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과 함께

담마다사 이병욱 2016. 10. 7. 12:25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과 함께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최근 다섯 차례 수행모임이 그렇다. 지난 9월부터 매주 두 곳의 수행처에 다니고 있다. 화요일에 열리는 도이법사의 위빠사나와 목요일에 열리는 오진법사의 선수행이 그것이다. 서로 불교전통도 다르고 수행방법도 다른 두 곳에 다니는 이유는 좀 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개인교습을 받는 듯

 

위빠사나수행은 지난 2009년 당시 한국명상원에서 접한바 있다. 그러나 수동적이었다. 묘원법사의 법문을 접하고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이 말씀 하신 불교라는 것을 알았다. 법문이 끝나고 경행과 좌선이 있었고 반드시 인터뷰 시간이 있었다. 열과 성을 다하여 지도하는 법사의 모습에서 한국불교 선승도 이렇게 까지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날 정도였다. 그 때 당시 교재는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paticcasamupada)’이었다. 경전과 주석서에 근거한 체계적인 법문집을 접하자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매료 되었다.

 

한국명상원에 다닌 것이 초기불교와 위빠사나 수행과의 인연이다. 이런 인연이 있어서일까 최근 도이법사로부터 수행지도를 받고 있다. 그러나 수행처에는 단 두 명만 나온다. 법사와 두 명의 수행자 합해서 세 명이다. 미디어붓다에서 운영하는 미붓아카데미’에서이다. 처음 열 명이서 시작 했으나 남은 것은 두 명 뿐이다. 그럼에도 도이법사는 열과 성을 다해 지도 해 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마치 개인교습을 받는 것 같다.

 

비록 두 명에 지나지 않지만 도이법사는 10, 100명에게 강연하듯이 똑같이 알려 준다. 그렇다고 똑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매회 나갈 때 마다 내용이 다르다. 교재는 마하시명상센터의 담마담론(Dhamma Discourses)’이다. 저자는 아신 자띨라 사야도가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영어와 우리말 해석으로 되어 있다. 초기경전에 근거한 위빠사나 실참수행지침서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책 보다는 법사의 요약된 설명이 훨씬 더 낫다.

 

니밋따(nimitta)를 보자는 것이 아니라

 

도이법사가 말한 것을 짤막하게 노트하고 있다. 그렇다고 다 받아 적을 수 없다. 가장 인상적인 말 몇 개를 기억하기 위해 적어 놓는다. 매회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는데 들을 때 마다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법사에 따르면 지식은 저수지와 같고, 지혜는 옹달샘과 같다.’고도 했다. 저수지의 물은 모아 놓는 기능이 있지만 옹달샘은 끊임 없이 물이 솟아오르는 것이 다르다고 했다. 여기서 솟아 오르는 물은 지혜를 상징하는데 그런 지혜는 사띠로 계발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위빠사나 수행은 한마디로 알아차리는 수행이다. 경행을 해도 알아차려야 하고 좌선을 해도 알아차려야 한다. 알아차림이라 말하는 것은 사띠를 말한다. 한 순간도 사띠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경행을 할 때 발을 들어 놓는 순간 까지 최대 여섯 단계가 있다. 한발 한발 옮기는데 의도와 행위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렇게 알아차리며 가다 보면 밤에 화장실 가는데 수 분 걸릴지 모른다.

 

좌선할 때 배의 호흡을 보라고 했다. 마하시방식은 배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는것이다. 코에 집중하여 니밋따를 보자는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자는 것이다. 다리가 아프면 아픈 것에 대하여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신념처라 한다. 다리가 아플 때 괴로움을 느끼는데 이를 알아차리는 것이 수념처라 한다.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괴로운 느낌이라고 아는 마음을 심념처라 한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여 무상, , 무아를 통찰하는 것이 위빠사나이다. 니밋따를 보자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매 순간 관찰 하는 것이 신, , , 법이라는 사념처 수행이다.

 

사띠(Sati) 그림문자

 

위빠사나 수행에서 알아차림이라는 말은 보편적 용어이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법문은 사띠(Sati), 즉 알아차림 한단어로 요약된다고 한다. 그런 사띠에 대하여 도이법사는 그림으로 만들었다.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sati’라는 말을 그림글자로 하여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를 부채에 그렸는데 카톡으로 보내 주었다.

