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세상의 끝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죽음의 왕도 찾지 못하는 것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1. 19. 18:20

 

 

세상의 끝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죽음의 왕도 찾지 못하는 것

 

 

 

내가 만든 세상?”

 

동기동창들의 모임인 카톡방에 글을 하나 올렸다. 일종의 자작시이다. 글쓰기를 하면서 언젠가 한번 올렸던 글을 짤막하게 표현한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 개의 세상이 있는데

하나는 세상이 있어서

세상속에서 태어나

세상속에서 살다 가는 것이다.

내가 없어도 여전히

세상은 잘 돌아 갈 것이다.

 

또 하나의 세상이 있는데

내가 있어서 세상이 있는 것이다.

내가 만든 세상에 태어나

내가 만든 세상에서 살다가 가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는 것이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

 

 

이와 같이 카톡방에 올렸더니 어느 친구가 내가 만든 세상?”이라고 의문하였다. 아마 처음 듣는 말처럼 보인 모양이다. 그 친구는 천주교를 믿고 있기 때문에 오늘 하루를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라는 말을 의아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그래서 , , 코 등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하여 인식하는 세상이라고 짤막하게 답하였다. 도움이 될는지 알 수 없다.

 

세상은 인식하는 자의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이 접촉하여 의식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초기불교에 대하여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에 속한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 (S35:107)”라고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불교적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주관적 세계관을 이야기 하면 이해 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유일신에 따른 창조론을 믿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주관적 세계관은 충격으로 받아 들여질 것임에 틀림 없다.

 

친구는 더 이상 카톡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계속 물어 보았더라면 세상은 인식하는 자의 것이다라고 결론 지었을 것이다.

 

 

 

Horizon

 

 

 

 

세상의 끝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세상은 인식하는 자의 것이다. 인식의 지평선을 확장한다면 더 많이 인식하게 될것이다. 그러나 달려서 지평선끝까지 이를 수 없다. 그렇다면 지평선 끝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 몸과 마음을 관찰하면 세상의 끝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끝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Pheūpama kāyam-ima viditvā, 페누빠망 까야미망 위디뜨와
Mar
īcidhamma abhisambudhāno,    마리찌담망 아비삼부다노
Chetv
āna Mārassa papupphakāni,   체뜨와나 마랏사 빠뿝파까니
Adassana
Maccurājassa gacche.   아닷사낭 맛쭈라잣사 갓체.

 

 

이 몸은 물거품과 같다고 알고

아지랑이와 같다고 깨닫는 님은

악마의 꽃들을 잘라버리고

죽음의 왕의 시야를 넘어서리라.

 

(Dhp46, 전재성님역)

 

 

この泡沫のごとくであるとり、

かげろうのようなはかない本性のものであると、

さとったならば、って、

死王られないところへくであろう。

(Dhp46, 中村元)

 

 

이 몸은 물거품 같고

아지랑이 같다고 깨달은 사람은

악마의 꽃화살을 꺾어 버리고

저승의 염라왕과도 만나지 않으리라

 

(Dhp46, 법정스님역)

 

 

觀身如沫 관신여말

幻法野馬 환법야마

斷魔華敷 단마화부

不覩死生 불도사생

 

(Dhp46, 한역)

 

 

몸이 물거품처럼 허무하고

마음이 아지랑이처럼 실체 없음을 깨달은 사람은

능히 감각적 쾌락의 꽃화살을 꺾으리니

죽음의 왕도 만나지 못하리라.

 

(Dhp46, 거해스님역)

 

 

Knowing this body

is like foam,

realizing its nature

       — a mirage —

cutting out

the blossoms of Mara,

you go where the King of Death

       can't see.

 

(Dhp46, Thanissaro Bhikkhu)

 

 

이 몸에 대하여 물거품과 아지랑이로 비유하였다. 그러나 더 자세히 말한다며 물거품은 오온중에 색온에 해당되고, 아지랑이는 상온에 해당된다. 왜 그런가? 포말의 경에 따르면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S22.95)”라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각은 산냐(saññā)’를 말하며 초불연에서는 인식이라 번역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법구경 46번 게송에서 물거품은 몸을 비유한 것이고, 아지랑이는 마음을 대표하여 비유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왜 몸을 물거품같다고 하였을까?

 

우리의 육체 대하여 이 몸은 물거품 같다고 아는 것(Pheūpama kāyam-ima viditvā)”라 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Pheūpama kāyam-ima viditvā: DhpA.I.336에 따르면, 이 몸은 머리카락 등처럼- 서른 두 가지의 신체의 구성요소-물질적인 다발로서 무력하고 허약하고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일시적이라는 의미에서 거품과 같다.

 

(법구경, 649번 각주, 전재성님)

 

 

물거품과도 같은 것이 몸이라 한다. 물거품은 건드리면 터져 버리고 내 버려 두어도 터져 사라져 버리고 만다. 마찬가지로 이 몸 또한 견고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 알고 보면 여러 가지 장기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해체 하면 몸이라 볼 수 없다. 그래서 주석에 따르면 32가지로 신체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것이 몸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32가지 구성요소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디가니까야에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Atthi imasmi kāye kesā lomā nakhā dantā taco masa nahāru aṭṭhi aṭṭhimiñjā vakka hadaha yakana kilomaka pihaka papphāsa anta antagua udariya karīsa pitta semha pubbo lohita sedo mede assu vasā kheo sighāikā lasikā muttanti".

