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세간적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

담마다사 이병욱 2015. 2. 14. 12:00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세간적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

 

 

요즘은 연예인들의 이야기가 눈길을 많이 끈다. 인터넷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기사가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가십거리이다. TV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어느 TV방송이든지 연예관련 프로가 있어서 연예인들의 동정을 보여 준다. 그런 이야기 중에 의미 있는 보도를 보았다. 그것은 유행가의 가사에 대한 내용이다. 지난 60년대부터 지금까지 50여년간의 유행가 제목에 대하여 키워드 검색을 해 보았더니 1순위가 사랑’, 2순위가 마음이었다고 한다.

 

사랑타령과 마음타령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가 사랑마음이다. 그래서 사랑으로 노래가 시작 된다면 사랑타령이 되고, 마음으로 시작 된다면 마음타령이 될 것이다. 만일 사랑타령과 마음타령을 빼 버린다면 노래는 재미가 없어 질 것이고 유행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과 마음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많이 사용되는 것일까? 이는 인간의 근원적은 욕망이라 볼 수 있다. 남녀간의 사랑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간혹 아가페적 사랑에 대한 가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찬송가 중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남녀간의 사랑타령은 나이에 대한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나이 든 원로 가수들도 사랑타령을 하고, 한물간 중견가수도 사랑타령을 한다. 물론 십대나 이십대의 신세대 가수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렇게 전세대에 걸쳐서 사랑타령을 한다.

 

사랑한다고 하여 그 사랑이 오래 가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음타령을 한다. 이렇게 노래를 보면 사랑과 마음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두 개의 키워드를 하여 만들어진 노래는  과거에도 있었고, 오늘도 내일도 계속될 것이다.

 

남녀간의 사랑에 있어서 사랑은 십이연기에 따르면 갈애에 해당된다. 갈애는 집착으로 되고, 집착은 업으로서 존재를 유발하고 만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라는 정형구에서 알 수 있다. 사랑은 태어남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초전법륜경 고성제에 따르면 태어남에 대하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이 함께 생겨난다.(S56.11)”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타령의 결말은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그래서일까 유행가의 가사를 보면 사랑의 기쁨 보다는 사랑으로 인한 슬픔과 괴로움이 더 많은 것 같다.

 

조건발생하는 마음

 

사랑을 행위로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행위라 함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를 말한다. 이를 한자어로 신구의삼업(身口意三業)’이라 한다. 이런 신구의 삼업에 대하여 또는 행위라 하고, 영어로는 액션(Action)’, 빠알리어러는 깜마(Kamma)’라 한다. 십이연기에서는 상카라(형성)’라 한다. 그런데 십이연기 정형구에 따르면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라 되어 있다. 여기에 유행가 노래가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사랑과 마음을 대입하면 사랑을 조건으로 마음이 생겨나며가 될 것이다.

 

남녀간의 사랑을 하면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가 뒤따른다. 이는 다름 아닌 사랑의 행위에 해당된다. 그런데 행위를 하면 그 행위를 조건으로 하여 반드시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마음에 대하여 십이연기에서는 윈냐나라 한다. 한자어로는 ()’이라 한다.

 

그런데 마음을 뜻하는 식이라는 말은 십이연기의 삼세양중인과에서 재생연결식을 뜻한다. 이번 생과 다음 생을 연결시켜 주는 마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 식은 반드시 조건발생한다는 사실이다. 행위를 조건으로 하여 식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건발생하지 않는 식은 있을 수 없다. 어떤 변치 않는 마음이 있어서 마치 옷을 갈아 입듯이 육체를 새로 받아 마음이 윤회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한소급하다보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어떤 이는 유전적 요인으로 보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DNA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는 맞지만 전부 맞다고 볼 수 없다.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전적으로 맞다고 볼 수 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두 맞다고 볼 수 없다. 왜 그럴까? 부처님은 DNA, 유전적 요인에 대하여 말씀 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초기경전 어디에도 부처님이 우리의 몸과 마음이 형성된 것에 대하여 유전적 요인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전적 설명 요인을 부정하였다. 이는 다음과 같은 초기경에 실려 있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 잠부디빠에서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따다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놓고 ‘이분은 나의 어머니, 이분은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 식으로 헤아려나간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의 ‘어머니의 어머니’ 식의 헤아림이 끝나기 전에 여기 잠부디빠의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모두 소모되어 없어져버릴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S15.1)

 

 

 

 

 

 

여기서 잠부디빠는 한역으로 ‘염부제’라 하며 인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누구일까?” 또는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일까?”라며 무한소급해 올라 가면 어떻게 될까? 마치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따다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놓고  족보를 따져 나간다면 인도대륙의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남아 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나를 찾는 것이 의미가 없음을 말한다. 만일 나를 찾아 무한소급하여 올라간다면 이 세상을 있게 하는 하나의 원인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누군가는 ‘존재의 근원’이라 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궁극적 실재’라 할 것이다. 이에 인격을 부여하면 야훼, 브라흐마 등 창조주가 될 것이다.

