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음식절제와 아들고기의 교훈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2. 8. 18:26

 

음식절제와 아들고기의 교훈

 

 

 

성자들이 탁발할 때

 

꽃들이 만발할 때 벌이나 나비를 볼 수 있다. 특히 꿀벌을 많이 볼 수 있다. 꿀벌이 이 꽃 저 꽃 찾아 다니며 꿀을 취하지만 결코 꽃이 망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이 지나가는 곳에 온전한 것이 없다.

 

사람이 한번 지나가면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 꺽어 가서 혼자서 감상하고자 한다. 그래서 사람이 몰리는 곳에 꽃은 망가진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거대한 도시가 형성된다. 이는 자연과 환경파괴로 이어진다. 도로를 건설하기 위하여 다리를 놓고 터널을 뚫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꿀벌은 다르다. 꿀벌이 꽃밭을 헤집고 다니지만 꽃밭은 전혀 망가지지 않는다. 성자도 마찬가지이다. 탁발하러 마을로 가지만 전혀 피해를 주지 않는다.

 

 

Yathāpi bhamaro puppha   야타삐 바마로 뿝팡

vaṇṇagandha ahehaya   완나간당 아헤타양
Pa
eti rasam-ādāya,        빨레띠 라사마다야

eva gāme munī care.      에왕 가메 무니 짜레.

(Dhp49)

 

 

색깔과 향기를 지닌 꽃은

꿀벌이 건드리지 않고

오직 꿀만 따서 나르듯,

성자는 마을에서 유행한다.

(Dhp49, 전재성님역)

 

 

蜜蜂は(の)色香(そこなわず)に、

をとって、からる。
聖者くときは、

そのようにせよ。

(Dhp49, 中村元)

 

 

꽃의 향기와 빛깔을 다치지 않고

꿀만을 따가는 꿀벌처럼

지혜로운 성자는 그와 같이

마을에서 마을로 걸식을 해야 한다.

(Dhp49, 법정스님역)

 

 

如蜂集華 여봉집화

不嬉色香 불희색향

但取味去 단취미거

仁入聚然 인입취연

(Dhp49, 한역)

 

 

마치 꽃의 빛깔과 향기와 모양을

다치지 않고 꿀만 따가는 벌처럼

빅쿠는 마을에서

그와 같이 탁발하여야 한다.

(Dhp49, 거해스님역)

 

 

As a bee — without harming

       the blossom,

       its color,

       its fragrance —

takes its nectar & flies away:

so should the sage

go through a village.

(Dhp49, Thanissaro Bhikkhu)

 

 

Bee-landing-on-flower

 

 

벌과 나비는 꽃밭을 망가뜨리지 않는다

 

벌과 나비는 꽃밭을 망가뜨리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색깔과 향기를 지닌 꽃은 꿀벌이 건드리지 않고(전재성님역)”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Yathāpi bhamaro puppha vaṇṇagandha ahehaya Paeti rasam-ādāya: DhpA.I.374에 따르면, 벌들은 꽃밭을 돌아다니면서 꽃과 그 향기를 파괴하지 않는다. 이렇게 벌들은 다니면서 필요한 만큼의 화밀(花蜜)을 빨아먹고 꿀을 만들기 위해 조금 더 취한다. 그리고는 숲속 깊이 들어가 꽃가루가 묻은 화밀을 나무의 깊숙이 숨겨진 벌집에 저장하면 그것이 꿀로 변한다. 꽃밭이 있기 때문에, 꽃들이나 그들의 색깔이나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모든 것은 자연상태로 남아 있다.

 

(법구경 dhp49, 660번 각주, 전재성님)

 

 

벌들은 꽃에서 필요한 만큼만 꿀을 취한다고 하였다. 인간과 달리 모두 가져 가지 않음을 말한다. 인간의 경우 이익 되는 것이 있으면 가만 두지 않는다.

 

있을 때 줏어 먹자?

