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간다고 하였을까?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카톡으로 소통하는 시대
요즘은 문자로 통하는 세상이다. 전화로 통하기 보다 문자로 한다. 심지어 가까이 있어도 문자로 소통하기 까지 한다. 같은 집안 내에 있으면서도 서로 문자로 소통한다고 하니 인터넷과 컴퓨터에 기반한 정보통신시대의 위력을 실감하게 한다.
오래 전에 졸업한 친구들과 ‘카톡’으로 소통하고 있다. 불과 몇 년 만에 놀라운 소통방식이 탄생한 것이다. 카톡서비스가 본격화 된 것이 다음카카오신임 사장의 발언에 따르면 2012년 부터라 하니 손안의 컴퓨터로 인하여 삶의 방식자체가 바뀐 것이다.
대부분 눈팅만 할 뿐
카톡을 본격화 한지가 두 달이 넘어 간다. 주로 동기동창 카톡방이다. 현재 23명이 가입 되어 있다. 그러나 문자로 소통하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눈팅’만 할 뿐이다. 이렇게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문자를 주고 받다 보니 나머지는 그저 참관자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다가 툭 던지기는 하지만 그런 케이스는 특별한 일이 있었을 때이다.
카톡방에서 대부분은 침묵한다. 그러나 대화내용을 열심히 보는 것 같다. 그런 실례로 카운트가 줄어 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 글을 올렸을 때 23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지만 나중에 보면 제로가 되어 있다. 실제로 다 본 것이다. 나중에 물어 보면 다 보았다고 한다. 문자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눈팅하고 있는 것이다.
카톡방에서 대화는 ㅋㅋ 하는 것
매일 글을 쓰는 입장에서 카톡방에서 대화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글쓰기를 즐겨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카톡방은 어디나 그렇듯이 잡담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심각한 이야기나 어려운 이야기는 그다지 환영 받지 않는다.
분위기를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글쓰기와는 별도로 카톡방에서 대화는 ㅋㅋ 하는 잡담수준이다. 재잘재잘 하는 채팅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여 늘 ㅋㅋ 거릴 수 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의미 있는 문장을 올려 놓기도 한다. 주로 아침시간이다.
일터로 향하는 길에 생각해 두었던 것을 날린다. 그런데 어느 친구는 보기가 좋았던 모양이다. 거의 채팅을 하지 않은 친구가 어느 날 문자로 아침마다 기다려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의미 있는 글을 올리기로 하였다. 채팅방의 특성에 맞게 짤막한 글이다. 그러다 보니 ‘자작시’처럼 되어 버렸다.
좀처럼 친구들은 글을 올리지 않는다. 그리고 별다른 호응도 없다. 공학도출신들이어서일까 아니면 표현력이 부족해서 일까? 아무튼 카톡방에서 재잘재잘 하는 것에 대하여 그다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열심히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요일 산행하면서 올린 글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 이었다.
일요일 나홀로 산행을 하였는데
일요일 오전 할 일을 다 해 마치고 산행을 하였다. 여기서 할 일이란 글쓰기를 말한다. 나홀로 떠나는 산행이다. 관악대로에서 곧바로 관악산길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걸어 갔다.
산행의 목표는 안양유원지까지이다. 대로에서 곧바로 산길로 연결 되어 있기 때문에 산길을 죽 따라 가기만 한다. 요즘에는 ‘둘레길’이라 하여 길이 잘 닦여 있고 또한 표지판이 되어 있어서 산책하는 기분으로 산행할 수 있다. 망해암을 거쳐서 안양유원지까지 이르는 가벼운 코스로 잡았다.
자작시를 날리고
산길을 올라 가면서 카톡을 하나 날렸다. 산행하다 보니 금새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낙엽이 수북히 쌓여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이었다. 날씨는 차갑지만 바람이 없기 때문에 따사로운 햇볕에 오히려 따스할 정도이었다. 이렇게 나홀로 산행하는 기분에 대하여 카톡방에 올린 짤막한 자작시는 다음과 같다.
나홀로 산행
홀로 가는 것보다
동행하면 힘이 덜 든다.
여럿이 함께 가면
더욱 힘이 덜 든다.
언제까지나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혼자의 길이다.
