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깟사빠존자와 두타행(頭陀行),두타산 천은사 가는 길에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22. 12:10

 

깟사빠존자와 두타행(頭陀行),두타산 천은사 가는 길에

 

 

 

다수결의 원칙으로

 

불영사 순례를 마친 순례팀은 천은사로 향하였다. 그러나 천은사로 정하기 까지 논란이 있었다. 천은사는 불영사에서 100키로 이상 떨어져 있고 약 한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라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서울로 돌아가는 시간이 너무 늦다.

 

곧바로 서울로 향하자고 하는 사람들과 원래 계획대로 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의견이 대립되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것은 다수결이다.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물어 통과 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의견 청취 결과 서울에 늦어도 좋으니 당초 계획대로 천은사를 들러 가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래서 버스는 천은사로 향하였다.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천은사 가는 길은 경치가 매우 좋았다.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달렸기 때문이다. 천은사가 강원도 삼척에 있기 때문에 버스는 7번 국도를 따라 달렸다. 그런 7번 국도는 우리나라에서 드라이브 하기에 가장 좋은 코스라 한다. 바다를 보고 달리는 해안도로이기 때문이다.

 

 

 

 

 

 

 

 

 

 

 

 

 

장쾌한 동해바다

 

해안도로를 타고 바다를 바라보면 상쾌하기 그지 없다. 수도권에 가까이 할 수 있는 서해바다와 달리 동해바다는 청정하고 장쾌한 이미지이다. 파란 하늘과 역시 파란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만 보여서 보기만 하여도 속이 후련하다.

 

 

 

 

 

 

 

 

 

 

 

 

가장 좋은 좌석은 어디일까?

 

버스를 탈 때 가장 좋은 좌석은 어디일까? 여행을 많이 다녀 본 사람들은 잘 안다. 그것은 가장 앞좌석이다. 운전석 바로 뒤에 있는 첫 번째 열이다. 그래서일까 해외여행에서 어느 노부부는 가장 먼저 앞좌석을 확보 하였다. 한번 자리가 확보 되자 여행 내내 노부부의 자리가 되었다. 여행경험이 많은 노부부는 자리를 잡을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앞좌석에 앉으면 전망이 좋다. 더구나 경치가 풍광이 좋으면 지루한 줄 모른다. 뒤좌석에서 잠을 자거나 잡담을 하는 것과 다르다. 이번 순례에서 봉사하기를 자처 하였기 때문에 앞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이국적인 정취가

 

바다가 보이는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니 이곳 동해안은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긴다. 태백산맥 너머와 이곳은 마치 다른나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장쾌한 바다와 소나무와 해안절벽등이 어루러진 독특한 풍광이 다른 지역과 확실히 차별화 된다. 그런 면에 있어서 7번 국도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라 보여진다.

 

 

 

 

 

 

 

 

 

 

 

 

 

 

 

 

 

 

 

 

 

 

 

 

 

천은사는 어디에

 

천은사는 어디에 있을까? 지도검색을 해 보았다. 지도로 검색해 보니 동해시에서 태백산맥 방향으로 들어 간 곳에 있다. 해발 1353미터의 두타산아래에 있다.

 

 

 

 

 

 

강원도에 있는 천은사라는 절은 생소하다. 일반적으로 지리산에 있는 천은사가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입장료 문제로 세상에 잘 알려진 천은사와 같은 이름이긴 하지만 이렇게 같은 이름을 가진 절은 무척 많다. 반야사, 백련사, 관음사 등 동명의 절이 많이 있기 때문에 지명이나 산이름과 함께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곳 강원삼척의 천은사는 일주문 현판을 보니 두타산천은사라 되어 있다.

 

 

 

 

 

왜 산이름이 두타산일까?

