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가족제도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최상의 효도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6. 10. 12. 12:22

 

 

가족제도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최상의 효도에 대하여

 

 

사람들은 강연이나 법문을 들을 때 귀담아 들을까? 아마 대부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버릴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별도로 메모를 해 놓지 않는 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만일 공부하는 학생이 선생님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시간만 때운다면 어떻게 될까? 학습효과도 거의 없을뿐더러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왜 새겨들어야 하는가?

 

부처님은 법문할 때 새겨 들으라고 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모든 사실의 뿌리가 되는 법문을 설할 것이다. 듣고 잘 새겨라. 내가 설명할 것이다.(Sabbadhammamūlapariyāya vo bhikkhave desessāmi2. Ta suātha. Sādhuka manasi karotha. Bhāsissāmī'ti)” 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새겨듣다는 말은 ‘manasi karotha’이다. ‘주의 기울여 들으라는 이야기이다. 초불연에서는 듣고 마음에 새겨라.”라고 번역했다. ‘새기다라는 말을 써서 성전협번역과 일치한다.

 

부처님 당시에는 필기구가 없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시면 잘 귀담아 듣고 기억해야만 했다. 마치 뼈에 새기듯이 가르침을 기억하고자 애썼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기억할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다.

 

 

Saddho ca puṇṇiya bhikkhu hoti upasakamitā ca payirupāsitā ca paripucchitā ca ohitasoto ca no ca sutvā dhamma dhāreti. Neva tāva tathāgata dhammadesana paibhāti.

 

뿐니야여, 수행승이 믿음을 갖추었고, 찾아와서, 가까이 앉아, 질문하고,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더라도,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 때 까지 여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가르침을 받아 들일 자세가 준비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 법을 설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믿음을 내야 한다. 그 다음 찾아 와서 물어 보라고 했다. 물은 것에 대하여 가르침을 설했을 때 귀담아 들으라 (ohitasoto)' 고 했다. 이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귀담아 들은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법을 설하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기억이라는 빠알리어는 ‘dhāreti’이다. 빠알리어 ‘dharati’保持, 持續, 存續의 뜻으로 기억하다의 뜻으로 번역됐다. 초불연에서는 호지하지 않으면이라 하여 ‘dharati’에 대하여 호지하다라는 뜻으로 번역했다.

 

여법하게 실천해야

 

기억한 것을 기억한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기억한 것을 숙고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지 않는다면, 그 때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 (A8.82)라 했다. 탐구로서 끝나는 것일까? 부처님은 실천을 강조했다.

 

실천까지 단계는 어떤 것일까? 경에 따르면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고, 가르침을 기억하고,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고, 의미를 알고 원리를 알아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한다면, (ohitasoto ca dhamma suāti, sutvā ca dhamma dhāreti, dhatānañca dhammāna attha upaparikkhati, no ca atthamaññāya dhammamaññāya dhammānudhammapaipanno hoti)” (A8.82) 라 되어 있다. 부처님은 실천을 강조했다. 그것도 법답게, 여법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한다(dhammānudhammapaipanno)’라 한 것이다.

 

같은 빠알리 구문에 대하여 초불연의 번역은 약간 다르다. 초불연에서는 귀 기울여 법을 듣고, 들은 뒤 법을 호지하고, 호지한 법들의 의미를 숙고하고, 주석서를 이해하고 삼장을 이해하여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지 않으면” (A8.82) 이라 했다. 초불연 번역을 보면 번역어에 주석서’‘삼장’‘출세간이라는 말이 들어가있다. 그러나 빠알리 원문에는 주석서와 삼장, 출세간을 뜻하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지나친 의역이고 주석적 번역이라 볼 수 있다.

 

도이법사 법문에서

 

들은 것은 기억하려고 애써야 한다. 기억한 것은 사유해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실천해야 한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도이법사의 법문이다. 화요일 저녁 도이법사의 위빠사나수행에서 들은 것이 하나 있다. 도이법사가 프린트한 것에 쓰여져 있는데 마음의 작용에 대한 것이다.

 

마음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선심, 불선심, 작용심, 그리고 무인작용심이다. 이 네 가지 마음 중에서 선심에 대한 것을 보면 보시+지계+수행(최고의 선)”이라고 써 놓았다. 불선심은 보시+지계+수행이 없는 것이라 했다. 과보심은 선과보심과 불선과보심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무인작용심은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라 하여 보통 아라한의 마음이라 한다.

 

 

 

 

 

 

 

보시하는 마음은 아름답다. 그리고 큰 과보를 받는다. 그런데 보시 보다 지계하는 것이 더 수승하다는 것이다. 보시를 백배의 과보로 본다면, 지계는 천배의 과보가 기대된다고 했다. 그러나 수행하는 것만 못하다. 보시와 지계와 비교할 바 없는 헤아릴 수 없는 과보가 기대된다고 했다. 이와 같은 선심에 대하여 도이법사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비교하여 설명했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며 산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효도잔치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음식이다. 좋은 옷을 사 드리고 안락한 거처를 만들어 드리는 것 역시 좋은 일이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이 있다. 그것은 부모를 불법승 삼보로 인도하는 것이다.

