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최진석교수의 노자강의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0. 14. 21:47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최진석교수의 노자강의

 

 

 

난세에 영웅난다는데

 

시대가 영웅을 만들어 낼까? 아니면 영웅이 시대를 만들어 낼까?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다. 전세계적으로 어느 나라이든지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영웅이 출현 하였다. 우리나라 같으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들 수 있다. 또 전국각지의 의병장들을 들 수 있다. 각 나라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영웅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평화의 시대라면 평범한 삶을 살아 갔을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은 맞다.

 

난세가 아닌 평화의 시대의 영웅은 누구일까? 아마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 어느 나라이든지 문화가 꽃을 피울 때 학문, 예술, 종교 등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영웅이라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율곡 이이, 퇴계 이황을 들 수 있다. 이외 수 많은 문화예술인이 있다. 외국도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난세의 영웅의 특징은 무엇일까? 대부분 무력과 관련이 있다. 무장출신이 영웅이 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난세의 영웅은 대부분 젊다. 하지만 평화의 시대 영웅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난세의 영웅과 평화의 시대 영웅은 다르다.

 

인문학의 시대에

 

지금은 평화의 시대이다. 전쟁이 난지 60년이 지났으므로 지금까지 평화의 시대가 계속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평화의 시대에는 인문학이 크게 발달한다. 특히 정보통신이 발달한 요즘 인문학 강사들도 일종의 영웅의 범주에 들어 갈 수 있을까?

 

인문학의 영웅으로서 도올 김용옥님을 들 수 있다. TV를 통해서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김용옥님은 노자강의로도 매우 유명하다.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2000년이 시작 되었을 때 EBS를 통하여 방영된 노자강의를 기억할 것이다.

 

김용옥님은 때로는 육두문자를 써 가며, 때로는 분필을 집어 던지는 등 과격행위를 하며 격정적 어조로 강의하였다. 이런 강의 스타일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그래서 어떤 이는 열렬하게 좋아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지독히도 혐오한다. 그럼에도 종종 TV에서 보는 김용옥님의 강좌는 들을 만하다.

 

최진석 교수의 노자 강의

 

노자 하면 김용옥님을 연상한다. 그러나 새로운 적수가 생겼다. 요즘 EBS에서 인문학강의를 하는 최진석교수가 바로 그 분이다. 그런 최진석 교수의 노자 강의를 심야시간에 들었다.

 

 

 

 

최진석교수의 강의 스타일은 김용옥교수와 딴판이다. 김용옥교수가 다혈질로서 격정적 강의 스타일이라면, 최진석교수는 부드러우면서 차분한 스타일이다. 그러나 노자라는 텍스트를 놓고 보았을 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강의 스타일은 확연하게 차이가 나지만 본질에 대한 이야기는 변함이 없다.

 

다시듣기 서비스를 이용하여

 

최진석 교수는 서강대 교수로 재직 중에 있다. 현재 EBS에서 인문학특강으로서 노자강의를 하고 있다. 이번에 본 것은 11강이다. 심야시간에 편안한 마음으로 보았는데 눈길을 끄는 대목이 몇 가지 있었다. 그래서 스마트 폰에 메모해 두었다. 그리고 다시듣기 서비스를 이용하여 다시 보았다.

 

방송에서 놓친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다시 들을 수 있는 것은 정보통신이 발달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시청하려면 정보이용료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듣고 싶은 것을 다시듣기로 들었을 때 아깝지 않다.

 

최진석 교수의 노자 11강에서 인상 깊었던 이야기가 있다. 많은 이야기 중에 통치자에 대한 이야기, 도에 대한 이야기, 무위에 대한 이야기 이렇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최고의 리더십은?

 

최진석교수의 강의 중에서 첫 번째로 기억하고 싶은 내용은 통치자에 대한 이야기다. 요즘 한국상황을 잘 반영하는 것 같은 이야기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통치스타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 먼저 최고의 지도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통치자중에 최고수준의 통치자의 레벨은 태상하지유지(太上下知有之), 아래에서 볼 때는 있다는 것만 알아. ‘아 통치자가 있었지라고 이정도만 아는 단계가 최고 통치자의 단계입니다.