 

왜 산이름이 두타산일까? 언젠가 직장에서 일박이일로 단합대회를 한적이 있었다. 그때 오락시간이 있었는데 이름 맞추기 게임이 있었다. 말이나 몸짓으로 알아 맞추게 하는 게임이다. 그 때 산이름에 대한 것이 있었는데 사회자가 머리를 치는듯한 시늉을 하였다. 두타산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두타라는 말은 머리를 치는 뜻과 전혀 관련이 없다. 한자어로 頭陀(두타)’라 되어 있지만 역시  한자어 뜻풀이로 해석이 되지 않는다. 두타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를 음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두타는 불교용어이다. 그래서 두타행(頭陀行)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산이름으로도 사용되고 있는 두타는 어떤 뜻일까?

  

깟사빠존자와 두타행

 

두타행은 불교의 승려가 닦는 수행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사전적으로 정의 되어 있다. 두타는 산스크리트어 dhu·ta’를 음역한 것이다. 빠알리어로는 두땅가(Dhutaga)’라 한다. 두타에 대한 사전적 정의로서 불교의 승려가 닦는 수행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 되어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두타행은 어떤 것일까?

 

두타행에 대하여 초기경전에 설명 되어 있다. 상윳따니까야 깟사빠상윳따(S16)이 그것이다. 마하야나에서는 두타제일로 알려진 부처님의 으뜸 가는 제자 중의 하나인 깟사빠 존자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깟사빠존자는 왜 두타행을 하였을까?

 

두 가지 유익한 점

 

깟사빠상윳따 늙음의 경(S16.5)’에 따르면 깟사빠 존자가 두타행을 한 이유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깟사빠 존자가 세존이시여, 저는 두 가지 유익한 점 때문에…”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두 가지 유익한 점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attanā ca diṭṭhadhammasukhavihāra sampassamāno - pacchimañcajanata anukampamāno 'appeva nāma pacchimā janatā diṭṭhānugati āpajjeyya.

 

[깟사빠]

나 자신의 바로 현세에서의 행복을 보면서,

그리고 후세의 뭇삶들에 대한 자비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후세의 뭇삶들은 이와 같은 점을 생각할 것입니다.

 

(Jiṇṇasutta-늙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6.5, 전재성님역)

 

 

깟사빠존자가 말한 것은 두 가지이다. 깟사빠존자가 두타행을 함으로 인하여 현세의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래의 삶들 역시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자비의 마음에서라고 하였다.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이 구절에 대한 초불연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제가 금생에 행복하게 머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후대 사람들을 연민하여서 입니다. 후대사람들은 [저를] 본보기로 하여 따라 할 것입니다.

 

(Jiṇṇasutta-늙음 경, 상윳따니까야 S16.5, 각묵스님역)

 

 

번역에서 ‘[저를] 본보기로 하여 따라 할 것이라 하였다. 이는 깟사빠존자가 두타행을 함으로서 본보기를 보여 준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번역은 성전협과 다르다. 성전협에서는 이와 같은 점을 생각할 것입니다라 하였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번역차이가 나는 것일까?

 

한편에서는 본보기를 따르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고,  또 한편에서는 이처럼 생각할 것이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왜 이렇게 번역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본보기로 하여 따라 함diṭṭhānugati을 옮긴 것인데, 보디 스님의 제안을 받아 들인 것이다. 이것은 diṭṭhi+anugati으로 이해한 것인데 설명은 보디스님, 800280번 주해를 참고할 것.

 

(초불연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이 각주 한 것을 보면 diṭṭhānugati의 번역에 대하여 빅쿠 보디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고 하였다.  아마도 빅쿠 보디의  CDB를 참고한 듯 보인다. 그래서일까 CDB 800페이지 280번 주해를 보라고 하였다.

 

보디스님의 각주를 참고하라고

 

빅쿠 보디의 CDB 280번 주해를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Reading with Se: app’eva nāma pacchimā janatā diṭṭhānugati āpajjeyya. Be and Ee have the plural āpajjeyyu. At KS 2:136 this is rendered: "For surely these [those who will come after us] may fall into error."

