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미래에 겪어야 할 업으로 인해

담마다사 이병욱 2015. 7. 20. 18:54

 

미래에 겪어야 할 업으로 인해

 

 

 

난사람 이나 든 사람이 되면

 

지난 봄 어느 법우님의 아들이 서울대 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대중교통수단으로 찾아 갔다. 지하철에서 내려 순환버스를 타고 목적지로 갔다. 캠퍼스가 얼마나 큰지 하나의 거대한 타운으로 형성되어 있다. 거기에는 아파트도 있고 심지어 마트까지 각종 편의시설이 되어 있다. 마치 미군기지에 가면 집단주거지도 있고 시장도 있어서 미국을 그대로 옮겨 온듯한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순환버스로 이동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땅에서 잘나고 똑똑한 사람으로 태어나 난사람 내지 든 사람이 되면 대우 받는다는 생각이다. 이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갖가지 혜택을 받는 것과 같다.

 

군대에서 별을 달면 차량제공 등 수십가지 대우가 달라지고 큰회사의 임원이 되면 각종 혜택이 부여 되어서 수십가지 대우가 달라진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이땅에서는 잘나고 똑똑해서 든 자가 되어야 하고 난 자가 되어야 대우를 받고 대접을 받는다.

 

여기 지독히도 못난 자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정신적 신체적으로 열등하여 한 세상 살기가 너무나 고달픈 사람이다. 누군가 도와 주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다. 그러다 보니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다. 당연히 지위가 낮은 위치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루하루 살기가 벅차다. 이 세상은 너무나 살기 힘들어서 형벌 같은 삶을 살아 간다.

 

잘난자나 못난자나 이 세상을 함께 살아 간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 간다. 그러나 삶의 방식은 다르다. 그럼에도 공통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즐기는 삶이다. 이는 초전법륜경 집성제로 알 수 있다.

 

잘 난대로 못 난대로

 

초전법륜경 집성제을 보면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S56.11)”라 되어 있다. 여기서 갈애는 세 가지로 설명된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잘난자나 못난자는 모두 갈애를 추구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로 살아 간다.

 

많이 가진자나 적게 가진자나 모두 즐기며 살고 있다. 다만 즐기는 대상이 다르고 질이 다를 뿐이다. 많이 가진 자는 룸싸롱에서 양주를 마시며 즐길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집에서 소주를 마시며 하루의 고단함을 녹인다. 부자나 가난한자나, 귀한자나 천한자는 모두 즐기며 산다. 그래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라 하였다. 잘난자는 잘난 맛에 살고 못난 자는 못난 대로 즐길 대상을 찾아 살아가는 것이다.

 

불공평한 세상에 평등한 것은?

 

잘난 자와 못난 자, 부자와 가난한자의 삶의 질은 다르다. 공통적으로 즐기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여럿 있다. 그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다. 태어남과 함께 누구도 예외 없다. 이렇게 본다면 불평등의 세상에서 시간이야말로 가장 공평한 것이다. 아무리 돈 많은 재벌회장이라도 늙으면 병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다. 왕년의 인기스타는 고왔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늙은 모습이 형편 없다. 시간 앞에 장사 없다고 시간 앞에 모두 무력하다.

 

한평생 잘 산 사람이 있다. 좋은 가문에 잘나고 똑똑하게 태어난 자이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용모도 갖추었다. 그래서 이 나라의 고위직을 물려 받아 대우와 대접을 잘 받고 산다.  은퇴 후에는 늙어 죽을 때까지 지급 되는 연금으로 인하여 천상과 같은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에게도 늙음과 병듦과 죽음은 예외 없이 다가 온다.

 

한평생 잘 먹고 잘 산 사람들은 늙어 병들어 죽으면 어디로 갈까? 아마 현실이 천상같다면 떠나기가 아쉬울 것이다. 재벌이 죽기 싫어하여 수명을 연장시키려고 하는 것과 같다. 지금 사는 곳이 천상인데 이곳을 떠나면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죽음이 몹시 두려운 것이다.

 

천상과도 같은 삶을 산 자가 죽으면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 천상과도 같은 삶을 산 자가 죽어서 악처에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경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대왕이여, 사람이 어떻게 해서 빛에서 어둠으로 갑니까? 대왕이여, 여기 어떤 사람이 부유하고 돈이 많고 호화롭고 금과 은이 많고 재물이 풍부하고 재산과 곡식이 많은 권세 있는 귀족의 집이나 권세 있는 성직자의 집이나 권세 있는 장자의 집과 같은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름답고 보기에 좋고 깨끗하고 연꽃과 같은 최상의 아름다움을 갖추었습니다. 그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탈 것, 꽃장식, 향료, 크림, 침상, , 등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체적으로 나쁜 일을 하고 언어적으로 나쁜 일을 하고 정신적으로 나쁜 일을 합니다. 그가 신체적으로 나쁜 일을 하고 언어적으로 나쁜 일을 하고 정신적으로 나쁜 일을 몸이 부서진 뒤 죽어서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다.