 

(최진석 교수의 '현대철학자, 노자' 11, EBS)

 

 

최진석 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최고통치자는 있는 듯 없는 듯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노자에 있는 문구를 설명한 것이다. 노자의 태상하지유지(太上下知有之)’라는 문구를 말한다.

 

태상하지우지(太上下知有之)의 구체적인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있다는 존재만 느끼게 해도 리더십이 발휘되는 최고 지도자를 뜻한다. 과연 이런 지도자를 우리는 가져 본 적이 있을까?

 

한국 근현대사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없는 듯 있는 듯,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지도자를 아직 까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그러나 거기에 근접한 지도자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이다. 인권을 우선시 하는 통치자가 이에 해당 될 것이다.

 

찬미하는 지도자

 

있는 듯 없는 듯존재감이 없는 통치자가 최고의 통치자라 하였다. 이런 통치자를 갖는 것은 행운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런 통치자를 보지 못하였다. 그 다음은 어떤 통치자가 있을까? 이에 대하여 최진석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차친이예지(其次親而譽之), 굉장히 좋게 생각하고 떠 받드는 단계, 이 단계가 노자가 볼 때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최진석 교수의 '현대철학자, 노자' 11, EBS)

 

 

두 번째 단계의 통치자는 친이예지(親而譽之)’라 한다. 자막으로 제공되는 문구를 보면 친밀함을 느끼고 그를 찬미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친절하여 칭찬받는 지도자를 말한다. 또는 과시형 지도자라 볼 수 있다. 각종 전쟁에서 승리하여 화려하게 개선하는 스타일의 지도자도 포함 될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인기 있는 지도자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두려움을 주는 독재자

 

노자가 말하는 세 번째 통치자 스타일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차외지(其次畏之), 두려워 하는 단계, 통치자가 무서운 단계, 이게 아마 독재 정도 될 거에요.

 

(최진석 교수의 '현대철학자, 노자' 11, EBS)

 

 

노자가 말하는 세 번째 통치자는 외지(畏之)’라 한다. 백성이 보기에 무서움과 두려움을 주는 통치자를 말한다. 이는 독재국가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3공과 유신의 박정희정권과 5공의 전두환 정권이 해당될 것이다.

 

가장 하치(下治)?

 

다음으로 네 번째 단계가 있다. 가장 하치에 해당된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제일 하치인데 기차모지(其次侮之), 아래에서 백성들이 통치자들을 놀려 먹어요. 무슨 통치자 시리즈 많죠? 아래에서 백성들이 통치자를 두려워 하는 단계를 넘어서 놀리는 단계가 되는 거에요.

 

(최진석 교수의 '현대철학자, 노자' 11, EBS)

 

 

통치에는 상치가 있고 하치가 있다고 한다. 상치는 통치자의 존재감이 없는 단계를 말한다. 그런데 하치는 백성들이 통치자를 비웃는 단계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앞에서는 두려워 말을 못하지만 뒤돌아서면 욕을 하는단계를 말한다. 그래서 통치자가 희화화 된다.

 

현재 한국은 어떤 통치자를 가지고 있을까? 네 가지 단계 중에 현재의 통치자는 어느 단계일까? 통치자가 국민을 믿지 않고 국민 또한 통치자를 믿지 않을 때  하치라 볼 수 있다. 이는 신뢰가 깨졌음을 말한다. 이렇게 신뢰가 깨졌을 때 통치자는 희화화 된다. 그래서 갖가지 패러디가 속출하고 소문이 돌게 된다.

 

누군가 도를 이야기를 하면

 

최진석교수의 강의 중에서 두 번째로 기억하고 싶은 내용은 도()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는 노자의 도를 말하며 이른 다른 말로 무위의 도라 한다. 그런데 도를 대하는 데 있어 사람들의 태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누군가 도를 이야기를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떤 이는 놀고 있네!”라 할지 모른다. 도는 한가한 사람들이나 하는 쓸데 없는 짓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도를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노자는 도를 대하는 일반사람들의 태도에 대하여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최진식교수의 강의를 참고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구 분

 

키워드

상사문도 권이행지

(上士聞道 勤而行之)

가장 높은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그것을 성실하게 실천한다

실천

중사문도 약존약망

(中士聞道 若存若亡)

중간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한다.

