담마의 거울

수행중에 왜 광명이 일어날까? 십경계와 도비도(道非道)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1. 18. 18:55

 

수행중에 왜 광명이 일어날까? 십경계와 도비도(道非道)

 

 

 

귀신은 있을까 없을까?

 

귀신은 있을까 없을까? 언젠가 불교방송 마음으로 듣는 음악시간에 프로를 진행하는 스님은 이렇게 물었다. 누군가 귀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질문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스님은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있을 것이고,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면 없겠지요라고 답하였다. 이런 답변이 정답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 귀신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귀신은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귀신을 본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한번도 귀신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귀신은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귀신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위빠사나수행처에서 들은 이야기

 

위빠사나수행처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법사가 법문하는 중에 귀신이야기를 하였다. 법사에 따르면 귀신은 없다라고 하였다. 왜 없다라고 하였을까? 다름 아닌 마음장난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서 만들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그런 이유로 무당의 예를 들었다.

 

무당은 일반사람들이 보이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무당만의 특수한 환경에서 발생된 것이라 한다. 무당이 되는 과정을 보면 정신적 충격을 겪는다. 주로 어렸을 적 경험이라 한다. 이런 충격은 잠재되어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미지화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미지에 지배당하게 될 것이라 한다. 더욱 더 집착하다 보면 이미지가 어느 순간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JPEG MPEG으로 변하는 것과 같다. 더 나아가 말을 걸어 오는 단계로 발전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귀신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자신의 마음에서 조작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귀신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마음장난으로 보는 이유이다.

 

환화(幻化) 이야기

 

귀신을 보는 자들은 대게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신이 만든 이미지에 집착하여 결국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환화(幻化)의 예를 들 수 있다. 예수를 보았다든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였다는 등의 이야기 등이 모두 환화에 속한다.

 

환화란 무엇일까? 불교TV사이트에서 김종욱교수의 강좌에 따르면, 환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환화(幻化)는 실체가 없는 것을 현재에 있는 것처럼 환술로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화가가 그럴듯한 귀신 그림을 그려 놓고 그 그림에 자신의 마음을 구속당하는 것을 말한다.

 

 

화가가 귀신 그림을 그려 놓고 자주 들여다 보다 자신의 마음을 그 그림속의 귀신에 구속 당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현상은 무당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에 철저하게 종속당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러면서 무언가 보았다고 하며 무언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초기불교입장에서 본다면 모두 비도(非道)’에 해당된다.

 

()와 비도(非道)

 

비도란 무엇일까? 문자적으로 풀이한다면 도가 아닌 것을 말한다. 귀신을 보았다든가 예수를 보았다든가 관세음보살을 보았다는 등 실체가 없는 것을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언급된 칠청정에서 다섯 번째가 도와 도아님에 대한 지와 견의 청정(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이 있다. 이를 줄이면 도비도(道非道)’라 한다.

 

일곱 가지 청정은 열 여섯 가지 지혜와 함께 설명된다. 이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칠청정과 16단계 지혜

칠청정

16단계 지혜

1

계의 청정

(sīla visuddhi)

 

네 가지 청정한 계

2

마음의 청정

(citta visuddhi)

 

근접삼매와 본 삼매

3

견해의 청정

(diṭṭhi visuddhi)

1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4

의심에서 벗어나는 청정

(kakhāvitaraa visuddhi)

2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paccaya pariggha ñāna)

5

길과 길 아님을 알고 보는 청정

(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

6

바른 길을 알고 보는 청정

(patipadāāadassa visuddhi)

4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na)

5

무너짐의 지혜(bhaga ñāna)

6

공포의 지혜(bhaya ñāna)

7

위험의 지혜(ādīnava ñāna)

8

역겨움의 지혜(nibbidā ñāna)

9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muñcitukamyatā ñāna)

10

깊이 숙고하는 지혜(paisakhā ñāna)

11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sakhārupekkhā ñāna)

12

수순하는 지혜(anuloma ñāna)

6 7사이에

13

종성의 지혜(gotrabhu ñāna)

7

지혜와 봄의 청정

āadassa visuddhi)

14

도의 지혜(magga ñāna)

15

과의 지혜(phala ñāna)

16

회광반조의 지혜(paccavekkhaa ñāna)

 

 

표를 보면 다섯 번째 청정이 길과 길 아님을 알고 보는 청정(도비도지견청정)’이다. 어느 것이 길()이고 어느 것이 길이 아닌(비도)지 알고 보는 청정을 말한다.