 

오래전 첫 직장에서 어느 사업부장이 늘 하던 말이 있었다. 종합상사에서 제조회사로 온 그 분은 있을 때 줏어 먹자!”라 하였다. 조금 지나면 남이 다 차지 하기 때문에 늦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건을 팔 시장이 형성되었을 때 최대한 이익을 취하자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승자독식을 말한다.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작동하는 곳이다. 그래서 시장이 형성되어 있을 때 단계적계획을 세운다. 3개년 또는 5개년 계획을 취하여 단계적으로 매출과 이익을 증대하고자 한다. 그러나 경쟁사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최초로 상품을 개발하였다면 경쟁사들이 진입하기 이전에 최대한 매출과 이익을 증대하고자 할 것이다. 그래서 있을 때 줏어 먹자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꿀벌과도 같은 삶

 

꿀벌은 결코 한꺼번에 다 먹지 않는다. 꿀을 먹을 만큼 먹고 꿀을 만들기 위해 조금 취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문명이 덜 발달된 원시부족에게도 볼 수 있다.

 

TV의 다큐프로를 보면 열대지방의 원시부족들은 그날 먹을 것을 그날 취한다. 문명사회에서와 같이 많이 축적하지 않는다. 그날 먹을 것을 그날 취하므로 서로 다투지 않는다. 손만 뻗으면 나무에는 과일이 있고 바닷속에는 물고기가 있다. 축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욕심이 없다. 마치 꿀벌과도 같은 삶이다. 자연을 훼손함이 없이 자연과 함께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다.

 

성자의 행위와 꿀을 만드는 행위의 유사성

 

법구경 49번 게송에서는 성자를 꿀벌에 비유하였다. 그래서 성자는 마을을 유행한다.”라 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eva gāme munī care: DhpA.I.374에 따르면, 아직 배우는 자[학인]이거나 배움을 뛰어넘은 자[무학]이거나 집에서 사는 자가 아닌 성자는 마을에서 집집마다 탁발하며 다닌다. 그가 마을에 있다고해서 그 마을의 가정들이 믿음이 작아진다던가 부가 적어지지 않는다. 믿음과 부는 평상시처럼 유지된다.

 

아직 배우는 성자는 이처럼 마을을 다니다가 그곳을 떠나 물을 얻기 쉬운 마을 밖에 한 장소에 가사를 놓고 그 위에 앉는다. 그리고 모아온 탁발음식을 차축을 돌게 하는 윤활유나 상처를 치유하는 붕대나 아들의 고기처럼 바라본다.

 

차축의 윤활유나 상처의 붕대처럼 여기는 것은 음식을 먹는 목적을 상기하는 것이고 아들의 고기는 음식의 비통함을 상기하는 것이다. 제정신의 사람이라면 거기에 탐욕을 부릴 수가 없다. 그것을 취한 후에, 숲속에 들어가 명상주제들을 닦아 네 가지 길[四向: cattararo magga]과 네 가지 경지[四果: cattari phalani]를 성취한다.

 

배움을 뛰어넘은 성자, 번뇌가 소멸한 거룩한 님은 길과 경지를 즉각적으로 체험한다. 이것이 성자의 행위와 꿀을 만드는 행위의 유사성이다.

 

(법구경 dhp49, 661번 각주, 전재성님)

 

 

부처님 당시 출가자는 재가자들이 사는 곳 근처에 살았다. 오늘날 한국불교와 같이 출가를 하면 심산유곡으로 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을로 출가한 것이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것은 산속이 아니라 마을과 가까운 숲이다.

 

마을 근처 숲에 있게 된 것은 탁발하기 좋기 때문이다. 직업을 갖지 않은 출가자는 탁발에 의존하여 청정한 삶을 유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 가까이에 살았다. 그렇다고 하여 마을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

 

출가수행자들은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까이 살지도 않았다. 청정도론 두타행에 따르면 청년이 마을 입구에서 돌팔매를 하였을 때 돌이 떨어진 자리, 또는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진 자리부터 숲으로 보았다.

 

숲에 사는 수행자들은 마을로 내려가 탁발하며 음식을 얻는다. 모은 음식을 마을 밖 숲에서 함께 나누어 먹는다. 이때 음식을 먹을 때 주의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얻은 음식을 먹을 때 윤활유처럼, 그리고 아들고기처럼 대하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어떻게 음식을 대할 것인가?