반신반의

하사문도 대소지

(下士聞道 大笑之)

가장 낮은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듣고서도 그것을 크게 비웃어 버린다.

비웃음

 

 

 

첫 번째의 근이행지(勤而行之)’단계이다. 이는 믿고 묵묵히 따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 도를 들으면 근면하게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믿음과 관련이 있다. 도를 믿기 때문에 받아 들이고 따르고 실천하는 것이다.

 

두 번째 약존약망(若存若亡)’단계이다. 이런 단계에서 사람들은 말은 되는 것 같은데..” 라든가, “듣기는 참 좋은데..”와 같은 말을 한다. 이는 반신반의하는 것이다. 도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대소지(大笑之)’이다. 문자 그대로 크게 웃는 것을 말한다. 아주 낮은 단계의 학자가 도를 들으면 놀고 있네!”라며 비웃는 것을 말한다. 누군가 도를 말하면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라 하며 내치든가, “팔자가 좋아서 도 타령하고 있네!”라든가, “배고파 봐라 도 이야기가 나오는가라고 크게 비웃는 행위를 말한다. 도에 대한 믿음이 없는 단계를 말한다.

 

남한테 수행한다고 말하지 말라

 

수행처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남한테 수행한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수행한다고 떠 벌리고 다녔을 때 좋은 소리 못 듣기 때문이라 한다. 한마디로 본전도 못건진다는 말이다. 누군가 나 수행하고 있어라고 말했을 때 주변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어느 누구인가는 수행한다는 사람이 뭐그래?라든가, “수행한다며 언행도 일치안되네?라고 말할지 모른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비난하는 것이다. 수행한다고 떠 벌리고 다녔을 때 대게 비난받음을 말한다. 그래서 비난 받지 않는 도는 도가 아니다라 하였다. 그런데 이번 최진식교수의 강의를 듣고 바로 이 말이 노자에 문구에 실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터진 이야기

 

노자 텍스트를 보면 상사, 중사, 하사 이렇게 세 가지 스타일이 소개 되어 있다. 그런데 하사의 경우 비웃는다고 하였다. 누군가 도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을 때 놀고 있네라며 크게 비웃는 행위를 말한다. 이에 대한 노자텍스트를 보면 다음과 같다.

 

 

불소부족이위도(不笑 不足以爲道), 만약 하사가 비웃지 않는다면 도라고 하기에 부족하다.

 

(최진석 교수의 '현대철학자, 노자' 11, EBS)

 

 

이 부분에서 웃음이 터졌다. 좀 달리 표현하면 빵 터졌다라 할 것이다. 이렇게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도를 대하는 일반사람들의 태도를 잘 표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사가 도를 듣고 비웃지 않으면 도가 아니다라 하였다.

 

노자 도덕경에 없는 말을 한 최진석 교수

 

최진석교수의 강의 중에서 두 번째로 기억하고 싶은 내용은 무위(無爲)’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위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노자는 세계와 관계할 때 자기 내면의 가치를 최대한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유위와 반대 되는 말이다. 유위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세계와 관계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무위에 관하여 최진석교수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노자가 생각할 때, 물론 노자가 도덕경 안에서 이런 이야기 한적이 없습니다만, 노자가 생각하기에 이 세계를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보는 사람은 이 세계를 보여 지는 볼 수 있는 사람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거죠.

