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사형수라 하더라도 절안으로 도망가면..”첩첩산중 상주 심원사순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0. 4. 14:32

 

 

사형수라 하더라도 절안으로 도망가면..”첩첩산중 상주 심원사순례

 

 

 

중추(中秋)의 날에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이다. 이런 날은 계절적으로 봄과 가을 뿐이다. 봄과 가을중에서도 중간 정도 되는 날이 쾌적한 날씨에 해당된다. 요즘이라면 중추(中秋)에 해당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지만 요즘의 날씨는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중추의 날 만 같아라라고 볼 수 있다.

 

중추 때가 되면 연례 행사가 있다. 그것은 순례법회이다. 금강회에서 주관하는 대규모의 순례법회는 봄과 가을 두 차례 시행된다. 봄에는 6 6, 가을에는 10 3일 이렇게 확정 되어 있다. 그래서 일년에 두 차례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계절에 천년고찰을 찾아 순례를 떠난다.

 

이번 가을 순례는 심원사이다. 경북 성주에 위치하고 있는 천년고찰이다. 가야산 기슭에 있어서 해인사와도 가깝다. 더구나 지역이 가야시대와 관련이 있다 보니 순례가 끝난 후 대가야박물관을 들러 보는 일정으로 잡혀 있다.

 

황금들녁을 바라 보면

 

심원사 가는 길에 본 농촌의 들녁은 황금색이다. 수도권 부근의 들녁에는 추수가 이루어진 곳도 종종 보이지만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황금색 그대로이다. 이렇게 풍요로운 황금색 들을 바라 보면 먹지 않아도 배부르듯이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하지만 농사 짓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편으로 뿌듯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힘겨울 것이다.

 

 

 

 

옆좌석에 앉은 법우님은 농촌출신이다. 기계화가 되기 이전 그리고 기계화 되기 어려운 들녁에서 자란 법우님은 벼배기가 가장 힘들었다고 하였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 까지 낫으로 벼를 베는 작업이 중노동 중의 중노동이라 하였다. 그래서 추수 때가 되면 일주일간 그야말로 허리가 휠 정도로 일을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황금색 바다를 바라 보는 것도 입장에 따라 다름을 알 수 있다.

 

삼층석탑이 돋보이는 이유

 

아침 7시 약간 넘어 출발하여 12시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시간 상으로 5시간 걸린 것이다. 가야산국립공원입구에 자리잡은 심원사는 가람배치가 잘 된 사찰이다. 안내문에 따르면 오로지 삼층석탑 하나만 있었으나 최근 복원 된 것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삼층석탑이 유난히 돋보인다.

 

 

 

 

 

 

심원사는 어디쯤 있을까?

 

심원사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수 없이 사찰순례를 다녔지만 심원사라는 절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우리나라에 전통사찰이 800군데가 넘는다고 하니 아직까지 가 보지 않은 사찰중의 하나에 속할 것이다. 이와 같은 800곳의 전통사찰과 폐사지를 순례 하려 한다면 평생 가도 다 보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방방곡곡에 불교문화유적으로 가득한 곳이 한국이다.

 

심원사는 어디쯤 있을까? 지도검색을 해 보았다. 경북 성주군 수륜면 소재의 심원사는 가야산국립공원 바로 아래에 있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첩첩산중

 

지도를 보면 심원사가 성주군에 속해 있지만 고령군에 더 가깝다. 그리고 대구에서도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깊은 오지에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사찰의 가장 위쪽에 위치한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첩첩산중에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가람배치가 잘 되어 있는 심원사

 

심원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찰은 매우 많다. 이럴 경우 지역명을 앞에 붙여 말해야 혼동 되지 않는다. 그런 성주 심원사는 가람 배치가 이상적으로 되어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 균형을 이루는 전각이 배치가 되어 있고, 가운데는 석탑이 있어서 안정감을 주고 있다.