 

초기경전에서 음식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하나는 음식을 윤활유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들고기를 대하듯 음식을 취하는 것이다. 먼저 윤활유의 비유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seyyathāpi bhikkhave, puriso vaa. Ālimpeyya. Yāvadeva ropanatthāya. Seyyathā vā pana akkha abbhañjeyya yāvadeva bhārassa nitraatthāya; evameva kho bhikkhave bhikkhu paisakhāyoniso āhāra āhāreti. Neva davāya na madāya na maṇḍanāya, na vibhusanāya, yāvadeva imassa kāyassa hitiyā yāpanāya vihisuparatiyā brahmacariyānuggahāya, iti purāañca vedana paihakhāmi, navañca vedana na uppādessimi, yātrā ca me bhavissati anavajjatā ca phāsuvihāro cāti. Eva kho bhikkhave, bhikkhu bhojane mattaññū ho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치료가 될 때까지 상처에 연고를 바르듯, 또한 예를 들어 짐을 옮길 수 있도록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듯.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있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불편했던 경험을 제거하고 새로운 고통을 초래하지 않겠다. 이것으로 나는 허물없이 안온하게 살리라.’라고 이치에 맞게 성찰해서 음식을 섭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안다.”

 

(Rathūpamasutta-수레의 비유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239, 전재성님역)

 

 

수레의 비유에 대한 경은 특이 하다. 대부분의 경에서 질문자가 있어서 질문을 하면 부처님이 가르침을 일러 주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경의 서문을 보면 부처님이 수행승들에게 수행승들이여라며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은 세 가지 원리를 갖춘 수행승에 대하여 말씀 하신다. 그 세 가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 그리고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 이렇게 세 가지 원리를 말한다.

 

세 가지 원리 중에서 두 번째 해당되는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에 대하여 연고와 기름의 비유를 들고 있다. 음식을 섭취하는 것에 대하여 상처가 났을 때 더 이상 덧나지 않게 연고를 바르는 정도라 하였다. 일종의 치유(ropanatthāya)’를 말한다. 이는 약으로서 음식을 말한다. 또 차축이 잘 돌아 갈 수 있도록 기름칠(abbhañjeyya)’ 하는 정도로 음식을 섭취하라고 하였다.

 

부처님이 음식에 대하여 약과 기름칠로 비유하였다. 이렇게 말씀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청정한 삶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연고와 기름칠의 비유는 사실상 출가자의 공양게라 볼 수 있다.

 

한문공양게를 보면

 

한국불교에도 공양게가 있다. 절에서 밥을 먹을 때 흔히 듣는 말이 이 음식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시작 되는 공양게를 말한다. 이를 오관게(五觀偈)’라 하는데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計功多少量彼來處

村己德行全缺應供

防心離過貪等爲宗

正思良藥爲療形枯

爲成道業膺受此食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나무석가모니불,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오관게-공양게송)

 

 

게송을 보면 이라는 말이 보인다. 음식을 섭취할 때 약으로서 보는 것이다.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육신이 지탱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다른가?

 

한문 오관게는 빠알리게송과는 약간 다르다. 음식절제의 목적에 대하여 오관게에서는 깨달음의 성취라 하였지만 빠알리 게송에서는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또 음식절제의 수단에 대하여 오관게에서는 육신을 지탱하는 약이라 하였으나 빠알리게송에서는  상처에 연고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는 것으로 비유였다. 이런 차이에 대하여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비고

한문공양게

(오관게)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수단)

 

-깨달음(목적)

빠알리공양게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치료가 될 때까지 상처에 연고를 바르듯, 또한 예를 들어 짐을 옮길 수 있도록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듯.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있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불편했던 경험을 제거하고 새로운 고통을 초래하지 않겠다. 이것으로 나는 허물없이 안온하게 살리라.’라고 이치에 맞게 성찰해서 음식을 섭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안다.”(S35.239)

-연고와 기름칠(수단)

 

-청정한 삶(목적)

 

 

 

이렇게 본다면 수행자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는 병의 치유나 최소한의 몸의 유지를 위함이라 볼 수 있다. 단지 먹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하여 먹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먹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육신을 지탱하기 위한 수단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약으로서 또는 기름칠로서 음식을 취하는 것은 청정한 삶의 실현에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아들고기의 교훈

 

음식을 대하는 두 번째 방식은 아들고기의 교훈이다. 아들고기란 무엇인가? 이는 윤회의 동력이 되는 자양분과 관련된 끔찍한 비유를 말한다.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두 사람의 부부가 적은 양식만을 가지고 황야의 길을 나섰는데, 그들에게는 사랑스럽고 귀한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그 두 사람의 부부가 황야를 지날 때 갖고 있던 적은 양식이 다 떨어져버렸는데도 그들은 아직 황야를 빠져 나오지 못했다.