 

 

 

 

 

 

 

부채의 그림을 보면 영어로 ‘Sati’가 형상화 되어 있다. 뱀의 구멍을 지켜 보고 있는 듯한 S자 모양이 있다. 뽀띨라 장로가 사띠 수행으로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교학의 대가인 뽀띨라 장로는 아라한이 못되었다. 그것은 아만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곱 살 먹은 아라한에게 굴욕을 감수 하며 배운 것이 사띠로써 육문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도이법사는 뽀띨라장로의 이야기에 모티브를 얻어 그림문자를 만든 것이다. , , , , 신 이라는 다섯 가지 뱀구멍을 막아 놓고 의문이라는 오로지 하나의 구멍만 지켜 보고 있는 것이 s자이다. 영어 a는 귀를 형상화 한 것이고, t는 코와 입를 형상화 한 것이고, i는 몸을 형상화 한 것이다. 부채의 설명문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Sati(사띠-알아차림)

 

이는 선한행위이며

계율을 지키는 일이며

편안과 고요함을 얻어

청정을 키워가며

지혜의 옹달샘이 생겨

사악도에 태어남을 막아

불사의 문에 이르러

지고한 행복의 열차를 얻는 일이다.

 

 

시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도이법사가 그림문자와 함께 지은 것이다. 시를 보면 사띠의 장점이 나열 되어 있다. 사띠는 기본적으로 선한 행위라는 것이다. 이는 사띠가 선한 마음부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감각의 문을 지킨다는 것은 계행을 지킨다는 말과 같기 때문에 사띠를 유지하고 있으면 계행은 자동적으로 지켜지는 것이다. 이렇게 늘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악처에 떨어지지 않고 불사에 이르는 열차를 타는 것과 같다고 했다.

 

몸풀기 동작

 

일주일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수행전통을 접하고 있다. 목요일에는 무상사 서울분원에 간다. 이번 주의 경우 여섯 명이 참석 했다. 두 분 법사 중에 일화법사가 무상사 조실 대봉스님과 함께 말레이시아 선수행모임에 참가하게 됨에 따라 오진법사가 지도 했다. 지난주에는 15명이 모였다. 공안인터뷰가 있는 날에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오집법사가 여섯 명을 직접 지도 했다. 먼저 몸을 푸는 체조부터 했다. 일종의 스트레칭이라 볼 수 있다. 일어서서 단전에 집중하며 합장자세를 취한다. 팔동작을 여러 크게 하게 큰 호흡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것이다. 합장한 손을 천천히 머리 위로 치켜 올리고 이어서 양팔을 벌린다면 다시 합장자세로 돌아 오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다. 좌선 하기 전에 몸을 푸는 방식중의 하나라고 본다.

 

스트레칭이 끝나면 포행이 시작된다. 빠른 걸음걸이를 말한다. 위빠사나에서는 경행이라 하지만 알아차리며 걷는 것은 아니다. 앞사람과 두 발걸음 정도 유지하며 빠르게 걷기 때문에 포행 역시 몸풀기 동작이라 볼 수 있다. 보통  십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위빠사나에서는 경행이라 하여 한시간동안 알아차리며 천천히 걷는 것과 대조적이다.

 

앉아 있다 보면

 

무상사에서는 40분 좌선을 기본으로 한다. 그 이상 하면 신체에 무리가 생긴다고 보는 것 같다. 그래서 40분 좌선하고 10분포행하는 식이다. 이는 위빠사나에서 1시간 좌선하고 1시간 경행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선수행에서 좌선을 더 중요시하는 것이다.

 

좌선을 한다고 해서 집중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그날 그날 컨디션에 따라 다르고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다르다. 더구나 일주일 한번 하는 것이라 실패하기 쉽다. 제대로 좌선을 하려면 최소한 두 타임 정도는 가져야 한다. 집중수행한다면 여러 타임 갖기 때문에 그 중에 성공가능성은 매우 높다.