 

 

 

 

 

 

 

 

 

 

 

 

 

 

 

 

 

 

 

 

 

 

 

 

 

 

신심있는 불자는 탑돌이를 하고

 

성주 심원사의 중앙에는 삼층석탑이 위풍 당당하게 서 있다. 삼층석탑의 크기기 천차만별이지만 이곳 심원사 석탑은 매우 커서 안정감이 있다. 신심있는 불자는 합장을 하며 탑돌이를 열심히 무언가 기원을 하고 있다.

 

 

 

 

목이 달아난 불상

 

성주 심원사에서 인상 깊게 본 것 중의 하나가 파괴된 문화재이다. 목이 달아난불상이 있는 가 하면, 연꽃 문양의 기단도 보인다. 오래 전 이 곳이 번영하였던 곳임을 알게 해 준다. 그러면서 동시에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부처님의 상호는 어떻게 생겼을까?

 

대웅전을 참배 하였다. 불자라면 누구나 들어 가서 삼배하는 곳이다. 그리고 사진 촬영하였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지 알 수 없으므로 이곳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의 상호는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해 두고자 함이다.

 

 

 

 

 

심원사 홈페이지에서

 

심원사홈페이지 에는 심원사의 유래가 실려 있다. 심원사가 신라시대 때 창건 되었지만 어느 절과 마찬 가지로 전란으로 인하여 소실 되었고 중창이 반복된 역사가 실려 있다. 가장 최근에는 성주군의 국립공원 가야산지구 문화관광자원 복원계획에 따라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삼원의 옛절이 가야산에 있는데

 

한국의 전통사찰은 일반적으로 심산유곡에 숨은 듯이 있다. 그래서일까 오늘 날까지 유적이 남아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이 접근 하기 어려운 깊은 산중에 기적처물처럼 서 있는 가람을 보면 절로 탄성이 나게 한다. 아마 이런 마음은 옛날 사람들도 마찬가지 이었을 것이다. 홈페이지에 소개 되어 있는 심원사관련 문헌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삼원의 옛절이 가야산에 있는데,

소나무, 잣나무 그늘 가운데 문을 닫지 않았다.

능엄경을 들고 미묘한 뜻을 물어 보려 하는데,

이몸의 한가함을 빌어 얻을 수 있을는지.

 

(이숭인(1349-1392)선생의 도은집)

 

 

 

 

 

 

 

기심원장로(寄深源長老)’라는 싯구이다. 고려시대 도은 이숭인이 지은 시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도은 선생은 고려말 삼은 중의 한사람이라 한다. 이숭인이 지은 도은집은 200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도은집에는 안양사지와 관련된 문구도 보인다. 그래서 안양이름은 안양사에서, 김중업박물관과 안양사지(安養寺趾)(2014-09-10)’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도은집에서 이숭인은 안양사의 탑은 태조가 세운 옛것입니다. 절의 남쪽에 탑이 있으니 벽돌을 포개서 7층으로 쌓고 기와로 덮었습니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이 기록 등으로 바탕으로 하여 최근 안양사가 발굴 되었다. 안양시의 지명의 유래가 안양사에 비롯되었는데, 기록상으로만 남아 있던 안양사가 유유산업 부지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숭인이 지은 도은집에는 불교사찰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주 심원사 역시 여말 이숭인의 시에 등장한다.

 

여말 삼은이라 하면 고려의 세 충신을 말한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을 말한다. 역성혁명을 일으킨 새로운 왕조를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 세 명의 충신들이다.

 

이숭인은 도은집을 남겨서 문집이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다. 그 도은집에 실려 있는 심원사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한가함이 느껴진다. 가야산을 배경으로 하여 심산유곡에 있는 심원사를 마치 지금 보는 듯 하다. 600년전의 도은 이숭인선생도 저 멀리 굽이 굽이 첩첩산중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피폐해진 민중들의 삶과 세월의 무상함이

 

심원사와 관련하여 또 다른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심원사를 지나가는데 오래된 절이라 거의 허물어지고 중이 없는 상태였다. 과거에 내가 여러 번 잠을 잤던 곳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절간의 문밖에 이르러 말 위에서 내려 잡초와 나무를 헤치며 얼마쯤 가다가 길을 잃고 한참 동안 방황하였다.

