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항상 청정한 마음을 내야 하는 이유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2. 9. 15:07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항상 청정한 마음을 내야 하는 이유

 

 

 

아름답고 매혹적인 꽃이 피었을 때 이를 보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보는 족족 따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다음 사람은 그런 꽃이 있었는지조차도 모를 것이다. 꽃박람회에서는 꽃을 따는 것이 금지 되어 있다. 그러나 들에 피어 있는 들꽃은 주인이 없기 때문에 따도 될 것이다. 그럼에도 꽃을 따는 행위는 일종의 살생과도 같다. 특히 수행자에게 그렇다. 율장대품에서 풀잎이라도 주지 않은 것을 훔칠 목적으로 갖지 말아야 한다.”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자는 풀 하나 밟는 것 조차 신경써야 한다. 그럼에도 꽃을 따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Pupphāni heva pacinanta   뿝파니 헤와 빠찌난땅

byāsattamanasa nara,   브야삿따마나상 나랑
Atitta
yeva kāmesu       아띳땅 예와 까메수

antako kurute vasa.      안따꼬 꾸루떼 와상.

 

(Dhp48)

 

 

오로지 꽃들을 따는데

사람이 마음을 빼앗기면,

욕망이 채워지기 전에

악마가 그를 지배한다.

(Dhp48, 전재성님역)

 

 

むのに

夢中になっているが、

みをたさないうちに、

征服する。

(Dhp48, 中村元)

 

 

꽃을 꺾는 일에만 팔려

마음에 끈질긴 집착을 가지고

욕망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은

마침내 죽음의 악마에게 정복당한다.

(Dhp48, 법정스님역)

 

 

如有採花 여유채화

專意不散 전의불산

欲意無厭 욕의무염

爲窮所困 위궁소곤

(Dhp48, 한역)

 

 

아름다운 꽃을 찾아 헤매듯

마음이 감각적 쾌락에 빠져 있는 자를

죽음은 먼저 앗아 가버린다,

쾌락에 채 만족하기도 전에.

(Dhp48, 거해스님역)

 

 

The man immersed in

gathering blossoms,

his heart distracted,

insatiable in sensual pleasures:

the End-Maker holds him

under his sway.

(Dhp48, Thanissaro Bhikkhu)

 

 

 

 

 

오로지 꽃들을 따는데 사람이 마음을 빼앗기면

 

게송에서 오로지 꽃들을 따는데 사람이 마음을 빼앗기면이라 하였다.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Pupphāni heva pacinanta byāsattamanasa nara : DhpA.I.366에 따르면, 꽃밭에서 여러 가지 꽃을 따서 화환을 만드는 사람처럼 감각적 쾌락의 가닥인 꽃들을 따 모으는 사람은 자신과 연결되거나 물질적 대상과 연결된다.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은 얻지 못한 것을 원하고 얻은 것에 탐착하는 방식으로 마음을 빼앗긴다. Dag.113.7에 따르면, 여기서 자신과 연결된 것은 금이나 은이나 침대와 의자와 같은 것과 관계된 감각적 쾌락을 말한다.

 

(법구경 Dhp48,  657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꽃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금과 은 등이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돈이다. 돈이 있어야 감각적 쾌락을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려고 한다. 또 노후를 생각하여 미리 축적해 놓고자 한다. 그래서 하루의 대부분을 돈 버는 일에 올인한다. 이것이 보통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다.

 

돈 버는 일에 올인하다 보면

 

돈 버는 일에 올인하다 보면 돈 버는 일에 마음을 빼앗긴다. 어느 날 돌아서 보면 시간이 많이 지났음을 알게 된다. 이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에스컬레이터를 탄 기분일 것이다. 모든 것이 스무스하게 진척되기 때문이다. 열심히 공부하여 바라는 대학에 들어가고, 대학에서 또 열심히 공부하여 원하는 직장에 취직 하게 되었을 때 누구나 바라는 정상적인 길을 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일을 한 만큼 급여를 받고, 월급을 모아 저축을 하고 재산을 불리는 재미에 세월 갈지 모른다. 그렇게 하루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내다 보면 한해, 두해, 십년, 이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간다. 그러다 뒤를 돌아 보게 되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 간다.