바스락바스락 낙엽을 밟으며
나홀로 산행
가을도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거리의 가로수나 공원에는 단풍이 여전하지만 산길에서는 거의 다 져 간다. 그러다 보니 산에는 낙엽으로 가득하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이파리는 비바람이 한번 불면 모두 떨어질 것처럼 간신히 붙어 있는 듯 하다. 이렇게 산길을 나홀로 걸으면서 자작시를 하나 날렸다.
등산길에 보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
등산길에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본다. 크게 두 부류이다. 집단으로 움직이는 사람들과 나홀로 등산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럿이서 움직이는 경우 말이 많다. 끊임 없이 재잘재잘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홀로 등산하는 사람들은 말이 없다. 이렇게 말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나홀로인가 아닌가의 차이다.
나홀로 등산하면 같은 길이라도 힘이 든다. 저 높은 산 꼭대기를 목표로 하였다면 수 없이 오르락 내리락 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무척 힘이 든다. 그러나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같은 거리라도 힘이 적게 든다. 서로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힘이 들면 상대방의 뒤를 따라 가면 되고 힘이 들 때 대화를 하면 활력이 솟는 것이 가장 큰 이점이다.
여럿이서 산행하면 더욱 더 힘이 덜 든다. 험한 등반길에서는 여러 명이 조를 짜서 이동한다. 주로 리더가 앞장선다. 길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엉뚱한 길로 가지 않는다. 뒤에 가는 사람들은 리더만 따라가면 된다. 그래서 험한 산길에서는 여럿이 움직이는 것이 매우 유리하다.
그런데 험준한 산길에서 나홀로 등반하면 어떨까? 어느 길이 맞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길을 잘 못 들었을 때 다시 되돌아 가야 하기도 하는 낭패를 겪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화할 상대가 없다는 것이다. 길을 가는데 있어서 바른 길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고 더구나 의지할 상대도 없으니 힘들기만 하다.
동행하면 힘이 덜 드는 것은 사실이다. 여럿이 함께 하면 더욱 힘이 덜 든다. 그야말로 앞사람의 꽁무니만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혼자가 된다. 언제까지나 동행할 수 없고 늘 여럿이서 그룹으로 움직일 수 없다. 나홀로 가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관악산 등산길에 보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홀로이다.
산행길에 명언을 접하고
산길이라 그런지 조용하다. 고요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 하다. 낙엽을 밝을 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산길을 걸어 올라가니 작은 산 중턱에 이르렀다. 그런데 중턱에는 도로가 나 있다. 아마 부대로 가는 도로일 것이다. 산 꼭대기에 부대가 있기 때문이다. 도로 길을 따라 가다 보니 명언이 적혀 있는 표지판이 여럿 보인다. 동서양의 현자 들이나 세계적으로 이름이 잘 알려져 있는 유명인들의 짤막한 경구이다. 그 중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옮기면 다음과 같다.
부자란 어떤 사람인가?
만족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
아무도 없다.
(벤자민 플랭크린)
참으로 멋진 글이다. 이렇게 산행길에 명언을 보면 다시 한번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 그리고 글을 화두삼아 산행을 하게 된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누군가 새심한 배려를 한 것이다.
행복지수공식이 있는데
벤지민 플랭크린의 명언을 보니 즉각적으로 생각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행복지수공식’이다. 이에 여러 차례 글을 올린 바 있다. ‘하늘에서 금비가 내려도, 진짜 행복이란?(2012-09-24)’라는 제목의 글이 대표적이다.
행복지수공식은 ‘행복지수=소유/욕구”로 표현 된다. 욕구를 최소화 하면 행복지수는 올라가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다고 하여 소유를 줄이자는 것은 아니다. 소유와는 크게 관계가 없다. 소유가 얼마 이든 간에 욕구만 최소화 하는 것이다.
지금 천만원을 가진 자나 현재 100억을 가진 자나 욕구를 최소화 하면 지수는 올라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천만원 가진자가 1억을 꿈꾸며 욕구를 극대화할 때 행복지수는 곤두박질 친다. 하지만 지금 100억을 가진 자가 더 이상 늘리려 하지 않고 현재 그 상태에서 욕구를 최소화 한다면 행복지수는 높아 진다.