 

앉아 있으면 생각이 불쑥불쑥 일어난다. 그 생각에 끄달려 가면 망상이 된다. 그때 생각의 무게를 느낀다. 생각으로 기와집을 짓는다는 것이 마음의 부담으로 작용하요 무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이럴 경우 망상이 일어났네라고 알아차리면 그뿐이다.

 

무엇이든지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모르기 때문에 두렵고 답답한 것이다. 알고 나면 마치 컴컴한 방에 전구를 켜는 것과 같다. 방에 불을 켜면 일시에 어둠이 사라지듯이, 알고 나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좌선한다고 앉아 있을 때 오만가지 생각이 일어나지만 알면 사라진다.

 

마음이 마음을 아는 것이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만 일어난다. 대상을 접하였을 때 두 개의 마음이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 갑자기 생각이 치고 올라 왔을 때 그 생각을 아는 마음은 뒤의 마음이다. 뒤의 마음이 알았을 때 앞의 마음은 이전마음이 되어 버린다. 알아차리면 생각이 망상으로 전개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앉아 있다 보면 갑자기 생각이 치고 들어온다. 이때 재빨리 호흡으로 돌아 가는 것이다. 호흡은 늘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베이스캠프와 같다. 이런 호흡에 대하여 플럼빌리지의 공동창업자 찬콩스님은 피난처와 같다고 했다. 눈을 감고 오감을 차단하며 오로지 의문 하나만 열어 놓았을 때 마음이 마음을 볼 수 있다. 마음을 어디에든지 가져다 붙일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어디다 붙이느냐에 따라 마음을 마음으로써 제어 할 수 있다.

 

스님들의 범계행위에 대하여

 

좌선이 끝나고 오진법사의 법문이 있었다. 영어로 하는 법문이다. 이날 통역을 담당하는 일화법사가 외국에 출장 갔기 때문에 오진법사가 직접 인터뷰를 진행했다. 궁금한 사항에 대하여 무엇이든지 물어 보라고 했다. 그러자 K법우님이 수행과는 관련 없는 질문을 했다. 그것은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한 것이다. 요즘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에서 스님들의 범계행위로 인하여 추락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이에 오진 법사는 매우 길게 설명했다. 통역은 질문한 K법우님이 담당했다. 한때 독일에서 유학한 바 있는 법우님은 지난해 같은 재가단체모임에서 함께 활동했었다. 이번 무상사 모임에 초대한 이도 K법우님이다.

 

오진법사는 범계를 저지른 스님들에게 절하라고 했다. 매우 파격적인 말이다. 범계승에 대하여 대부분인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이 보통이디. 그런데 절을 하라고 한다. 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범계를 저지른 스님에게 절을 하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하나는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부끄러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적극적으로 감추려 하는 것이라 했다. 예를 갖추어 합장할 때 양심있는 스님이라면 내가 절을 받을 자격이 있나?”라며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 보며 초심으로 돌아 갈 수 있음을 말한다.

 

화두를 하나 주었는데

 

오진법사는 스님들의 계행과 관련하여 일본의 예를 알려 주었다. 오진법사에 따르면 20세기 초 일본불교에서는 승려들이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고 한다. 머리는 삭발했지만 그때 당시 일반사람들이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던 것처럼 스님들도 수염을 길렀다는 것이다. 더구나 고기를 먹는 등 계행을 어기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이에 일반사람들이 분개하여 수염을 자를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혀 먹혀 들어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산에서 수행만 하던 청정한 고승이 스님들을 모아 놓고 수염깍을 것을 이야기 했다고 한다. 이에 모든 스님들이 그 말 한마디에 모두 수염을 깍았다고 한다. 일반사람들이 이야기할 때는 들은체만체 했지만 청정한 고승의 한마디에 모드 계행을 지켰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오진법사는 이를 화두 삼아 생각해 보라고 했다.