 

돈을 받아 먹는 재미에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는데, 그 시간이 쌓이고 쌓여서 수 십년이 흘러 갔을 때 더구나 나중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이 세월만 지나갔음을 느꼈을 때 ()’()’를 느낀다. 마치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아무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을 때 지나간 세월이 아깝다는 느낌이 든다. 돈이라는 것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일 것이다.

 

욕망이 채워지기 전에 악마가 그를 지배한다.”

 

게송에 따르면 욕망이 채워지기 전에 악마가 그를 지배한다.”라 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Atitta yeva kāmesu antako kurute vasa : DhpA.I.366에 따르면, ‘욕망이 채워지기 전이라는 것은 대상의 감각적 쾌락들과 그 획득과 소비와 수집에서 오는 오염된 상태인 감각적 쾌락들과 관련하여 불만족을 말한다. 그리고 악마의 원어는 끝내는 자(antako)’즉 죽음이다. 악마는 사람을 비탄에 빠뜨리고 마침내 복종시킨다.

 

(법구경 Dhp48,  658번 각주, 전재성님)

 

 

성공관련 서적을 보면 바라는 것은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루어 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성취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것이 금이나 은이 될 수도 있고, 집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바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를 세속적 용어로 오욕락이라 한다.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세속적 오욕락은 식욕, 성욕, 수면욕, 재물욕, 명예욕을 말한다. 이런 오욕락을 추구하지만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식욕이 만족 되면 성욕을, 성욕이 만족 되면 안전에 대한 욕구를 추구한다.

 

돈을 벌어 욕구가 충족 되었을 때 이번에는 명예를 얻고자 한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번 자가 시의원, 도의원에 도전하는 것은 명예를 위한 것이다. 더 나아가 지자체장이나 국회의원이 되고자 한다면 권력을 탐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패배의 쓴 맛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좋아 하는 사람을 얻기 위하여 쫒아가지만 상대는 더 멀리 도망가 버린다. 주식으로 돈을 많이 벌기 위하여 올인 하지만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까진다.

 

바란다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더 멀리 달아날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욕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불만족만 쌓이게 된다. 이런 불만족의 끝은 어디일까? 이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antako’라 하였다. 이는 끝내는 자라는 뜻이다.

 

남는 것은 ()’()’

 

끝내는 자의 의미인 ‘antako’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악마로 번역하였다. 나까무라 하지메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신)’이라 하였고, 법정스님은 죽음의 악마라 하였다. 거해스님은 죽음이라 하였고, 타닛사로 빅쿠는 End-Maker(끝내는 자)’라 하였다.

 

Antako’라는 말이 들어 간 게송이 율장대품에도 있다. 그것은 “형상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의/ 감각에서 즐거운 것들/ 거기서 나의 욕망은 떠났으니/ 죽음의 신이여, 그대가 패했다. (악마에 대한 이야기1, 율장대품 제1장 크나큰 다발, 전재성님역)”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죽음의 신이 antaka이다. 초불연에서는 이를 끝장 내는 자라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End-maker(끝을 만드는 자)’라 하여 타닛사로 빅쿠의 번역과 같다.

 

꽃을 따는데 열중한다면 정신이 팔리는 것과 같다. 오욕락을 추구하는데 열중한다면 역시 정신이 팔리는 것과 같다. 정신이 팔린다는 것은 정신을 빼앗긴다는 말과 같다. 이렇게 오욕락 추구에 정신이 팔리지만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애만 쓰다가 세월 보내는 것이다.

 

짝사랑하는 애인이 있어 쫒아 가 보지만 상대는 더 멀리 도망가기만 한다. 주식에 올인하면 할수록 잔고만 줄어 들 뿐이다. 경마장에서 열심히 자료를 들여다 보며 베팅(betting)’해 보지만 집에 올 때는 빈털털이 신세이다. 명예와 권력을 추구 해 보지만 패배 하였을 때는 동네의 개도 쳐다 보지 않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 오욕락에 마음을 빼앗겼을 때 남는 것은 이다. 최종적으로는 끝장 내는 자, 즉 죽음의 신 악마에게 불려 갈 뿐이다. 그래서 욕망이 채워지기 전에 악마가 그를 지배한다.”라 하였다.

 

빠띠뿌지까와 관련된 이야기(Patipujikavatthu)

 

법구경 48번 게송과 관련하여 인연담이 있다. 전재성님이 법구의석을 번역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시가 설해진 데는 이와 같은 인연담이 있다: DhpA.I.363-366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에 계실 때, 빠띠뿌지까와 관련된 이야기(Patipujikavatthu)이다.