 

귀신을 보았다든가 하는 등의 견해는 비도에 속한다. 실재 하지 않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견해를 말한다. 그런데 도인지 비도인지 구별하는 청정은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계청정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어서 마음청정, 견해의 청정, 의심에서 벗어나는 청정이 따라야 한다.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

 

도비도에 대한 청정은 어느 정도 지혜가 무르익었을 때 가능하다. 표에 따르면 관련된 지혜가 세 번째 지혜에 해당되는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라 한다.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도표에 따르면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와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에 이어 세 번째로 계발된 지혜를 말한다. 만일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지 못하고,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인과를 모른 채 귀신을 보았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실재하는 것이라 여길지 모른다. 그래서 예수를 보았느니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였느니 하는 등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이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정신-물질은 원인과 결과에 따른 현상임을 바르게 아는 지혜가 계발 된다면 더 이상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청종도론에서는 위빳사나경계라는 항목에서 설명된다.

 

십경계가 있는데

 

위빳사나경계란 무엇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이 초보적인 위빳사나로 위빳사나를 시작한 자에게 열 가지 경계들이 일어난다.(vsdm 20.105)”라고 하였다. 여기서 경계라는 말은 upakkilesa를 뜻한다. Upakkilesa'impurities(불순물들)'의 뜻이다. Kilesa가 오염을 뜻하므로 Upakkilesa는 오염원들이 위로 올라온다는 뜻이다. 수행중에 겪는 신비한 체험이 이에 해당된다. 이를 보통 수행중에 일어나는 경계로 본다. 그렇다면 어떤 경계가 있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열 가지로 설명한다.

 

 

Katame pana te dasa upakkilesāti? Obhāso, ñāa, pīti, passaddhi, sukha, adhimokkho, paggaho, upaṭṭhāna, upekkhā, nikantīti. Vuttañheta

 

 

But what are these ten imperfections? They are: (1) illumination, (2) knowledge, (3) rapturous happiness, (4) tranquillity, (5) bliss (pleasure), (6) resolution, (7) exertion, (8) assurance, (9) equanimity, and (10) attachment.

 

(빅쿠 냐나몰리역)

 

 

무엇이 열 가지 경계들인가? ①광명 ②희열 ③경안 ④결심 ⑤분발 ⑥행복 ⑦지혜 ⑧확립 ⑨평온 ⑩욕구이다.

 

(청정도론, 도와 도아님에 대한 지와 견의 청정, 20 105, 대림스님역)

 

 

광명, 희열 등 열 가지 경계는 오로지 올바로 수행하는 자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라 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 위빳사나의 경계는 진리를 통찰함에 이른 성스러운 제자와 그릇되게 수행하는 자와 명상주제를 놓아버린 게으른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Vsdm 20.105)”라 하였다. 오직 바르게 수행하고 지속적으로 명상주제와 함께 하는 위빳사나를 시작한 수행자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라 한다.

 

그릇되게 수행하면

 

올바르게 수행하면 광명, 희열 등의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반대로 그릇되게 수행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이에 대하여 위빠사나 수행자를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세 번째 위빠사나 지혜는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이다. 이 지혜에 따르면 통증, 쑤심, 경련, 나른함, 가려움, 혐오, 메스꺼움, 흔들림 같은 온갖 종류의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외부 감각대상으로 나타는 표상은 불쾌한 것들이다. 장례식, 군대, 머리의 무거움, 무거운 발걸음 등 어떤 수행자는 사야도에게 귀신이나 무서운 것을 보았다고 보고 한다. 사야도가 그것들을 보고 두려웠느냐고 물으면 두려웠다고 대답한다.

 

(위빠사나 수행자를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309p, 행복한 숲)

 

 

책에 따르면 귀신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무서운 표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려운 느낌이 일어난 것이다. 두려운 느낌이 일어 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표상에 끄달리면 표상에 종속되고 말 것이다. 앞서 언급된대로 화가가 그럴듯한 귀신 그림을 그려 놓고 그 그림에 자신의 마음을 구속당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이에 대하여 책에서는 이때 어떤 수행자는 , 이라고 알아차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무서운 표상을 보았을 때 두려워 하지 말고 단지 , 하며 그치라는 것이다. 그래도 그치지 않고 두려움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는 그래도 잘 안되거나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면, ‘두려움, 두려움이라고 알아차려야 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알아차리면 사라진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알아차리면 표상이 사라짐을 말한다. 마치 초기경전에서 마라가 나타났을 때 마라인 줄 알아차리면 물러나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한 정형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자 악마 빠삐만은 '세존께서는 나에 대해 알고 계신다. 부처님께서는 나에 대해 알고 계신다'라고 알아채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그곳에서 곧 사라졌다.(S4.20)