 

(최진석 교수의 '현대철학자, 노자' 11, EBS)

 

 

최진석교수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하였다. 보여지는 대로 보는 사람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을 이긴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하면서 노자 도덕경에 없는 말이라 한다.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의 경(M1)’에서

 

최진석교수의 노자 강의를 듣고서 최대의 수확을 올린 것이라면 보여 지는 대로라는 말이다. 이 말이 무위를 잘 설명하는 것이라 하는데, 사실 이 말은 불교의 경전에 이미 실려 있는 말이다.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의 경(M1)’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Diṭṭha diṭṭhato sañjānāti. Diṭṭha diṭṭhato saññatvā diṭṭha maññati. Diṭṭhasmi maññati. Diṭṭhato maññati. Diṭṭha me'ti maññati. Diṭṭha abhinandati. Ta kissa hetu? Apariññāta tassā'ti vadāmi.(17)

 

[세존]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보여진 것을 보여진 것으로 여기고 보여진 것을 보여진 것으로 여기고 나서, 보여진 것을 생각하고 보여진 것 가운데 생각하고 보여진 것으로부터 생각하며 ‘보여진 것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보여진 것에 대하여 즐거워 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나는 말한다.”

 

(Mūlapariyāyasutta-근본법문의 경, 맛지마니까야 M1, 전재성님역)

 

 

노자를 춘추시대의 사상가라 한다. BC 6세기에 활약한 제자백가 가운데 하나인 도가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신원이나 행적이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다.

 

최진석교수가 한 말은 이미 맛지마니까야에

 

노자 텍스트로 가장 오래 된 것이 죽간본으로서 전국시대(BC.403-BC.221)로 본다. 다음으로 전국시대말이나 한나라 초기의 백서본이 있다. 그리고 왕필본이 있는데 왕필(226-249)이 주석을 달아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텍스트에서도 무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보여지는 것이라는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최진식 교수는 도덕경 안에서 이런 이야기 한적이 없습니다만이라고 말한 다음에 보여지는 대로 보는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최진식 교수가 말하는 보여지는이라는 말이 위와 같이 빠알리 니까야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노자 보다 더 앞서 살았고, 또 구전으로 전승되어 온 초기경전에서 보여진 것을 보여진 것으로 여기고…”로 시작 되는 가르침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렇다면 최진식 교수는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에 실려 있는 내용을 알고 노자이야기를 한 것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노자의 무위와 불교의 무위

 

최진식 교수가 말한 노자의 무위에 대한 설명은 이미 불교경전에 실려 있다. 이로 보았을 때 노자와 불교는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불교가 중국에 전래 되었을 때 큰 저항이 없었을 것이라 본다.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노자라는 텍스트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노자의 방식으로 불경을 이해하려고 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노자의 무위로 이해 하였을 것이라 본다.

 

무위라는 말은 상윳따니까야에서 무위상윳따(S43)’라 하여 별도의 모음이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무위는 노자의 무위와 다른 것이다. 도가의 무위는 무위자연을 뜻하지만, 불교에서 무위 즉 아상카따(Asakhata)’의 뜻이다. 이는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다름아닌 열반을 뜻하는 다른 말이다.

 

열반은 조건지어진 모든 것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초기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위는 무엇을 말할까? 이는 수행승들이여, 무위란 무엇인가?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무위라 한다. (S43.1)”라 하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위는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 더 이상 조건 지어지지 않은 상태, 즉 열반을 무위라 하는 것이다. 이는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을 뜻하는 무위와 다른 것이다

 

보여진 것을 보여진 것으로 여기고(Diṭṭha diṭṭhato sañjānāti)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의 경(M1)’에서는 최진식 교수가 말한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다. 이에 대하여 교학만 배웠을 때, 물라빠리야야경(근본법문의 경, M1)(2012-12-0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보여진 것을 보여진 것으로 여기고(Diṭṭha diṭṭhato sañjānāti)이라는 말은 어떤 내용일까?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Diṭṭha diṭṭhato sañjānāti : Pps.I.37에 따르면, 보여진 것(Diṭṭha)은 신체적 시각(masacakkhu: 육안)과 정신적 시각(dibbacakkhu : 하늘 눈, 천안)으로 보여진 것 즉, 형상의 세계를 말한다.

 

(맛지마니까야 25번 각주, 전재성님)

 

 

경에서는 보여지는 것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귀로 들려 지는 것, 그리고 감각된 것, 인식된 것도 나온다. 이를 한자어로 견문각지(見聞覺知)’라 한다. 그래서 들려 지는 것은 신체적 청각과 정신적 청각으로 들려진 것, 즉 소리의 세계를 말한다. 또 감각된 것은 신체적 후각-미각-촉각에 의해서 감각된 냄새--감촉의 세계를 말한다. 그리고 인식된 것은 정신에 의해서 의식된 것, 즉 정신의 대상으로서 사실의 세계를 말한다. 이런 사실을 일반사람들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일반사람

 

일반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만일 누군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인식하고 싶은 것만 인식한다면 어떻게 될까? 각각 자신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삶의 방식을 살아 간다.

