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 날 때 측은지심을

담마다사 이병욱 2015. 2. 10. 09:54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 날 때 측은지심을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가족관계, 친구관계, 직장관계 등 관계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집에 가면 남편이나 아내로서, 또는 아빠나 엄마로서 역할을 한다. 직장에 가면 자신의 역할에 맞는 직위가 있다.

 

페르소나(Persona)

 

사람들은 각자 가면을 하나씩 쓰고 산다. 집에서는 가장이라는 가면을, 직장에서는 직위라는 가면을 쓰고 산다. 마치 연극배우가 상황에 맞는 배역을 소화해 내는 것 같다. 이런 가면을 또 다른 말로 페르소나(Persona)’라 한다. 융심리학에서 나온 말로 또 하나의 페이스(Face)를 말한다. 그래서 집에 가면 가장의 얼굴, 직장에 가면 예를 들어 부장의 얼굴을 한다.

 

여러 가지 얼굴로 살다 보면 자신의 참된 얼굴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가면을 자신의 얼굴로 착각할 때도 있다. 직장에서 부장이라는 직함이 자신의 본 모습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다. 이렇게 사람들은 또 하나의 페이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상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대표적이다.

 

네 가지 상(四相)’에 하나 더 추가된 것이 있다. 절에 가면 스님이 있는데 스님상이 있다. 스님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스님상을 말한다. 신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도는 신도답게 살아야 한다는 신도상을 말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학생답게, 군인은 군입답게, 공무원은 공무원답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학생상, 군인상, 공무원상을 말한다.

 

집도 없고 절도 없을 때

 

누구나 하나 이상의 상(相)을 가지고 살아 간다. 그래서 그때그때 알맞은 역할을 해야 한다상이 너무 강하면 어떻게 될까? 아상(我相)이 너무 강하면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럴 경우 나홀로가 될 수 있다.

 

우리 속담에 집도 절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집도 없다라는 말은 알겠지만, ‘절도 없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아마 옛날에는 절이 양로원이나 고아원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 본다. 요즘도 TV를 보면 종종 절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오세암이나 봄 여름 가을 겨울같은 영화에서도 알 수 있다.

 

옛날에는 갈 곳이 없으면 절로 갔었나보다. 요즘도 툭하면 머리깍고 절에나 갈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절이라는 곳이 삶에서 마지막으로 거쳐 가는 장소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가야 할 집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수단인 가야 할 절도 없다면 그 심정은 어떠할까? 그래서 집도 절도 없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돌아갈 집이 있기에

 

남자는 가정과 직장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둘 중에 하나만 없어도 방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정도 없고 직장도 없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 방황의 극치가 될 것이다. 이런 경우 집도 절도 없다라는 말이 실감날지 모르겠다.

 

집은 있는데 직장이 없다면 산으로 가게 될 것이다. 아이엠에프(IMF)당시 실직한 수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았다. 서울 근교의 북한산이나 관악산은 실직한 사람들이 즐겨 찾는 장소가 되었다. 그곳에 가면 밥도 얻어 먹을 수 있었다. 갈곳이 없어 산으로 온 자들에게 점심공양을 무료로 해 주는 사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직장을 잃으면 주로 산으로 가는가 보다.

 

사람들이 산으로 가는 것은 마땅히 갈 직장이 없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돌아가야 할 집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재작년 해외여행을 했다. 해외여행의 조건으로 돈과 시간이 있어야 하지만, 필요조건이 충족되지 않음에도 성지순례라는 명목으로 해외여행을 강행하였다. 그런 여행지에서 자기소개 사간이 있었다. 어떤 이가 자기소개를 하면서 남긴 멘트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돌아갈 집이 있어서 다행입니다라는 말이다. 비록 먼 타국에 와 있지만 여행이 끝나면 돌아갈 집이 있기에 안심한다는 것이다.

 

왜 독살이 하는가?

 

누구나 돌아갈 집이 있다. 그래서 집으로가는 것이다. 그러나 집이 없는 사람은 집에 갈 수 없다. 집이 없으면 어디로 가야 할까? 방황이 시작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아갈 집이 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흔히 말하는 노숙자가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빚 등으로 인하여 집으로 갈 처지가 아닌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돌아 갈 곳이 있다. 비록 그 곳이 누추할지라도 돌아 갈 곳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안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처가 있다. 크고 작건 간에 자신의 몸하나 누울 공간은 있다. 부자나 가난한자나 공통적으로 하루 세 끼 먹고 살듯이, 오척단신 누울 공간정도는 있는 것이다.

 

거처에는 혼자 있을 수도 있고 여럿 있을 수도 있다. 혼자 있으면 독살이이고 여럿 있으면 공동살림이 된다. 그런데 여럿 있다 보면 갈등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조직 중에 가장 최소 단위라 볼 수 있는 가정에서 부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 등이 일어나는 것도 함께 살기 때문이다.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다고 하여 혼자 살면 어떻게 될까? 아마 이 사회는 온통 독살이 하는 사람들로 넘쳐 날 것이다.

