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지 않는 건봉사 순례
건봉사를 향하여
금강회순례법회를 다녀 왔다. 매년 6월 6일과 10월 3일 이렇게 일년에 두 차례 시행 되고 있는 순례법회이다. 전체기수가 참여 하는 큰 순례법회라 볼 수 있는데 이번 순례법회는 ‘건봉사’이다.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건봉사로 떠나는 전세버스는 모두 여덟 대이다. 45인승 버스가 꽉 찰 정도이니 대략 300명 가량 된다. 이렇게 큰 인원이 출발하다고 보니 이동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막히지 않는 길을 찾아 가다 보니 주로 국도로 가게 되었다. 특히 S자형의 진부령길은 오랜만이다. 요즘 대부분 국도가 곧바로 되어 있어서 교량과 터널을 무수하게 통과하지만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진부령길은 전형적인 S자형길로서 옛날의 정취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막히지 않는 길과 옛날길로 가다보니 건봉사에는 예정보다 늦게 도착하였다. 민통선 안에 있다는 건봉사에 도착한 시간은 거의 오전 12시 가까이 되었다.
최전방에 위치한 건봉사
건봉사는 처음이다. 그러나 이전에 기별법회순례지어서 일부 법우님들은 두 번째라 한다. 그런 건봉사는 우리나라 최전방에 위치해 있다. 이를 지도로서 확인 하면 다음과 같다.
건봉사는 다른 절과 달리 민통선 안에 있다. 그래서 불과 이십여년전 까지만 해도 갈 수 없는 절이었다. 그러나 1989년 이후 복원이 되어 현재는 불자들의 대표적인 성지순례 코스가 되었다.
건봉사의 옛날모습은?
건봉사 주차장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불이문’이다. 입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당시 파괴되지 않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라 한다.
한국전쟁당시 격전지이었던 건봉사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전각이 불이문이다. 나머지 전각은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건봉사의 옛날모습은 어떠하였을까? 불이문 바로 옆에는 1920년대에 촬영되었던 건봉사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사진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이것이 19020년대 건봉사전경이다. 불이문 뒤에 크고 작은 수 많은 전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진을 보면 산이 거의 ‘민둥산’에 가깝다. 1920년대 금강산 지역의 모습이다. 지금의 모습과는 천지차이가 난다.
현재 건봉사주변은 매우 울창한 산림으로 뒤덥혀 있다. 이런 민둥산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전역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고 한다. 땔감으로 나무가 사용되기 때문에 무차별적인 벌목에 따른 것이라 본다. 지금도 북한지역의 사진을 보면 민둥산을 볼 수 있는데, 1920년대의 건봉산 모습과 닮았다고 본다.
16번이나 주인이 바뀐 격전지
건봉사는 최근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 그 이전에는 절터만 남아서 폐허나 다름 없었다고 한다. 이유는 이 지역이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이었기 때문이다. 표지판 설명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휴전 직전까지 한국군 5. 8. 9사단및 미군 제10군단과 공산군 5개 사단이 16차례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곳이라 한다. 그래서 건봉사는 전쟁중에 무려 16번이나 주인이 바뀐 곳이다. 더구나 건봉사가 군대의 주둔지가 됨에 따라 건봉사는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불이문 하나만 남겨 놓고 초토화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법한 도량으로 재탄생
‘건봉사지구전투’로 알려져 있는 건봉사는 한국현대사에서 비극적이고도 슬픈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현재는 복원불사가 이루어져 여법한 도량으로 재탄생하였다. 그래서 수 많은 불자들의 성지순례지가 되었다.
사명당이 거병하던 곳
건봉사는 1994년 이후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현재와 같은 사격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표지판에 따르면 옛날에는 대찰이었다고 한다. 1878년 소실 되기 이전에는 3.183칸에 달하는 전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건봉사가 대찰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주둔지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는 사명당이 바로 이곳에서 거병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조선왕실에서는 이곳 건봉사를 호국도량으로 지정하였기 때문에 대찰로서 사격을 유지한 것이라 보여진다.