 

심원암에 당도하니 여기서부터는 수석이 조금씩 맑아 보였다.

 

엊그제 심원암에서도 중이 없어 들어가지 않았는데 지금 또 그 경우를 만났으니,

이 어찌 흉년이 들고 부엌이 많아 산속의 중들도 삶을 지탱해 내지 못하여 곳곳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산속의 중도 이와 같으니 마을 백성들의 사정을 알만하다. 곤궁한 마을은 집만 덩그렇고 사는 사람이 없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한강 정구(1543-1620)선생의 한강집2 유람록)

 

 

 

 

 

 

 

이 기록은 17세기 초의 기록이라 볼 수 있다. 기록으로 보아 심원사가 많이 퇴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 때문일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원종(1622-1680)의 경산지에 따르면 만력 계사년(1593) 봄에 호남의 의병들이 실화하여 심원 일대까지 불타는 바람에 거의 씨도 남지 않았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호남 의병의 세력이 이곳 성주지방에 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심원사가 불탄 원인이 의병에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실화 때문이라 하였다. 의병들이 왜군을 물리는 치는 과정에서 발생된 화재로 본다. 이런 이유로 심원사는 잿더미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강집에 따르면 산속에 스님도 없다고 표현되어 있고 더구나 마을 백성들도 먹을 것이 없어서 곤궁하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민중들의 삶과 세월의 무상함이 잘 표현 되어 있다.

 

세속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

 

또 하나의 기록을 보면 심원사가 성역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 헌정 9(1668)에 작성된 경산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일요암 고려말의 호군 송천우가 도길봉의 사위가 되었다. 길봉은 간신 길부의 아우이다. 길부가 주살을 당하자 천우도 연좌되어 죽게 되었다. 순군이 체포하려 하자 심원사로 달려갔다. 순군이 추격하다가 잡지 못하여 천우가 죽음을 면하였다. 천우는 드디어 머리를 깍고 이 암자를 창건하였다. 대게 고려는 부처를 높이 받들었으므로 비록 사형수라 하더라도 절안으로 도망가면 잡아 가지 못했기 때문이라라고들 한다.

 

(이원종(1622-1680) 경산지, 헌종 9년(1668) 2 불우조)

 

 

 

 

 

 

 

조선시대 사람인 이원종은 전해 들은 이야기를 자신의 문집에 싣고 있다. 그것은 도망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잡히는 죽게 되는 도망자가 깊은 산속의 절로 피신하였을 때 함부로 잡아 가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다. 이는 고려시대 당시 불교를 국교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한다.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사찰은 성스런 장소이다. 어떤 연유로이든지 죄를 지은 자나 쫒기는 자를 모두 받아 들여 주었고 또한 보호해 주는 곳이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절은 세속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성역이나 다름 없다.

 

싸끼야의 아들들 가운데 출가한 자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처벌도 할 수 없다

 

성역으로서 상가는 초기경전에도 보인다. 이에 대하여 출가시켜서는 안될 사람과 구족계를 받기에 부적합한 자들(2014-08-0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글에서 성역으로서 승가에 대한 이야기가 율장대품에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사람]

“여보시오,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마가다 국의 왕 쎄니야 빔비싸라께서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 가운데 출가한 자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처벌도 할 수 없다. 가르침은 잘 설해졌으니, 올바로 괴로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청정한 삶을 영위하여야 한다.’라고 명령했습니다.

 

(41 출가시켜서는 안될 사람3, 율장대품 제1장 크나큰 다발, 전재성님역)

 

 

 

 

 

 

부처님당시 16대국 중 가장 강성하였던 마가다국왕은 부처님교단에 출가한 자들에 대하여 “어떠한 처벌도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출가수행자들의 처소는 ‘치외법권’지역이거나 ‘성역’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요즘도 종종 조계사로 피신하는 시국수배자들을 볼 수 있다.