 

대왕이여, 예를 들면 사람이 궁전에서 코끼리의 어깨에 내리고 코끼리의 어깨에서 말의 등에 내리고 말의 등에서 수레로 내리고 수레에서 땅으로 내리고 땅에서 암흑으로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이 사람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빛에서 어둠으로 갑니다.”

 

(Puggalasutta-사람의 경, 상윳따니까야 S3.21, 전재성님역)

 

 

한평생 영화롭게 산자에 대한 것이다. 높은 지위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영화를 누리고 그것도 늙어 죽을 때 까지 누렸을 때 임종을 맞이 하면 어떻게 될까? 다행히도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여 선업을 많이 지었다면 죽음 앞에 당당할 것이다. 그러나 높은 지위에 올라갈수록, 많이 재산을 가질수록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 대게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밟고 올라 가는 경우가 많다. 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경쟁자가 많다면 권모술수, 마타도어 등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가 낙타구멍에 들어 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부자가 될 수 없음을 말한다. 부동산 투기 등 불로소득이나 불법적 거래 등 비정상적 방법으로 부를 축적 하였을 때 이는 도둑질에 해당된다.

 

높은 지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부를 축적하면 할수록 그와 비례하여 악업은 늘어 간다. 이런 악업은 대게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신체적으로 나쁜 일을 하고 언어적으로 나쁜 일을 하고 정신적으로 나쁜 일을 몸이 부서진 뒤 죽어서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다.”라 하였다. 높은 지위에 있던 자나 부자로 호사스럽게 산자는 대부분 지옥에 태어남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빛에서 어둠으로가는 것이라 하였다.

 

악행의 그림자에 압도 되었을 때

 

우리가 사는 인간세상은 선처에 속한다. 여기서 선처는 인간이상의 세상을 말한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하여 욕계천상, 색계천상, 무색계천상은 선처에 속한다. 인간 이하, 즉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은 사악도라 하여 악처로 분류한다.

 

여기 한평생 천상과 같은 삶을 산 자가 있다. 그러나 높은 지위에 오르고 높은 지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었다. 타인의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자리이다. 여기 재산이 많은 자가 있다. 천문학적 재산을 모으기 까지 온갖 불법과 탈법을 저질렀다. 불로소득으로 형성된 재산을 지키고 늘려 가기 위하여 선행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 자에게 문득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어리석은 자가 의자 위에 올라앉거나 침대위에 올라 눕거나 땅바닥에서 쉬거나 할 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M129)”라 하였다.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부끄러운 행위가 떠 오른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수행승들이여, 이를테면 커다란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저녁 무렵에 지상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가 의자 위에 올라앉거나 침대 위에 올라 눕거나 땅바닥에서 쉬거나 할 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

 

(Bālapaṇḍita 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 맛지마니까야 M129, 전재성님역)

 

 

Mountain Casts Massive Shadow on Clouds

 

 

이는 범죄를 저지른 자의 심리, 즉 ‘죄의식’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땅도 속이고 하늘도 속여도 자신의 양심을 속일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커다란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저녁 무렵에 지상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라 하였다. 여기서 커다란 산봉우리의 그림자는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악행을 말한다. 이런 그림자가 자신을 덮쳤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악행을 저지른 자가 임종에 이르렀을 때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 이생과 내생을 연결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마음에 따라 내생이 결정된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선처에서 악처에 태어나는 경우에 대하여 죽을 때에 앞서 설한 업으로 지옥 등의 시뻘건 불길의 형상 등의 악처의 표상이 마노의 문을 통해 나타난다.”라 하였다. 이는 임종순간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 가운데 하나를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행으로 인한 업이 무거우면 거대한 산그림자가 드리우듯이 악업이 압도할 것이다. 끔찍한 살인을 하여 늘 마음속에 드리우며 살았다면 그 마음속의 그림자가 임종순간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어 지옥불과 같은 표상이 나타날지 모른다. 그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때 지옥행을 면할 수 없음을 말한다.