 

도이법사에 따르면 부모에게 보시를 하고, 지계하고, 더구나 수행을 하도록 인도한다면 부모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쌓게 하는 것이라 했다. 맛난 음식과 좋은 옷 등 호사를 시켜 주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가르침에 귀의하게 하여 남은 여생을 보시하고, 지계하고 수행하는 삶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최대의 효도라 했다. 이런 취지로 도이법사는 선심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리고 근거가 되는 경이 앙굿따라니까야에 있다고 했다.

 

부모의 경(mātāpitu sutta, A2.32)에서

 

앙굿따라니까야를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둘의 모음에 부모의 경(mātāpitu sutta, A2.32)’이 있다. 먼저 부모의 은혜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Dvinnāha bhikkhave na suppatikāra vadāmi, mātucca pitucca. Ekena bhikkhave asena mātara parihareyya.

 

ekena asena pitara parihareyya vassasatāyuko vassasatajīvī. So ca nesa ucchādanaparimaddana nahāpanasambāhanena, tepi tattheva muttakarīsa cajeyyu, natveva bhikkhave mātāpitunna kata vā hoti, patikatavā.

 

Imissā ca bhikkhave mahāpahaviyā pahūtasattaratanāya mātāpitaro issarādhipacce rajje patiṭṭhāpeyya, natveva bhikkhave mātāpitunna kata vā hoti, patikata vā. Ta kissa hetu: bahukārā bhikkhave mātāpitaro puttāna āpādakā posakā, imassa lokassa dassetāro.

 

수행승들이여, 두 분에 대하여는 은혜를 갚기가 쉽지 않다. 두 분이란 어떠한 분인가? 어머니와 아버지이다.

 

수행승들이여, 한쪽 어깨에 어머니를 이고 한쪽 어깨에 아버지를 이고 백년을 지내고 백년을 살면서, 향료를 바르고 안마를 해주고 목욕시키고 맛사지를 해드리며 간호하는데, 그들이 어깨 위에서 똥 오줌을 싸더라도 수행승들이여, 어머니와 아버지의 은혜를 갚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머니와 아버지로 하여금 이 칠보로 가득한 대륙의 지배자로서 왕위에 취임하도록 하여도 어머니와 아버지의 은혜를 갚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이들을 낳고 양육하며 세상에 내보내는 많은 일을 행했기 때문이다.”(A2.32,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먼저 부모의 은혜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나를 여기에 있게 한 것은 부모의 은혜라는 것이다. 부모가 똥과 오줌을 가리지 못해 간호해 준다고 해서 은혜를 다 갚는 것도 아니고 칠보를 가진 왕권을 준다고 해서 은혜를 다 갚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어떻게 해야 부모의 다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부모의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이어지는 부처님 말씀은 다음과 같다.

 

 

Yo ca kho bhikkhave mātāpitaro assaddhe saddhāsampadāya samādapeti, niveseti, patiṭṭhāpeti, dussīle sīlasampadāya samādapeti. Niveseti, patiṭṭhāpeti, maccharī cāgasampadāya samādapeti, niveseti, patiṭṭhāpeti, duppaññe paññāsampadāya samādapeti, niveseti. Patiṭṭhāpeti, ettāvatā kho bhikkhave mātāpitunna katañca hoti patikatañca atikatañcāti.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믿음이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믿음을 권하고, 믿음에 들게 하여 믿음을 확고하게 하고, 계행이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계행을 권하고, 계행에 들게 하여 계행을 확고하게 하고, 인색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보시를 권하고, 보시에 들게 하여 보시를 확고하게 하고, 지혜가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지혜를 권하고, 지혜에 들게 하여 지혜를 확고하게 하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은혜를 갚는 것이며, 넘치게 갚는 것이다.” (A2.32, 전재성님역)

 

 

부모에게 믿음과 계행과 보시와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오줌 똥을 받아 주는 것도 좋고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을 사드리는 것도 큰 효도이지만 더 큰 효도는 부모를 지혜의 길로 이끄는 것이다.

 

한평생 믿음 없이 살았다면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에 귀의하게 유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효도라는 것이다. 이렇게 삼보에 귀의 하였을 때 계행이 없이 살았던 부모는 늦게나마 지계하는 생활을 하고, 한평생 인색하게만 살았던 부모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게 함으로써 보시공덕을 짓게 하는 것이다. 더구나 가르침을 알려 드려 지혜있는 삶으로 유도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가족제도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가족을 제도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자신은 열심히 절에 다니고 열심히 수행하지만 정작 가족에게는 권유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절에 가면 스님들이 늘 하는 말은 가족과 손잡고 나오십시오라는 말이다.

 

나이 들어 늙은 부모님들은 한평생 힘들게 살았을 것이다. 삶에 바쁘다 보니 지혜로운 삶에 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늦게나마 삼보에 귀의하게 하고 삼보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왜 좋은 일인가? 믿음과 함께 보시하고 지계하는 삶을 산다면 천상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 보다 더 큰 효도가 있을까?

 

치매에 걸린 부모의 똥과 오줌을 걷어내는 것도 효도이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사드려서 호사시켜 주는 것도 효도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가르침을 알려 주는 것이다. 보시하고 지계 하는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다. 더욱 좋은 것은 지혜로운 삶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늦게나마 나이 든 부모에게 수행해보기를 권유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다.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은 그때 뿐이지만 믿음, 지계, 보시, 지혜의 공덕을 쌓아 놓으면 천상에 태어나는 것과 같다. 부모에게 최상의 효도는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2016-10-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