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위대한 별이여! 나에게 감사하라!”니체와 차라투스트라
심야에 즐겨 보는 프로가 있다. EBS 인문학강좌 시간이다. EBS에 거의 채널을 고정하다시피 하여 놓고 있는데 볼 거리가 매우 많다. 먹고 마시며 떠드는 프로와 달리 주로 다큐프로가 많아 사실상 다큐멘타리채널이라 볼 수 있다. 그런 EBS에서 종종 심야시간에 사유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인문학강좌이다.
인문학 강좌에서
이진우교수가 진행하는 인문학강좌 ‘니체, 신이 죽은 시대를 말하다’를 보았다.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2014년 강의하였던 것이다. 이번에 재방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다시보기를 이용하여 해당 강좌를 보았다. 일회 이용권으로 보았다. 무료로 보여 주면 좋으련만 요즘은 이렇게 모두 유료화 되어 있다. 단 몇 줄의 자료를 위하여 시간과 노력과 함께 유료구매를 해야 한다.
이진우교수에 따르면 니체 이전에는 존재가 진리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라는 말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신이 이세상을 창조하였기 때문에 신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 존재자체가 진리라는 것이다. 반면 끊임 없이 변화하는 것은 진리가 아닐 것이다. 이에 니체는 사고를 완전히 바꾸어 생각하였다.
니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세상이 끊임 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보았다.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이런 식으로 끊임 없이 반복 되는 현상을 보고서 “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보았다. 이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전통을 따른 것과 같다.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너는 두 번 강물을 들어 갈 수 없다.”라고 하였다. 끊임 없이 강물은 변화기 때문이다. 만물은 계속하여 전환되고 생성되고 변화 되는 것이야말로 진리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체는 “진리란 끊임 없이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니체의 관점은 기독교의 중세철학을 완전히 뒤집어 엎는 것과 같다. 이를 정리 하면 “존재는 진리이고 변화는 가상이다.”라는 개념이 거꾸로 “존재는 가상이고 변화는 진리이다.”로 바뀌게 된다.
니체의 깨달음
니체는 변화가 진리라 하였다. 그렇다면 니체는 이런 생각은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인문학강좌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갑작스럽게 그런 생각이 떠 올랐다고 하였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만 살았던 니체에게 어느 날 휴양지 호수가를 거닐다가 ‘주를레이’ 바위 앞에서 불현듯 떠올랐다고 하였다. 그것은 “아, 삶은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야!”라는 말이다. 마치 선사가 기연으로 깨닫는 것과 같다.
갑자기 번개가 때리듯이 떠 올랐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는 어느 정도 사유의 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어떤 계기로 인하여 불현듯 번개처럼 떠 오른 것이다. 율장대품에서도 바구존자가 “현관에 발을 내딛다가 넘어졌다가 일어서려고 애쓰다가 깨달음을 얻어 거룩한 님이 되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누군가로부터 한 마디 말에 의하여 깨달을 수도 있고 특별한 인연에 따라 어느 날 문득 확연히 이치를 알게 될 때가 있음을 알게 된다. 니체도 그런 케이스라 보여진다.
니체와 불교사상
인문학강좌에 따르면 니체로 인하여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이전에는 기독교 유일신과 그리스의 이데아사상이 만나서 중세신관이 형성되었다. 이에 대하여 어느 철학자는 ‘사막의 종교가 날개를 단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중세의 신관이 천년을 지배하였다. 그 중심사상이 바로 ‘존재론’이다.
기독교에서는 창조주가 만든 이 세계에 대하여 진리 그 자체로 보았다. 그래서 하나의 이상적인 모델 즉, 진선미와 같은 이상을 추구하게 되었다. 반면 위악추는 철저히 버려야 할 것으로 보았다.
기독교신관에 따르면 늘 변화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런데 니체는거꾸로 어느 날 갑자기 깨닫고서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변화함이 없이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허위로 본 것이다. 이는 불교적 세계관과 매우 유사하다.
강좌가 끝나고 질문 시간에 어느 학생이 질문하였다. 학생에 따르면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에 대하여 불교적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진우교수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니체가 직접적으로 동양사상 불교 힌두교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니체가 문헌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본대학에서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겼을 때 거리를 걸어 가다가 도서관에 들어 갔는데, 우연히 쇼펜하우어를 발견하게 됩니다.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으면서 ‘철학적 해방감을 느꼈다’ 이렇게 표현 하거든요. 쇼펜하우어는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뿐만 아니라 니체가 책을 많이 읽었어요.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유럽의 지성인들이 사상가들이 동양에 대하여 알고 있는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보여집니다.
