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해탈과 깨달음과 열반은 동시적, 즉각적 결과를 가져오는 무시간성(akalika)

담마다사 이병욱 2016. 9. 21. 10:13

 

해탈과 깨달음과 열반은 동시적, 즉각적 결과를 가져오는 무시간성(akalika)

 

 

 

 

 

 

 

매주 화요일 위빠사나수행처로 향합니다. 종로오피스텔에서 도이법사가 지도하는 모임입니다. 세 번째로 참석하기 위하여 종로3가역에서 내렸습니다. 저녁 7시에 모임이 시작 되기 때문에 안양에서는 5시에 떠나야 합니다. 도중에 식사도 해야 합니다. 가장 무난한 식사는 햄버거를 먹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저녁에는 자극적인 음식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햄버거집은 지하철1호선 1번 출구에 있습니다. 지난 번에도 간 적이 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늘 그렀듯이 주변에는 노인들이 많습니다. 아마 전철을 무료로 탑승할 수 있는 연령대인 것 같습니다. 인도 바닥에 주저 앉아 삼삼오오 모여 있는 노인들도 있고, 노인들을 대상으로 좌판을 벌려 놓고 소품을 파는 노인들도 있습니다.

 

종로3가는 노인천국입니다. 이는 종로2가가 젊은이들의 거리인 것과 매우 비교됩니다. 불과 길 하나 사이임에도 종로2가와 종로3가의 사람들을 보면 마치 다른 나라에 온 듯 합니다. 햄버거집도 노인들이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일층은 물론 이층까지 거의 대부분 나이 든 노인들이 차지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햄버거를 먹는 것도 아닙니다. 커피 한잔 시켜 놓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수행처로 가는 길은 마치 야시장 같은 분위기입니다. 이면도로에는 노점상이 즐비합니다. 시각과 청각, 후각 등을 자극하는 갖가지 먹거리들이 널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앉아 술을 마시는데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 마시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수행처에 도착했습니다. 모두 세 명이 참석했습니다. 첫 번째 모임에서는 열명 가량 되었으나 갈수록 줄어 드는 것 같습니다. 도이법사에 따르면 한명이 남더라도 지도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세 번째 모임에서는 경행을 지도 받았습니다. 모두 12단계의 경행방식이 있다고 하는데, 이날은 세 단계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경행은 문자적으로 말하면 가볍게 걷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면 경행명상이 됩니다. 그래서 영어로 ‘walking meditation’이라 합니다. 경행을 함으로 인하여 정신과 물질에 대한 지혜를 알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경행할 때 가장 먼저 왼발, 오른발하며 명칭을 부여 하는 것입니다. 왼발을 내 딛을 때 왼발이라 하고, 오른발을 내딛을 때 오른발이라 합니다. 두 번째로 들어서 놓음, 들어서 놓음라며 명칭을 부여하면서 발을 들었다가 놓는 두 단계 동작입니다. 발을 들었을 때 의도가 개입한 것이고 발을 놓을 때 역시 의도가 개입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 들어서 닿아서 놓음이라 하여 세 단계로 명칭을 부여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명칭을 부여 하여 경행하면 온통 발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은 시체와 다름 없습니다. 정신작용이 있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경행을 하다 보면 의도에 따라 발이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시체가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의도가 실려서 발을 들고 의도가 있어서 발을 닿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행은 우리 몸이 물질과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경행을 마치고 좌선을 했습니다. 40분 가량 했는데 자주 해 보지 않아서인지 불편했습니다. 평좌를 한 것이 원인인 것 같습니다. 방석 없이 바닥에 다리를 밀착시키는 평좌는 시간이 많이 흐르면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것 같습니다. 이럴 경우 오른쪽 다리 위에 왼다리를 올려 놓는 반가부좌가 나을 듯 합니다.