 

The translator here evidently understands diṭṭhānugati as resolvable into diṭṭhi+anugati, with diṭṭhi meaning wrong view. Spk and Spk-pt are silent, but I find it more plausible to take the first part of the compound as the past participle diṭṭha, "the seen" in the sense of an example or role model.

 

This interpretation can claim support from the use of the idiom at AN I

126,19-20, 127,22-23; I11 108,5-6, 2 5 1 ,~a~n d 422~01,9 . See too MLDB, n. 57.

 

(280번 주해, CDB 1 800p, 빅쿠 보디)

 

 

빅쿠 보디의 설명에 따르면 diṭṭhānugati에 대하여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사견에 잘못 빠지다라는 뜻이 된다.  이는 diṭṭhti가 일반적으로 사견의 뜻이고, ānugati‘following after’로서 따르다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사견을 따르는 것이 되어 버려 본문의 뜻과 정반대의 번역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가이거의 견해를 인용하여 선입관으로 결정하다뜻으로 또는 보여진 것을 지향하다, 보여진 것을 모방하다의 뜻이라 하였다. 그래서 번역도 후세의 뭇삶들은 이와 같은 점을 생각할 것입니다라 하여 보여진 것을 모방하다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빅쿠 보디는 diṭṭhānugati에 대하여 diṭṭhi+anugati로 분해 하여 설명하였다. diṭṭhi 에 대하여 과거분사로서 diṭṭha’로 보아 보여진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diṭṭhānugati에 대하여 보여진 것을 따르는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깟사빠존자가 두타행을 하여 모범을 보여준 것을 말한다.

 

따를 것인가 vs 생각할 것인가

 

빅쿠보디가 해석한 diṭṭhānugati문구가 들어 있는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a pleasant dwelling in this very life, and I have compassion for later generations, thinking, 'May those of later generations follow my example!

 

(Old, CDB S16.5, 빅쿠보디역)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바로 지금 생에서 즐겁게 머무는 것, 그리고 나는 후세사람을 위하여 후세사람들이 나의 예를 따르기를!”라고 생각하면서 자비를 갖는다.

 

 

이렇게 본다면 diṭṭhānugati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나의 예를 따르는 것(follow my example)”으로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견해를 존중하여 초불연 각묵스님은 [저를] 본보기로 하여 따라 할 것이라 번역하였다. 이는 diṭṭhānugati에 대하여 diṭṭhi+anugati분해하고, diṭṭhi에 대하여 과거분사형인 diṭṭha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전협의 전재성님은 diṭṭhānugati에 대하여 분해 하지 않고 그대로 번역하여 이와 같은 점을 생각할 것입니다라고 생각에 방점을 두었다. 이렇게 본다면 두 가지 번역문이 된다. 하나는 깟사빠의 두타행을 따를 것인가라는 견해가 있고 또 하나는 생각할 것인가라는 견해가 있는 것이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부처님이 포기하였던 고행

 

두타행은 고행이다. 그렇다고 하여 부처님이 포기 하였던 그런 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포기하였던 고행은 초전법륜경에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yo cāya attakilamathānuyogo dukkho anariyo anatthasahito, S56.11)”라 하였다. 자신을 학대하여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고행 그 자체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고행이 깨달음을 이루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고행 그 자체에 집착한다면본말이 전도 된 것이다. 부처님은 고행 그 자체에 집착한다면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고행 그 자체에 집착하는 극단적인 고행을 버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깟사빠의 두타행은 극단적 고행과는 다른 것이다.

 

깟사빠의 두타행은?