 

형제 같고 누이 같은

 

매년 두 차례 씩 열리는 금강회 순례 법회에 참석해 왔다. 지난 십년 동안 몇 차례를 제외하고 봄과 가을에 열리는 법회에 참석하여 기록을 남겨 왔다. 십년전과 비교하여 가면 갈수록 참가 인원은 줄어 든다. 이번에는 전세버스가 6대 동원 되었지만 십년전에는 15대 정도인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매년 두 차례의 금강회순례와 매년 두 차례의 기별 순례를 합하면 일년에 네 번 또는 다섯 번 순례를 하게 된다. 그 때마다 참가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바뀐다. 그럼에도 오랜 만에 만나면 마치 친척 보듯이 반갑다. 아마 얼굴이 이제는 익숙해서일 것이다. 이렇게 종교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사실상 가족이나 다름 없다. 모두가 형제 같고 누이 같기 때문이다.

 

 

 

 

 

해서는 안되는 이야기

 

오랜 만에 만나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관점이 다른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세월호사건이라 볼 수 있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였을 때 금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종교이야기, 정치이야기, 지역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는 해 보았자 요새말로 본전도 못 뽑는다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왜 그럴까? 생각하는 바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말로 표현 되는 것도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자칫하면 논쟁으로 발전 되기 쉽다.

 

세월호사건도 그렇다.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대화 내용을 들으니 우려하던 내용이다. 유가족들이 받을 돈이 10억이 넘을 것이라는 등의 말이다. 그러면서 유가족들을 비판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뒷좌석 사람들 뿐만 아니라는 것이다. 상당수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놀란다.

 

법우님 한 분도 세월호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부정적 의견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질서가 그대로 계속 유지 되기를 바래서 일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옆 좌석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법우님이 그렇지 않았다.

 

세월호관련 “~카더라

 

출발 할 때부터 끝날 때 까지 옆자리에 앉아 있었던 법우님은 모임에서 막내에 해당된다. 30대 후반에 불교와 인연을 맺어 지금 여기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십년이 지난 지금도 막내이다. 기별 모임이기 때문에 한번 막내이면 영원한 막내가 되는 것이 이 모임의 특징이다.

 

법우님은 대단히 활동적이다. 자전거로 전국일주 하는 것이 취미라 한다. 그래서 자전거에 텐트를 싣고 사대강 등 어디든지 간다고 한다. 연휴가 길면 2 3일 일정으로 돌아 다니는데 요즘은 주로 섬을 찾는 다고 한다. 섬에서 텐트를 치고 자연과 함께 하는 것이  취미라 하였다. 이렇게 활동적인 법우님은 모바일도 매우 잘한다. 자전거모임에도 가입하여 대화를 주고 받기도 하는데 해외의 자전거족 들의 소식도 페북을 통하여 접하고 교류한다고 하였다.

 

그런 법우님이 최근 세월호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해 주었다. 카톡방에 고향사람들의 모임이 있는데, 어느 날 세월호와 관련하여 글이 올라 왔다고 하였다. 고향후배가 올렸다고 하는데 내용은 최근 트위터나 카톡방에 유포 되어 있는 세월호비방글을 말한다.

 

세월호비방글의 특징은 “~카더라이다. 이런 비방글은 SNS를 통하여 대량으로유포되어서 거의 모든 카톡방이나 트위터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사적인 모임인 카톡방에서 조차 무차별로 유포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퍼뜨린 것으로 보고 있다.

