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명상하는 사람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무불상시대와 명상의 붓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2. 7. 11:48

 

명상하는 사람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무불상시대와 명상의 붓다

 

 

절에 가면 의례 볼 수 있는 것이 불상이다. 사람형상을 한 불상을 보면, 보는 이에 따라 극진한 공경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상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경과 우경은 어떤 차이일까?

 

예경인가 우경인가?

 

신심있는 불자들은 불상대하기를 부처님 대하듯 한다. 그런 불상은 돌이나 철 또는 나무, 그림, 종이 등 다양한 형태의 재료로 만들어졌다. 이런 불상을 만드는 자를 불모(佛母)’라 한다.

 

불모가 만든 작품, 즉 불상에 사람들은 예경하고 부처님 보듯하고 각종 소원을 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경향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불상은 우상이라 볼 수 있다.

 

불상이 소원이나 비는 기복의 대상으로 전락하였을 때 애니미즘(animism)과 다를 바 없다. 바위나 나무 등에 비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다만 대상이 불상으로 바뀌었을 뿐 마음의 심층에는 샤마니즘(shamanism)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절에 가면 불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관음전에 가면 관세음보살이 있고 지장전에 가면 자장보살이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나한, 산신 등 수 많은 형상을 볼 수 있다.

 

절에서 수 많은 형상을 접할 때 의문이 든다. 불자들은 형상의 의미를 알고 예경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만일 뜻도 의미도 모르면서 단지 기도의 대상으로 절한다면 우상숭배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무불상시대 오백년

 

부처님당시에는 불상이 없었다. 물론 부처님이 계셨기 때문에 따로 불상을 만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부처님의 재세시는 물론 부처님 열반후 오백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불상이 없었다는 것이다. 불교사적으로 이를 무불상시대라 한다.

 

무불상시대 오백년을 지나 불상이 출현하였다. 지금은 불상이 당연히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부처의 형상을 한 불상이 없었던 시대가 오백년 동안 지속 되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그런데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불상의 출현이 대승불교의 출현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원을 전후하여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났는데 시기적으로 불상이 출현한 때와 같은 시기라 볼 수 있다.

 

무불상시대가 오백년동안 지속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예경심의 발로라 보여진다.

 

오로지 부처님의 정법만이 전승 되었을 때 별도로 불상을 만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가르침을 접하는 것 자체가 부처님을 본 것과 다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초기경에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dhamma passati so ma passati, yo ma passati so dhamma passati, S22.87)”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불상조성을 할 필요가 없었을 이유가 있다. 부처님이 불상조성금지를 암시 하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dhammadīpāna dhammasaraāna anaññasaraāna, S22:43)”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라면 굳이 불상을 만들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진리를 본 자 역시 불상이 필요 없을 것이다. 진리 그 자체가 다름 아닌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를 보면 나를 본다. (dhamma passati so ma passati)”라고 하였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존하는 자라면 굳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불상을 만들어 불상에 경배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이 된다. 이는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anaññasaraāna)”라고 말씀 하신 준엄한 부처님의 명령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상에 경배할 필요도 없고 불상을 만들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불다보살의 시대에

 

무불상시대 오백년은 정법이 살아 있었던 시대라 본다. 물론 오늘날 테라와다불교에서도 정법은 살아 있다. 테라와다불교에서도 불상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정법이 변질 된 것은 아니다. 정법이 변질된 것은 대승불교가 시작 되고 나서 부터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대승불교의 시작과 함께 불상이 출현하였다는 사실이다.

 

한번 불상이 출현하게 되자 갖가지 버전의 불상이 출현하였다. 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신앙에 따라 그 수 만큼 갖가지 형상이 출현 하였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절에 가면 무수한 다불다보살의 형상을 볼 수 있다.

 

다불다보살을 특징으로 하는 대승불교에서는 수 많은 형상들이 있다. 무불상시대에서 불상이 출현하자 마치 봇물 터지듯이 갖가지 형상의 불살, 보살상, 나한상, 심지어 경전에 등장하는 갖가지 신장상들이 등장하였다. 그래서 절에 가면 대웅전에 불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좌우에 협시보살상이 있고 뒤와 양 옆에는 수 많은 신장들이 있다.

 

절에 가면 수 많은 형상과 만난다. 큰 절이라면 사천왕문에서는 무서운 형상을 한 사천왕상을 보게 되고, 금강문에서는 금강역사상 등 단계를 거칠 때 마다 독특한 형상을 보게 된다. 절의 맨 뒤편에는 칠성각 또는 산신각으로 불리우는 전각이 있어서 신신이 모셔져 있다. 이렇게 절에는 갖가지 형상의 불상이 있어서 불자들은 절에 가면 순례 하듯이 전각을 돌며 불상 또는 보살상 등에 절하며 각자의 소원을 빈다.

 

왜 불상에 절하는가?