 

그러나 잘 배운 부처님의 제자는 보여진 것을 보여진 것으로 여긴다라 하였다. 이는 세상을 보는 태도가 다름을 말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들려진 것, 감각 된 것, 인식 된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인다. 그렇게 하였을 때 즐거움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감각대상의 즐거움에 빠진 자이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 역시 듣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런 갈애가 일어 났을 때 ‘희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래서 연기의 회전이 시작 된다.

 

우다나 바히야의 경(Ud1.10)’에서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의 경(M1)’에서는 보여진 것을 보여진 것으로 여기고라고 시작 되는 법문이 있다. 그런데 이런 류의 법문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보인다. 우다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Tasmātiha te Bāhiya, eva sikkhitabba:

 

“di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
sute sutamatta
bhavissati,
mute mutamatta
bhavissati,
viññ
āte viññātamatta bhavissatī-ti.

 

Eva hi te Bāhiya, sikkhitabba.

Yato kho te Bāhiya,

di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
sute sutamatta
bhavissati,
mute mutamatta
bhavissati,
viññ
āte viññātamatta bhavissati,

 

tato tva Bāhiya na tena, yato tva Bāhiya na tena, tato tva Bāhiya na tattha, yato tva Bāhiya na tattha, tato tva Bāhiya nevidha, na hura, na ubhayam-antare, 23 esevanto dukkhassā-ti.

 

 

[세존]

바히야여, 그렇다면,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다.

 

바히야여,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바히야여,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다. 바히야여, 그대가 그것과 함께 있지 않으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 속에 없다. 바히야여, 그대가 그 속에 없으므로 그대는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그 양자의 중간세상에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

 

(Bāhiyasutta-바히야의 경, 우다나 Ud1.10, 전재성님역)

 

 

성질 급한 바히야가 부처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탁발중의 부처님은 “바히야여, 지금은 알맞은 시간이 아니다. 나는 도시로 탁발하러 가는 길이다.( Ud1.10)”라고 말씀 하시면서 거절하였다. 그러나 세 번째로 머리를 조아리며 요청하자 부처님이 위와 같이 말씀 하신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말룽끼야뿟따경(S35.95)’에서

 

바히야의 경에 실려 있는 문구는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의 경(M1)’에 실려 있는 문구와 유사하다. 또 상윳따니까야 말룽끼야뿟따경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Ettha ca te mālukyaputta diṭṭhasutamutaviññātabbesu dhammesu di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 sute sutamatta bhavissati, mute mutamatta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 bhavissati.

 

Yato kho te mālukyaputta diṭṭhasutamutaviññātabbesu dhammesu di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 sute sutamatta bhavissati, mute mutamatta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 bhavissati. Tato tva mālukyaputta na tena, yato tva mālukaputta na tena, tato tva mālukyaputta na tattha, yato tva mālukyaputta na tattha, tato tva māluakyaputta nevidha na hura na ubhayamantarena esevanto dukkhassāti.

 

[세존]

말룽끼야뿟따여, 그대에게 보이고 들리고, 감각되고 인식된 것에 관하여 말한다면,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이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각된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된 것만이 있을 뿐이다.

 

말룽끼야뿟따여,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이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각된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된 것만이 있을 뿐이라면, 말룽끼야뿟따여, 그대는 그것에 의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는 그것 안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그것 안에 있지 않으면, 여기나 저기나 그 양자 사이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자체가 괴로움의 종식이다.”