 

카톡방에서 볼 수 있는 세월호관련 “~카더라는 어떤 내용일까? 대부분 카톡방에 퍼진 내용은 대체로 동일하다. 그것은 “1) 사망자에 대한 국가추념일 지정 2) 추모공원지정 3) 추모비 건립 4) 사망자 전원 의사자 처리…”라는 식으로 일렬번호를 매긴 항목이 나열된 것이다. 이런 문자를 보았을 때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자식이 죽어 가슴에 묻은 유가족의 심정을 이해하기는 하지만 너무 한 것 아니야?”라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카더라에 대하여 너무 한 것 아니야?” 라는 마음을 갖게 만들었을 때 유포자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나 다름 없다. 유포자는 바로 이런 점을 노린 것이다. 그래서 유가족들이 농성을 하는 것도 보상금을 많이 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자식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어서 특별법을 요구한 것일 뿐 사망자에 대한 국가추념일 지정 등의 사항을 요구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법우님은 고향후배가 유포하였다는 세월호관련 비방글에 대하여 조목조목 반박하는 글을 올렸다고 한다. 그렇게 하자 후배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올린 글을 내렸다고 한다. 주변에서 이런 식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동창회나 향우회 등 순수한 모임에서 어떤 의도를 가진 글이 대량으로 배포 되었을 때 서로 다투는 모습이다. 이처럼 관점이 다른 민감한 이슈를 친구들 모임 등에 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이는 모임에서 종교이야기, 정치이야기, 지역이야기 이렇게 세 가지 금기사항을 어김에 따라 발생된 사건으로 본다.

 

늙으면 죽어야지?

 

점심시간이 되었다. 늘 그렇듯이 절에서 먹는 점심은 기대가 된다. 비록 나물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 비빔밥에 지나지 않지만 어느 고급식당에서 먹는 것 보다 맛이 있다. 그것은 얼굴이 익숙한 사람들끼리 대화하며 밥을 먹기 때문일 것이다.

 

식사 중에 어느 법우님은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하였다. 올해 나이가 95세인데 요양병원에 있다고 한다. 신체의 일부가 마비 증상이 있고 치매도 있어서 병원에 있게 되었는데 일년 되었다고 한다. 항상 부부가 함께 순례에 참여 하는 법우님 이야기이다.

 

법우님에 따르면 하루에 두 차례 병원에 들른다고 한다. 자식 된 도리로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병이 들어서 오래 사는 것 도 재앙이라 본다.

 

나이가 든 노인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잠자듯이 죽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이다. 종종 조손가정을 소개 하는 TV프로를 보면 삶에 지친 노인이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이처럼 노인들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대부분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말이다.

 

그러나 법우님 말에 따르면 그런 말은 건강할 때나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병이 걸려서 고통을 받으면 오히려 병을 이기고자 하는 의욕이 강하여 삶의 의지를 불태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강하였을 때 늙으면 죽어야지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해보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늙으면 죽어야지 하는 말은 마치 노처녀가 나는 죽어도 시집가지 않을래라는 말과 같고, 장사하는 사람이 이것 믿지고 팔아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그래서 노처녀의 시집가지 않겠다는 말, 장사치의 믿지고 판다는 말, 그리고 노인의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말이 삼대거짓말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삼사순례가 일사순례로 되어

 

이번 가을순례는 일사(一寺)순례가 되었다. 보통 사찰순례한다고 하면 삼사(三寺)순례가 보통이다. 전세버스를 대절하여 어렵게 마련한 것이기 때문에 보통 세 군데 사찰을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순례간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삼사순례를 간다고 한다.

 

이전에는 삼사순례를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사로 줄었다. 두 군데로 한정하는 것이다. 삼사를 하게 되면 시간도 더 소요되고 늦게 돌아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순례는 심원사 한 곳 만 보게 되었다. 그래서 일사순례가 되었다. 그 대신 대가야 박물관 견학 코스가 추가 되었다.

 

 

 

 

 

 

 

산구릉에 크고 작은 수 많은 봉분이

 

순례기간 중에 박물관에 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렇게 일탈이 있게 된 것은 변화를 주기 위함일 것이다. 봄에 건봉사 순례당시에는 속초 동명항 포구에 갔었다.

 

대가야 박물관이 있는 지형은 특이 하다. 산구릉에 크고 작은 수 많은 봉분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숫자가 수백개에 달한다고 한다.