 

한때 서른 셋 신들의 하늘나라에 말라바린(Malabhalin)이라는 하늘아들이 천명의 선녀들에게 둘러싸여 정원에 들어갔다. 오백 명의 선녀들이 꽃을 따서 던지면 오백명의 선녀들이 꽃을 주어 하늘아들을 치장했다. 그런데 한 선녀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몸이 등불처럼 꺼져서, 싸밧티 시의 한 고귀한 가문에 태어났다. 그리고는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전생을 기억했고. ‘하늘아들 말라바린의 아내이다.’라고 회상하며, 자라서는 꽃공양과 향공양을 하면서 전 남편의 곁에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했다. 그래서 그녀의 남편을 공경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빠띠뿌지까(Patipujika)라고 지었다.

 

그녀는 열여섯에 다른 가문에 시집을 갔다. 그리고 그녀는 수행승들에게 식권으로 먹는 음식과 보름의 음식과 우기의 음식을 공양하며 천상의 남편과 만나길 발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열달 후에 한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걸을만하자 두 번째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걸을만하자 또 다른 아들을 낳고 해서 어느덧 네 아들을 낳았다. 어느날 그녀는 공양을 올리고 공덕을 수행승들에게 회향하고 가르침을 듣고 계행을 지키고는 그날 저녁에 갑자기 질병으로 죽어서 다시 천상계에 화생했다.

 

천상계에서는 여전히 선녀들이 말라바린에게 꽃을 장식하고 있었다. 하늘아들 말라바린이 오늘 아침부터 당신이 안보이던데, 어디 갔다 왔소?’라고 물었다. ‘여보, 저는 죽었습니다.’ ‘무슨 소리요?’ ‘주인님, 사실입니다.’ ‘어디서 태어났소?’ ‘싸밧티 시의 한가문에 태어났습니다.’  얼마나 그곳에서 오랫동안 지냈습니까?’ ‘주인님, 열달만에 저는 어머니의 태에서 나와 열여섯 살에 다른 가문에 시집가서 네 아들을 낳아 기르며, 수행승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시중을 들며 다시 돌아오기를 서원하여 당신 곁에 온 것입니다.’ ‘인간의 수명은 얼마나 됩니까?’ ‘주인님, 백년입니다.’ ‘그렇게 짧습니까?’ ‘주인님, 그렇습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짧은 시간 태어나서 산다면, 시간을 빈둥거리며 방일하게 보냅니까?’ ‘주인님,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인간들은 늙음과 죽음이 없이 무수한 세월을 사는 것처럼 방일합니다.’ 그러자 말라바린은 크게 동요하며, ‘당신이 말한 대로 인간들이 태어나 겨우 백년을 사는데, --인간의 백년은 서른 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하루 밤낮에 해당한다. 신들의 수명은 천상년으로 천년이고, 인간년으로 환산하면, 3 6백만년에 해당한다. –- 빈둥거리며 방일하게 보낸다면, 언제 그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겠습니까?’

 

한편 지상에서 다음날 수행승들은 이 사실을 부처님께 알렸다. 부처님께서는 천상계의 일을 수행승들에게 설명하고 이 세상의 모든 뭇삶의 목숨은 짧다. 그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채워지기도 전에 죽는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시로써 오로지 꽃들을 따는데, 사람의 마음이 빼앗기면, 욕망이 채워지기 전에 악마가 그를 지배한다.’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흐름에 든 경지 등을 성취했다.

 

(법구경 48번 게송 인연담, 빠띠뿌지까와 관련된 이야기(Patipujikavatthu))

 

 

인연담에 따르면 삼십삼천의 천녀는 순간의 실수로 인간계에 태어났다. 이에 대하여 등불처럼 꺼져서라 하였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그것도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계에 태어났는데 이후 삶의 과정을 보면 보통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별로 다르지 않다. 여자로 태어나 나이가 차 시집을 가고, 시집에 가서 애를 낳는 과정을 말한다. 그런데 인간계에서 죽어서 다시 천상계에 태어났다. 이는 수행승들에게 공양을 하는 등 공덕을 쌓았기 때문이다. 계를 지키고 보시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시계생천(施戒生天)’의 가르침이 딱 들어 맞는다.

