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의 삼업과 탐진치 삼독과의 관계는? 무아송(無我頌)을 염하며
성찰을 강조하는 교수님
평소 존경하는 P교수님의 칼럼이 교계신문에 실리고 있습니다. 대학생시절부터 참선 수행을 했다는 P교수님은 유명한 재가법사의 선맥을 잇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칼럼을 보면 ‘성찰’이라는 말이 늘 나옵니다. 성찰배경이라 하여 무엇을 성찰할 것인지에 대하여 먼저 언급합니다. 주로 잘못된 관행이나 잘못된 제도 등에 대한 것입니다. 최근성찰 배경을 보면 ‘김영란법’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P교수님은 성찰할 것에 대하여 주로 선어록과 관련하여 설명합니다. ‘김영란법돌파하기’에 대하여 ‘마조의 평상심시도’로 설명했습니다. 칼럼에서 인상적인 말 있습니다. 그것은 “만일 월급 이외의 부수입은 철저히 ‘봉사의 대가!’라고 마음먹고”라는 말입니다. 부수입이 생겼을 때 이웃과 사회에 기부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도 일상 속에서의 치열한 자기성찰과 함께, 각자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맡은 바 책무에 더욱 철저하려 애쓴다면”라 하여 성찰을 강조 했습니다.
성찰력과 수행력이 있는데
성찰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잘못한 기분이 듭니다. 반성의 의미가 크게 다가와서 일 것입니다. 초기경전에도 성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둘의 모음 ‘쟁사의 품’이 그것입니다. 품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정형구가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성찰의 힘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있는데, 이와 같이 성찰한다. 신체적인 악행을 하면 현세와 미래세에 악한 과보가 생겨나고, 언어적인 악행을 하면 현세와 미래세에 악한 과보가 생겨나고, 정신적인 악행을 하면 현세와 미래세에 악한 과보가 생겨난다. 그는 이와 같이 성찰하여 신체적인 악행을 끊어 버리고 신체적인 선행을 닦고, 언어적인 악행을 끊어 버리고 언어적인 선행을 닦고, 정신적인 악행을 끊어 버리고 정신적인 선행을 닦아 자신의 청정을 수호한다.” (A2.11, 전재성님역)
신구의 삼업에 대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신구의 삼업은 십악행으로 설명됩니다. 신체적인 것은 생명을 죽이는 것,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 삿된 음행을 하는 것이 해당됩니다. 언어적인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 이간질하는 것, 욕지거리하는 것, 꾸며대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것은 욕심, 분노, 삿된 견해입니다.
십악행을 하면 금생도 괴롭고 내생도 괴로울 것이라 했습니다. 동시에 자신에게도 괴롭고 타인에게도 괴로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악행을 끊어 버릴 수 있을까요? 품에 따르면 성찰력과 수행력이라 했습니다. 성찰의 힘과 수행의 힘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끊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수행력과 관련하여 두 가지를 들었습니다.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칠각지)와 네 가지 선정입니다.
염각지가 선두인 것은
칠각지와 관련하여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있습니다. 이를 한자어로 ‘염각지’라 합니다. 염각지가 가장 선두에 나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십이연기에서 무명이 선두이듯이 칠각지에서 염각지가 선두인 것은 연결고리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빗방울이 모여서 개울을 이루고, 개울이 강물이 되어 바다로 흘러 들어 가는 이치와 같습니다. 깨달음의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는 단계가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비가 굵은 알갱이가 되어 떨어질 때 산꼭대기에서 밑으로 흘러내리면서 산의 협곡과 계곡과 지류를 이루듯이,”(S12.23) 이라 했습니다. 마침내 “큰 강을 이루고 다시 큰 바다와 대양을 이루는 것과 같다.”라 했습니다. 빗방울에서부터 시작하여 계곡, 협곡, 지류, 작은 못, 큰 못, 작은 강, 큰 강, 바다의 순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염각지가 선두인 것은 가장 먼저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봅니다. 모든 학문이 기초적인 것을 외는 것부터 시작 되듯이 중요한 가르침은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이 강조하신 것을 기억하고, 기억한 것을 사유하는 것입니다.