 

그때 수행승들이여, 그 두 사람의 부부는 우리들의 적은 양식이 다 떨어져버렸지만 아직 황야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우리 모두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귀한 아들을 죽여서 말린 고기나 꼬챙이에 꿴 고기를 만들어 아들의 고기를 먹으면서 황야를 빠져나가는 것이 어떨까?’라고 이와 같이 생각했다.

 

(Puttamasasutta-아들의 고기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12.63,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십이연기에 대한 가르침에서 (윈냐나)’이 있다. 이 식을 설명하기 위하여 네 가지 자양분을 설명하였다그것은 물질의 자양분, 접촉의 자양분, 의도의 자양분, 의식의 자양분, 이렇게 네 가지 자양분을 말한다. 이 네 가지 중에 물질의 자양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끔찍한 아들의 고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사람들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그래서 사흘만 굶으면 남의 집 담을 넘는다고하고 하였다. 이렇게 굶주리면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 사랑하는 외동아들과 함께 황야를 건넌 부부가 식량이 떨어졌을 때 역시 눈에 뵈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부는 아들을 잡아 먹기로 합의 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존재에 대한 욕망이다. 아마 생존하게 된다면 아이는 또 나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생존의 본능 앞에 비정한 부모라 볼 수 있다. 생존이라는 극한 상황에 내 몰렸을 때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 볼 수 있다.

 

음식의 비통함을 상기하기 위하여

 

부모는 마치 동물을 잡아 먹듯이 아들을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황야를 빠져 나갈 수 있도록 고기를 말리고 마치 양꼬치처럼 꼬챙이로 꿴 고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존하기 위하여 아들고기를 먹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부모심정은 어땠을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외아들아, 어디에 있니? 외아들아, 어디에 있니?”라며 가슴을 치면서 먹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부처님이 아들고기를 이야기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다음과 같은 구절로 알 수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은 놀이 삼아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취해서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진수성찬으로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영양을 위해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

 

(Puttamasasutta-아들의 고기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12.63, 전재성님역)

 

 

세상에 어느 부모가 아들고기를 먹으면서 맛을 즐기면서 먹을 수 있을까? 경에 따르면 생존하기 위하여, 육신을 지탱하기 위하여 아들고기를 먹을 뿐이지 진수성찬으로서, 또는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하여 먹지 않았을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로지 황야에서 빠져 나올 때 까지만 자양분을 섭취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아들고기를 먹은 것이다.

 

아들고기의 교훈을 보면 청정한 삶을 목적으로 한 수행자들은 음식먹는 것을 즐겨서는 안된다. 단지 먹는 재미를 위하여 진수성찬을 즐기고, 단지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하여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주석에서 아들의 고기는 음식의 비통함을 상기하는 것이다.”라는 설명으로 알 수 있다.

 

꿀과 사향사과(四向四果)

 

법구경 49번 게송에 따르면 성자의 행위와 꿀벌의 꿀을 만드는 행위에는 유사성이 있다고 하였다. 꿀벌이 꽃들을 찾아 다니며 꿀을 채집하지만 결코 꽃을 해치지 않듯이 마찬가지로 성자들 역시 탁발을 하지만 재가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것을 말한다.

 

그런데 꿀벌은 피해를 주지 않고 꿀을 맛 보면서 동시에 소량의 꿀을 모은다. 이는 마치 수행자가 를 닦아 를 이루는 것과 같다. 탁발로 인하여 재가자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출가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네 가지 길[四向: cattararo magga]과 네 가지 경지[四果: cattari phalani]를 성취한다.”라 하였다. ‘사향사과(四向四果)를 말한다.