 

(초기경에서 ‘마라’에 대한 정형구)

 

 

악마 빠삐만이 사라진 이유는 정체가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나에 대해 알고 계신다라며 사라진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알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귀신이나 무서운 표상을 접하였을 때 두려워 하지 말고 단지 , 또는 두려움, 두려움하며 알아 차릴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십경계가 나타나지 않는 자들

 

명상주제와 함께 올바로 수행하는 수행자에게 광명 등 열 가지 경계(십경계)가 나타날 수 있다고 하였다. 경계라 한 것은 일종의 장애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제거해야 할 오염원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십경계 항목을 보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십경계가 나타나지 않는 자들이 있다. 이에 대하여

 

 

“Vipassanupakkilesā hi paivedhappattassa ariyasāvakassa ceva vippaipannakassa ca nikkhittakammaṭṭhānassa kusītapuggalassa nuppajjanti.(Vsdm,20.732)”

 

 

로 설명된다. 이에 대한 번역을 보면 위빳사나의 경계는 진리를 통찰함에 이른 성스러운 제자와 그릇되게 수행하는 자와 명상주제를 놓아버린 게으른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라 하였다. 이미 도와 과를 이룬 성자들은 더 이상 십경계가 나타나지 않음을 말한다. 또 명상주제를 놓친 자들이나 수행에 게으른 자들에게도 광명 등 십경계가 나타나지 않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십경계는 열심히 수행하는 수행자에게만 나타나는 일종의 특권이라 볼 수 있다.

 

경계에 머물러 있을 때

 

그런데 청정도론에 따르면 십경계에 머물러 있는 것을 경계하였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하여 무애해도에 실려 있는 이야기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Katha dhammuddhaccaviggahitamānasa hoti? Aniccato manasikaroto obhāso uppajjati, ‘ obhāso dhammo ’ ti obhāsa āvajjati, tato vikkhepo uddhacca. Tena uddhaccena viggahitamānaso aniccato upaṭṭhāna yathābhūta nappajānāti. Dukkhato… anattato upaṭṭhāna yathābhūta nappajānāti”(Ps.ii.100-1)

 

 

“How does the mind come to be seized by agitation about higher states? When a man is bringing [formations] to mind as impermanent, illumination arises in him. He adverts to the illumination thus, ‘Illumination is a [Noble one’s] state.’The distraction due to that is agitation. When his mind is seized by that agitation, he does not understand correctly [their] appearance as impermanent, he does not understand correctly [their] appearance as painful, he does not understand correctly [their] appearance as not-self.

 

(빅쿠 냐나몰리역)

 

 

어떻게 [성스러운] 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어난 들뜸에 의해서 마음이 붙들리게 되는가? 그가 [상카라들을] 무상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광명이 일어난다. 광명이 법이라고 생각하고 광명으로 전향한다. 그것으로 인한 산만함이 들뜸이다. 그 들뜸에 마음이 붙들려 그들이 일어남을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일어남을 괴로움이라고 ‥‥ 일어남을 무아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청정도론, 도와 도아님에 대한 지와 견의 청정, 20 105, 대림스님역)

 

 

십경계 중에 광명이 어떻게 발생되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대림스님은 그가 [상카라들을] 무상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광명이 일어난다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Aniccato manasikaroto obhāso uppajjati”에 대한 번역이다. 냐나몰리는 When a man is bringing [formations] to mind as impermanent”라 하였다. 현상들에 대하여 무상하다고 주의를 기울일 때 광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상이라고 주의를 기울일 때 광명, 희열, 경안, 행복, 결심, 분발, 확립, 평온, 욕구 등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광명이 발생하였을 때

 

그런데 광명이 발생하였을 때 이에 대하여 ‘obhāso dhammo’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obhāso dhammo’에 대하여 냐나몰리는 Illumination is a [Noble one’s] state”라 번역하였다. “광명은 성스런 상태이다라는 말이다. 빛을 보았다고 하여 마치 깨달은 것처럼 여기는 것을 말한다. 이 구절에 대한 빅쿠냐나몰리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He adverts to it as Nibbána or as the path or as fruition” (Vism-mhþ 816). “The agitation, the distraction, that occurs about whether or not the illumination, etc., are noble states is ‘agitation about higher states’” (Vism-mhþ 815).