염각지에서 실천의 대상은 네 가지입니다.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입니다. 이 네 가지 염처에 대한 것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념처라면 몸에 대한 관찰이기 때문에 무엇을 관찰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습니다. 느낌, 마음,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어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 갈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려면 부처님의 중요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을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을 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명상 대상이 되는 몸(身), 느낌(受), 마음(心), 사실(法)에 대한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을 때, 올바로 새김(sati)을 확립됩니다. 사띠가 확립되면 그 다음 단계는 택법각지입니다. 명상과정에서 일어나는 착하고 건전한 상태와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이후 깨달음의 고리는 정진각지, 희각지, 경안각지, 정각지, 사각지 순으로 진행됩니다. 이것을 성찰하는데 있어서 수행력이라 합니다.
수행의 힘으로
또 하나의 수행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 가지 선정입니다. 성찰하는데 있어서 칠각지와 함께 소개 되어 있는 네 가지 선정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난 뒤,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고…”로 시작되는 정형구입니다. 칠각지와 사선정과 같은 수행의 힘으로 탐진치 삼독을 끊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수행의 힘인가? 수행승들이여, 그 가운데 학인에게 해당되는 수행의 힘이 있는데, 그 학인에게 해당하는 수행의 힘에 의해서 탐욕을 끊어 버리고 분노를 끊어 버리고 어리석음을 끊어 버린다. 탐욕을 끊어 버리고 분노를 끊어 버리고 어리석음을 끊어 버려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짓지 않고 악한 것에 종사하지 않는다.” (A2.11, 전재성님역)
수행의 힘으로 삼독을 끊어 버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힘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성찰의 힘입니다. 그래서 성찰의 힘과 수행의 힘으로 악하고 불건전 한 것들을 끊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구의 삼업과 탐진치 삼독의 관계
신구의 삼업과 탐진치의 삼독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마치 기어가 맞물려 돌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이 시스터매틱(Systematic)하기 때문입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가르침은 마치 퍼즐 맞추기 놀이와 같습니다. 아이들의 지능을 계발하기 위한 그림조각맞추기 놀이 같은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매우 방대합니다. 팔만사천법문이 개별적인 것으로 의미 없이 나열 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매우 정교하게 잘 짜여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계장치와 같고 퍼즐맞추기 그림판과도 같습니다. 신구의 삼업과 탐진치 삼독의 관계도 그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이를 천수경 십악참회에서 봅니다. 십악참회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아석소조제악업 (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 (皆由無始貪瞋癡)
종신구의지소생 (從身口意之所生)
일체아금개참회 (一切我今皆懺悔)
지난세월 제가지은 모든악업은
옛적부터 탐진치로 말미암아서
몸과말과 생각으로 지었사오니
제가이제 모든죄업 참회합니다.
(천수경 참회게)
천수경 참회게는 화엄경에서 유래합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따르면 “往昔所造諸惡業 皆由無始貪瞋癡 從身語意之所生 一切我今皆懺悔”라 되어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아(我)과 왕(往)의 차이입니다. 천수경에서는 “지난세월 제가 지은 모든악업은”이라 하지만 화엄경에서는 “비롯함이 없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라 합니다.
게송을 보면 모든 악업은 탐진치에서 시작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탐진치는 모두 신구의 삼업의 소산이라는 것입니다. 이 몸과 마음으로 인하여 탐진치 삼업을 지은 것입니다. 만일 이 몸과 마음이 없다면, 무아라면 탐진치 삼업을 지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잘못을 범한 수행승의 성찰
성찰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paṭisaṅkhā’라 합니다. 사전을 찾아 보니 ‘reflection; judgement; consideration’의 뜻입니다. 초불연에서는 ‘숙고’라 번역했습니다. 빅쿠보디는 ‘reflection’이라 했습니다. 빠일리어 paṭisaṅkhāna가 힘을 뜻하는 bala와 함께 쓰여 ‘paṭisaṅkhānabala’라 하는데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power of computation’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쉽게 풀이하면 ‘계산하는 힘’이 됩니다.