 

"많이 드세요"가 아니라 알맞게 드세요

 

요즘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보면 매일 잔칫날이고 매일 파티하는 날 같다. 수백명이 동시에 식사하는 카페테리아의 메뉴를 보면 고기가 빠질 날이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TV에서는 경쟁적으로 먹거리 방송을 내 보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마치 세상이 먹기 위하여 사는 것처럼 보인다. 음식절제와 관련하여 최근 묘원법사의 글을 보았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을 위해서 식사량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사실 음식을 조절하는 문제는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필요한 것입니다. 다만 수행이라는 목표가 있을 때는 양을 조절하려는 의도를 계속 가질 수 있어서 더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수행을 위해서 식사량을 조절하려고 하다보면 먹으려는 욕망과 먹지 않으려는 절제가 부딪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만약 먹지 않으려는 의도가 강하면 이 각오가 느슨해질 때 오히려 더 먹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있어서 바라는 마음으로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해야 가장 이상적 결과를 얻습니다. 좋은 일도 바라는 마음으로 할 때는 반작용이 있으므로 무엇이나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음식을 먹는 것은 본능이기 때문에 욕망으로 먹기 마련입니다. 상좌불교 비구들이나 일반 수행자들에게 먹는 것에 대한 계율이 많은 것은 먹을 때 욕망으로 먹기 때문입니다. 만약 음식을 먹을 때 알아차려서 욕망으로 먹지 않으면 그만큼 바른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기 위해서 먹는 것을 조절할 것이 아니라 음식을 알아차리면서 먹으면 이 행위 자체가 수행이 됩니다. 이처럼 먹을 때 알아차리면서 먹으면 도과를 성취할 수도 있습니다. 주석서를 보면 혀에 불이 붙지 않게 먹으라는 스승의 말씀을 실천하여 도과를 성취한 기록도 나옵니다. 이때 혀에 불이 붙지 않게 먹는 다는 것은 탐욕으로 먹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탐욕으로 먹으면 음식의 맛도 모르고 몇 번 씹지도 않고 삼킵니다. 이때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고 욕망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기 위해서 음식을 조절할 것이 아니고 음식을 먹는 것에서부터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 따로 음식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려면 음식을 먹기 전에지금 무슨 마음으로 먹는가?”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 뒤에 음식을 집을 때부터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음식을 먹으면 계율로 먹게 됩니다. 계율로 먹는다는 것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먹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나 음식을 먹을 때 맛있는 것을 바라는 탐욕으로 많이 먹으면서 시도 때도 없이 먹고, 맛이 없을 때는 성냄으로 먹고, 이렇게 탐욕과 성냄으로 먹는 것이 어리석음으로 먹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알아차리면서 먹으면 음식물을 많이 집지 않고 적당히 집으며, 음식을 오래 씹게 되어 적게 먹고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음식의 맛을 알면서 먹을 수 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는 자기 입맛으로 먹지 말고 음식의 맛을 알아차리면서 먹는 것이 필요합니다. 모든 음식은 각각의 맛이 있으므로 이렇게 음식이 가진 고유한 맛을 알아차리면서 먹으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먹지 않고 훌륭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음식을 재료 맛으로 먹는 것입니다. 이렇게 먹으면 씹을 때마다 맛이 달라 무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음식물을 삼키면 그 맛도 한순간에 사라지는 무상을 느끼게 되어 과식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법을 볼 수 있습니다.

 

음식에 대한 일반적 인사는 "많이 드세요." 입니다. 하지만 수행자의 음식에 대한 인사는 "알맞게 드세요." 입니다. 알맞은 것이 중도며 팔정도고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묘원법사, 음식을 알아차리면서 먹는 것이 수행입니다, 2014-12-05, 한국명상원)

 

 

수행자의 공양게

 

더 맛있는 것을 찾아 맛집순례를 하고 더 맛있게 먹기 위하여 레시피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살기 위하여, 생존하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 그것 자체를 즐기는 세상이 되었다. 비록 수행자에게 한정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부처님은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하여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서 또는 차축이 잘 돌아 갈 수 있도록 기름칠 하는 것 정도로 한정하였다. 그래서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있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음식을 취하는 태도일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자의 공양게라 볼 수 있다.

 

 

2014-12-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