 

In this connection Vismmhþ quotes the following text: “Friends, any bhikkhu or bhikkhunì who declares the attainment of Arahantship in my presence has always arrived there by four paths or by one of them. What four? Here, friends, a bhikkhu develops insight preceded by serenity. While he is developing insight preceded by serenity the path is born in him. He cultivates, develops, repeats that path. As he does so his fetters are abandoned and his inherent tendencies are brought to an end. Again, friends, a bhikkhu develops serenity preceded by insight … He develops serenity and insight yoked equally. Again, friends, a bhikkhu’s mind is seized by agitation about highest states. When that consciousness settles down internally, becomes steady, unified and concentrated, then the path is born in him … his inherent tendencies are brought to an end” (A II 157).

 

(The Path of Purification Visuddhimagga, 20, 33번 각주, 빅쿠냐나몰리)

 

 

초불연 대림스님이 번역한 청정도론에도 각주가 보인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광명등에 대해 성스런 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어난 들뜸, 산만함이 법에 의한 들뜸이다. 이 법에 의한 들뜸으로 인해 위빳사나의 바른 과정으로부터 벗어나서 다른 형태를 취하여 일어난 마음을 ‘[성스런]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어난 들뜸에 의해서 마음이 붙들림이라 한다.

 

(청정도론 3 187번 각주, 대림스님)

 

 

어떻게 광명이 발생하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빅쿠냐나몰리에 따르면 도와 과의 열반으로 마음이 전향하였을 때라 한다. 그런데 광명 등 십경계는 보다 높은 상태의 동요라 하였다. 이에 대한 대림스님의 각주를 보면 난해하다. 잘 이해가 되지 않음을 말한다. 빅쿠냐나몰리는 각주에서 인용예를 들었다. A II 157의 문구를 인용한 것이다.

 

광명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A II 157’PTS본 앙굿따라니까야 2 157페이지를 말한다.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아난다]

벗들이여, 또한 수행승의 정신이 수행과정에 대한 흥분에 사로 잡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벗들이여, 그러나 정신이 내적으로 안착되고 안정되어 통일되고 집중될 때가 오면, 그는 길을 지각합니다. 그가 길을 섬기고 닦고 익힙니다. 그가 길을 섬기고 닦고 익히면 결박이 제거되고 경향이 종식됩니다. 벗들이여 어떤 수행승이나 수행녀든 내 앞에서 거룩한 님의 경지를 성취했다고 알린다면, 모두 네 가지 고리 가운데 어느 하나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쌍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170, 전재성님역)

 

 

수행과정에 대한 흥분에 사로 잡히는 경우에 대한 내용이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가르침이나 진리에 대한 흥분이 아니라 멈춤과 통찰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흥분을 말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수행과정에서 일어나는 흥분을 말한다. 이 흥분에 대하여 빅쿠냐나몰리는 agitation(동요)distraction(산만)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런 흥분은 진리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도가 아닌 것이라 하여 비도(非道)라 한다.

 

앙굿따라니까야 각주에 따르면 비도에 청정도론에서 설명된 광명, 희열 등 열가지 경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오염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초보적으로 통찰수행을 하는 자에게는 통찰에 수반되는 열 거지 오염이 생겨난다라고 하였다. , 광명, , 희열, 경안, 즐거움, 확신, 책려, 확립, 평정, 욕구 이렇게 열 가지를 말한다.

 

번역비교를 해보면

 

그렇다면 수행자는 왜 이런 흥분에 사로 잡히게 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각주와 초불연 대림스님의 번역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구  분 

청정도론, 도비도지견청정(20 105)

비고 

빠알리어

“Katha dhammuddhaccaviggahitamānasa hoti? Aniccato manasikaroto obhāso uppajjati, ‘ obhāso dhammo ’ ti obhāsa āvajjati, tato vikkhepo uddhacca. Tena uddhaccena viggahitamānaso aniccato upaṭṭhāna yathābhūta nappajānāti. Dukkhato… anattato upaṭṭhāna yathābhūta nappajānāti”(Ps.ii.100-1)

manasikaroto 

대림스님역

어떻게 [성스러운] 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어난 들뜸에 의해서 마음이 붙들리게 되는가? 그가 [상카라들을] 무상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광명이 일어난다. 광명이 법이라고 생각하고 광명으로 전향한다. 그것으로 인한 산만함이 들뜸이다. 그 들뜸에 마음이 붙들려 그들이 일어남을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일어남을 괴로움이라고 ‥‥ 일어남을 무아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청정도론 20 105)