성찰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의 일을 반성하며 살핌’입니다. ‘살핀다’라는 말이 키워드 입니다. 무엇을 살핀다는 것일까요?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둘의 모음 ‘쟁사의 품’ 다섯 번째 경 ‘쟁사의 경(A2.15)’에 잘 표현 되어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발생할 수 있습니다. 때로 구설수에 오를 수 있습니다. 특히 남말 좋아 하는 사람들에게는 먹잇감이 됩니다. 승단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어떤 쟁사가 일어날 때 잘못을 범한 수행승과 힐문하는 수행승이 자신을 잘 성찰하지 않으면, 수행승들이여, 그 쟁사는 필연적으로 지연과 소란과 포악으로 이끌어질 것이고 두 수행승들은 화평하게 지내지 못할 것이다.”(A2.15)라고 경고 했습니다. 여기서 쟁사라고 하는 것은 언쟁의 쟁사, 훈계의 쟁사, 범계의 쟁사, 의무의 쟁사를 말합니다.
승단에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부처님은 잘못을 범한 수행승과 힐문하는 수행승, 두 수행승이 어떻게 성찰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해법을 말씀 하셨습니다. 먼저 잘못을 범한 수행승의 성찰에 대한 것입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잘못을 범한 수행승이 잘 스스로 자신을 성찰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여기 그 잘못을 범한 수행승이 이와 같이 ‘나는 신체적으로 어떤 악하고 불건전한 일을 저질렀으므로 그 수행승은 내가 신체적으로 어떤 악하고 불건전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았다. 내가 신체적으로 신체적으로 어떤 악하고 불건전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 수행승은 내가 신체적으로 어떤 악하고 불건전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수행승은 내가 어떤 악하고 불건전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나서 불쾌해 했다. 그 수행승은 불쾌해 하면서 나에게 불쾌한 말을 했다. 그 수행승이 불쾌한 말을 하자, 나는 불쾌해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에 관하여 밀수품에 대해 세금을 물어야 하는 사람처럼 잘못을 범했다.’라고 스스로 성찰한다. 수행승들이여, 그 잘못을 범한 수행승은 이와 같이 스스로 자신을 성찰한다.”(A2.15, 전재성님역)
성찰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먼저 잘못한 것을 반성하는 것부터 시작 됩니다. 신체적으로 잘못을 저질렀다고 했는데 십악에 따르면 살생이나 도둑질, 음행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체적 잘못을 누군가 보았을 것입니다. 잘못을 지적했을 때 잘못으로 받아 들이지 않았을 때 문제가 생깁니다.