건봉사의 역사를 보면 전란과 매우 관계가 깊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사명당이 이곳에서 승병을 일으켜 왜군과 대적하였고, 한국전쟁당시에는 아군과 적군의 치열한 격전지이었다. 이런 전쟁의 와중에 건봉사는 늘 초토화 되었다. 그러나 전란이 지나고 나면 다시 복원되는 일이 되풀이 된 것이다. 이렇게 초토화와 복원이 반복된 현장이 건봉사이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사명당의승병기념관
이런 건봉사에 승병활동을 한 사명당을 기리는 전각이 있다. 주차장 바로 옆에 세워져 있는 ‘사명당의승병기념관’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찾는 이가 없다. 내부에는 불도 켜 있지 않아 어둑하다. 그런 어둠 속에서 사명당의 초상화가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시비 ‘사랑하는 까닭’
건봉사에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머문 곳이기도 하다. 만해스님은 백담사에서 주로 머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곳 건봉사에서도 머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시비로 알 수 있다.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한용운의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랑하는 까닭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만해스님의 ‘사랑하는 까닭’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시를 보면 키워드가 백발, 눈물, 죽음이다. 이 시는 무엇을 말하자 함일까? 단순하게 님과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까?
한용의 시에는 ‘님’이나 ‘사랑’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이들은 사랑타령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스님이었던 한용운의 시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불교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시어에 님이나 사랑이라는 말이 등장하지만 이를 불교적 용어로 바꾸어 놓고 보면 시인의 메시지를 알 수 있다. 위 시 역시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불교의 ‘제행무상’을 노래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생겨난 것은 변하여 소멸할 수 밖에 없음에도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라 볼 수 있다.
육대적멸보궁 중의 하나
전란의 폐허속에서 복원된 봉건사에서 볼 것은 무엇일까? 그 것은 두 가지라 본다. 하나는 진신사리가 있는 ‘적멸보궁’이고 또하는 ‘등봉대’이다. 먼저 진신사리에 대한 것이다.
건봉사는 불자들에게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최근 불자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것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기 때문이다. 건봉사가 민통선 안에 있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최근에 성지순례로 각광을 받는 것은 진신사리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건봉사는 육대적멸보궁 중의 하나라 한다.
건봉사 적멸보궁 종무소에 하나의 표가 붙어 있다. 안내 표지판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적멸보궁은 모두 여섯 곳이다. 즉, 통도사, 상원사, 봉정암, 법흥사, 정암사, 건봉사이다. 예전에는 사대보궁이니 오대보궁이니 하여 회자 되었으나 여기에 건봉사가 추가 된다면 이제 육대적멸보궁이라 해야 할 것이다.
108산사순례기도회의 ‘평화의 불’
적멸보궁 내부로 들어가 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평화의 불’이다. 선묵혜자스님이 이끄는 108산사순례기도회가 다녀 갔다는 증거이다. 새겨진 글씨를 보니 2013년 10월 17일이다.
불상이 없는 법당
적멸보궁 내부에는 법당이 있다. 그러나 법당에는 불상이 없다. 법당에 불상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법당 바로 뒤에 부처님진신사리를 모신 탑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당에 별도로 불상을 모시지 않은 것이다. 진신사리탑이 불상을 대신하기 때문에 어느 적멸보궁에서든지 법당에 불상은 모셔져 있지 않다. 그래서 벽면을 터서 유리로 처리하여 진신사리탑이 보이도록 해 놓았다.
진신사리탑 모양을 보니
법당 뒤에는 진신사리탑이 있다. 부도탑 형태로 되어 있는 여러 개의 탑이 있는데 중앙이 진신사리탑으로 보인다. 중앙탑은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좌우에는 이끼가 낀 듯 오래 되어 보이는 탑이 보인다. 생긴 모습을 보니 종모양이다.
스투파가 연상되는 진신사리탑
오래 되어 보이는 진신사리탑을 보자 마치 ‘스투파’가 연상되었다. 마치 그릇을 엎어 놓은 듯한 복발형 모양을 한 것이 스투파이다. 스리랑카에서는 ‘다고바’라 하여 보리수와 함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거대한 스투파가 건립되었는데 ‘산치대탑’이 대표적이다. 스리랑카의 경우 스투파에 대하여 다고바라 부르는데 역시 거대하다.