마음에 잡도리할 때 

전재성님역

정신이 사실에 대한 흥분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상한 것이라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광명이 생겨나는데, 그가 광명은 사실이라고 생각하여 광명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것으로 인한 혼란이 흥분이다. 그 흥분에 의해서 마음이 사로잡혀 그것의 발생을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고 괴로운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한다.( A4.170 579번 각주)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두 개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차이가 난다. 대림스님 번역은 난해 하지만 전재성님 번역은 이해하기 쉽다. 그것은 아마 용어의 사용에 대한 차이 일 것이다.

 

초불연의 경우 마나시까라(manasikara)에 대하여 마음에 잡도리하다라 하였고, 전재성님은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인다로 번역하였다. 또 담마(dhamma)에 대하여 대림스님은 초지일관 이라 번역하였고, 전재성님은 문맥에 맞게 사실이라 번역하였다. 또 아낫따(anatta)에 대하여 대림스님은 무아라 하였지만 전재성님은 실체없음이라 하였다. 이렇게 용어 사용이 다르다 보니 번역 내용 또한 달라진다.

 

수행중에 왜 광명이 일어날까?

 

수행중에 왜 광명이 일어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청정도론 해석에 따르면 무상한 것이라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광명이 생겨나는데, 그가 광명은 사실이라고 생각하여 광명에 주의를 기울인다. (Aniccato manasikaroto obhāso uppajjati, ‘ obhāso dhammo ’ ti obhāsa āvajjati)”라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광명은 사실(obhāso dhammo)’이라는 말이다. 담마에 대하여 진리, 가르침, 원리, , , 사실 등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그 중에 사실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광명이 일어 났을 때 이를 진리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냐마몰리는 “to be seized by agitation about higher states”라 하여 보다 높은 상태에 대한 흥분으로 마음이 붙들려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광명이 생겨난 요인을 보면 무상한 것이라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었을 때라고 하였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모든 현상에 대하여 무상하게 본다는 것은 대상에 대하여 마음 집중하는 삼매와는 다른 것이다. 대상에 대하여 집중하면 사마타가 된다. 그러나 대상에 대하여 무상한 것이라 본다면 위빠사나가 된다. 그런데 광명, 희열 등 열가지 경계 또는 장애가 일어나는 것은 바르게 수행하는 수행자에게서만 일어 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만일 누군가 대상에 대하여 사마타 수행을 하였을 때 귀신 등 무서운 표상이 일어났다면 이는 올바른 수행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대상에 대하여 무상한 것이라고 지혜로서 관찰하였을 때만 광명 등 열가지 경계가 나타남을 말한다.

 

그런데 그런 경계는 혼란과 흥분으로 설명된다. 현상에 대하여 무상으로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었을 때 광명 등이 발생하는데, 이런 광명 등을 보고서 흥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일 말하는가? 빛을 보고서 , 내가 드디어 깨달았구나!”라는 착각이 일어 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Tattha obhāsoti vipassanobhāso. Tasmi uppanne yogāvacaro “na vata me ito pubbe evarūpo obhāso uppannapubbo, addhā maggappattosmi phalapattosmī” ti amaggameva “maggo” ti, aphalameva ca “phala” nti gahāti. Tassa amagga “maggo” ti aphala “phala” nti gahato vipassanāvīthi ukkantā nāma hoti. So attano mūlakammaṭṭhāna vissajjetvā obhāsameva assādento nisīdati.

 

 

Herein, illumination is illumination due to insight.34 When it arises, the

meditator thinks, “Such illumination never arose in me before. I have surely reached the path, reached fruition;” thus he takes what is not the path to be the path and what is not fruition to be fruition. When he takes what is not the path to be the pathand what is not fruition to be fruition, the course of his insight is interrupted. He drops his own basic meditation subject and sits just enjoying the illumination.