 

부처님은 원인 없이 존재한다는 존재론을 부정하였다. 어떤 것이든지 반드시 조건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변치 않는 마음이 있다거나 영혼을 부정하였다. 마음은 반드시 조건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마음 역시 조건발생의 산물로 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단지 유전적 요인 또는 DNA, 그리고 진화론적 관점으로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

 

요즘 과학을 전공하는 학자들 중 일부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진화론적 관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이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던 아메바와 같은 원생동물 등을 들먹이며 진화론적 설명을 시도 한다. 연기법도 진화론적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심지어 부처님 당시 사람들이 요즘과 같은 과학을 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업타령한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 즉 오온을 떠나서 가르침을 설하지 않았다. 오온의 범위를 벗어나 우주론적으로 또는 생물학적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은 업으로 인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이 형성되었음을 설명하였다. 진화론적 연기론을 신봉하는 학자들 입장에서 본다면 부처님은 업타령을 한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형성된 것에 대하여 유전적 요인으로 보고 있다. 과학자로서 당연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DNA로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부처님 당시 오늘날과 같은 과학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진화론적 관점으로 연기법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이는 존재론에 바탕을 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존재론이 아니다. 이는 마치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따다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 놓고  족보를 따져 나가는 것이 무의미 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을 말씀 하고자 한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인식론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왜 인식론인가? 그것은 현상에 대하여 그대로 알고,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존재의 근원을 탐구 하여 이 세상의 원리를 밝히고자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우리의 몸과 마음을 탐구하여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의 방법에 이르는 길을 알려 주었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진리를 설한 것은 존재론이 아니라 분명히 인식론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깨달음이다.

 

인식론을 바탕으로 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마음은 매우 중요한 키워드이다. 그런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원래 있던 마음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어떤 마음이든지 조건 발생하는 것이다. 한생에서 다음생으로 갈 때 역시 마음이 간다. 마음이 있어야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이 없다면 세상도 없을 것이다. 마음이 없는 상태가 열반이다. 더 이상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세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디. 그런데 마음은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통제 불능이 마음이다. 그래서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라는 단멸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행위가 있는 한 그 행위를 조건으로 하여 마음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는다고 하여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이 다시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 없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마음의 작용이다. 그러나 그 마음은 반드시 행위에 따라 조건발생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나는 왜 이모양 이꼴일까?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왜 나는 이렇게 생겼고 왜 이런 성향을 가졌을까?”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의 얼굴은 도중에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태어났을 때 모습과 늙었을 때 모습은 다르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무리 성형수술을 해도 본 바탕은 바꿀 수 없다. 이런 원리는 마음에도 적용된다. 이런 마음을 성향이라 볼 수 있다.

 

성향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사람이 변했다라고 말하지만 자세히 뜯어 보면 본질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도둑놈은 여전히 도둑질이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남의 물건에 손이 가는 것은 성향 때문이다. 사기꾼 역시 거짓말하면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속여 먹이려 드는 것은 한번 형성된 성향 때문이다.

 

성향은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도중에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마치 얼굴이 일생동안 바뀌지 않고 유지되듯이 한번 형성된 성향 역시 일생동안 지속된다. 그렇다면 사람의 얼굴과 성향을 결정짓는 것이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진화생물학을 신봉하는 자들은 유전적 요인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는 진화생물학이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부처님이 진화생물학과 같은 존재론적 방식으로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존재론을 배격하면서 인식론으로 설명하였다.

 

부처님은 우리의 얼굴과 성향이 일생동안 지속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였을까? 이는 초기경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M135)

 

 

 

shapes

 

 

부처님은 업()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이는 행위를 말한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가 바로 업인 것이다. 빠알리로 깜마(Kamma)라 하고 영어로는 액션(Action)이라 한다. 그래서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라고 분명히 선언하였다. 이런 정형구는 초기경 도처에 등장한다.