 

 

 

 

 

 

 

 

 

 

 

 

 

 

 

 

 

 

 

 

 

왕의 무덤이 출토 되었는데

 

수 많은 무덤 중에는 왕의 무덤도 있었다. 그곳에서 출토된 왕관 등을 박물관에서 전시해 놓고 있다.

 

 

 

 

 

 

 

 

 

 

 

 

 

 

 

 

 

 

 

 

 

 

 

 

잔인한 순장(殉葬)풍습

 

전시된 유물은 모두 무덤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무덤의 주인공인 왕이 평소 사용하였던 것이나 저승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이다. 각종 그릇, , 말안장, 왕관 등 지배자의 위상을 보여 주는 것들이다. 그런데 무덤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순장(殉葬)’이라는 것이다.

 

정치권에서 나오는 이야기 중에 순장조가 있다. 현대통령과 임기를 함께 하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공직도 맡지 않고 대통령과 최후의 그 날까지 함께 따라감을 말한다. 이렇게 끝까지 따라 가는 사람을 순장조라 한다.

 

순장(殉葬)이라면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그의 아내나 신하 또는 종들을 함께 매장하던 고대 장례 풍속을 말한다. 특히 가야시대의 무덤이 순장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왕의 무덤에서 순장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죽은 왕과 함께 저승에서 같이 살기 위한 목적으로 순장을 하였는데 어린 아이부터 신하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이런 순장의 모습을 보면서 그 때 당시 사람들이 참으로 잔인하였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 되면서 순장풍습은 사라졌다고 한다. 불교의 불살생사상이 강력하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 있잖아요?”

 

대가야박물관을 다 보고 나왔다. 그런데 법우님 한분이 , 있잖아요?”하며 말을 걸어 온다. 종종 순례법회에 나오는 법우님이다. 거사님과 함께 부부끼리 나오지만 거사님이 바빠서인지 혼자 참석한 것 같다.

 

법우님이 보자고 한 것은 음악씨디 때문이다. 이전에 받았던 씨디를 다시 받고 싶다고 하였다. 놀랍게도 씨디가 다 닳아서 소리가 끊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 것이 있으면 받고 싶다고 하였다.

 

음악씨디를 여러 개 만들었다. 2008년부터 만들어서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주었다. 특히 같은 기수의 법우님들에게는 빠짐 없이 다 주었다. 그것도 여러 종류를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나누어 주고 난 다음 나중에 만났을 때 넌지시 음악이 어때요?”라고 물어 본다. 그러면 거의 대부분 좋다라고 말한다. 어떤 법우님은 즐겨 듣는 천수경 등 독송용 테이프를 치우고 씨디음악만 듣는다고 하였다.

 

, 있잖아요?”하며 말을 걸어 온 법우님도 음악씨디를 열심히 듣고 있다고 하였다. 그것도 하루 종일 듣는다고 하였다. 2008년도에 씨디를 보시하였으니 지금까지 6년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매일 수년간 듣다 보면 씨디가 너덜너덜 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음이 끊기는 등 씨디가 파손된 것이라 본다.

 

들어도 질리지 않은 음악

 

법우님은 원하는 씨디를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어 왔다. 아마 이번 순례에 참가하면 볼 수 있을 것이라 하여 미리 준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법우님이 보여 준 사진을 보니 여러 종류의 씨디 중의 하나이다.

 

 

 

 

 

하루종일 들어도 질리지 않은 음악이 있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를 찬탄하는음악이다. 그런 음악은 듣는 것만으로도 공덕이 된다. 그런데 매일 그것도 수년 동안 너덜너덜 해질 때 까지 들었다니 놀랍다.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노래는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마침 그 음악씨디가 있어서 보내 주기로 하였다. 법우님이 택배로 발송될 주소를 알려 주어서 씨디를 발송하는 일만 남았다. 이왕 보내는 김에 여러 종류의 씨디를 여러 장 보낼 예정이다.

 

 

 

2014-10-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