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해코지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둘을 구별해야 합니다. 법구경에서도 “잘못을 지적하는 님, 꾸짖어 충고하는 님, 현명한 님, 숨겨진 보물을 일러주는 님을 보라.”(Dhp76) 라 했습니다. 이런 현자와 사귀라 했습니다. 그런데 잘못을 지적하는 자에게 불쾌하게 생각한다면 신체적으로 악업을 지을 뿐만 아니라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도 악업을 짓습니다. 이는 “그 수행승이 불쾌한 말을 하자, 나는 불쾌해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수행승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적반하장격으로 잘못을 지적하는 자에게 죄가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수행승이 죄를 범했을 때 허물이 훈계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수행승 자신에게 허물이 있음을 반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그 잘못을 범한 수행승은 ‘밀수품에 대해 세금을 물어야 하는 사람처럼 잘못을 범했다.’라고 스스로 성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힐문하는 수행승의 성찰
잘못을 지적하는 자에도 성찰이 필요합니다. 힐문하는 자는 어떻게 성찰해야 할까요? 다음과 같이 성찰해야 함을 말합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힐문하는 수행승이 잘 스스로 자신을 성찰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여기 힐문하는 수행승이 이와 같이 ‘이 수행승은 신체적으로 어떤 악하고 불건전한 일을 저질렀으므로 내가 이 수행승이 신체적으로 어떤 악하고 불건전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았다. 이 수행승이 신체적으로 신체적으로 어떤 악하고 불건전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나는 이 수행승이 신체적으로 어떤 악하고 불건전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수행승이 참으로 신체적으로 어떤 악하고 불건전한 일을 저질렀으므로 내가 이 수행승이 어떤 악하고 불건전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았다. 이 수행승이 어떤 악하고 불건전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나서 나는 불쾌했다. 나는 불쾌해 하면서 이 수행승에게 불쾌한 말을 했다. 내가 불쾌한 말을 하자, 이 수행승도 불쾌해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에 관하여 밀수품에 대해 세금을 물어야 하는 사람처럼 잘못을 범했다.’라고 스스로 성찰한다. 수행승들이여, 그 힐문하는 수행승은 이와 같이 스스로 자신을 성찰한다.”(A2.15, 전재성님역)
잘못을 범한 자나 잘못을 지적하는 자나 남에게 알리는 것은 죄업을 짓는 것이 됩니다. 지적하는 것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하여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비겁한 행위입니다. 뒤에서 남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팔정도 정어에서 ‘이간질을 하지 않고’라는 가르침을 어긴 것입니다. 신구의 삼업에서 구업을 짓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세상에는 ‘남의 잘못 만을 찾는 자’와 ‘잘못을 그만 두게 하려는 자’ 이렇게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비난과 비방하는 것이라 볼 수 있고, 후자의 경우 충고 내지 비판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적하려거든 당사자에게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당사자가 없는 데서 남말 하는 것은 이간질에 해당되는 것으로, ‘밀수품에 대해 세금을 물어야 하는 사람처럼 잘못을 범했다.’라고 스스로 성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하루에도 무수하게 죄업을 짓고 살아 갑니다. 구체적으로 십악행을 말합니다. 아런 죄업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천수경과 화엄경에 따르면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瞋癡)’라 했습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근본 이유라 합니다. 그런데 더 근원적으로 이 몸과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이라 하여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의 소산으로 본 것입니다.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가진 것이 가장 큰 이유라 볼 수 있습니다.
죄악과 탐진치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몸과 마음을 내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탐진치가 일어납니다. 죄업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고 여겨야 할 것입니다. 무아가 되었을 때 더 이상 탐, 진, 치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유신견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버려야 할까요?
초기경전에 유신견 정형구가 있습니다. 오온에서 물질에 대한 것을 보면 “그는 물질을 자아로 여기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rūpaṃ attato samanupassati, rūpavantaṃ vā attānaṃ, attani vā rūpaṃ, rūpasmiṃ vā attānaṃ)”(M44)라 되어 있습니다. 몸에 대하여 네 가지로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적용하면 모두 20가지 유신견이 됩니다. 이런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탐진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 몸과 마음을 나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한 신구의 삼업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신구의 삼업에 대하여 수행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경에서는 칠각지와 네 가지 선정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또 밀수꾼의 비유를 들어 성찰의 힘으로 설명했습니다. 근본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무아송(無我頌)
어떤 경계에 부딪쳤을 때 사띠 하는 것도 중요하고,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도 중요하고, 화두 드는 것도 좋습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무아를 염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염할까요?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T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M28) 라고 염불하듯이 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입니다. 좀더 확장하면 오온에 대하여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무아송(無我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몸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 몸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 몸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 느낌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 느낌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 지각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 지각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 지각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 형성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 형성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 형성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 의식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 의식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 의식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2016-11-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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