 

다시 천상에 태어났을 때 갑자기 출현 한 것처럼 보인다. 화생한 것이다. 그것도 죽었을 당시 모습이다. 이런 구성에 대하여 누군가는 허구라 할 것이다. 그러나 픽션이냐 논픽션이냐를 따지는 것은 인연담이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에서 어긋난다. 그저 그러려니하고 받아 들일 뿐이다.

 

천상의 하루가 인간의 일생

 

인연담에 따르면 천상의 하루가 인간의 일생에 해당된다. 그래서 오늘 아침부터 당신이 안보이던데, 어디 갔다 왔소?”라고 물어 본 것이다. 오전에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하여 물어 본 것이다.

 

오전에 선녀는 인간계에서 일생을 보낸 것이다. 도중에 죽었기 때문에 아침 나절 잠깐 자리를 비운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인간의 백년은 서른 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하루 밤낮에 해당한다.”라고 보충설명을 해 놓았다. 그리고 신들의 수명은 천상년으로 천년이고, 인간년으로 환산하면, 3 6백만년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욕계여섯천상

No

욕계천상

 

    

1

타화자재천

(빠라님미따와사왓띠,

Para-nimmita-vasavatti)

16,000 천상년

(92억년)

-남에 의해서 창조된 것을 지배할 수 있는 천신

-자기 스스로 욕망의 대상을 창조 하지 못하지만 시종들이 창조해 주는 것을 지배 하고 제어 할 수 있음

2

화락천

(님마나라띠, Nimmanarati)

8,000 천상년

(23억년)

 

정신적인 힘으로 그들이 원하는 감각적욕망의 대상을 창조할 능력을 갖추고 있음

3

도솔천

(뚜시따, Tusita)

4,000 천상년

(57천년)

-주석서에는 희열을 뜻하는 삐띠(piti) 로 설명

-미륵(메떼야, Metteyya)보살이 머물고 있는 곳

4

야마천

(야마, Yama)

2,000 천상년

(14천년)

-죽음을 관장 하는 막강한 신

-주석서에서는 신성한 행복을 얻어서 두루 갖추고 있는 존재로 정의

5

삼십삼천

(따와띰사, Tavatimsa)

1,000 천상년

(36백만년)

- 33에 속하는 천신이라는 의미

-우두머리는 인드라(Indra)

-인드라는 삭까(Sakka)라고도 하며  ‘제석’ 또는 ‘제석천왕’이라 함.

-삼십삼천을 ‘제석천’이라고도 부름

6

사대왕천

(짜뚜 마하라지까, Catu-maharajika)

500 천상년

(9백만년)

-인간보다 더 풍부한 감각적 쾌락이 있음

- 동천왕 다따랏타(Datarattha);

음악가인 간답바를 통치

-남천왕 위룰하까(Virulhaka);

보물을 관리는 하는 꿈반다를 통치

-서천왕 위루빡카(Virupakkha);

용들을 통치

-북천왕 웻사와나(Vessavana);

약카들을 통치

 

 

 

인연담에 등장하는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는 일반적으로 삼십삼천(Tavatimsa)’이라 부른다. 다른 말로 제석천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수명을 보면 ‘1000천상년이다. 인간으로 환산하면 무려 ‘36백만년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수명계산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형성조건에 따른 31개의 세상이 있는데

 

전재성님이 번역한 빠알리니까야 각권을 보면 마지막 부분에 세상도표가 실려 있다. 아래로는 지옥에서부터 위로는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천 까지 모두 31개의 세상이 표현 되어 있다. 이를 형성조건에 따른 31가지 세상이라 한다. 이때 형성조건이라 무엇을 말하는가? 예를 들어 욕계천상에 태어나려면 믿음과 보시와 지계를 실천하면 된다. 이는 부처님의 차제설법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순서에 맞게 설하였다. 이는 아난다여, 사람은 ‘나는 순서에 맞는 설법을 하겠다.’라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해야 한다. (A5.159)”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주석에 따르면 보시를 설한 다음에 계행을 설하고 계행을 설한 다음에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설하고, 다음에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재난과 욕망의 여읨의 공덕을 설하고, 그 다음에 부처님의 본질적인 가르침인 네 가지 거룩한 진리와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설한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윤리적인 것보다 수승한 수행적 관점을 설하는 것을 말한다. (A5.159, 375번 각주, 전재성님)”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와 같은 가르침에 따르면 천상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인간이 사는 인간계가 있듯이 믿음과 지계와 보시를 하면 그 과보로 형성되는 천상계는 존재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가르침에 대하여 방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나는 논리적인 설법을 하겠다”라 하여 방편설법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부처님의 설법은 경에 따르면 차제설법, 방편설법, 자비설법, 무대가설법, 자타이익설법 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어떻게 설법을 것인가? 차제설법과 방편설법(2014-08-14)’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천상도표의 근거는?