 

 출가수행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두타행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견딜수 없을 정도로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깟사빠 존자는 스스로 두타행을 함으로서 두타행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런 두타행은 어떤 것일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깟사빠]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유익한 점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숲에서 사는 자로서 숲의 생활을 찬탄하고, 또한 저는 걸식하는 자로서 걸식의 생활을 찬탄하며, 또한 저는 분소의를 걸친 자로서 분소의를 입는 것을 찬탄하고, 또한 저는 세 가지 옷만을 소유한 자로서 세 가지 옷만을 소유하는 것을 찬탄하며, 또한 저는 욕심이 적은 자로서 욕심이 적은 것을 찬탄하고, 또한 저는 만족을 아는 자로서 만족을 아는 것을 찬탄하며, 또한 저는 홀로 있는 자로서 홀로 있는 것을 찬탄하고, 또한 저는 사교하지 않는 자로서 사교하지 않는 것을 찬탄하며, 또한 저는 정진하는 자로서 정진하는 것을 찬탄해왔습니다."

 

(Jiṇṇasutta-늙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6.5,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두타행의 여러 가지에 대하여 보여 주고 있다. 주로 숲에 머물며 걸식에 의존하는 생활을 말한다. 그리고 시체를 싼 천조각을 모아 만든 분소의를 입고 있다. 이렇게 머무는 것, 먹는 것, 입는 것에 대하여 철저하게 무소유와 소욕으로 일관하는 수행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정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경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지 않으나 청정도론에서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열 세 가지 두타행 (terasadhutaṅgāni)

 

청정도론에서는 열 세 가지 두타행이 소개 되어 있다. 청정도론을 근거로 하여 만든 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열 세가지 두타행(terasadhutagāni)

No

  

    

구분

1

분소를 입는 수행

pasukūlikaga

공동묘지 등에서 버려진 천조각으로 만든 옷

2

삼의만 수용하는 수행

tecīvarikaga

검소한 생활과 여분의 옷에 대한 탐욕을 피함

3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수행

piṇḍapātikaga

항상 걸식에 의지 해야함

4

차례대로 탁발하는 수행

sapadānacārikaga

눈을 내리뜨고 마을의 차례대로 탁발함

5

한 자리에서만 먹는 수행

ekāsanikaga

음식에 대한 갈애를 버림

6

발우의 탁발음식만 먹는 수행

pattapiṇḍikaga

다양한 맛에 대한 갈애를 버림

7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음

khalupacchābhattikaga

음식을 보관하지 않기 위함

8

숲에 머무는 수행

āraññikaga

부적절한 형상 등에 마음이 휘둘리지 않기 위함

9

나무 아래 머무는 수행

rukkhamūlikaga

영원하다는 인식을 버려서 무상을 느끼기 위함

10

노천에 머무는 수행

abbhokāsikaga

해태와 혼침을 제거하기 위함

11

공동묘지에 머무는 수행

sosānikaga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12

배정된 대로 머무는 수행

yathāsanthatikaga

숙소에 대한 탐욕을 버림

13

눕지 않는 수행

nesajjikaganti

바른 도닦음을 증장 시키기 위함

精進

  

 

표에서 13번째 항목을 보면 정진이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눕지 않는 수행으로 소개 되어 있다. 두타수행자가 숲속에서 머무는 것도 힘든 일인데 더구나 눕지 않고 지내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말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가 될 것이다.

 

청정한 삶을 구현하기 위하여

 

열 세가지 두타행을 보면 불교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특히 분소의와 탁발에 대한 것이 그렇다. 공동묘지 등 버려진 천조각을 이어 만든 옷을 입고 걸식에 의존하는 삶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무소유의 삶에 대한 실천일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열 세가지 두타행에 대한 게송이 있다. 그 중에서도 불교를 불교다웁게 만들고 또한 가장 청정한 삶을 구현할 수 있는 것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분소의를 입는 수행(pasukūlikaga)’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수행(piṇḍapātikaga)’이다. 이에 대한 찬탄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1)분소의를 입는 수행에 대한 게송

 

 

Mārasenavighātāya, pasukūladharo yati;

Sannaddhakavaco yuddhe, khattiyo viya sobhati.

 

Pahāya kāsikādīni, varavatthāni dhārita;

Ya lokagarunā ko ta, pasukūla na dhāraye.