스리랑카 다고바(스투파)
우리나라에서도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탑을 보면 인도에서의 스투파와 스리랑카의 다고바가 연상된다. 다만 크기가 매우 작을 뿐이다. 만일 이 진신사리탑을 큰 형태로 만든다면 아마 인도의 산치대탑이나 스리랑카의 다고바와 유사하게 될 것이라 본다. 그렇게 된다면 대웅전 앞에서 볼 수 있는 삼층석탑이나 오층석탑 등을 대체할지 모른다.
건봉사에 가면 꼭 보아야 할 곳
건봉사에 가면 꼭 보아야 할 곳이 있다. 그곳은 ‘등봉대’이다. 안내표지판 설명에 따르면 서기 758년 수행승 31명과 신도 1,820명이 이곳 건봉사에서 ‘아미타만불염불회’를 결성하였다고 한다. 만일동안 아미타불 정근을 하며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만일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일년이 365일이므로 만일은 27년이다. 만일 동안 스님들과 신도들이 수행정진한 결과 모두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정토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등봉대이다.
등봉대 가는 길
건봉사에서 등봉대로 가려면 산길을 약 20여분 걸어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개별행동은 되지 않는다. 단체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등봉대가 민통선 안에 있기 때문이디. 그래서 군부대의 협조를 받아야만 올라 갈 수 있다.
지뢰지대
등봉대 가는 길은 통제구역 안에 있다. 오로지 허용된 길로만 통행이 가능하다. 길 양옆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어서 출입을 할 수 없다. 군부대의 통제하에 출입이 가능한 것은 이곳이 민통선지역이기도 하지만 지뢰지대이기 때문이다.
등봉대에 올라가는 길은 그다지 가파르지 않다. 평범한 산길이다. 더구나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다. 육칠년전에 이곳에 와 보았다는 법우님의 말에 따르면 그 때 당시에는 길의 폭이 매우 좁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혀진 것을 보더니 “조금 지나면 포장 될 것 같다”라는 농담을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수 많은 불자들이 찾아 온다는 것을 말한다. 적멸보궁과 함께 이곳 등봉대는 건봉사를 대표하는 명소이기 때문이다.
탑모양이 하나 있을 뿐
등봉대가 건봉사의 명소이다. 그러나 막상 당도해서 보면 적멸보궁에서 보았던 탑모양이 하나 있을 뿐이다. 이곳이 스님들과 신도들이 만일결사하여 기도하였던 장소라는 표시일 것이다.
저 멀리 금강산의 연봉이
등봉대는 전망이 좋다. 시야가 탁 트여 사방이 내려다 보인다. 날씨가 흐리긴 하지만 저 멀리 산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래서 민간인 통제를 담당하고 있는 하사관에게 금강산이 어느 쪽 방향인지 물어 보았다. 그러나 군인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아마도 이곳이 통제구역이다 보니 금강산이 어느 곳에 있는지가 비밀에 속하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어떤 봉우리가 금강산인지는 대충 식별 할 수 있다. 저 멀리 금강산의 연봉이 보였기 때문이다.
되돌아 오는 길에 동명항으로
건봉사순례를 마친 전세버스는 ‘동명항’으로 이동하였다. 동명항은 속초에 있다. 이렇게 순례방식이 변한 것은 이번 순례를 주관한 법우님의 노력에 따른 것이다. 예전에는 이사순례나 삼사순례 하는 것을 당연시 하였으나 이번에는 일사순례 하고 되돌아 오는 길에 명소에 들르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되돌아 오는 길에 속초에 있는 동명항에 가게 되었다.
설악산을 갈 때 돌아 보는 곳이 속초이다. 그 중에 항구가 있는 동명항이다. 그런 동명항은 언젠가 와 본 기억이 있다. 그러나 너무 오래 되어서 기억이 가물하다. 다시 찾은 동명항은 많이 바뀌어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전망대가 생긴 것이다.
전망대에서 항구와 바다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보았던 방파제는 그대로 있다. 오각형 모양의 대형 콘크리트 구조물도 그대로이다. 예전에는 방파제 주변이 노점 등으로 혼잡하였으나 지금은 잘 정비되어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 본 바다는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바위에는 거센파도가 때려서 하얀 포말을 내며 부서진다.