 

전재성님이 번역한 니까야의 각권 말미에 있는 천상도표는 근거없이 작성된 것이 아니다. 삼십삼천에 대하여 천천상년(36백만년)이라 한 것은 모두 경전적 근거를 갖는다. 아비담마나 주석서 등 논장에 실려 있는 이야기는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십삼천의 수명이 인간으로 따져 36백만년이라 한 것은 어떤 경을 근거로 한 것일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비싸카여, 인간의 일백 년이 서른 셋 하늘나라 신들의 하루 밤낮이고, 그러한 서른 밤이 한달이고, 그러한 열두 달이 일년이고, 그러한 일년의 천년이 서른 셋 하늘나라 하늘나라 신들의 수명입니다.

 

비싸카여, 세상에 어떤 여자나 남자가 여덞 가지 고리를 갖춘 포살을 준수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서른 셋 하늘나라 신들 사이에 태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인간의 왕권은 천상의 행복에 비해 보잘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싸카의 포살에 대한 경, 앙굿따라니까야 A8.43, 전재성님역)

 

 

앙굿따라니까야 비싸카의 포살에 대한 경에 따르면 인간의 일백 년이 서른 셋 하늘나라 신들의 하루 밤낮이라 하였다. 그리고 일년의 천년이 서른 셋 하늘나라 하늘나라 신들의 수명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경을 근거로 하여 세상도표가 만들어진 것이다.

 

한권으로 읽는 경전의 문제점

 

삼계가 표시 되어 있는 31개의 세상도표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과학의 시대에 검증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현세의 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만 실천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

 

인연담에 등장하는 삼십삼천 이야기에 대하여 단지 방편으로 설한 것이라 하여 실재하지 않는다고 내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미래에는 모조리 빠질지 모른다. 실제로 한권으로 요약되어 있는 경전의 경우 초월적이고 신비한 내용은 모조리 빠져 있다.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이 대표적이다. 오로지 현세적인 내용만 있을 뿐 삼계와 윤회에 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경에서 그 부분만 의도적으로 삭제해 놓은 것도 있다.

 

초기경전이 바이블처럼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한권으로 경전을 축약한다고 하여 비과학적 요소를 삭제 한다면 부처님이 전달하고자 하는 중요한 가르침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하늘사람 등 초월적이고 신비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가르침을 분명하게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경에서 악마가 등장하였을 때 악마는 항상 부처님과 반대 되는 견해를 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욱 더 부각하는 것과 같다.

 

법구경인연담도 마찬가지이다. 삼심삼천의 천신이 선녀의 행적을 묻는 것도 가르침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이다그 말은 당신이 말한 대로 인간들이 태어나 겨우 백년을 사는데, 빈둥거리며 방일하게 보낸다면, 언제 그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겠습니까?”라는 문구가 대표적이다.

 

기대수명이 백세에 육박한다고 하여도

 

백년도 못사는 것이 인간이다. 기대수명이 늘어 백세에 육박한다고 하여도 백년 안팍의 삶이다. 그런데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숫따니빠따에서도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 있습니다.(stn574)”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천상에서는 수명이 보장 되어 있다. 그래서 31개의 세상도표를 보면 욕계천상 이상의 세계는 수명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인간을 포함하여 인간 이하는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다.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 있지 않고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을까? 이에 대하여 어느 법사는 업대로살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전에 지은 행위가 있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한 과보가 언제 익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신통제일 목갈라나도 이전에 지은 업으로 인하여 제명대로 살지 못하였다.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가 나중에 아라한이 되었지만 이전에 지은 업이 익었을 때 결국 돌에 맞아 죽고 말았다. 이렇게 인간을 포함하여 인간 이하의 축생 등의 세계에서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인간의 기대수명이 백세가 된다고 하여도 백살까지 살도록 어느 누구도 보장해 주지 않음을 말한다.