(EBS 인문학 특강 월-화 24:10 ~ 25:00, 이진우 교수의 '니체, 신이 죽은 시대를 말하다' 5강)
이진우교수에 따르면 니체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임에 틀림 없다. 니체 당시 유럽의 지성들은 불교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서양에 전해진 불교
니체가 생존한 시기를 보면 1844년부터 1900년까지 이다. 특히 니체가 독립철학자 생활의 기간인 1879년부터 1888년 사이에 동양철학, 특히 불교와 관련된 서적을 접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빠알리니까야가 서구에 전해진 시기와 일치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원음이라 불리우는 빠알리니까야는 서양에 언제 알려 졌을까? 자료에 따르면 1855년 덴마크의 빈센트 하우스 뵐이 담마빠다(법구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 최초라 한다. 법구경은 1869년에는 독일어로도 번역 되었다. 1881년 리즈 데이비스는 빠알리성전협회(PTS)를 창립하여 본격적으로 번역에 착수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독일에서 독일지성들이 접한 불교적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대승불교나 선불교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독일에서 빠알리니까야가 제대로 번역되어 나오기 시작한 시점은 1902년이다. 독일에서 최초로 맛지마니까야가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놀라운 사실이다. 빠일리어로 본 부처님 원음 번역이 우리보다 무려 일세기가 빠른 것이다. 그런데 독일에서 맛지마니까야 출간은 독일지성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이는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가 맛지마니까의 영향을 받아 소설 ‘데미안’을 썼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헤르만 헤세는 맛지마니까야에 ‘병아리 부화 이야기(M16)’를 모티브로 하여 소설 데미안을 썼다. 이때가 1916년이다. 이렇게 이미 백 년 전에 유럽에서는 부처님의 원음을 접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사상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활동하던 시기는 니까야가 번역되어 나오기 이전의 일이다. 법구경 정도 번역되어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불교에 대하여 완전히 알았다고 볼 수 없다. 부분적으로 안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제행무상의 진리정도라 본다.
니체는 불교의 제행무상과 유사한 변화를 강조하였다. 그래서 기존 형이상학적 철학과는 정반대로 “존재는 가상이고 변화는 진리이다.”라 하였다. 이런 측면으로 본다면 불교의 삼법인에서 제행무상의 진리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니체는 그 이상 나가지 못하였다. 삼법인에서 일체개고와 제법무아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내일은 잘 될 거야?
EBS인문학 강좌에서 인상적 장면이 있었다. 그것은 니체의 변화 또는 무상의 사상과 관련하여 “내일은 잘 될 거야”라는 말이다. 이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나타낸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항상 미래에 사는 것을 말한다. 이는 “오 년 후에는 달라 질 거야, 십 년 후에는..”가 되고 말 것이다. 내일이 오면 또 내일을 얘기 하는 것처럼 ‘메뚜기’처럼 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현실을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부자 되기를 바란다. 열심히 돈을 모아 고급승용차를 사거나 아파트를 살 꿈을 꾼다. 이런 세속적인 가치나 도달해야 할 목표에 너무 집착하면 이 순간을 놓칠 수 있다. 이는 현실을 사는 것이 아니다.
죽어서 천국을 기대하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마치 천국에 태어나기 위하여 삶을 산다면 현실을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이데아를 상정해 놓고 거기에 맞추는 삶을 추구 한다면 미래를 살 뿐 현실의 삶이 아니다.
마음이 과거에 가 있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편치 않다. 대부분 악하고 불건전한생각들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회상 할 때 즐거웠던 것 보다 아쉬웠던 것이 더 많다. 또 ‘내일은 잘 될 거야’라고 미래에 대하여 막연한 기대를 하는 것도 근심과 걱정이다. 결국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즐거움 보다 괴로움이 더 많은 것이다.
부처님은 마음을 항상 현재에 두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붙잡을 수 없는 것이기에 잘 관찰하라고 하였다. 어떻게 관찰하는가? 대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관찰하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하였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 (M131)
“그대 위대한 별이여! 나에게 감사하라!”
니체가 불교에 영향받은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모두 다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제행무상의 진리 등 일부만 수용한 것으로 본다. 가장 핵심사상인 무아사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을 보면 불교적 냄새가 물씬 풍겨난다. 그런 니체는 신을 죽여 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초인을 만들어 내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있다. 니체의 사상이 무르익은 후기에 쓰인 것으로, 위버멘쉬(초인), 권력에의 의지, 영겁회귀 등 니체의 중심 사상을 문학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라 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실존한 배화교 창시자 차라투스트라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 1부1절에 이런 말이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서른이 되었을 때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십년의 세월을 지치지도 않고 정신과 고독을 즐기며 살았다. 하지만 마침내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어느 날 아침 동이 트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양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태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대 위대한 별이여! 그대가 빛을 비추어 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존재가 없다면, 그대의 행복은 무엇이겠는가! 지난 십 년 동안 그대는 여기 나의 동굴로 떠올랐다. 그러나 나와 나의 독수리와 나의 뱀이 없었다면 그대는 자신의 빛과 그 빛의 길이 싫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침마다 그대를 기다렸고 그대의 넘치는 빛을 흠뻑 취했으니, 그대를 축복했던 것이다. 보라! 이제 나는 지나치게 많은 양의 꿀을 모은 꿀벌처럼 나의 지혜에 싫증이 났다. 이제 나에게는 손을 뻗쳐 나의 지혜를 나누어 줄 대상이 필요하다. 현명한 사람들이 그들의 어리석음을,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부(富)를 기뻐할 때까지 나의 지혜를 나누어 주고 싶다.
차라투스투라의 독백이 있다. 그것은 “그대 위대한 별이여! 그대가 빛을 비추어 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존재가 없다면, 그대의 행복은 무엇이겠는가!”라고 외치는 장면이다. 지금 만물을 소생하게 하는 태양이 있지만 내가 없다면 그 태양이 나에게 의미가 없는 것과 같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에게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 생명의 근원이 되는 태양도 창조주의 작품으로서 감사해야 할 대상이다. 별빛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대뜸 별빛을 향하여 “별빛이여, 그대는 나에게 감사하라”는 식으로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내가 있음으로 해서 이 세상이 존재함을 말한다.
내가 태양을 봄으로 인하여 태양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태양을 보고서 “태양이여, 그대는 나에게 감사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창조주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인식하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
2015-07-2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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