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안양이름은 안양사에서, 김중업박물관과 안양사지(安養寺趾)

담마다사 이병욱 2014. 9. 10. 00:28

 

안양이름은 안양사에서, 김중업박물관과 안양사지(安養寺趾)

 

 

 

지역에 안양예술공원이 있다. 예전에는 안양유원지라 하였다. 그러나 약 10년 전 크게 정비되면서 면모가 일신 되었다. 각종 예술작품과 자연이 어우러져서 몰라 보게 달라졌다. 그래서 종종 찾곤 한다. 특히 무더운 여름에 주로 찾는다. 깨끗이 정비된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잘정비된 상가, 그리고 각종 예술작품이 있어서 언제나 활기가 넘치는 곳이다.

 

김중업박물관

 

올해 들어 처음 예술공원을 찾았다. 초입에 전에 보지 못하던 이름과 마주 하였다. 그것은 김중업박물관이다. 김중업이라면 유명한 건축가이다. 그런데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이곳에 김중업박물관이 새로 생겨난 것이 매우 의아해 하였다.

 

김중업박물관이 있는 곳은 예전의 유유산업부지이다. 예전에 안양유원지 초입에 볼 수 있었다. 커다란 굴뚝이 있는 공장으로서 유유산업이라고 큰 글씨로 쓰여 있는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다른 곳으로 이전해 갔을 것이다. 그 유유산업 부지에는 이제 공원이 되어 있다.

 

이곳에 보물이 있다니!

 

김중업박물관이라 명명된 공원에 들어가 보았다.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이 당간지주이다. 절이나 폐사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구조물이다. 야외에서 법회를 열 때 탱화를 걸어 놓기 위하여 바위로 된 지지대이다.

 

 

 

 

당간지주에 대한 설명문을 보니 보물로 지정 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라면 매우 가치 있는 문화재임에 틀림 없다.

 

설명문을 보니 82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연대가 확실한 것은 명문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문이 새겨진 것은 흔치 않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보물로 지정된 듯 하다.

 

당간지주는 중초사지것이다. 그런데 중초사지는 안양사지의 이전 절이름이다. 이곳 김중업박물관 자리가 예전의 안양사지 자리이기 때문이다.

 

공장안의 삼층석탑

 

당간지주 바로 옆에는 삼층석탑이 하나 있다. 이름은 중초사지 삼층석탑이다고려시대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석탑을 보면 완전하지 않다. 가장 아래층만 온전할 뿐 이층과 삼층에는 기단이 없이 지붕이 포개져 있는 형태이다.

 

설명문에 따르면 현 위치에서 동북쪽으로 80미터 지점에 있었던 것이라 한다. 그러나 1959년 유유산업이 건설되면서 현 위치로 옮겨 왔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유유산업이 건립된 이래 공장안에 이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이 계속 있어 왔다는 이야기이다.

 

유유산업 부지에 안양사지가

 

현재 김중업박물관이라 명명된 구유유산업 부지는 예전에 안양사지이었다. 더 이전에는 중초사지 이었다. 827년에 중초사가 건립되었고, 그 자리에 10세기 초에 안양사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안양사지는 고려 개국시기에 안양사의 창건이 이루어져 번영하다가 16세기 까지 존재하였다. 이후 500여년 간 폐사지로 있게 된다. 그러다 1959년 유유산업이 이 터에 공장을 짓게 된다. 근래 유유산업이 이전 됨에 따라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발굴이 이루어져 안양사지의 면모가 드러났다.

 

고려 태조 왕건이 창건한 안양사

 

구유유산업 부지에 안양사가 있었다. 그런 안양사는 안양시의 유래가 되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또한 규모도 매우 큰 사찰이었다. 특히 고려의 개국과 관련이 되어 있어서 문헌상에 고려 태조 왕건이 안양사를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최근 출토된 기와에서 안양사(安養寺)라는 명문이 발견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 명문으로 인하여 안양시의 유래가 안양사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혀 주고 있다.