 

윤회의 두려움을 안다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면 오늘 잠들면 내일이 올지 아니면 내생이 시작될지 알 수 없다. 당장 한 두 시간 후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이렇게 본다면 게으름을 피울 여유가 없다. 그래서 인연담에서는 빈둥거리며 방일하게 보낸다면, 언제 그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겠습니까?”라 한 것이다.

 

인연담에서는 천신의 입을 빌어 불방일을 강조 하고 있다. 또 이어지는 부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 세상의 모든 뭇삶의 목숨은 짧다. 그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채워지기도 전에 죽는다.”라 하였다. 짧은 목숨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감각적 쾌락에 정신이 빠져 있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이어서 오로지 꽃들을 따는데, 사람의 마음이 빼앗기면, 욕망이 채워지기 전에 악마가 그를 지배한다.”라 하였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엉뚱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종국에는 끝장 내는 자(죽음의 신)’에게 끌려 가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세세생생 윤회하는 것을 말한다.

 

윤회의 두려움을 안다면 윤회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정진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나 사성제의 진리를 깨달아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 백세는 너무 짧다는 것이다. 더구나 수명이 보장 되어 있지 않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면 게으름을 피우거나 꽃을 따는데만 마음이 팔려 있다면 ‘End-Maker(끝장 내는 자, 죽음의 신)’에게 붙들려 갈 뿐이라는 가르침이다.

 

유배지에서 치열하게 산 정약용

 

수명은 보장 되어 있지 않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하루를 마치 일생을 살듯이 살아야 할 것이다. 불교닷컴에 실린 마성스님의 글을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알려 주는 것 같다.

 

 

어느덧 한해를 마무리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이맘때가 되면 지난 한해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계획했던 일들을 다하지 못한 아쉬움만 남는다. 옛 사람이시간은 너무나 빨라서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無常迅速, 時不待人].”고 말했다. 눈 깜박할 사이에 황혼을 맞이하게 된다는 교훈이다.

인간이 시간을 단위별로 구분한 것은 시간의 소중함을 망각하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만일 인간들에게 무한정 시간이 주어진다면 시간의 소중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 인생은 단 한 번의 기회[
一會一期] 뿐이기 때문에 더욱 값진 것이다.

한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한정된 시간 안에 자신이 세운 목표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다가 어느 날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매순간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범부들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망각하고 산다. 그러다가 중환자실에 실려 오면 그때서야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일도 어김없이 태양은 떠오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태양을 다시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세월을 보내기 위해 소일(
消日)거리를 찾고 있다. 대관절 얼마나 시간이 남아돌기에 소일거리를 찾는단 말인가.

다산 정약용(
丁若鏞, 1762-1836)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에서 천하에 가르쳐서는 안 되는 두 글자의 못된 말이 있다. ‘소일(消日)’이 그것이다. , 일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1 360, 1 96각을 이어대기에도 부족할 것이다. 농부는 새벽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애쓴다. 만일 해를 달아 맬 수만 있다면 반드시 끈으로 묶어 당기려 들 것이다. 저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날을 없애버리지 못해 근심 걱정을 하며 장기바둑과 공차기 놀이 등 하지 않는 일이 없단 말인가?”라고 안타까워했다.

이 글은 일없이 허송세월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다산은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해 18년이라는 긴 유배생활에서도 저술에 몰두했다. 그가 남긴 저술들을 총정리한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는 총 154 76책이나 된다. 그가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연재] 마성 스님의 摩聖斷想-10, 불교닷컴 2014-12-03)

 

 

마성스님은 정약용의 예를 들었다. 유배지에서 한가롭게 유유자적하며 소일하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살았음을 말한다. 그 증거로 유배지에서 저술된 154 76책을 예로 들고 있다.

 

출가수행자에게 예를 갖추어야 하는 이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함부로 살 수 없다. 한적한 곳에서 하릴없이 시간이나 때우면서 보내거나 주식이나 경마 등 쓸데 없는 곳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돈을 벌기 위하여 올인 하는 것 역시 수행의 관점에서 본다면 부질 없는 짓이 된다. 한평생 돈을 벌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쳤음에도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지나간 세월은 아까운 것이다. 그래서일까 젊은 나이에 출가하는 자들은 선견지명이 있는 것 같다. 마치 세상의 이치를 다 아는 자들 같다. 마치 전생에서부터 수행자이었단 자들이 이 세상에서도 수행자로 사는 것 같다.