 

(빅쿠 냐나몰리역)

 

여기서 (1) 광명이란 위빳사나로 인해 생긴 광명이다. 그것이 일어날 때 수행자가 '이전에 나에게 이와 같은 광명이 일어난 적이 없다. 확실히 나는 도에 이르렀고, 과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여 도가 아닌 것을 도라고, 과가 아닌 것을 과라고 여긴다. 그가 도가 아닌 것을 도라고, 과가 아닌 것을 과라고 여길 때 위빳사나의 과정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는 자기의 근본 명상주제를 놓아버리고 광명을 즐기면서 앉아있다.

 

(청정도론, 도와 도아님에 대한 지와 견의 청정, 20 107, 대림스님역)

 

 

수행중에 빛을 보았을 때 예를 든 것이다. 환한 빛이 일어 났을 때 사람들은 확실히 나는 도에 이르렀고, 과에 이르렀다(addhā maggappattosmi phalapattosmī)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설명에 따르면 수행중에 빛을 보는 것은 수행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장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빛을 봄으로 인하여 마치 목적에 다 다다른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 그가 도가 아닌 것을 도라고, 과가 아닌 것을 과라고 여길 때(Tassa amagga “maggo” ti aphala “phala” nti)”라 하였다. 수행중에 빛을 보는 것은 도가 아니라 비도(非道)라는 것이다.

 

광명을 즐기면서 앉아있다(obhāsameva assādento nisīdati)”

 

도와 도아닌 것을 가려 내는 것이 칠청정에서 도와 도아님을 알고 보는 청정(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이다. 이는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로 설명된다. 그런데 도가 아닌 것을 도라며 여기며 , 내가 드디어 깨달았구나!”라고 착각하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광명을 즐기면서 앉아있다(obhāsameva assādento nisīdati)”라 하였다.

 

광명을 어떻게 즐기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하나의 일화를 소개 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이와 같이 다르기 때문에 여기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찟달라 산에 이중 담장을 한 방안에 두 분의 장로가 앉아있었다. 그 날이 그믐의 포살일이었다. 사방은 구름으로 덮여있었고 그 밤은 네 가지 조건을 갖춘 어둠으로 짙게 깔려있었다. 그 때 장로 한 분이 말하였다. '존자시여, 지금 제게는 탑전의 사자좌에 다섯 색깔을 가진 꽃들이 놓여있는 것이 보입니다.' 다른 한 분이 말하였다. '도반이여, 별로 경이롭지도 않은 것을 말씀하셨소, 내겐 지금 바다 한 가운데 1유순이나 되는 장소의 물고기와 거북이가 보인다오.'

 

(청정도론, 도와 도아님에 대한 지와 견의 청정, 20 107, 대림스님역)

 

 

광명을 즐기는 자들의 이야기를 보면 광명도 광명 나름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가부좌한 자신의 주변에만 광명이 일어나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실내 가득이 일어나고, 또 어떤 이에게는 사원 전체가 광명이 일어난다.

 

그런데 청정도론에 따르면 어떤 자에게는 땅의 표면부터 색구경천의 세계까지 하나의 광명을 만들면서 일어난다.(Vsdm.20.108)”라고 하였다. 온 우주에 광명이 일어나니 , 내가 도와 과를 이루어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렀구나!”라고 충분히 착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냐나āa), 지혜인가 앎인가?

 

즐기면서 앉아 있는 것은 광명 뿐만이 아니다. 알아차리지 못하면 희열, 경안, 즐거움, 확신, 책려, 확립, 평정, 욕구 등이 일어날 때도 역시 이를 즐기면서 앉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열가지 경계 또는 장애 중에 ‘ñāa이 있다. 이를 대림스님은 지혜라 하였고, 전재성님은 앎이라 번역하였다. 냐나몰리는 knowledge’라 하였다. 열가지 경계에 대하여 비도라 하였는데 지혜라 번역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열가지 경계 또는 장애 중의 하나인 ñāa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Ñāanti vipassanāñāa. Tassa kira rūpārūpadhamme tulayantassa tīrentassa vissaṭṭhaindavajiramiva avihatavega tikhia sūra ativisada ñāa uppajjati.

 

 

Knowledge is knowledge due to insight. As he is estimating and judging

material and immaterial states perhaps knowledge that is unerring, keen, incisive, and very sharp arises in him, like a lightning flash.

 

(빅쿠 냐나몰리역)

 

 

지혜란 위빳사나의 지혜이다. 그가 물질과 정신을 고찰하고 조사할 때 인드라의 벼락과 같은 활기차고, 예리하고, 빛나고, 아주 맑은 지혜가 일어난다.