 

[세존]

또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이 몸을 이와 같이 ‘이 몸속에는 머리카락, 몸 털, 손톱, 피부, , 근육, , 골수, 신장, 심장, 간장, 늑막, 비장, , 창자, 장간 막, 위장, 배설물, 뇌수, 담즙, 가래, 고름, , , 지방, 눈물, 임파액, , 점액, 관절액, 오줌이 있다.’라고 발가락 위에서부터 머리카락 아래에 이르고 피부의 끝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의 오물로 가득한 것으로 개별적으로 관찰한다.”

(Mahāsatipaṭṭhānasutta -새김의 토대의 큰 경, 디가니까야 D22, 전재성님역)

 

 

우리몸은 머리카락, 몸털 등 모두 32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몸은 마치 옹기와도 같은 것이다. 옹기는 언젠가는 깨어지고 말 운명을 가졌듯이 마찬가지로 사람의 몸 역시 부수어질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옹기처럼 힘이 없고 약해서 부수어지기 쉽고 오랫동안 지속하기 어렵고 일시적이다. 그래서 몸을 포말과 같은 것으로 본다.

 

마음은 아지랑이와 같은 것

 

몸이 물거품과 같은 것이라면 마음은 아지랑이와 같은 것이다. 멀리서 보면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가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Marīcidhamma abhisambudhāno: DhpA.I.337에 따르면, 아지랑이는 멀리서 보면 형태를 가지고 분명히 만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공허하고 비어 있고 만질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 몸도 매 순간 사멸하고 다시 생겨난다는 의미에서 아지랑이와 같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그 아지랑이 같은 성격을 잘 알고 꿰뚫어 본다는 뜻이다.

 

(법구경, 650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아지랑이를 이 몸으로 비유하였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각(saññā)’을 말한다. 왜 그런가? 주석의 설명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매 순간 사멸하고 다시 생겨난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마음은 매 순간 조건에 따라 생멸을 거듭한다. 왜 그런가? 법구경에 따르면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마음(Dhp33)”라 하였고, 물고기가 물에서 잡혀 나와 땅바닥에 던져진 것과 같아 이 마음은 펄떡이고 있다.(Dhp34)”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마음이고, 빠르게 일어나고 빠르게 사라지는 것이 마음이고, 마음은 또한 제멋대로이다. 이처럼 실체가 없는 마음을 아지랑이로 비유한 것이다.

 

악마의 꽃이란?

 

이 몸이 물거품 같고, 이 마음이 아지랑이 같다고 아는 것은 실체가 없다고 아는 것과 다름 없다. 그렇게 아는 자에 대하여 깨달은 자라 하였다. 그런데 깨달은 자는 악마의 꽃을 잘라 버린다(Chetvāna Mārassa papupphakāni)”고 하였다. 여기서 악마의 꽃은 무슨 의미일까?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Chetvāna Mārassa papupphakāni: DhpA.I.337에 따르면, 고귀한 길을 통해서 악마의 꽃들이라 불리는 세 가지 존재[三有: tibhava] , 감각적 쾌락의 존재[欲有: kamabhava], 미세한 물질적 존재[色有: rupabhava], 비물질적 존재[無色有: arupabhava] 의 윤회를 자른다.

 

(법구경, 651번 각주, 전재성님)

 

 

악마의 꽃은 삼계의 존재를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오온에 대하여 나의 몸,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여길 때 욕계, 색계, 무색계 중의 한 세계에서 태어나게 된다. 그래서 세 가지 세계에 태어나는 존재에 대하여 악마의 꽃이라 하였다.

 

악마의 꽃인가 악마의 꽃화살인가?

 

악마의 꽃에 대한 빠알리어는 ‘Mārassa papupphakāni’이다. 여기서 Papupphaka(adj.)‘pa+pupphaka’의 형태로서 ‘with flowers in front’의 뜻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꽃들이라 번역하였다. 이와 같은 악마의 꽃들을 잘라 내야 한다고 하였다. 갈애를 바탕으로 한 악의 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라낸다라는 뜻의 ‘Chetvāna(having cut off or severed)’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나까무라하지메의 번역을 보면 (악마의 꽃의 화살)’이라 하였다. 화살이라는 말이 원어 없음에도 왜 화살이라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PCED194에서는 ‘papupphakāni’ 에 대하여 flower-tipped (of the arrows of Māra)’라 하였기 때문이다. 번역하면 ‘(악마의 화살의 )끝에 달린 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까무라하지메는 악마꽃의 화살이라 번역한 것이다. 이를 중역한 법정스님은 악마의 꽃화살이라 하였다. 그래서 법정스님은 악마의 꽃화살을 꺾어 버리고라 번역하였다.