동명항의 명물은 오징어 순대라 한다. 짧은 시간이 주어졌지만 건어물 등 쇼핑하는 사람도 있고 속초의 명물 오징어 순대를 시켜 놓은 사람도 있다.
불가사의한 신행이야기
이번 건봉사 순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귀가하여 보니 저녁 10시가 넘었다. 강원도 북쪽 철책선 가까이 있기도 하지만 도중에 동명항을 들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후 6시 넘어 동명항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해는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에 가까운 날이기 때문에 저녁 8시가 되어도 날이 훤하다.
탑승한 버스에는 여러 기수가 섞여 있었다. 같은 기수의 법우님들은 여섯명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버스 뒷좌석에서는 웃음꽃이 피었다. 지루한 귀가 길에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른 것이다.
법우님들과 이야기를 하면 주로 주로 개인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신행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특히 어떤 법우님들은 은 불가사의한 신행이야기를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과연 그럴까?”하고 의문이 들 정도이다. 그럼에도 매우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거짓말 같지는 않아 보인다.
불교음악씨디를 나누어 주고
버스속에서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주변 법우님들이 관심을 보인다. 후배기수의 법우님들이다. 이들 법우님들에게 씨디를 나누어 주었다. 늘 가지고 다니는 음악씨디이다. 누군가에게 주기 위하여 만든 불교음악씨디이다. 그러면서 말로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단 들어 보면 압니다”라고 말한다.
“들어 보면 압니다”라는 말이 궁금증을 유발하는 것 같다. 지난 4월 경북 울진에 있는 불영사 순례법회기 ‘“스님들이 자비롭다고 생각하세요?”점심공양을 거부한 전통사찰(2014-04-21)’를 작성한 바 있다. 그 글에서 음악씨디 이야기를 하였다. 그랬더니 글을 본 일부 법우님들이 메일을 보내 왔다. 씨디를 구할 수 없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택배로 모두 보내 주었다. 그것도 한장이 아니라 여러장 발송하였다. 또 필요하면 더 보내 줄 수 있다고도 하였다.
검색창에 ‘진흙속의연꽃’을 치면
씨디를 요청한 법우님 중에는 사례에 대한 이야기도 하였다. 어느 법우님은 돈을 보내 겠다다고도 하였다. 또 어떤 법우님은 건강관련 식품을 보내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모두 거절하였다. 음악씨디는 판매용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씨디는 비매품으로서 인연이 있는 분들에게 선물로 보시하고 있다. 그런데 씨디를 들어 본 분들마다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처음 들어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음이 차분해지고 희열을 느낀다고 하였다. 아무래도 부처님 말씀을 노래로 만든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반응을 알고 있기 때문에 늘 몇 장의 씨디를 가지고 다닌다. 이번 순례에서도 다섯 장을 준비 하였다. 그래서 좌석 주변에 있는 법우님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블로그를 소개하였다. 다음 검색창에 ‘진흙속의연꽃’을 치면 사이트로 연결될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러자 법우님들이 관심을 가졌다. 검색이 되었다면 아마 이 글을 보고 있을지 모른다.
다시 오지 않는 건봉사 순례
버스로 이동 중에 인솔을 책임지고 있는 법우님이 한 말이 생각났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라는 말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 의미가 크게 다가오는 것은 왜 그럴까?
아무리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라도 다시는 돌아 오지 않는다. 한때 즐거웠던 일을 회상하며 그 때 당시의 상황을 바라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무상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변화기 때문이다.
그 때 당시로 돌아 갈 수 없는 것은 왜 그럴까? 조건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때 당시와 지금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그 때 당시로 돌아 갈 수 없는 것이다.
그 때 당시를 바라거나 아쉬워 할 필요가 없다. 그 때 당시의 조건과 지금의 조건은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 즐거웠다면 조건이 맞아서 즐거웠다고 알면 그뿐이고, 오늘 괴로웠다면 역시 조건이 맞아서 괴로웠다고 알면 그 뿐이다. 그 어디에도 그 어느 것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번 건봉사순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2014-06-0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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