 

 

 

 

김중업박물관이라 명명된 구유유산업 부지는 사실상 안양사지나 다름 없다. 지난 2008년 발굴작업이 시작 되어 어느 정도 사찰의 윤곽이 파악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이 절터 이었음을 입증하는 주춧돌이 곳곳에 보인다.

 

 

 

 

 

유유산업 부지에는 건축물이 아직 남아 있다. 도로 등 빈 곳만을 발굴한 것이다. 그래서 현재 발굴된 터를 보면 남문회랑터, 중문터, 전탑터,  금당터, 강당터이다.

 

불국사처럼 회랑터가

 

우리나라에서 회랑터가 있는 곳은 드믈다. 그런 회랑은 경주 불국사를 연상하면 된다. 법당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에 복도식으로 회랑이 나 있는 형태를 말한다. 그런데 안양사지에서는 불국사처럼 회랑터가 발견 된 것이다.

 

 

 

 

 

7층 전탑이 있었다

 

안양사지는 사방에 회랑이 있다. 그리고 중앙에 탑이 있었다. 그런데 탑의 형태가 벽돌로 쌓아 올린 형태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떤 형태일까? 안양사지관에 전시 되어 있는 그림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안양사 7층 전탑 상상도

 

 

전탑은 7층 구조로 되어 있다. 모두 벽돌을 쌓아 올린 탑이다. 땅속에 묻힌 파편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땅속에 묻힌 전탑파편

 

 

탑이 무너져 내려 땅속에 묻힌 것이다. 16세기 이후 오랜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으나 최근 발굴로 인하여 그 실체를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모양은 어떻게 생겼을까? 전시해 놓은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전탑의 벽돌 모양(28.3X14.3X4.7Cm)

 

 

벽돌은 장방형으로 되어 있는데 크기 가로28.3cm, 세로14.3cm, 두께4.7cm 사이즈이다. 이와 같은 장방향 벽돌은 답도와 전탑의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금당이 있던 곳

 

안양사지 중앙에는 금당지가 있다. 금당지는 사찰의 중심공간으로서 오늘날 대웅전에 해당된다. 현재 주춧돌로 위치가 표시 되어 있지만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금당의 규모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은 구유유산업부지의 공장건물이 철거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쪽에 다음과 같은 커다란 건물이 아직 까지 자리잡고 있다.

 

 

 

금당동쪽위에 지어진 유유산업건물

 

 

3층으로 된 구유유산업 건물은 절터 위에 지어진 것이다. 그래서 1959년 유유산업이 건립될 때 안양사지의 유구가 많이 훼손 되었다고 한다.

 

금당터는 건물의 서쪽 도로 부지의 주춧돌만 발견 되었을 뿐이다. 금당의 반은 공장건물로 인하여 더 이상 파악할 수 없다건물은 현재 문화누리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정면9칸 측면4칸의 대규모 강당터

 

금당터 위에는 강당터가 있다. 강당터의 경우 비교적 주춧돌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강당터의 주춧돌을 보면 매우 많다. 설명문에 따르면 정면9, 측면4칸 규모라 한다. 이는 동서로 39.5m, 남북으로 14.4미터에 달하는 대형건물이다. 그런데 설명문에 따르면 이와 같은 구조는 경주 황룡사지의 내부시설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안양사는 황룡사와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건물의 뼈대가 남아 있는 이유는?

 

그렇다면 이렇게 강당터 주춧돌이 잘 보존 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김중업 작품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현재 유유산업 부지에는 두 동의 김중업작품 건물이 있다. 두 동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제거 되었다.

 

건물이 제거 되었지만 이전 건물의 기둥형식으로 뼈대를 남겨 두고 있다. 그리고 뼈대 사이에 수메르설형문자, 고대그림문자 등이 새겨져 있는 여덟 개의 새로운 기둥이 세워져 있다.

 

 

 

 

안양사는 황룡사와 유사한 구조

 

안양사가 황룡사와 유사하게 생겼다는 것은 기록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안양사로 이름이 바뀌기 이전의 중초사를 를 건립한 스님이 황룡사의 주통 황창화상이었기 때문이다. 황창화상이 이곳에 머물면서 공사를 지휘한 기록이 있다는 것으로 경주 황룡사와의 연관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가람배치에서 나타난다.