지금 하나도 가진 것이 없는 자라도 욕구를 최소화 하면 역시 지수는 높아 진다. 결론적으로 많이 가진 자나 적게 가진 자나 지금 여기에서 욕구를 최소화 하면 행복지수는 올라가게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행복지수는 소유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많이 가진 자는 많이 가진 대로 만족하면 지수가 높아지는 것이고, 적게 가진 자 역시 현재 그 상태에서 만족하면 지수는 높아진다. 이렇게 본다면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행복해질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망상이다.
만족론(滿足論)과 지족론(知足論)
플랭크린의 ‘만족론’을 보면 법구경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그것은 “어떠한 것이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다(dhp331)”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을 보면 “재가자들이 도둑질과 같은 행동을 하고도,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출가자가 온갖 비리를 행하고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크고 작건 간에 자신의 소유에 만족하는 것만이 행복이다.(DhpA.IV.34)”라 하였다.
법구경에 따르면 재가자들이 도둑질 한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직접 물건을 훔친다는 의미도 있지만 요즘식으로 말하면 불법과 탈법, 불로소득으로 형성된 재산을 뜻한다. 자신의 이마의 땀과 팔뚝의 힘으로 정당하게 번 재산이 아니라 불법과 탈법을 일삼아 번 재산은 사실상 도둑질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현재 상태에서 족함을 알면
욕심이 있기 때문에 아흔 아홉칸 가진 자는 백칸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탐욕만 부린다면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참으로 금화의 비가 내려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만족은 없다. (Dhp186)”라 하였다.
행복론에는 동서양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벤자민 플랭크린의 ‘만족론’이나 법구경에 실려 있는 ‘지족론’을 보면 동서양을 초월하고 시대와 공간과 인종을 초월한다. 이렇게 본다면 소욕지족은 진리이다. 그렇다고 하여 결코 소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많이 가졌건 적게 가졌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욕구가 문제이다. 그래서 주석에 따르면 “그러므로 크고 작건 간에 자신의 소유에 만족하는 것만이 행복이다”라 하였다. 소욕지족을 말한다. 많건 적건 건에 욕구를 적게 하며 현재 상태에서 족함을 알면 바로 그것이 행복이라는 말이다.
11월에 보는 개나리꽃
망해암을 향하여 올라 가는 도중에 꽃을 발견하였다. 모든 것이 저물어 가는 계절에 꽃을 보다니 꽃 본 듯이 반가웠다. 그런데 11월에 보는 꽃은 노랑개나리이었다. 엄동설한을 코 앞에 두고 왜 개나리가 피었을까?
개나리는 봄의 전령사와 같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찬바람이 여전 할 때 3월 말에 핀다. 따스한 양지쪽에 있는 나무에서 빨리 핀다. 그래서 노랑꽃을 접하였을 때 진짜 봄이 왔음을 실감하게 해 준다. 그런데 춥고 삭막한 계절을 앞에 두고 노랑개나리가 핀 것이다!
철이 아닌 때 꽃이 피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상기후에 따른 변화라 보아야 할까?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꽃이 피었다는 사실은 반갑기만 하다.
안양제1경 망해암낙조
망해암에 이르렀다. 안양유원지로 넘어 가는 길목에 있다. 그런 망해암은 안양 8경중의 하나이다. 안양에 8경이 있는데 그 중에 제1경이 바로 망해암이다. 왜 제1경으로 정해졌을까?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망해암에서 보는 낙조가 일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망해암에서 서쪽하늘을 바라보면 날씨가 좋은 날 서해바다가 보인다. 저 멀리 송도의 고층으로 형성된 마천루도 보인다. 더구나 석양에 보면 서해바다가 햇볕에 반사되어 눈이 부실 정도로 훤하게 보인다.
이날 망해암에서 바라본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점심 무렵으로 강한 햇볕탓일 것이다. 그래서 백색의 아파트 단지만 파노라마친다.
망해암에 대하여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망해암은 안양권에 있는 전통사찰이다. 안양권이라 하면 같은 생활권인 안양, 군포, 의왕, 과천 이렇게 네 개의 도시를 말한다. 인구가 대략 120만명이다. 이렇게 너른 안양권에서 알려져 있는 전통사찰은 삼막사, 염불사, 망해암, 청계사 정도이다. 이들 전통사찰은 안양권 뿐만 아니라 서울과 인천 등 경기도에 사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예전 보다 몰라 보게 큰 변화를 가져 왔다. 망해암도 역시 큰 변화가 있었다.