 

Tasmā hi attano bhikkhu, paiñña samanussara;

Yogācārānukūlamhi, pasukūle rato siyāti.

(청정도론)

 

 

While striving for Death’s army’s rout

The ascetic clad in rag-robe clout

Got from a rubbish heap, shines bright

As mail-clad warrior in the fight.

 

This robe the world’s great teacher wore,

Leaving rare Kási cloth and more;

Of rags from off a rubbish heap

Who would not have a robe to keep?

 

Minding the words he did profess

When he went into homelessness,

Let him to wear such rags delight

As one in seemly garb bedight.

 

(빅쿠 냐나몰리역)

 

 

마라의 군대를 항복받기 위해 분소의를 입은 수행자는

전쟁터에서 갑옷으로 무장하나 왕족처럼 빛난다.

 

세상의 스승께서도 까시의 비단 옷 등을 버리고

분소의를 입으셨거늘 누가 그것을 입지 못할까?

 

그러므로 비구는 스스로 서원한 말을 기억하여

수행자에게 적합한 분소의 입는 것에 즐거워할지어다.

 

(대림스님역)

 

 

 

2)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수행에 대한 게송

 

 

Piṇḍiyālopasantuṭṭho, aparāyattajīviko;

Pahīnāhāraloluppo, hoti cātuddiso yati.

Vinodayati kosajja, ājīvassa visujjhati;

Tasmā hi nātimaññeyya, bhikkhācariyāya sumedhaso.

 

Evarūpassa hi –

 

“Piṇḍapātikassa bhikkhuno,

 

Attabharassa anaññaposino;

Devāpi pihayanti tādino,

No ce lābhasilokanissito” ti.

 

(청정도론)

 

 

The monk content with alms for food

Has independent livelihood,

And greed in him no footing finds;

He is as free as the four winds.

 

He never need be indolent,

His livelihood is innocent,

So let a wise man not disdain

Alms-gathering for his domain.

Since it is said:

 

“If a bhikkhu can support himself on alms

And live without another’s maintenance,

And pay no heed as well to gain and fame,

The very gods indeed might envy him” (Ud 31).

 

(빅쿠 냐나몰리역)

 

 

탁발음식 덩이에 만족하고

타인에 의존하지 않는 생활을 하고

음식에 탐욕을 버린 수행자는 사방에 자유롭다.

 

게으름을 떨치고, 생계가 청정하다;

그러므로 지자는 탁발하는 것을 경멸하지 말아야 한다.

 

탁발음식으로 자신을 지탱하고

타인에 의해 부양되지 않는 비구가

만약 이득과 명예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신들도 그를 부러워한다.(Ud31)”

 

(대림스님역)

 

 

두타행은 빅쿠의 전유물일까?

 

그렇다면 두타행은 반드시 빅쿠만 하는 것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빅쿠니도 할 수 있고, 심지어 재가불자도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다만 그 범위를 제한 하고 있다. 열 세가지 항목을 준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청정도론을 근거로 하여 두타행 대상에 대한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두타행의 내용과 대상

No

수행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

재가

1

분소의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2

삼의만 수용

수용

수용

X

X

X

3

탁발음식만 수용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4

차례대로 탁발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5

한 자리에서만 먹음

수용

수용

수용

수용

수용

6

발우 음식만 먹음

수용

수용

수용

수용

수용

7

나중 음식 먹지않음

수용

X

수용

X

X

8

숲에 머묾

수용

X

수용

X

X

9

나무 아래 머묾

수용

X

수용

X

X

10

노천에 머묾

수용

X

수용

X

X

11

공동묘지에 머묾

수용

X

수용

X

X

12

배정된 대로 머묾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13

눕지 않음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사미니:식차마나포함

재가: 우빠사까(남자신도)와 우빠시까(여자신도)

 

 

표를 보면 빅쿠니의 경우 숲이나 노천에 머무는 수행이 허용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여성이라는 신체특징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이 숲에서 머물 때 항상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금한 것이라 보여진다. 재가불자의 경우 허용되는 것은 두 가지 뿐이다. ‘한자리에서만 먹는 수행발우의 탁발음식만 먹는 수행이 이에 해당된다. 마치 템플스테이하면 밥을 먹을 때 행동처럼 보인다. 이처럼 두타행은 빅쿠의 전유물은 아니다. 출가자이건 아니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범위는 제한 되어 있다.