 

빛나던 범천도 돼지우리 속에서는 꿀꿀거리네

 

한평생 안락하게 살며 선행을 하지 않은 자들은 악처에 태어나기 쉽다. 상대방을 밟고 높은 지위에 올라간 자, 불법과 탈법과 불로소득으로 형성된 재산으로 호의호식한자는 죽어서 거의 대부분 악처일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경전적 근거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하느님의 권속인 신들의 하느님 세계의 수명의 한계는 일겁이다. 일반사람들은 거기서 신들의 수명의 한계만큼 머물다가 그 수명이 다하면, 지옥에도 가고 축생에도 가고 아귀의 영역으로도 간다.

 

(자애의 경1, 앙굿따라니까야 A4.125,  전재성님역)

 

 

색계초선천에 사는 자들이 있다. 그 중에 대범천이 있다. 수명이 일겁이다. 이토록 오랫동안 사는 자가 수명이 다 되어 죽으면 어떻게 될까? 놀랍게도 인간으로도 태어나지도 못하고 지옥이나 축생, 아귀와 같은 악처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미얀마속담에 빛나던 범천도 돼지우리 속에서는 꿀꿀거리네라 하였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선처에 태어날 공덕을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상과 같이 즐거움만 있는 곳에서는 선업을 쌓을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과거에 지은 선업공덕으로 수명과 복을 누리며 산다. 그러나 수명이 다하였을 때 복도 다하게 된다. 남은 것은 무엇일까? 과거에 지었던 악업이다. 남아 있는 악업으로 인하여 인간으로도 태어나지 못하고 악처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남을 밟고 높은 지위에 있는 자나 각종 불법과 탈법 불로소득으로 천상과 같은 삶을 산 자는 죽어서 거의 대부분 악처에 태어날 것이다.

 

미래에 겪어야 할 업으로 인해

 

여기 못나고 가난하고 불행하게 사는 자가 있다. 마치 형벌과 같은 삶을 살았지만 착하고 건전하게 살았다. 못났기 때문에 높은 지위에 올라가기 위해 남의 눈에 눈물이 나게 하지도 않았고, 가진 것이 없어서 불법과 탈법과 불로소득에 따른 재산도 축적하지 않았다.

 

그는 주어진 여건에 만족하며 살았다. 그러다 임종에 이르렀다. 그가 태어나는 곳은 어디일까? 거의 대부분 천상일 것이다. 왜 그런가? 이미 인간세상에서 과거에 지은 악업에 대한 과보는 다 받았다. 이제 남은 것은 선업에 대한 과보 뿐이다. 그래서 선처에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옥에 있는 자도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 지옥이 있다. 그런데 기독교의 지옥과 다르다. 기독교의 지옥은 한번 빠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불교지옥은 악업이 다하면 빠져 나올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가 더 매력적인 종교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옥에서 어떻게 선처에 태어날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악처에서 선처로 태어나는 경우에 대하여 악처에서 비난할 바가 없는 업을 쌓은 자에게 앞서 설한 방법대로 비난할 바가 없는 업이나 업의 표상이 마노의 문으로 나타난다. (17)”라 하였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지옥에서 악행에 대한 과보를  충분히 받았다는 의미로 받아 들여 질 수 있다. 마치 죄를 지은 자가 교도소에 들어가 징역을 산 것과 같다. 징역을 살고 만기 출소를 하면 충분히 죄값을 치룬 것과 같다.

 

지옥에서 갖은 고통을 다 당하고 더 이상 당할 죄업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과거생 언젠가 지었던 ‘선업’일 것이다. 지옥에서 갖은 고통을 겪으면서 악업이 모두 소멸 되었으니 이제 남은 것이라곤 선업 밖에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비록 지옥에 있더라도 그 악업이 다하면 얼마든지 천상에 태어 날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다른 악처에 떨어진 중생들은

미래에 겪어야 할 업으로 인해 천상세계에 태어난다.

왜냐하면 미래에 겪어야 할 업이 없이

윤회에 유전하는 중생이란 없기 때문이다. (13)

 

 

악처에 떨어진 중생들이 미래에 겪어야 할 업으로 인하여 천상세계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말이 미래에 겪어야 할 업이다. 이는 받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은 업을 말한다.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는자가 악업이 다하였을 때 언젠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선업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선업을 대상으로 하여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기독교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미래에 겪어야 할 업이 없는 자

 

미래에 겪어야 할 업이 없는 자는 누구일까? 그것은 아라한이다. 아라한은 번뇌가 소멸된 자이므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탐진치로 살아가는 중생들은 번뇌가 다 소멸 되지 않는 한 선업이든 악업이든 업을 짓게 되어 있으므로 삼계를 윤회 할 수 밖에 없다.

 

 

2015-07-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