 

좌선할 때 배의 움직임을 보라고 했습니다. 배에서 일어나는 호흡에 대하여 일어남, 사라짐이라는 명칭을 부여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하시센터의 전통이라 합니다. 적어도 일년은 이런 방식으로 한다고 합니다. 코 끝에서 호흡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는 것입니다. 코끝에서 호흡을 보는 방식은 사마타이고 배에서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는 것은 위빠사나라 했습니다. 이렇게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는 것에 대하여 베이스켐프와 같다고 했습니다. 언제든지 되돌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려움이나 통증 등과 같은 강한 대상이 나타나면 그것을 알아차리면 사라집니다. 가려운 것이 가려운 줄 알면 신기하게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면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고 난 후 다시 베이스켐프격에 해당되는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으로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테라와다에서 하는 이야기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어느 스님, 어느 법사가 말하더라도 똑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는 교리와 수행법이 체계화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빠알리삼장이라는 공통된 텍스트가 있고 경전을 근거로한 수행법이 있어서 누가 말하더라도 매번 모두 똑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도이법사의 법문 역시 이전에 들었던 테라와다 스승들의 말과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수행처에서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내가 열반으로 인도한다.”라는 말입니다. 좌선할 때 가렵다고나 간지럽다거나 다리에 통증이 있어도 참고 견디어야 함을 말합니다. 이를 정진이라 합니다. 그런데 정진의 다른 말이 다름 아닌 인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가 열반으로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열반이라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러가지 열반에 대한 정의가 있을 수 있지만 수행처에서 하는 말은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입니다. 탐진치라 하지만 이는 14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부수들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들,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들,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들이 여럿 있는데 대표로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 합니다. 이런 마음이 소멸된 상태가 열반이라 합니다. 그런데 열반은 해탈과 깨달음과 동의어라 합니다. 그래서 해탈에서 열반까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가르침의 무시간성을 의미합니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일까요? 수행처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열반에 이르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탐진치라는 오염원을 소멸시켜야 합니다. 탐진치를 소멸한다는 것은 번뇌를 소멸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번뇌는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이는 삼사화합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M18) 라고 초기경전에서 설명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접촉으로부터 시작 됩니다. 지금 내돈 떼먹고 달아난 자나 결재를 안하고 버티는 자가 갑자기 생각난 것 역시 접촉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분노의 마음이 일어 났을 때 성냄이라는 오염원에 오염된 것입니다. 이것이 번뇌입니다. 이런 번뇌를 소멸시켜 나가는 과정이 수행입니다.

 

일어난 생각들은 대부분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입니다. 또한 대부분 과거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런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기 시작합니다. 사념의 구조물을 짓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생각의 기와집 짓는다고 말합니다. 생각속에서 벌어진 일들이 전개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를 망상이라 합니다. 경에서는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미래-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M18) 라 했습니다.  여기서 희론은 망상, 빠알리어로 빠빤짜(papanca)’라 합니다. 거대한 사념의 구조물이 형성되었을 때 이를 망상이라 하는데 여기에 탐진치로 오염되었을 때 이를 번뇌(kilesa)라 합니다.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염오, 이욕의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염오-이욕-해탈이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해탈 다음에 깨달음, 깨달음 다음에 열반 이런식으로 시간을 두고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탐진치가 소멸되어 번뇌에서 벗어났다면 바로 그 상태가 해탈이고 동시에 깨달음이고 열반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이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동시성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akāliko)”(S11.3) 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와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초불연에서는 아깔리까에 대하여 시간이 걸리지 않고라 했습니다. 이는 빠알리어 ‘akālika’라는 말이 시간을 뜻하는 ‘kālika’에 부정접두어 a가 붙어서 ‘akālika’ 가 됨으로써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라는 뜻이됩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즉각적으로 효과를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해탈한 다음 몇 년 후에 열반이 아니라 해탈과 동시에 열반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정한 삼매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삼매입니다. (suci  Samādhi mānantarikaññamāhu, Sn2.1)” 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탐진치로 오염된 번뇌가 소멸되면 해탈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은 시간이 걸리지 않기 때문에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결과에 대한 무시간성입니다.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흐르는 시간개념이 아니라 사건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번뇌가 소멸되자 마자 해탈이고 열반인 것에 대하여 호진스님의 글로서도 알 수 있습니다. 호진스님은 자신의 저서에서 “시간이란 그 자체로서는 없고, 연속이 다소간 잘 조절된 연속적인 업들과 불연속적인 업들이다” (윤호진, 무아윤회문제연구 214P, 민족사) 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사건으로 파악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이는 빨래줄처럼 선형적으로 흐르는 시간에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으로 파악했을 때 무시간성을 말합니다. 지금 순간적으로 일어난 생각이 망상으로 발전되지 않고 욕망과 분노에 물들지 않았을 때, 번뇌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 그 상태가 해탈이고 깨달음이고 동시에 열반이라는 말입니다.

 

 

2016-09-2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