 

후세사람들이 전부 따라 하기에는

 

출가자에게 있어서 열 세가지 두타행은 매우 가혹한 것이다. 그래서 불교의 고행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고행에 대하여 모든 빅쿠가 다 따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정신만은 계승해야 될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경에서 말한 diṭṭhānugati의 뜻은 아마도 후세의 뭇삶들은 이와 같은 점을 생각할 것입니다라고 번역한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후대사람들은 [저를] 본보기로 하여 따라 할 것입니다.”라 하여 must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런 번역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비록 깟사빠가 두타행을 하여 모범을 보이긴 하였더라도 후세사람들이 이를 전부 따라 한 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초불연에서 왜 이런 번역이 나오게 되었을까? 아마도 빅쿠보디의 견해를 너무 존중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깟싸빠여, 훌륭하다. 깟싸빠여, 훌륭하다.”

 

부처님은 깟사빠의 두타행에 대하여 어떻게 보았을까? 경에서는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Sādhu, sādhu, kassapa, bahujanahitāya kira tva kassapa, paipanno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 Tasmātiha tva kassapa, sāāni ceva pasukūlāni dhārehi nibbasanāni, piṇḍāya ca carāhi, araññe ca viharāhī'ti.

 

 

[세존]

깟싸빠여, 훌륭하다. 깟싸빠여, 훌륭하다. 그대는 많은 사람의 안녕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참으로 이와 같이 실천해왔다. 그러므로 깟싸빠여, 닳아빠진 베로 만든 그 분소의를 걸치고 걸식하러 다니며 숲속에서 살아라."

 

(Jiṇṇasutta-늙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6.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깟사빠의 두타행에 대하여 칭찬하였다. 그 칭찬의 말이 ‘sādhu’이다. 사두는 ‘good; virtuous; profitable. (adv.), well’의 뜻으로 좋다또는 훌륭하다의 뜻이다. 금강경에서도 부처님이 수보리 존자를 칭찬할 때 선재 선재(善哉善哉)’라 하였는데 이는 사두를 음역한 것이다. 우스개 말로 사두에 대하여 우리말로 그려 그려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아름드리 나무의 천은사길

 

두타산천은사라 쓰여 있는 일주문을 지나 천은사길로 들어 갔다. 천은사로 가는 길에 아름드리 나무가 많이 보였다. 수령이 250년 된 느티나무가 여럿 된다. 또 아름드리 나무가 많아 태백산맥 너머의 지역과 차이가 난다.

 

 

 

 

 

 

 

 

 

 

 

 

 

 

 

 

 

 

 

 

 

 

 

 

 

 

 

노보살이 순례팀을 반겨주고

 

천은사에 도착하자 종무소의 노보살이 순례팀을 반겨 준다. 늘 그렇듯이 순례자들은 법당에 들러 참배한다. 천은사에는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는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최근 지어진 전각들이 대부분이다.

 

 

 

 

 

 

 

 

 

 

 

 

 

 

 

 

 

 

천은사에는 동백꽃이 한창

 

사람들은 두타라는 말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일반사람들은 그저 부르는 산이름 정도로 알 고 있으나 사실 두타라는 말은 불교용어이다. 이처럼 불교용어가 산이름으로 사용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 것이다. 두타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천은사에 동백꽃이 한창이다.

 

 

 

 

 

 

 

 

 

 

 

 

 

 

 

 

 

 

 

 

 

 

 

 

2014-04-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