 

젊은 나이에 출가한 자는 생이지(生而知)’이기 쉽다. 학습에 따라 앎을 얻는 학이지(學而知)’와 달리 이전 생에서 이미 닦은 것이 있기 때문에 태어날부터 앎을 구족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일반사람들과 다르다. 따라서 나이가 많건 어리건 머리 깍은 출가자에게 길가다 마주치면 반배의 예라도 올려야 한다.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뭇삶이다. 오염된 채로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았다면악처에 가게 될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Nimittassādagathita vā bhikkhave viññāa tiṭṭhamāna tiṭṭheyya anubyañjanassādagathita vā, tasmi ce samaye kāla kareyya, hānameta vijjati ya dvinna gatīna aññatara gati gaccheyya niraya vā tiracchānayoni vā. Ima khvāha bhikkhave ādīnava disvā eva vadāmi.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Ādittapariyāyasutta-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235, 전재성님역)

 

 

참으로 무시무시한 이야기이다. 꽃을 따는데 정신이 팔리듯이, 오욕락의 추구에 마음을 빼앗긴 상태에서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되면 어떻게 될까? 또 잔뜩 화가 난 상태에서 갑자기 쓰러져 죽음을 맞으면 어떻게 될까?

 

인상(nimitta: 總象)과 속성(anubyañjana: 細象)

 

경에서 인상(nimitta)’이라고 한 것은 총체적으로 파악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총상(總象)’이라고도 한다. 여자를 보았을 때 여자다남자를 보았을 때 남자다하는 것을 말한다. ‘속성(anubyañjana)’이라는 말은 부분적으로 파악되는 것을 말한다. 여자를 보았을 때 눈, ,   등 세세하게 파악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세상(細象)’이라고도 한다. 감각기관을 단속 하지 못하여 사물의 인상과 표상의 유혹에 사로 잡혔을 때 마음을 빼앗긴 것과 다름 없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며 탐욕의 절정에서 순간적으로 죽음을 맞이 하였다면 아마 축생으로 태어나기 쉬울 것이다. 세상도표에 따르면 축생으로 형성될 조건을 보면 우치(愚癡)탐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냄의 절정에서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는 아수라에 태어나기 쉬울 것이다. 지옥의 경우 형성조건은 잔인, 살해이다. 누군가를 살해하여 그 인상(nimitta, 표상)’이 항상 남아 있을 때 순간적으로 죽은 다면 지옥에 화생할 것이다.

 

경에 따르면 그 순간에 죽는다면(tasmi ce samaye kāla kareyya)”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임종순간을 말한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임종순간에는 업과 업의 표상과 태어날 곳의 표상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의 마음(재생연결식)이 일어날 것이다.

 

알아차림을 유지 하지 못하였을 때 인상이나 속성에 마음이 사로 잡혀 있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niraya vā tiracchānayoni vā)”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순간순간 알아차림을 유지 할 수밖에 없다. 부처님이 왜 매순간 마다 알아차림을 놓치지 말라고 하였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것이다.

 

항상 청정한 마음을 내야 하는 이유

 

젊어서 출가하여 청정한 삶을 살아 갈 때 어느 순간 죽음이 덥쳤다면 선처에 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젊어서 출가한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다. 젊어서 마음껏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난 다음 나이 들어 출가할 수도 있지만 그 때 가 보아야 알 수 있다. 왜 그런가?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여기에서 항상 청정한 마음을 내는 수밖에 없다

 

 

Upanīyati jīvitamappamāyu

jarūpanītassa na santi tāā
Eta
bhaya marae pekkhamāno

lokāmisa pajahe santipekkhoti.

 

[세존]

“삶은 덧없고 목숨은 짧으니,

늙음을 피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쉴 곳이 없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 (S1:3)

 

 

Accenti kālā tarayanti rattiyo

vayoguā anupubba jahanti,
Eta
bhaya marae pekkhamāno

lokāmisa pajahe santipekkhoti.

 

[세존]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 (S1.4)

 

 

 

 

2014-12-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