 

진화생물학을 몰랐던 부처님 당시 부처님은 업이 뭇삶들을 차별한다고 말씀 하셨다. 한번 형성된 얼굴과 성향이 일생 가는 것도 이전 생에 지은 업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진화생물학에서 말하는 유전적 요인이나 DNA의 작용과는 다른 것이다.

 

부처님이 오늘날 설하였다고 하더라도 진화생물학적으로 연기법을 설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존재론에 바탕을 둔 진화생물학으로는 인식론에 바탕을 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식론에 바탕을 두어야 연기법이 성립한다.

 

연기법을 바탕으로 한 것이 사성제이고 십이연기이다. 이런 연기법은 존재론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인식론에 바탕을 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식론은 앎, 이해, 깨달음과 관련된 것이다.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관찰하였을 때 허무주의와 영원주의가 타파 되고, 연기의 고리를 끊어 버렸을 때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되는 것을 아는 것도 인식론에 따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과학문명시대인 지금 이 시점에 오셨어도 인식론에 기반을 둔 연기법을 설하지, 존재론에 바탕을 둔 진화론적 연기법을 설할 리 없을 것이다.

 

성자로 거듭 태어났을 때

 

한번 형성된 얼굴과 성향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성향은 바뀔 수 있다. 얼굴은 성형하여 아무리 뜯어 고쳐도 본바탕은 바꿀 수 없지만 성향은 바뀔 수 있다. 그것도 극적으로 바뀔 수 있다. 어떻게 바뀌는가? 성자의 흐름에 들면 바뀐다.

 

유아론적 유신견을 타파 하였을 때 성향이 확 바뀐다. 그래서 현재의 나는 이전의 나가 아니다. 새로 태어난 것이다. 비록 몸과 얼굴은 이전 모습 그대로 있지만 성향 즉 마음이 확 바뀌어 있기 때문에 새로 태어난 것으로 본다. 이는 앙굴리말라경(M86)에서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ariyāya jātiyā jāto)”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성자가 됨으로 인하여 이전의 나는 죽고 새로 태어난 것이다. 물론 인식론적이다.

 

축생계의 생물들보다 다양한 성향

 

유행가 가사를 보면 사랑타령 아니면 마음타령이다. 그런데 이 사랑과 마음이라는 키워드는 불교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말이라는 사실이다. 사랑에 대하여 업으로 치환하면 업타령과 마음타령이 될 것이다.

 

업과 마음은 십이연기에서 무명--의 순으로 설명된다. 이를 우리말로 하면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가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철저하게 조건 발생이다. (상카라: 형성)이 생겨난 요인은 무명에 따른 것이고, 업으로 인하여 마음()이 발생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 즉 오온이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한번 형성된 몸과 성향(마음)은 평생간다는 사실이다. 특히 성향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축생계의 생물들처럼 그렇게 다양한 어떠한 다른 종류의 생물도 보지 못하였다. 수행승들이여, 그 축생계의 생물들조차도 마음에 의해서 다양해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렇지만 그 마음은 축생계의 생물들보다 다양한 것이다.” (S22.100)

 

 

동물의 왕국을 보면 다양한 생명체를 만난다. 심해에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생명체도 많다고 한다. 땅속에도 전에 보지 못하던 생명체로 가득하다. 이미 밝혀진 것과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생명체를 합하면 그 수는 매우 많을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생명체 들 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고 하였다. 비록 인간이라는 호모사피엔스 한 종에서 마음의 다양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마음은 축생계의 생물들보다 다양한 것이다라 하였다. 여기서 마음에 대하여 순간순간 조건발생하는 마음이라기 보다 한번 형성된 성향으로 본다.

 

성향은 대체로 일생을 가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얼굴과도 같다. 이렇게 본다면 호모사피엔스 한 종에도 이 세상의 축생이나 곤충 등 생명체의 종 보다 더 많은 성향을 가진 인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식론에 바탕을 둔 연기법

 

사람의 얼굴이 다르고 성향이 다른 것은 이전에 지은 업에 따른다. 그래서 부처님은 업에 따라 차별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는 요즘 과학자들이 진화생물학에 따른 진화연기를 주장하는 것과 다르다. 왜 그럴까? 탄생의 뿌리에 대하여 마음의 상태로 보기 때문이다.

 

조건 발생하는 마음에 따라 한번 형성된 성향은 평생간다. 이런 성향에 대하여 진화생물학에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몸이나 얼굴생김새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지만 성향 등 마음에 대해서는 진화생물학 또는 진화연기론으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이 왜 존재론에 기반하지 않고 인식론에 바탕을 둔 연기법을 설하였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2015-02-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