 

열린선원 시간표를 보니

 

무상사 서울분원은 별도의 수행공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빌려 쓰고 있는 것이다. 매주 목요일 저녁 시간은 무상사 서울분원만이 쓸 수 있도록 예약되어 있다. 문입구에 써진 팻말을 보니 열린선원이라 되어 있다. 해인사를 연고로 하는 일종의 수행처라 볼 수 있다. 출입문에 붙어 있는 시간표를 보니 어떤 열린선원이 어떤 용도로 활용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시간표에는 위빠사나와 선수행, 그리고 각종 강좌가 매일, 그것도 시간대를 달리 하여 열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상사 서울분원에 할당된 시간은 목요일 저녁 7시 부터이다. 지도법사는 안제이 스텟즈와 일화지도법사라 되어 있다. 안제이 스텟즈는 폴란드 출신 오진법사를 말한다. 일화법사는 여성으로서 한국인 지도법사이다.

 

법회안내표를 보면 김열권법사의 시간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위빠사나 1세대로 잘 알려진 김열권 법사가 지도하는 시간은 월요일, 화요일, 토요일 삼일에 걸쳐 있다. 이제열법사의 법림법회도 이곳에서 열린다. 지안스님의 법화경 강좌도 있고, 원순스님의 치문과 참선 강좌도 보인다. 한 공간에서 다양한 전통의 불교수행과 다양한 전통의 강연과 다양한 법회가 하루도 빠짐 없이. 그것도 오전과 오후와 저녁으로 나뉘어 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열린선원이라 했나보다.

 

현각스님의 페이스북 글에 대하여

 

수행모임은 9시에 끝났다. 오늘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커피를 사고 싶었다. 두산위브빌딩 1층에는 커피점이 여러 곳이 있는데 그 중에 자주 가는 집이 있다. 그곳에 오진법사를 포함하여 모두 7명이 모였다. 주로 오집법사가 이야기하고 궁금한 것을 물어 보는 형식의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영어가 짧아서 잘 알아 듣지 못했다. 대부분 영어가 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이라 대충 알아 듣는 것 같다. 통역은 K법우님이 했다. 이제 지천명에 이른 법우님으로 외국에서 유학한 바 있고 더구나 무상사에 수 년 동안 수행한 바 있다. 나머지 법우님들은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이다. 

 

커피를 앞에 두고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오진법사에게 몇 가지 물어 보았다. 먼저 현각스님의 페이스북 글에 대한 것이다. 불과 두 세달 전 현각스님의 페이스북 글로 인하여 한국불교계가 발칵 뒤집힌 바 있다. 이에 대하여 현각스님을 옹호하고 현각스님을 비난한 자현스님을 비판한 글을 교계신문에 기고한 바 있다.

 

현각스님의 글에 따르면 어느 불자가 한국불교는 죽었다고 말하자 현각스님은 한국불교는 죽지 않았다. 무상사에 가면 한국불교가 살아 있다.”라는 취지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오진법사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이에 오진법사는 현각스님의 글에 대하여 ‘bad’라는 표현을 했다. 한국불교가 망했다는 네티즌의 글에 동조한 것에 대하여 잘못된 것이라 했다. 그래서 현각스님이 한국불교에 사과의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오진법사의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현각스님의 말에 동조하여 한국불교에 문제가 있고 무상사만이 한국불교의 맥을 이어 가고 있다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은 전혀 빗나갔다. 오히려 한국불교의 치부를 들추어낸 현각스님의 페이스북 글에 문제가 있고 더구나 사과까지 해야 한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 그렇다면 오진법사는 왜 이런 식으로 이야기 했을까? 이는 인터뷰시간에 일본불교이야기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불교가 타락했을 때 청정한 고승 한사람으로 인하여 맑아졌다고 했다. 일반인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먹히지 않았는데 한사람의 도인의 출현으로 인하여 청정해진 것을 화두로 삼아 생각해 보라고 했다. 또한 계행을 지키지 않는 스님에 대하여 오히려 예를 갖추어 합장하며 절하라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현각스님의 페이스북 글은 오진법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려 깊지 못한 행위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현각스님의 글은 페이스북에서 지워졌다. 이후 자신의 글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한 별도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까르마(karma)때문에

 

오진법사와 한시간 동안 커피타임을 가지면서 이것 저것 물어 보았다. 한국불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현각스님에 대하여 물어 보자 자신이 문을 열어 준 사람이라 했다. 숭산스님이 1981년 폴란드를 방문 했을 때 법문에 감화를 받아 제자가 되었는데 이후 미국 거주식 선원에서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누군가 문을 노크 하길레 문을 열어 주었더니 오늘날 한국불자들이 잘 알고 있는 현각스님이었다고 한다. 현각스님 보다 먼저 숭산스님의 제자로 입문한 것이다.