 

(청정도론, 도와 도아님에 대한 지와 견의 청정, 20 114, 대림스님역)

 

 

대림스님은 ñāa에 대하여 지혜라 번역하였다. 그래서 지혜란 위빳사나의 지혜이다라 하였다.  그런데 냐나몰리는 knowledge라 번역하여 Knowledge is knowledge due to insight”라 하였다. 냐나의 의미에 대하여 통찰로 인한 지식으로 번역하였다.

 

지식과 지혜는 다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냐나는 지식의 의미에 더 가깝다. 다만 지혜가 있는 지식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은 냐나에 대하여 앎이라 번역하였다.

 

PCED194에 따르면 ñāa는 아홉 종류의 통찰지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일까 또 다른 의미의 ñāa에 대하여 ‘knowledge, comprehension, intelligence, insight’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ñāa는 차라리이해에 가깝다. 완전한 지혜가 일어나기 이전에 일시적으로 이해가 생겨난 것이다. 예를 들어 한번 보기만 해도 이해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한 앎이 수행중에 일어났을 때 이를 즐기면 경계에 떨어지는 것으로 본다.

 

비도(非道)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광명, 희열, 앎이 일어 났을 때 이는 도가 아니다. 비도임에도 마치 도와 과를 이룬 것처럼 착각하고 이를 즐기고 있을 때 경계에 떨어진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도와 도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함을 말한다. 그렇다면 비도인 것들로부터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Kusalo pana paṇḍito byatto buddhisampanno yogāvacaro obhāsādīsu uppannesu ‘‘ aya kho me obhāso uppanno, so kho panāya anicco sakhato paiccasamuppanno khayadhammo vayadhammo virāgadhammo nirodhadhammo ’’ ti iti vā ta paññāya paricchindati upaparikkhati.

 

Atha vā panassa eva hoti, ‘‘ sace obhāso attā bhaveyya, ‘ attā ’ ti gahetu vaṭṭeyya. Anattā ca panāya ‘ attā ’ ti gahito. Tasmā so avasavattanaṭṭhena anattā, hutvā abhāvaṭṭhena anicco, uppādavayapaipīanaṭṭhena dukkho ’’ ti sabba arūpasattake vuttanayena vitthāretabba. Yathā ca obhāse, eva sesesupi.

 

 

But when illumination, etc., arise, a skilful, wary meditator who is endowed with discretion either defines and examines it with understanding thus: “This illumination has arisen.38 But it is impermanent, formed, conditionally arisen, subject to destruction, subject to fall, subject to fading away, subject to cessation.”

 

Or he thinks: “If illumination were self, it would be right to take it as self; but being not-self, it is taken as self. Therefore it is not-self in the sense of no power being exercisable over it; it is impermanent in the sense of non-existence after

having come to be; it is painful in the sense of oppression by rise and fall,” all of which should be treated in detail according to the method given under the immaterial septad (§83). And as in the case of illumination, so too with the rest.

 

(빅쿠냐나몰리역)

 

 

숙련되고 슬기롭고 경륜이 있고 지성을 갖춘 수행자는 광명 등이 일어날 때 '나에게 이런 광명이 일어났구나. 그러나 이것은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 따라 일어났고,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고,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고,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라고 이와 같이 그는 통찰지로 한계를 정한 뒤 면밀히 조사한다.

 

혹은 그는 이와 같이 생각한다. '만약 광명이 자아라면 자아라고 여김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자아가 아닌데도 자아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그것은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뜻에서 무아다. 생겼다가 없어지는 뜻에서 무상하다. 일어나고 사라짐에 의해 압박 받는다는 뜻에서 괴로움이다.' 라고. 이 모든 것은 정신의 일곱 가지에서 설한 방법대로 상세하게 알아야 한다. 광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머지도 그와 같다.

 

(청정도론, 도와 도아님에 대한 지와 견의 청정, 20 126, 대림스님역)

 

 

광명 등이 생겨 났을 때 이를 즐기지 말고 무상, , 무아로 관찰하라는 말이다. 어떻게 관찰하는가? 가장 먼저 나에게 이런 광명이 일어났구나(aya kho me obhāso uppanno)”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이런 광명에 대하여 그러나 이것은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 따라 일어났고,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고,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고,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왜 이렇게 알아차려야 할까? 그것은 무상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형성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광명 역시 조건이 바뀌면 소멸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동요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려면

 

수행중에 나타나는 열 가지 경계(장애)에 대하여 무상, , 무아로 관찰하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면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되어 즐기며 앉아있지 않을 것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현상에 대하여 무상으로만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무상과 함께 고와 무아를 함께 알아차림을 말한다. 그렇다면 무상, , 무아 이렇게 세 가지 특징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할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알 수 있다.