 

(Mālukyaputtasutta-말룽끼야뿟따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95, 전재성님역)

 

 

보인 것’, 또는 보여지는 것이라는 말은 빠알리어로‘diṭṭha’이다. 이는과거분사형으로서 수동형이다. 이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시각의식이 일어남에 따라

 

수동형으로서 보인 것’, 또는 보여지는 것이라 하였을 때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Srp.II.383에 따르면, 시각의식에 보여진 형상 속에는 오로지 보여진 것만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각의식은 오로지 형상속에서 형상만을 보고 영원한 어떤 본질을 보는 것은 아니다. 다른 유형의 의식 가운데도 보여진 것만이 있을 뿐이다. 보여진 것 가운데 보여진 것이라고 불리어진 것은 형상을 형상속에서 인식하는 시각의식이다. 

 

‘뿐’이라는 말은 한계를 말한다. 단지 보여진 것 뿐이다. 마음의 속성으로 단지 보여진 것뿐이다. 그 의미는 나의 마음은 지금 단지 시각의식일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시각의식이 시야에 들어온 형상에 관한 탐욕이나 증오나 어리석음에 영향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래서 순간포착(자와나)은 탐욕 등이 없는 시각의식 뿐이고, 이 경계를 지나치지 않고 탐욕 등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4 184번 각주, 전재성님)

 

 

우리들이 매일 눈으로 보는 것은 보고 싶어서 보는 것 보다 보여지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눈이 떠 있는 한 시야에 들어 오는 것은 모두 대상이 된다. 이렇게 보여지는 것에 대하여 시각의식이 일어나는데 이런 시각의식은 아직 분별되지 않는다. 단지 시각의식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각의식이 일어남에 따라 좋고 싫음에 대하여 분별하게 된다. 이런 분별이 일어날 때 느낌이 일어나서 ‘갈애’나 ‘희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래서 연기의 회전이 시작 된다.

 

그렇다면 이를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번역에서는 ‘뿐’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신역에 따르면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 있을 뿐이며’라 수동태로 번역하였다. 수동태로 하여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더 이상 생각을 확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에 대하여 “보인 안에는 보인 것만 있을 뿐” 부처님 말씀에 언하대오(言下大悟)(2013-11-30)’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최진석교수가 강조한 사항은?

 

EBS인문학특강 최진식교수의 노자 11강에서 강조 된 것이 있다. 그것은 강의 시작에서 한번 언급되었고, 강의가 끝날 때 또 한번 강조된 문구이다. 특히 강의 말미에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대로 보는 사람을 항상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최진석교수는 이 세계가 대립면의 공존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하자고 하였다. 이렇게 인식하였을 때 특정한 이념이나 개념, 지식 등에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자발적 통찰력으로 세계와 관계함을 뜻한다.

 

통찰하는 자가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보는 사람이라 하였다. 그래서 보여지는 대로 보는 사람은 세계를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사람을 이길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자신이 만든 사념의 구조물에 갇혀

 

최진식 교수의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불교경전에 실려 있는 말이다.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의 경(M1)’, 우다나 바히야의 경(Ud1.10)’, 그리고 상윳따니까야 말룽끼야뿟따의 경(S35.95)’에서 유사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부처님은 보여지는 것 뿐만 아니라 들려지는 것, 감각 되는 것, 인식 되는 것 이렇게 네 가지로 설명하였다. 부처님이 이렇게 설명한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개념화 방지라 볼 수 있다.

 

만일 누군가 보고 싶은 대로 본다면 갈애를 야기할 것이다. 그런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유발하기도 하고 희론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특히 희론으로 발전 되었을 때 사념의 구조물을 만든다. 그래서 자신이 만든 사념의 구조물에 갇히고 만다.  이에 대하여 생각에 어떻게 실체성이 부여 되는가? 왜곡된 사유 만냐띠 6단계(2013-08-22)’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사념의 구조물은 개념화 된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주의 주장을 뜻하는 이념 또는 이데올로기라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누군가 보고 싶은 대로 보았을 때 그는 이념의 노예가 될 수 있다. 이를 부수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부처님은 보여진 것을 보여진 것으로 여기고(Diṭṭha diṭṭhato saññatvā, M1)”이라 하였고,  볼때는 보여질 뿐(di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 Ud1.10)이라 하였고,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di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 S35.95)라 하였다.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이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각된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된 것만이 있을 뿐이다. (S35.95)

 

 

2014-10-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