 

경주 황룡사지를 가 본적이 있다. 이에 대하여 불국사 주인은 누구? 사유화된 문화재관람사찰과 출재가역할분담론(2012-06-18)’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긴 바 있다. 황룡사지의 규모는 엄청나게 크다. 황룡사지에 대한 발굴조감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조감도를 보면 금당지를 중심으로 가람배치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방에 회랑이 있고, 중문을 통하면 목탑이 나오고 금당으로 이어진다. 금당 뒤에는 강당이 있다. 이런 구조는 불국사도 동일하다. 이렇게 본다면 통일신라시대 세워진 절은 대게 불국사나 황룡사와 비슷한 가람배치라 볼 수 있다. 안양사도 예외가 아니다. 황룡사의 스님이 공사감독을 지휘하였으니 황룡사와 유사한 구조가 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안양사의 모습은?

 

그렇다면 고려시대 안양사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안양사지관에 전시 되어 있는 모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것이 안양사의 모습이다. 대찰로서의 사격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려태조 왕건이 건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폐사지로서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주춧돌로 확인 된 가람배치를 보면, 마치 불국사처럼 사방으로 회랑이 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중문을 통하여 들어 가면 7층으로 된 전탑이 나오고, 전탑 뒤에는 금당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금당 뒤에는 전면 아홉칸의 큰 규모의 강당이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이 안양시의 유래가 된 16세기 이전에 실재 하였던 안양사의 모습이다.

 

 

 

 

기록으로 존재하는 안양사

 

안양사는 역사적 기록으로 존재한다. 안양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해 놓은 안양사지관에는 안양사와 관련된 기록을 볼 수 있다.

 

도은집에 따르면 태조왕건(918-943) 당시 안양사의 탑은 태조가 세운 옛것입니다. 절의 남쪽에 탑이 있으니 벽돌을 포개서 7층으로 쌓고 기와로 덮었습니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여기서 도은집은 고려말기의 학자 도은 이숭인의 시문집을 말한다.

 

안양사와 관련하여 대각국사 문집에 기록이 나온다. 문집에 따르면 의천대사(1055-1101)가 안양사를 방문하여 능종숭통의 진영을 참배하고 조사당에서 열반경론 30권을 읽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고려 우왕 7(1381)에는 최영장군이 등장한다. 도은집에 따르면 최영장군이 안양사 7층전탑 중수와 낙성식과 관련하여 왕이 내시 박원계를 보내어 향을 내리고 사리 열 두개와 부처 치아 한 개를 탑가운데 모셨다. 이때 승려 천 명이 불사를 올리고 보시한 시중이 삼천이었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참으로 놀라운 기록이다. 부처님 치아사리는 스리랑카 불치사에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고려시대 말기에 부처님 치아 사리를 안양사 7층전탑에 모셨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다. 더구나 치아사리를 봉안할 때 최고권력자인 최영장군이 관련 되어 있고, 더구나 승려 천명과 신도 삼천명이 모였다고 하니 안양사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게 해 준다.

 

잊혀져간 안양사

 

안양사의 영화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막을 내린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30(1448) 불당의 일과 관련하여 삼성산 안양서터에 큰 절을 다시 창건한다는데 이것이 모두 전하께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법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 참으로 두렵습니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세종시대 당시 안양사는 이미 폐사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다시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숭유억불정책의 조선 대신들이 간언하여 말린 것이다.

 

16세기 이후 안양사는 잊혀졋다. 그러나 탑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중종 25(1530) 신중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안양사, 삼성산에 있다. 절 남쪽에 고려 태조가 세운 7층 벽돌탑이 있고 김부식이 지은 비명은 글자가 결락 되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절은 폐사 되었지만 7층 전탑은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안양사지 조감도를 보면

 

현재 안양사지에는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주춧돌로 가람의 배치 상태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일곱개 층으로 이루어진 지하에서 시대별로 유물이 발견 됨으로 인하여 역사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초반까지 올라 감을 알 수 있다.