망해암에 대하여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블로그활동을 하면서 사찰순례를 하였는데 그 때 마다 순례기형식으로 글을 올렸다. 그결과 수백개의 사찰순례기를 작성하였다. 망해함과 관련하여 올린 글이 있다. ‘서해의 낙조가 일품인 안양1경 미륵도량 망해암(望海庵)(2007-04-01)’라는 제목의 글이다. 2007년에 작성하였으니 칠년전의 일이다.
2007년 당시 망해암을 보았을 때 실망스러웠다. 그것은 절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난개발된 것처럼 가람배치가 중구난방이었다.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절 가운데 일반 주택가처럼 보이는 집이 있었다. 도저히 절 같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그 때 당시 순례기에서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
망해암은 전통과 현대가 버물려진 잘못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원래부터 있었던 암자인 용화전을 기준으로 하여 건축물이 무 계획적으로 난립되어 지어 지지 않았나 생각 된다. 특히 용화전 앞에 있는 3층짜리 네모난 콘크리트 건물은 전통사찰의 면모를 훼손하는 부조화의 극치이다. 그리고 살림집으로 쓰여진 듯한 기와건물도 사찰의 분위기와는 영 맞지 않는다.
(진흙속의연꽃, 서해의 낙조가 일품인 안양1경 미륵도량 망해암(望海庵)(2007-04-01))
순례법회를 수 없이 다니고 수없이 사찰순례를 하였지만 절 같지 않은 절이 망해암이었다. 그래서 네모만 콘크리트 건물을 보고서 무계획적으로 난립된 것이라 하였고 살림집으로나 적합한 기와집이 있는 것이 이상해 보인다고 하였다.
칠년후와 비교해 보니
그런데 칠년이 지난 현재 완전히 바뀐 모습이다. 어떻게 바뀌었을까?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2007년 망해암
2014년 망해암
2007도의 경우 용화전 앞에 빨간 기둥과 노랑벽의 콘크리트 건물이 보인다. 바로 이것이 난개발의 전형이라 본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가 아닌 난개발일 뿐이다. 이런 점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칠년후 깔끔히 정리 되었다. 망해암 주불이 모셔져 있는 용화전 앞을 가로 막고 있던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는 너른 옥상마당이 새로 생겨났다. 더구나 석재를 이용하여 리모델링 되었기 때문에 주변 환경과도 어울린다. 가장 좋은 것은 철거하는 것이지만 아쉬운 대로 개선된 것이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칠년만에 비교해 보는 망해암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가 있다. 그것은 절집에 마치 여염집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기와집이 철거 된 것이다. 그 대신 그 자리에는 여법한 법당이 들어섰다. 극적인 변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2007년 망해암
2014년 망해암
2007년 당시 절집 중앙에는 살림집처럼 보이는 기와집이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있었다. 마치 도시의 주택가를 산중에서 보는 듯하여 정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후 불사가 시작 되었다. 현재 보는 천불전 법당이다. 아래층에는 지장전이고 윗층에는 천불전이라는 이름의 여법한 법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조감도를 보면서
칠년만에 극적인 변화를 보인 곳이 망해암이다. 이런 변화를 바랬다. 그래서 2007년 당시 나름대로 희망이 담긴 글을 썼다. 불사에 대한 조감도를 보면서 소감을 적은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커다란 조감도를 보면 용화전을 제외한 부조화의 극치인 3층일반 건물과 가정집 모양의 건물을 밀어 버리고 새로운 전각을 만든다는 그림이 붙어 있다. 그리고 그 조감도에는 미륵부처님이 용화전 밖으로 나와서 전신을 다 드러낸 입상을 밖에 세워 놓음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공사는 시작 되고 있지 않다. 과연 미륵부처님이 용화전 밖을 나와서 안양시를 바라보면서 서 있을 그 날이 언제 일까.