 

하나의 잘 만들어진 불상을 보면 신심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하다. 32 80종호로 대표되는 형상을 보면서 신심을 다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소원을 빌기도 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불자들의 신행행태이다. 그러나 가르침을 알고 가르침을 이해하고 불상을 대한다면 어떨까?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인 연기법을 이해하고 불상을 대했을 때 감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면전에 부처님이 살아 계신듯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불상에 단순하게 절만 한다면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하여 절대자나 초월적존재에게 비는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 하였을 때 불상을 대하는 느낌은 다르다. 예를 들어 부처님이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라 하여 허무주의를 논파하고,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라 하여 영원주의를 논파 하였는데,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불상은 단지 소원성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부처님은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여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여 영원주의를 극복하였다. 그래서 죽으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라는 삿된 견해와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잘못된 견해를 부수었다. 이런 사실은 명상속에서 관찰된 것이다.

 

이렇게 명상속의 부처님을 보았을 때 절을 하게 된다. 소원을 들어 주는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향상으로 이끄는 스승으로서 불상의 발 아래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리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다.  

 

눈을 내려 뜬 불상과 눈을 감은 불상

 

불상의 시대에 불상의 형태도 갖가지이다.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눈모양일 것이다. 눈을 뜨고 있는 불상과 눈을 감고 있는 불상이 있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불상을 보면 대부분 눈을 내려 뜨고 있다. 그러나 테라와다 불교의 불상을 보면 일부 명상에 잠겨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명상에 잠겨 있는 부처님형상 중에 가장 거룩해 보이는 불상이 있다. 그것은 스리랑카 폴론나루와(polonnaruva)에 있는 불상이다.

 

 

 

명상의 폴론나루와(polonnaruva)불상

 

 

폴론나루와불상을 보면 눈을 지긋이 감고 있다. 이는 부처님이 명상하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명상할 때 왜 눈을 감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위빠사나수행처에서 법사가 설명하기를 눈을 감음으로 인하여 눈과 형상의 접촉을 막아 시각의식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명상하기에 좋은 장소는 한적한 곳이 좋다. 눈과 귀, , , 촉감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다섯 가지 감각대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을 말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수행처는 민가에서 떨어진 숲에 있었다.

 

명상속의 붓다는 보기에 거룩할 뿐만 아니라 신심을 내게 한다. 명상하는 모습의 불상만 보아도 마음을 끌어 당기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눈을 내려 뜨고 있는 불상을 보면 약간은 권위적이다. 물론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내려다 보고 있는 형상이지만 불상을 대하는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외경의 대상이 된다. 더구나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크다면, 그것도 금빛찬란 하다면 지금 면전의 부처님은 자비의 마음으로 모든 소원을 들어 줄 것 같아 보인다.

 

 

 

눈을 내려 뜬 조계사 불상

 

 

 

부처님이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무불상시대가 오백년간 있었다. 그러나 불상은 없었어도 상징은 있었다. 대표적으로 보리수를 들 수 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테라와다불교는 보리수신앙이 매우 강하다. 사원에 가면 보리수가 있고 보리수가 예경 대상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외 예경 대상으러서 부처님을 상징하는 불족적, 보륜 등이 있었다.

 

대승불교가 출현하면서 거의 동시에 불상도 출현하였다. 이렇게 한번 불상이 출현하게 되자 마치 봇물 터지듯이 형상화 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형상화 되었다. 오늘날 절에서 보는 신중단에 각종 호법신장들이 이를 말해 준다.

 

불자들은 절에 가면 이 전각 저 전각 찾아 다니며 참배 한다. 그리고 돈을 복전함에 집어 넣는다. 대부분 자신과 가족의 건강, 학업, 사업번창 등을 기원한다. 그러다보니 이런 형상 저런 형상에 대하여 의미도 뜻도 모른 채 기도하고 소원을 빈다. 과연 이것이 불자의 바른 신행 태도라 볼 수 있을까?

 

불상을 바라보면서 부처님처럼 깨달은 자가 되겠다고 발원하는 자는 극히 드물다. 거의 대부분 불상, 보살상, 나한상, 산신상, 심지어 호법신장 등에게 절하며 기도하고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만일 부처님이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부처님은 깨달은 자이다. 그것도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한 자이다. 그래서 부처님에 대하여 삼마삼붓다또는 정등각자라 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불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도 불상 이외 갖가지 형상들을 만들어 놓고 그 형상에 서원성취를 바라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본다면 언짢아 하실 것 같다. 원래의 의도와는 완전히 빗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명상하는 사람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불상이 없었던 시대도 있었다. 과거 무불상시대 오백년이 있었기 때문에 불상이 없었어도 불교는 성립하였다. 굳이 불상을 갖는다면 하나의 불상만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그것은 석가모니부처님상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석가모니불상 이외에 일체 다른 형상을 모시지 않는 절을 종종 볼 수 있다.

 

절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형상화한 불상 하나면 족하다고 본. 그것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는 부처님상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였다.“명상하는 사람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라고.

 

 

201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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