 

안양사지는 공원화 되어 있다. 유유산업 부지에 공장건물과 함께 유적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다. 이를 조감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왜 김중업박물관이라 부를까?

 

안양사지는 안양사지라 불리지 않고 김중업박물관이라 불리운다. 그렇다면 김중업과 안양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김중업박물관이 이곳에 설립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박물관을 관리하는 이에게 물어 보니 김중업의 작품이 이곳 유유산업 부지에 있기 때문이라 한다. 

 

조감도에서 2번 건물이 김중업관이라 불리우는 건물이다. 2번 건물은 현재 김중업박물관처럼 사용되고 있다. 2014 3월 개관 하였으니 지지금으부터 불과 6개월전이다. 이렇게 2번 건물이 김중업박물관으로 된 이유는 김중업의 수많은 작품 중에 유일하게 공장건물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것도 1959년 유유산업이 건립 될 때 김중업이 설계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이를 사진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이 건물에 대한 설명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59년에 설계한 초기작품으로 건물의 구조체계를 노출시켜 조형적인 효과를 거두려는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박스형의 건물에서 구조체계와 그 속에 채워진 벽은 재료에 의해 시각적으로 분리된다. 이는 자유로운 입면과 평면의 추구로 건물을 지탱하는 구조체는 다양한 형태와 공간의 조작이 가능하다.

 

유유산업 사무실의 경우 건물 측면으로 돌출된 기둥과 들보는 건물 내벽력의 의미를 없게 하므로 벽체는 유리로 처리되어 건물의 투명성과 개방성을 높인다. 단순하고 간단환 기능은 건물의 명쾌한 구조체계의 벽면분할로 높은 작품성을 지니며, 김중업의 초기작품을 특징 짓는 요소이다.

 

(유유산업 김중업 작품건물 설명문)

 

 

설명문에 따르면 이 건물은 김중업이 1959년에 설계한 초기작품이다. 지금으로부터 55년전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돌출된 기둥과 들보 처리는 매우 독특하여 공장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매우 현대적인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단지 공장의 사무용 건물임에도 이렇게 예술적으로 만든 것이 놀랍다. 그래서일까 공장은 이전해 갔지만 건물은 남아 있다. 작품으로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중업에 관한 유물을 보면

 

김중업의 초기작품이자 공장건물인 현 김중업관에는 김중업에 대한 모든 것이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금년 3월 김중업박물관이 개원 되면서 김중업에 관한 유물을 이곳으로 가져 왔기 때문이다.

 

 

 

 

 

 

 

 

 

 

 

 

 

 

 

 

 

 

 

 

 

 

 

 

시대를 달리 하여 두 가지가 공존

 

구 유유산업 부지는 이제 공원이 되었다. 그런데 이 공원에는 시대를 달리 하여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다. 하나는 안양사지에 대한 것이고  또하는 김중업에 대한 것이다.

 

안양사는 9세기부터 16세기 까지 이곳 부지에서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폐사지가 되었다. 지금은 그 부지 위에 김중업의 작품건물이 서 있다. 이렇게 본다면 구유유산업 부지에는 안양사지와 김중업의 작품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나 명칭은 김중업박물관으로 되어 있다.

 

안양사지관

 

안양사지에는 안양사지라는 말이 없다. 대규모 발굴이 이루어지고 이 발굴된 유물을 전시해 놓은 안양사지관이라는 별도의 건물이 있음에도 김중업박물관이라 불리운다.

 

 

 

 

 

커다란 교회가 우뚝 서있고

 

지금은 김중업박물관이라 불리우는 안양사지에는 주춧돌만 보인다. 그 주춧돌 바로 너머에는 커다란 교회가 우뚝 서있다. 아마 안양사가 번영하였을 때에는 그 땅도 안양사영역이었을 것이다. 그곳에 불교와 관련된 건축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안양사지 마애종이라 해야

 