(진흙속의연꽃, 서해의 낙조가 일품인 안양1경 미륵도량 망해암(望海庵)(2007-04-01))
2007년 당시 망해암은 불사를 앞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절의 입구에서 커다란 조감도를 볼 수 있었다. 그 조감도를 보면 난개발된 건물은 일체 보이지 않고 가정집과 같은 건물은 모두 철거 되어 있다. 대신 그 자리에 여법한 법당이 들어가 있다. 2007년 당시 조감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2007년 망해암 불사조감도
조감도를 보면 현재와 비교해 볼 때 맞는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조감도 대로 시행된 것은 가정집과 같은 건물이 철거 되고 그 자리에 천불전이 들어선 것이다. 형태는 다르긴 하지만 조감도와 유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감도 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망해암의 주불전인 용화전 앞에 있는 네모만 형태의 콘크리트 건물이다. 조감도에서는 깨끗이 철거 되어 있고 더구나 커다란 미륵불이 조성될 것으로 되어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재 망해암에는 철근 콘크리트 건물은 여전히 남아 있고 미륵대불도 조성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본다면 반 정도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조감도 대로 모두 되어 있지 않고 반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가람으로서 품격을 갖춘 것에 대해서는 7년전과 비교하면 마치 상전벽해가 된 듯 하다. 그런 바램을 7년 전의 글에서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공사는 시작 되고 있지 않다. 과연 미륵부처님이 용화전 밖을 나와서 안양시를 바라보면서 서 있을 그 날이 언제 일까.”라고 의문하였다.
“부처님…”하며 간절히 기도를 하는 불자
망해암에서 미륵대불은 아직 조성되지 않았다. 아마 언젠가는 조감도대로 조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미륵불은 망해암의 주불이다. 미륵불이 모셔져 있는 용화전에 들어가 보았다. 마침 어느 불자가 열심히 기도 하고 있다. 나지막한 목소로리 “부처님…”하는 것으로 보아 매우 절박한 듯 하다. 두 손을 합장하며 눈을 감고 입으로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부처님을 찾는 것을 보니 간절함이 느껴진다.
보기에도 간절함이 엿보이는 불자님이다. 삼배를 올리려 들어 가려 하는데 방해 될까봐 미안할 정도이다. 조용히 들어가서 삼배를 올리고 나왔다.
용화전 미륵불을 보면
망해암은 미륵도량이다. 용화전에 미륵불이 있는데 특이 하다. 상반신 윗부분만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설명문을 보면 미륵불의 나머지 아래 부분은 마루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였다. 대게 미륵불의 크기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상반신만 노출되어 있는 미륵불의 형상을 보면 특이 하다. 머리에는 둥그런 원판모양의 보관을 쓰고 있고 얼굴은 하얗게 칠해져 있어서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 되어 있다.
전통사찰에 가면 전통을 내 세울 수 있는 문화재가 있다. 망해암 역시 내 세울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상반신만 노출되어 있는 미륵불이다. 조성연대가 1479년이라 하니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국보나 보물은 아니다. 이렇게 역사가 오래 된 불상이다 보니 기도의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새로 지은 천불전 보다 이곳 용화전을 찾는 이가 더 많다. 그래서 열심히 그것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불자들을 볼 수 있다.
길을 잘 못 들어 섰는데
망해암을 지나 목적지인 안양예술공원으로 향하였다. 가는 길은 둘레길이다. 요즘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는 일종의 산책길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둘레길을 걷다 보면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이전에도 둘레길을 걸어 보았기 때문에 둘레길로 들어 섰다.
둘레길에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으면 길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힘들다. 망해암에서 안양유원지길로 넘어 가는 둘레길 역시 마찬가지이다. 거의 등산객을 볼 수 없어서일까 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러다 보니 길을 잘 못 들어선 것이다.
길아닌 길로 들어섰다. 아니 길없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길을 잃어 버렸다. 더구나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어서 밟으면 푹 빠진다. 그러다 보니 넘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길 아닌 길, 길 없는 길을 가다 보니 빠지고 넘어지고 긁히게 되었다.
이럴 때 누군가 동행하였더라면 올바른 길로 들어 섰을 것이다. 길을 잘 아는 사람과 함께 갔더라면 수월하게 갔을 것이다. 그러나 길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되는 상황에서 단지 판단으로만 길을 가게 되었을 때 그 길은 험한 길이 되고 만다. 이번 나홀로 산행도 그런 케이스이었다.