 

거해스님 역시 꽃화살이라 하였다. 그래서 능히 감각적 쾌락의 꽃화살을 꺾으리니라 하였다. 하지만 꽃화살이라 번역한 것은 오역이라 본다. 화살이 아니라 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꽃화살이 아니라 꽃들이라 해야 바른 것으로 본다.

 

영역을 보면 꽃화살이 들어가는 번역이 있다. 다음과 같은 번역이다.

 

 

Realizing that this body is like froth, penetrating its mirage-like nature, and plucking out Mara's flower-tipped arrows of sensuality, go beyond sight of the King of Death!

(Dhp46, Acharya Buddharakkhita)

 

 

붓다락키따역에 따르면 Mara's flower-tipped arrows of sensuality”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직역하면 마라의 꽃-끝에 감각적 욕망이 달린 화살로 번역할 수 있다. 주어는 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의역하면 끝에 감각적 욕망이 달린 마라의 꽃화살이 된다. 화살이 주어가 되는 것이다. 거해스님역과 비슷해졌다.

 

붓다락키따역을 보면 주어는 Mara's flower(악마의 꽃)’라 되어 있다. ‘tipped arrows of sensuality’구절은 설명문이다. 각주에나 있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실린 격이다.

 

악마의 꽃은 제거 되어야 한다. 그래서 “plucking out Mara's flower(악마의 꽃은 뽑아 내면)”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나까무라하지메의 은 부적절한 번역이다. 마찬가지로 법정스님과 거해스님의 악마의 꽃화살이라는 번역 역시 부적절하다.

 

죽음의 왕이 볼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주석에 따르면 악마의 꽃은 삼계를 말한다. 존재에 대한 갈애를 일으켜 세세생생 윤회 하는 존재들이 악마의 꽃들인 것이다. 그러나 오온에 대하여 물거품이나 아지랑이 등으로 관찰하여 실체가 없음을 아는 깨달은 자라면 더 이상 태어남은 없을 것이다. 존재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악마의 꽃이 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악마의 꽃들을 잘라버린 자에 대하여 죽음의 왕의 시야를 넘어서리라(Adassana Maccurājassa gacche”라 하였다. 죽음의 왕을 맛쭈라자(Maccurāja)’라 한다.

 

 게송을 보면 죽음의 왕의 시야를 넘어서리라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이는 죽음을 관장하는 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있음을 말한다. 무엇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마음이라 볼 수 있다.

 

존재에 대한 갈애를 일으켜 삼계를 윤회하는 자는 마지막 죽음의 의식이 일어 날 때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마음이 일어난다. 이 마음이 현생과 내생을 연결 시켜 준다 하여 재생연결식이라 한다. 그런데 오온에 대하여 실체가 없는 것으로 아는 깨달은 자는 더 이상 재생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리 죽음의 왕이 그 마음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번뇌가 부수어진 수행승은 악마의 시야을 넘어선다. 그것이 위대한 불사(不死)의 열반이다.(DhpA.I.337)”라고 설명하였다.

 

마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면

 

죽음의 왕이 재생의 마음을 찾지 못한 것은 열반에 들었기 때문이다. 열반에 든 자는 재생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의 왕이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열반에 대하여 불사(不死)’라 한 것이다.

 

마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된다. 마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열반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숫따니빠따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보인다.

 

 

[존자 아지따]

Paññā ceva sati ceva (iccāyasmā ajito)
nāmñarūpañ ca mārisa,
Eta
me puṭṭho pabrūhi kattheta uparujjhati

 

“존자여, 지혜, 새김과 더불어 명색은

어떠한 경우에 소멸하는 것입니까?

제가 이와 같이 여쭈니 말씀해 주십시오.

 

 

 [세존]

Yameta pañha apucchi ajita ta vadāmi te,
Yattha n
āmñaca rūpañ ca asesa uparujjhati,
Viññ
āassa nirodhena ettheta uparujjhati.

 

“아지따여, 그 질문한다면,

그대에게 명색이 남김없이 소멸하는 것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의식이 없어짐으로써, 그 때에 그것이 소멸합니다.

 

(Ajita sutta-학인 아지따의 질문에 대한 경, 숫따니빠따 Sn5.2, 전재성님역)

 

 

학인 아지따가 부처님에게 열반은 어떤 상태인지 묻는다. 그러자 부처님은 ‘의식이 없어지는 것(Viññāassa nirodhena)’이라 한다. 경에서 소멸되는 것은 명색이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각주에 따르면   ‘의식이 소멸할 때 명색도 소멸한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지혜와 새김이라는 것은 명색 즉 정신-신체적인 과정에 포함되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의식(Viññāa)이 소멸 되면 더 이상 명색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열반상태인 것으로 본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어떤 존재로든지 태어나지 않게 된다. 또 마음이 없으면 인식할 수 없다.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세상도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완전한 열반에 들었을 때 마음 자체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세상자체도 있을 수 없다. 그런 마음은 하나의 마음 또는 한마음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발생된 마음이다.

 

 

2014-11-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