교회 바로 너머에는 석수동 마애종이 있다. 이는 바위에 새겨진 그림을 말한다. 마애종을 스님이 치고 있는 모습이다. 설명문에 따르면 고려초기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쓰여 있다. 마애종은 안양예술공원 초입에 있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십여년전 마애종을 처음 접하였을 때 참으로 궁금하였다. 주변에는 불교와 관련된 천년고찰은 보이지 않고 단지 예술성이 매우 뛰어 난 작품만 덜렁 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의문이 풀렸다. 그것은 안양사지가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 유유산업 부지에서 안양사유물이 발견 된 것은 2008년도의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 마애종 명칭은 석수동마애종이라 한다. 경기도 유형문회재로 등재 되어 있다. 그러나 이름을 바꾸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바로 옆에 기록상으로만 존재하였던 안양사지가 발견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안양사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하여 창립된 시기와 일치한다. 그래서 명칭을 바꾼다면 안양사지 마애종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극적인 안양사지 발굴

 

안양에 산지 19년이 되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안양예술공원(구안양유원지)를 찾지만 안양사지가 이곳에 있는 줄 몰랐다. 그런데 안양사라는 절이 이곳 예술공원 영역내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안양사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기록으로 남겼는데 2007년도에 단청(丹靑) 아름다운 대웅전, 삼성산 안양사(安養寺)(2007-07-28)’라는 제목으로 기록을 남긴 바 있다.

 

현재의 안양사는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9세기에 건립된 안양사가 아니다. 안양시의 유래가 되는 안양사는 지금은 김중업 박물관이라 불리우는 구유유산업 부지에 있었던 안양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안양사지가 발견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자료를 검색 하여 보니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양시가 안양예술공원 입구에 있던 유유산업 부지를 사들였던 것은 박물관을 짓기 위해서이었다. 부지 내에 있던 중초사지 당간지주등 유적과 한국 근대건축계의 거장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을 중심으로 복합문화공간을 만들고자 계획했었다. 그래서 공장부지를 사들이고 터를 닦는 중이었는대 그 자리에서 절터가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신라 흥덕왕 시대 중초사지의 유물인가 했다. 그곳에 이미 만든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문자가 새겨진 당간지주가 있었기 떄문이다. 뜻밖의 발견에 박물관 건립계획은 수정되었다. 그리고 시굴작업이 확대 되었다.

 

안양사(安養寺)’라는 글자가 분명하게 새겨져 있는 기와가 발견 되었다. 기와가 발견된 곳에서 좀 떨어진 안양예술공원 뒤쪽 삼성산자락에 안양사라는 절이 있기는 했다. 그 절은 한국전쟁 이후에 지어진 것인데 유물은 뭔가 달랐다. 기와의 문양도 그렇거니와 고려시대 최영장군이 세웠던 7층 전탑 일부로 보이는 현재의 안양사가 세워지기 훨씬 이전의 시기를 보여 주었다. 세 차례의 발굴작업을 통해 땅속 깊이 묻혀있던 문화재가 빛을 보게 되었다.

 

( [리뷰]안양사지 특별기획전-천년고찰의 고즈넉함을 거닐다, 안양문화예술재단, 2013-07-11)

 

 

 

 

안영사명 암기와

길이 32.3 cm, 4.7 cm, 두께2.3 cm , 고려전기

 

 

안양문화예술재단의 공식블로그에 실려 있는 글을 옮긴 것이다. 글에 따르면 안양사지가 발견 된 것은 매우 극적임을 알 수 있다. 그 동안 기록으로만 전해져 오던 안양사터가 박물관공사를 하던 중에 발견된 것이다.

 

이렇게 절터가 발견되자 원래 계획을 대폭수정하여 발굴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안양사(安養寺)’라는 명문이 찍힌 기와조각이 발견된 것이다. 그래서 안양이름의 유래가 되는 안양사가 천년 전에 이곳에 실재 하였음이 밝혀 진 것이다.