안온한 장소에서
길없는 길, 길아닌 길에서 간신히 빠져 나왔다. 바위로 이루어진 능선이 보였기 때문이다. 바위 능선은 아무도 찾아 오지 않는 곳 같다. 주변에 길이 없어서 고립된 곳이다. 그런데 바위로 이루어진 곳에 움푹 패인 곳이 보였다. 두 세람이 앉기에 널널한 공간이다. 더구나 남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늦가을의 햇살에 따사롭다.
주변에는 길도 없고 사람도 없기 때문에 완전히 고립된 장소이다. 그곳에 잠시 앉아 있었다. 그렇게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최고로 좋은 장소로 보였다. 만일 누군가 홀로 기도를 한다면 소위 기도발이 잘 먹힐 장소로 보였다. 또 누군가 명상을 한다면 한소식할 것 같은 아늑한 분위기이다. 길을 잃어 버렸지만 그 덕분에 안온한 장소를 발견한 것이다.
목적지 안양예술공원에 도착하고
능선을 타면 등산이 쉬워 진다. 그래서 계곡보다 능선이다. 그런데 관악산의 경우 바위로 이루어진 능선이 많기 때문에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맨땅으로 만 이루어진 것과 다른 것이다. 이렇게 능선길을 죽 따라 가다 보니 목적지인 안양예술공원에 도착하였다.
예술공원은 이제 먹거리천지가 되었다. 옛날에는 안양유원지라 불리던 곳이다. 구로에서 반세기를 살았다는 친구의 말에 따르면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놀러 가는 곳이 안양유원지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 가는 곳도 안양유원지이었기 때문에 서울 사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 하였다. 또 유원지 입구에는 포도밭이 많아서 포도로 유명한 곳이라 한다. 그러나 현재는 포도밭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잘 정비된 가로와 예술품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예술공원이 되었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예술공원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하였다. 물론 나홀로식사이다. 먹거리천국인 예술공원거리에서 선택한 것은 보리밥에 청국장이다. 이렇게 식사를 시켜 놓고 문자를 날렸다. 오늘 나홀로 산행을 마무리하는 문자이다. 동창 카톡방에 다음과 같은 시아닌 시를 남겼다.
나홀로 떠난 산행이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 되었네.
동행하면 힘들지 않지만
두 개의 길을 만났을 때
어떤 길로 가야할까?
모두 다 가는 대로로 가야 할까?
아니면 남들이 가지 않은 길,
길없는 길로 가야 할까?
왼쪽길인가 오른쪽길인가?
동행하지만 결국
혼자 가는 길이다.
나보다 낫거나
나와 동등한 자와 함께
길을 가야 한다.
그래야 두 갈래 길에서
바른 길로 가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와 함께 가지 않는다.
두 갈래 길에서
올바른 길로 가지 않기에.
나보다 낫거나 동등한 자를
만나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홀로 길을 가는 것이 더 낫다.
미국의 유명한 시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있다. 마지막 구절에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라는 내용이 있다. 사람들이 적게 간 길, 가지 않은 길을 간 것에 대한 소감이다. 그 길을 감에 따라 이후에 모든 것이 달라졌음을 말한다.
누구나 길을 간다. 그 길이 산길이든 인생길이든 누구나 길을 간다. 그런데 길을 가다 보면 반드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왼쪽길인가 오른쪽길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이럴 경우 동행자가 있으면 좋을 것이다.
왜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간다고 하였을까?
수행의 길을 간다면 좋은 도반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에 따르면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과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절반에 해당합니다.(S3.18)”라 하였다. 나홀로 가는 것 보다 함께 같이 갈 동반자가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좋은 것이다. 청정한 삶을 실현 하는데 있어서 절반에 해당될 정도로 결정적이라는 말이다.
동반자라 하여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왜 그럴까? 어리석은 자와 함께 하면 고통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바른 길이 아닌 길로 가려 하기 때문이다.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친구하자는 대로 할 경우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걷다가 만나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 가야하리라./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없으니.(Dhp61)”라 하였다.
어리석은 자와 함께 길을 가느니 차라리 혼자 가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숫따니빠따에서는 고독한 수행자의 모습이 잘 표현 되어 있다. 외뿔을 가진 코뿔소가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가듯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였나 보다.
2014-11-1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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