 

호불호(好不好)가 명확한 사람

 

사람들은 홀로 살아 갈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관계를 맺고 살아 갈 수밖에 없다. 무인도에서 홀로 살지 않는 한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 살아 간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세상을 혼자 힘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 간다고 생각 하였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가정과 직장에서 긴장과 갈등, 대립이 일어나는 것도 자신()’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자기주장이 뚜렷한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주관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주관이 지나쳐 버리면 어떻게 될까? 아마 완고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한마디로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고집이 센 자들은 대게 이기적이다. 오로지 자기자신 밖에 모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한다. 그래서 누구나 내 뜻대로따라야 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다 보니 호불호(好不好)’가 명확하다. 한번 좋으면 죽어라 좋아하고 한번 싫으면 죽어라 미워한다. 대체로 권력자나 부자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많이 가진 자들이 안하무인격인데 이는 호불호가 분명하기 때문이라 본다.  

 

똥퍼!”

 

호불호가 분명하면 어떤 일이 발생될까? 아마 십중팔구는 탐욕성냄으로 귀결 되고 말 것이다. 한번 좋으면 죽어라 좋아 하는 것은 탐욕의 발로이다. 한번 싫으면 죽어라 미워하는 것은 마음속의 분노가 표출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호불호가 뚜렸한 사람은 탐욕과 성냄으로 사는 자들이다. 부처님이 가장 경계하였던 --로 사는 자들이다.

 

불교에서는 탐욕과 성냄에 대하여 버려야 할 번뇌로 보고 있다. 그런데 번뇌에 대하여 오염원으로도 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탐욕과 성냄으로 사는 자들은 오줌이나 똥과 같은 오염원과 함께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요즘은 화장실이라 하지만 옛날에는 측간이라 하였다. 마당을 가로질러 한켠에 카다란 구덩이를 파서 만든 것이 측간이다. 수세식으로 되어 있는 화장실만 사용하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잘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불과 삼사십년 전까지만 해도 똥퍼!”하는 소리가 들렸다. 똥차들이 골목을 누비고 돌아 다니며 변소의 똥을 퍼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번 똥을 푸면 온동네가 똥냄새로 진동한다.

  

똥냄새는 역겨운 것이다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탐욕과 성냄은 똥과도 같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오염원이기 때문이다.

 

낄레사(kilesa)와 오물장(汚物場)

 

오염원을 빠알라어로 낄레사(kilesa)’라 한다. 왜 낄레사라 하였을까? 그것은사람들을 더럽히고 타락하게 하는 상태로 끌고 내려 가기 때문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이런 오염원으로 탐욕, 성냄, 어리석음, 자만, 사견, 의심, 게으름, 들뜸, 양심없음, 수치심 없음을 들고 있다. 이런 오염원은 냄새 나고 더럽고 악취풍기는 것이다. 그래서 오물장(汚物場)과도 같은 것이 오염원이다.

 

주관이 너무 뚜렸하여 개성이 강한 자가 있다. 그러다보니 좋아하고 싫어함도 분명하다. 한번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조금도 융통성이 없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 내 뜻대로 안되면 마구 화를 낸다. 대게 권력자나 많이 가진 자에게서 볼 수 있다. 이번에 땅콩회항사건으로 구속된 재벌삼세녀가 대표적이다.

 

개성이 강한 자는 이기적이기 쉽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화합하기 어렵다. 호불호가 분명해서 탐욕과 성냄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늘 긴장과 갈등을 유발한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자는 관계가 엉망이다. 가정이나 직장에서나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는다. 가정에서는 싸움 그칠 날이 없고 직장에서는 시기와 질투, 중상모략이 그칠 날이 없다.

 

이기주의자들은 아상(我相)을 바탕으로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탐욕적이고 분노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사람을 볼 때 악취가 나는 것 같다. 버려야 할 오염원을 잔뜩 짊어 지고 있어서 마치 오물장과도 같은 사람이다.

 

오늘날 독살이 하는 사람이 많아 졌다고 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관계가 좋지 않아서 일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바랑 하나 메고 내키는 대로 떠난다면 세상은 독살이로 넘쳐 날 것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간단하다. 이기적으로 살지 않으면 된다. 이 말은 이타적으로 살자는 말과 같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이기적으로 살면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지만 이타적으로 살면 관계가 부드러워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이기적 삶의 트레이드 마크라 볼 수 있는 탐욕과 성냄의 반대로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관용과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탐욕의 상극은 관용이다. 성냄의 상극은 자애이다. 그래서 탐욕과 미움으로 사는 이기주위자는 오물장과 같은 견해를 가졌으므로 악취를 풍기지만, 관용과 자애로 사는 사람은 관계가 좋아 향내 나는 사람과도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한마디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욕심부리고 성내는 상대방이 있다. 성낸다고 하여 같이 성을 낸다거나 욕심부린다고 하여 미워하면 똑 같은 사람이 된다. 이럴 경우 마음을 돌려야 한다. 마음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내 뜻대로 하려는 상대방에게 연민의 마음을 내면 된다. 연민의 마음을 낼 때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 날 수 없다.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 측은지심으로 마음을 돌려 버리는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 날 때 측은지심을!”

 

 

 

2015-02-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