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법인(三法印)에서 왜 항상 무상, 고, 무아 순서일까?
불교에 삼법인이 있다. 세 가지 법의 도장이라는 뜻이다. 마치 관공서에서 공문에 직인을 찍으면 효력을 발휘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라는 법의 도장으로서 불교인지 아닌지 가려 낼 수 있다. 겉으로는 불교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상락아정을 말한다면 삼법인이라는 잣대를 들이 대었을 때 불교인이 아닌 것과 같다.
삼법인은 불교의 근간을 이룬다. 초기경전 도처에 무수히 등장하는 말이 무상, 고, 무아이다. 이를 삼특상(tilakhana)이라고 한다. 그런데 삼법인과 삼특상은 반드시 순서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순서를 무시하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한다면 무식을 스스로 폭로 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왜 그런가? 순서를 지켜야 할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삼특상과 삼법인은 거의 같은 개념이다. 그러나 쓰임새는 약간 다르다. 특히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에서 사용순서가 그렇다. 대승불교에서는 삼법인이라 한다. 문제는 무상, 고, 무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대승에서는 ‘고’대신 ‘열반적정’을 넣기도 하고 ‘고’와 ‘열반적정’을 모두 포함하여 사법인이 되기도 한다.
대승불교에서 삼법인은 불교 전반의 가장 큰 특징을 정리한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다 보니 순서가 무시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법의 도장으로서 역할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 따르려 하는 테라와다에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 날 수 없다. 삼특상은 오온으로 대표되는 유위법의 세 가지 보편적 특징을 밝힌 것으로서 순서는 항상 무상, 고, 무아이어야 한다.
삼특상이 무상, 고, 무아인 것은 정형화 되어 있다. 초기 경전 어느 곳을 열어 보아도 순서를 무시한 것을 볼 수 없다. 왜 그럴까? 부처님이 그런 순서로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은 근거가 되는 문구로도 알 수 있다.
“Taṃ kiṃ maññasi, rāhula, cakkhu niccaṃ vā aniccaṃ vā” ti? “Aniccaṃ, bhante”.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ā taṃ sukhaṃ vā”ti? “Dukkhaṃ, bhante”.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ipariṇāmadhammaṃ, kallaṃ nu taṃ samanupassituṃ – ‘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 ti? “No hetaṃ, bhante”
[세존] "라훌라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각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라훌라]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라훌라]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라훌라]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Cūḷarāhulovādasutta-라훌라에 대한 가르침의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147, 전재성님역)
이와 같은 정형구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무상, 고, 무아 순서이다. 경을 보면 부처님은 첫 질문으로 무상에 대하여 물었다. 이어서 무상하게 변하는 것에 대하여 물었다. 최종적으로 무아를 유도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결국 라훌라에게 무아의 가르침을 알려 주기 위하여 무상과 괴로움의 가르침을 펼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가장 차별화 된 것이 있다.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특징적인 것이 무아사상이다. 이제까지 전세계 어느 종교나 사상에서도 무아를 말한 적이 없었다. 오직 부처님만이 무아를 설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삼법인 또는 삼특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아이다. 결국 무아를 설하기 위하여 나머지 두 개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법구경에도 삼법인의 근거가 되는 게송이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
(Dhp277)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
(Dhp278)
‘일체의 사실은 실체가 없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
(Dhp279)
법구경에서도 순서는 무상, 고, 무아이다. 이렇게 순서를 정해 놓은 것에 대한 주석을 보면 무상에 대하여 “그 때 그 때 괴멸하는 것이 무상이다.”라 하였다.
주석에 따르면 고에 대해서는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해서, 생겨난 것은 괴멸해야 하는 원리에 의해 고통받는다.”라 하였다. 이는 라훌라 교계의 작은 경에서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ā taṃ sukhaṃ vā)”라는 구절과 일치한다.
무상한 것은 당연히 괴로운 것이다. 왜 그런가? 이에 대하여 주석에 주석에서는 “‘죽지 말고, 괴멸하지 말라’라고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말한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은 지배권이 없음을 말한다. 나의 몸과 마음이 나의 통제안에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에 나의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무아이다.
무아를 설명하기 위하여 무상과 괴로움이 동원 된 것이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그들은 생겼다가 없어지는 뜻에서 무상하다. 일어나고 사라짐에 의해 압박받는다는 뜻에서 괴로움이다. 자재자가 아니라는 뜻에서 무아다.(20장)”라고 설명되는 것과도 일치 한다.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삼특상의 순서는 반드시 무상, 고, 무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단계적 깨달음의 가르침과도 관련이 있다. 부처님은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음을 말씀 하셨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나는 최상의 지혜가 단번에 성취된다고 설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그와 반대로 오로지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닦고 점차적으로 발전한 다음에 지혜의 성취가 이루어진다. (M70)”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가르침은 돈오점수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은 단계적 깨달음을 강조 하였다. 그런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무아이다. 무아를 설명하기 위하여 무상과 괴로움을 앞세운 것이다. 왜 삼법인과 삼특상에서 무상, 고, 무아 순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라 본다.
2015-07-22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뒤에서 남말하는 당신, 정말로 비열하고 어리석은 사람 입니다 (0) | 2015.07.29 |
---|---|
“그대 위대한 별이여! 나에게 감사하라!”니체와 차라투스트라 (0) | 2015.07.22 |
미래에 겪어야 할 업으로 인해 (0) | 2015.07.20 |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 (0) | 2015.07.20 |
그러려니, 그렇네, 그렇구나, 그렇군 (0) | 2015.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