 

발굴이전의 유유산업

 

안양사지에는 유유산업 시절의 건물 두 동이 아직도 남아 있다.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이라 한다. 그 건물 밑에는 아직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중업이라는 건축가의 작품이 발굴을 위해 건물을 해체 하는 것 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발굴이 이루어지기 전의 유유산업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에 대한 사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발굴당시의 유유산업터

 

공장부지에는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유유산업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안양시가 복합문화공간을 만들기 위하여 인수하였다. 그래서 공사중에 유물이 발견되었다. 2008년 유물발굴 당시의 사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안양사지를 깔고 앉아 있는 김중업작품 공장건물

 

김중업의 작품이라는 두 동의 건물은 남겨 둔 채 빈터에서만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안양사지관의 설명문에 따르면 앞으로의 방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번 발굴조사로 고려전기부터 조선전기에 이르는 안양사의 존재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사지역이 구 유유산업 건물 외곽 일부에 국한되었기에, 각 시기별 변화양상을 규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따라서 향우 보완조사외 추가조사를 통해 그 부족함을 채울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안양사지관)

 

 

 

 

 

설명문을 보면 발굴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 하고 있다. 유유산업 전체 부지가 안양사터 이었고, 지금도 지하에는 안양사와 관련된 수 많은 유물들이 발굴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가 설계한 공장건물이 안양사지를 깔고 앉아 있는 형국으로 되어 있어서 건물 밑 부분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지금은 공원화 되어

 

김중업의 작품인 사무실건물을 비롯하여 커다란 건물이 공장부지를 거의 다 채우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공원화 되어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안양이름은 안양사에서

 

안양시의 유래는 안양사에 시작 된다. 그래서일까 안양사지관에서 홍보용 동영상에서는 다음과 같이 태조왕건과 안양사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또 안양이름은  안양사에서 유래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천수경 원아결정생안양(願我決定生安養)

 

이처럼 안양시가 안양사로부터 유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안양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는 천수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천수경에서 원아결정생안양 (願我決定生安養 )”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원하오니 저희들이 극락세계 태어나게 하소서라는 뜻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안양이라는 말은 극락을 뜻한다.

 

십자가 모양으로 바뀐 안양상징

 

하지만 현재 안양은 이름만 안양일 뿐이다. 안양에는 불교를 믿는 사람들 보다 개신교와 천주교, 즉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신교를 믿는 시장이 세 번 당선 됨에 따라 안양시의 상징도 십자가 모양으로 바뀌었다. 이에 대하여 안양시청의 상징로고는 십자가 형상을 하고 있을까(2008-10-2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안양의 성시화 운동을 주도 하였던 보수정당출신의 S시장 시절에 일어난 일이다. 십자가 문양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안양이라는 뜻이 본래 극락을 의미한다. 이는 불자들의 생활경전이라 볼 수 있는 천수경에 들어 있는 문구이다. 그럼에도  영문으로 ANYANG이라 하여 첫글자 A를 따서 에이 플러스(A+)라 한다. 그 에이플러스가 결국 십자가 문양으로 되었다. 성시화를 주도하였던 S시장 시절에 발생한 일이다. 그래서 시의 곳곳에는 십자가를 상징하는 문양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수카바티

 

하지만 안양시가 안양사에서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 있다. 법륜스님의 강연이 안양시민회관에서 열렸는데 진보진영에서 당선된 시장의 말에 따르면 안양FC(Football Club)의 구호가 수카바티라 한다. 수카바티는 산스크리트어로 극락을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아직까지 안양이 안양사에서 비롯 되었음을 잊지 않은 것 같다.

 

앞으로 천년은 또 어떻게 변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형성된 모든 것들은 무상하다고 하였다. 천년전 이곳에 안양사가 있어서 번영하였으나 지금은 주춧돌과 유물만 남아 있다. 그 자리에는 한국현대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중업의 공장건물작품이 자리 잡고 있다. 명칭도 김중업박물관이라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천년은 또 어떻게 변할 것인가?

 

 

Sabbe sakhārā aniccā ti,    “삽베 상카라 아닛짜” 띠

yadā paññāya passati,            야다 빤냐야 빳사띠                  

Atha nibbindati dukkhe ~         아타 닙빈다띠 둑케

esa maggo visuddhiyā.            에사 막고 위숫디야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

 

(법구경, Dhp277)

 

 

 

2014-09-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