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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났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15. 6. 28. 10:58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났을 때

 

 

종교를 믿는 목적은 무엇일까? 거의 십 년 전 설문조사에 따르면 마음의 안정과 평화 1위이었다. 이는 놀라우면서도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을 특징으로 하는 기독교에서 천국에 태어나는 것이 목적일 것이지만 지금 여기에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불교 역시 내세에는 선처에 태어나는 것이 목적일 것이지만 지금 여기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과 평화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종교는 안정, 평화, 행복이라는 키워드에 포커스가 맞추어 진다.

 

고성염불에 대하여

 

6월 네 째 주 휴휴재 강좌는 고성염불에 대한 것이었다. 멀리 대구에서 오신 보송법우님이 자신의 오랜 수행법인 고성염불에 대한 소개를 하였다. 미리 준비한 자료를 읽어 가며 소개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로 염불시연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고성염불.3gp

 

 

보송법우님은 그 많은 수행 중에 염불을 택하였을까? 이는 의사로서 환자들의 죽음을 많이 목격하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병에 걸려 임종에 이르렀을 때 아무리 수행을 많이 한 자라도 육체적 고통 앞에 무력함을 보인다고 한다. 극심한 육체적 고통에 압도되었을 때 살기 위하여 발버둥 치는 가련한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너무나 많이 목격하였다는 것이다. 수행자 역시 예외가 아님을 말한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스님들은 아프지도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스님들은 보통사람들과 달리 특별난 존재로 보는 것이다. 이는 스님들이 수행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사람들은 세상속에서 살아 가야 하므로 수행을 꿈도 꾸지 못하지만 출가한 스님들은 수행이 본분사이기 때문에 수행으로 단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스님들도 병에 걸려 병원에 실려 왔을 때 일반사람들과 다름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큰스님이라 불리우는 수행자가 임종을 앞두고 삶에 대한 집착을 보였을 때 일반사람 보다 못함을 보았다고 하였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염불수행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씬 레드 라인(The Thin Red Line, 1988)

 

늦은 귀가를 하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휴휴재의 시간을 마치면 자정이 넘어 돌아 온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영화를 보았다. EBS에서 보여 주는 토요씨네마이다. 이 날 영화는 씬 레드 라인(The Thin Red Line, 1988)’로서 보고 싶었던 영화이다. 휴휴재에서 차담하는 것을 멀리 하고 귀가 한 것도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이다.

 

영화는 과달카날전투에 대한 것이다. 과달카날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가 어떤 메시지를 전할 것인지에 대하여 대충 짐작하였다. 그런 예측은 벗어나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 주었다.

 

 

 

레드 라인(The Thin Red Line, 1988년)

 

 

영화는 미군의 입장에서 바라 본 것이다. 그것은 전쟁의 참상에 대한 일종의 고발영화라 볼 수 있다. 특히 일본군이 포로로 잡혔을 때 지옥이 연상되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위치하였을 때 다양한 반응에 대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미군이나 일본군 병사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쟁터로 끌로 나와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갖가지 반응을 보여 주고 있다. 대부분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것이다.

 

일본군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을 때 증오심에 불타는 미군에게 살해 되는 장면이 나온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에 떠는 일본군 병사의 모습을 보면 지옥이 따로 없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아미타불을 염하는 일본군인의 모습도 보여 준다. 또 어떤 군인은 좌선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마 종교생활을 열심히 한 군인 이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미타불을 염하는 일본군 병사와 그 자리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 일본군 병사를 보면서 종교가 극한상황에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두려움과 공포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부짓는 모습과 매우 대조적이다. 비록 영화속의 한장면이지만 수행을 한자와 하지 않은 자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수행을 한자와 하지 않은 자의 차이는?

 

영화속에서는 아미타불 염불을 하는 자는 입으로 계속 아미타불염을 함으로 인하여 극한의 두려움과 공포를 벗어나고자 한 것으로 본다. 이는 임종에 이르렀을 때 나무아미타불을 열번 염송하면 극락에 태어난다는 가르침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는 두려움과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도 좌선자세를 취하는병사의 모습도 보여 준다. 이런 모습도 평소 수행이 되어 있지 않으면 나오기 힘든 자세라 본다.

 

사람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떨어지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수행을 하지 않은 자와 수행을 한자로 크게 구분 될 것이라 본다. 수행을 하지 않은 자들은 대게 본능대로 살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을 것이다. 죽음이 막연하게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살고 싶은 것이다. 설령 어떤 이가 천당이 어딧어! 지옥이 어딧서! 죽으면 끝나는 것이여!”라고 할지 모르지만 마음속에는 존재에 대한 욕구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죽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단멸론적 견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본다.

 

수행을 한 자들은 내세에 대한 믿음이 있다. 내세를 믿는 다는 것은 착하고 건전한 삶을 살아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죽음은 크게 두려워 할 일이 아니다. 다만 삶의 일부로서 간주 된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는 것이다. 설령 삶과 죽음의 경계에 처해 있다고 하더라도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대구에서 올라 오신 법우님은 염불수행에서 이런 점을 강조 하였다.

 

염불수행을 하면

 

매순간 경계에 떨어진다. 그것은 접촉에 따른 것이다. 접촉이 일어났을 때 느낌이 일어난다. 좋은 느낌, 싫은 느낌, 무덤덤한 느낌이다. 좋으면 거머 쥐려 하고 싫으면 밀쳐 내려 한다. 좋아함과 싫어함에 휘둘려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불호를 알아 차리는 사람이 수행자이다. 그러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알아차림으로 벗어나고자 하고 또 어떤 이는 염불로서 극복하고자 한다. 이외 다양한 자신만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의사로서 수 많은 삶과 죽음을 목격한 의사출신 법우님은 염불수행자이다. 그것도 고성염불이라 한다. 매일 저녁 집에서 큰 소리로 한시간씩 염불한다고 한다. 염불수행이야말로 자신에게 적합한 수행이라 말하며 시범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염불수행을 하면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고 한다. 지금 여기에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누릴 수도 있고 내세에서도 선처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염불이야말로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수행방법이라 한다.

 

동아시아에서 염불수행의 대명사라 볼 수 있는 아미타불신앙이 매우 강세이다. 종파불교를 지향하는 일본에서는 정토종이 최대 교세를 자랑하고 있다. 중국 역시 정토사상이 대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에 정토사상이 주류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동아시아에서 정토사상은 매우 뿌리가 깊은 것이다.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났을 때

 

염불과 관련하여 초기경전에서도 유사한 내용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깃발의 경(S11.3)’에 따르면 공포나 전율이나 소름이 끼치는 두려움이 생겨나면이라 하면서 그때는 이렇게 하라고 하였다.

 

 

Itipi so bhagavā araha sammāsambuddho vijjācara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 buddho bhagavā

 

이처럼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깨달은 님, 세상의 존귀한 님이다.”(S11.3)

 

 

이 문구는 흔히 말하는 여래십호에 대한 것이다. 두려움과 공포심이 일어났을 때, 또는 불가항력적인 상황 일때, 모든 경계에서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이를 불수념이라 하였다. 오늘날 염불수행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염불수행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정근을 한다. 그러나 불수념에서는 모두 열 가지 별호를 칭명한다. 대상은 다르지만 칭명을 함으로 인하여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에서는 동일하다. 그런데 초기경전에서는 불수념 뿐만 아니라 법수념승수념이 더 있다.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났을 때 삼보에 의지 하는 것이다.

 

 

2015-06-28

진흙속의연꽃

 

고성염불.3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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