 

 

So eva upaparikkhitvā obhāsa “neta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 ti (ma. ni. 1.241) samanupassati. Ñāa…pe… nikanti ‘‘ neta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 ’’ ti (ma. ni. 1.241) samanupassati. Eva samanupassanto obhāsādīsu na kampati na vedhati.

 

 

Having investigated it thus, he sees the illumination as “This is not mine, this is not I, this is not my self.” [638] He sees knowledge … (etc.) … attachment as “This is not mine, this is not I, this is not my self.” Seeing thus, he does not waver or vacillate about the illumination, and so on.

 

(빅쿠 냐나몰리역)

 

 

그는 이런 광명을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면밀히 관찰한다. 지혜를 ‥‥ 욕구를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면밀히 관찰한다. 이와 같이 면밀히 관찰할 때 광명 등에 대해 흔들리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다.

 

(청정도론, 도와 도아님에 대한 지와 견의 청정, 20 114, 대림스님역)

 

 

무상, , 무아 이렇게 세 가지 중에 가장 핵심은 무아이다. 현상에 대하여 무상으로 정신활동을 기울인 결과 광명 등 열가지 비도가 생겨났다면, 비도로부터 벗어나 도로 향하기 위해서는 무아의 지혜를 내어야 함을 말한다. 그런 무아의 가르침은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neta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라고 정형화 되어 있다. 그래서 경계에 부딪칠 때마다 부처님의 무아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동요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누구나 무상함을 느낀다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귀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귀신이 확실히 있다고 말할 것이고, 귀신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귀신 같은 것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를 보았느니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였느니와 같은 말이다. 그래서 예수나 관세음보살이 실재 하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현상에 대한 집착은 비도(非道)에 해당된다.

 

도와 비도를 가려 내는 지혜가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이다. 이 단계의 지혜에 이르려면 무상의 지혜로는 부족하다. 무상으로 정신활동을 기울이었을 때 광명, 희열 등의 열 가지 경계(장애)가 발생하는데,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 때 , 내가 깨달았구나또는 , 내가 도와 과를 이루었구나라고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비도인 것으로 도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는 무상함만 알았을 때이다.

 

누구나 무상함을 느낀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자연무상을 느낀다. 늙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 보면서 인생무상을 느낀다. 이렇게 자연무상과 인생무상을 느끼지만 왜 도와 과에 이르지 못할까?

 

 

 

 

왜 범부들은 깨닫지 못할까?

 

누구나 무상함을 느끼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자신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몸도 세월에 따라 늙어 가는 것을 보면서 몸도 무상함을 느낀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몸은 비록 늙고 병들어 가지만 마음 만은 언제나 청춘으로 생각하는 것도 자아는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을 보아도 늙은이를 보아도 무상함을 느끼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아에 바탕을 둔 무상함이다.

 

자아에 기반한 무상함을 느낄 때 수행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광명 등 열 가지 경계(장애)로 본다. 그래서 광명이 일어났을 때 , 내가 깨달았구나!”라고 생각하며 이를 즐기며 앉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르침에 따르면 광명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단지 조건에 따라 형성된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광명을 보고서 도와 과를 이루었다고 착각하는 것은 광명에 대하여 나의 광명이라고 보는 것과 같다.

 

나의 광명은 근본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조건에 따라 형성된 광명도 무상하고 자신도 무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시에 무상하게 변하기 때문에 나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광명이 일어 났을 때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면밀히 관찰하라고 하였다.

 

모든 것이 무상하게 변해 갈 때 자신 역시 무상하게 변해 간다. 계절이 바뀌어 떨어지는 낙엽을 보았을 때 무상함을 느끼지만 그 느끼는 마음 역시 무상하게 변하고 있다. 이렇게 고정된 실체가 없는 마음에서 무상함을 느낄 때 이것이 진정한 무상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를 기반으로 하여 무상함을 느끼는 자는 절대로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무아를 기반으로 하는 자가 무상함을 느낄 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도와 비도에 대한 설명으로 알 수 있다.

 

 

 

2014-11-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