 

오진법사에게 계속 물어 보았다. 그것은 출가에 대한 것이다. 왜 출가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물어 본 것이다. 법사에 따르면 출가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단기간에 그쳤다고 한다. 젊은 시절 화계사에서 수 년간 짧게 살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환속했을까? 물어 보니 까르마(karma)’라고 짧게 대답했다. 스님으로 살기에 까르마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것 저것 물어 보았는데

 

남방불교에서는 빅쿠로 살더라도 계를 지키기 힘들 때 계를 반납하고 재가불자의 삶을 산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시 출가할 수도 있다. 오진법사에 따르면 무상사에서도 출가와 재가로 번갈아 사는 것은 자유롭다고 했다. 단지 계만 지키면 출가자로 살 수 있는 것이다. 계를 지킬 자신이 없을 때는 재가의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이는 한국불교와 대조된다.

 

한국불교에서는 한번 스님이면 영원한 스님이다. 또 환속하면 다시는 스님 되기가 힘들다. 그래서일까 계를 어기고 사는 스님들이 많은 것 같다. 쌍둥이 아빠로 회자되고 있는 용주사 사태가 대표적이다. 이외 음주승, 도박승, 음행승, 폭력승 등이 있다. 계를 지키기 힘들면 반납하고 재가불자로서 살면 될 텐데 계행을 어기면서 스님으로 사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이런 스님들에게 절하라고 한다. 절 받기가 부끄러운 줄 알라고 하는 것이다.

 

숭산스쿨의 특징은 거주식 선원(Residential Zen Center)’에 대해서도 물어 보았다. 숭산스님이 미국에서 포교할 때 아이비리그의 대학생들을 한 집에 모여 살게 하였는데 이것이 숭산스클의 거주식 선원의 시초이다. 오진법사나 현각스님 등이 모두 거주식 선원 출신이다. 그렇다면 거주식 선원은 오늘날 몇 군데나 될까?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전세계의 대부분 선원이 비거주식 선원이라 한다. 건물을 임대하여 아침에 문을 열어 저녁에 문을 닫는 형식의 선원을 말한다. 전세계에 약 100곳 가량 된다고 한다. 아프리카의 경우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유일하게 하나 있고, 남아메리카의 경우 전무하다고 한다. 대부분 미국과 유럽에 숭산스쿨이 몰려 있다고 했다. 아시아에도 일본, 홍콩, 말레이시아 등에도 숭산스쿨이 있다고 했다. 오진법사에 따르면 올해 3월 한국에 들어 오기전 6년 동안 홍콩 관음스쿨에서 지도법사로 있었다고 한다.

 

음악씨디를 선물하고

 

한시간동 커피타임을 가지면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영어가 짧아 잘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주변에 있는 법우님들의 도움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자주 듣다 보니 단어만 들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에 대하여 감으로 알 수 있었다.

 

커피모임에 참가한 법우님들에게 커피대접과 함께 선물을 주었다. 그것은 이미우이 불교음악 씨디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선물을 주고 있다. 오진법사에게 주었더니 옴마니반메훔이나 옴따레뚜따레등 곡명을 알아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우이의 가장 유명한 곡 자비송도 알고 있다고 했다.

 

 

 

 

 

 

 

무상사 서울분원은 올해 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직까지 별도의 홈페이지는 없지만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다만 서울분원을 알리는 페이스북은 있다. 페이스북 주소는  https://www.facebook.com/kwanumseoul이다. 페이스북을 하지 않아 익숙하지 않지만 페이스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과

 

매주 두 번 열리는 수행모임에 참여 하고 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수행모임은 청정하다는 것이다. 수행모임에 참여하면 청정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수행하는 것 자체가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청정한 분위기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경행 또는 포행을 하고 좌선을 하는 것은 청정한 행위이다. 무엇보다 수행자를 만나 가르침을 듣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즐거움이다. 또한 도반들과 함께 담마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과의 모임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다.

 

 

인내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stn266)

 

 

2016-10-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