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불안(Buddhacakkhu)으로 세상을 관찰하였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10. 10:24

 

불안(Buddhacakkhu)으로 세상을 관찰하였을 때

 

 

 

 

인간은 경이로운 존재

 

인간이라는 존재는 다른 존재와는 다르다. 이를 테면 축생과는 다른 존재이다. 그것은 사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유능력이 있다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인류문명사회를 만들었다. 세상을 지배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수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퍼졌고 수 많은 경이적은 작품을 만들어 내었다. 이렇게 인터넷에 글을 쓰게 된 것도 인류공동의 창작물이라 볼 수 있다.

 

잠실에 가면 초고층빌딩이 올라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백층이상 되는 빌딩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능력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어디 이뿐인가?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더구나 달나라는 물론 화성, 저 멀리 외계에 까지 우주선을 보내는 시대가 되었다. 컴퓨터로 온 세상을 연결하여 소통하는 시대에 인류의 창작물은 어디까지 갈지 알 수 없다.

 

 

 

 

 

 

이제까지 인류가 이룩해 놓은 문명을 보면 인간은 참으로 위대해 보인다. 그렇다고 하여 인간은 견고한 존재가 아니다. 부서지기 쉬운 존재이다. 병들고 늙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나약한 인간의 힘으로 오늘날 물질문명이 이룩된 것을 보면 인간은 매우 강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는 물질에 대한 것이다. 정신영역으로 가면 더욱 더 놀라운 인간의 능력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이천오백년전의 부처의 출현이다.

 

정신집중의 힘으로

 

과학문명시대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과학적 잣대로 판단하려 한다. 자신의 눈이나 귀 등으로 감지된 것 이외에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 또한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 아니면 역시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신영역으로 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정신영역까지 과학의 잣대로 판단 할 수 없다.

 

신통을 이야기 할 때 자신의 감감적 인지와 과학적 잣대로 무장한 자들은 믿지 않는다. 그러나 신통은 정신영역이다. 마음을 집중하였을 때 상상도 못하는 힘이 나올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집중으로 인하여 백층이상의 고층빌딩을 만들어 내었고 우주선을 외계로 내 보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모두가 정신의 집중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정신을 집중하여 사선정 상태에서 신통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함부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정신을 집중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 그래서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 하였다. 이천오백년 전 부처님도 정신을 집중하여 이 세상의 원리를 밝혀 내었다. 정신집중의 힘으로 세상을 관찰하여 원리를 밝혀 낸 것이다. 그때 당시 터져 나온 감흥어가 있다. 이를 우다나라 한다. 부처님이 깨달음과 열반에 대하여 오로지 현자의 지혜로 밝혀 낸 것이다.

 

세상의 관찰에 대한 감흥어

 

초기경전 우다나에 세상에 대한 관찰의 경이 있다. 부처님이 네란자라 강 언덕의 우르벨라 마을 보리수 아래에서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때 감흥에 대한 기록을 이곳 저곳의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다. 가장 자세히 나와 있는 것이 율장대품이다. 그런데 우다나에는 율장대품 뿐만 아니라 다른 니까야에서 보이지 않는 감흥어가 있다. 이를 세상의 관찰에 대한 감흥어이다. 경은 이렇게 시작 된다.

 

 

Atha kho Bhagavā tassa sattāhassa accayena tamhā samādhimhā vuṭṭhahitvā Buddhacakkhunā loka volokesi. Addasā kho Bhagavā Buddhacakkhunā loka volokento satte anekehi santāpehi santappamāne anekehi ca pariāhehi pariayhamāne rāgajehi pi dosajehi pi mohajehi pī  ti.

 

그 때 세존께서는 칠 일 동안 앉아 명상하면서 해탈의 기쁨을 누리고 계셨다. 세존께서는 깨달은 님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면서 탐욕에서 생겨나고 성냄에서 생겨나고 어리석음에서 생겨난 무수한 고통으로 괴로워 하고 무수한 고뇌로 불타는 뭇삶들을 보았다.

 

(Lokavolokanasutta -세상에 대한 관찰의 경, 우다나 Ud.32, 전재성님역)

 

 

이 문장은 상윳따니까야 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S6.1)’에 실려 있는 문구와 유사하다. 동일하게 율장대품에도 실려 있다. 그런데 상윳따와 율장대품에는 아자빨라니그로다 나무아래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하느님(범천: 브라흐마)의 권청에 따라 이 세상을 관찰 하였을 때의 일이라 본다.

 

깨달은 자의 눈(Buddhacakkhu)

 

부처님이 이 세상을 바라 본 것은 깨달은 자의 눈으로 본 것이다. 이는 육안으로본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경에서는 깨달은 님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면서라 하였다. 여기서 깨달은 님의 눈이란 ‘Buddhacakkhu’를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에게는 다섯 가지 눈이 있었다. 첫째, 자연의 눈(육안), 둘째, 하늘의 눈(천안), 셋째, 지혜의 눈(혜안), 넷째, 보편의 눈(보안), 다섯째, 깨달은 님의 눈(불안)이다. 이 중에 세상을 관찰한 것은 불안(Buddhacakkhu)이다.

 

부처님은 불안으로 무엇을 보았을까? 그것은 중생들의 삶의 방식을 본 것이다. 이에 대하여 무수한 고통으로 괴로워 하고 무수한 고뇌로 불타는 뭇삶들이라 하였다. 괴로워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생겨는 것이라 하였다.

 

첫번째 감흥어

 

부처님은 불안으로 세상을 관찰하였다. 우다나에서는 세상에 대한 관찰을 긴 게송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상윳따나 율장대품에서 조금 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 추한 모습의 뭇삶, 가르치기 쉬운 뭇삶, 가르치기 어려운 뭇삶, 그리고 내세와 죄악을 두려워 하는 무리의 뭇삶들을 보았다. (S6.1)”라 한 것과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다음과 같은 감흥어로 알 수 있다. 모두 여덟 감흥어 중에 먼저 첫번째 감흥어이다.

 

 

Aya loko santāpajāto

phassapareto Roga vadati attato,
Yena yena hi maññati
Tato ta
hoti aññathā.

 

[세존]

고통속에서 태어나 접촉에 시달리니

이 세상은 질병을 자기라고 부른다.

아무리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그것과 다른 것이다.”

 

 

첫 번째 구절에서 고통속에서 태어나(santāpajāto)”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이 세상은 늙고 병들고 죽는 것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재난과 오염에 의한 장애로 괴로움속에 생겨나,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 사로잡힌다.(UdA.209)”라고 설명 되어 있다. 태어남이 고통인 것이다. 그리고 삶도 고통이다. 고성제에서와 같이 생노병사가 고통이다.

 

접촉에 시달린다(phassapareto)’고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주석에 따르면 이 세상은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세 가지 괴로움의 조건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 접촉에 사로잡혀서 이러저러한 감관의 문을 통해서 이러저러한 대상의 전개를 통해 시달린다.(UdA.209)”라고 하였다.

 

모든 것은 접촉에서 시작 된다. 이 때 느낌이 있다. 그것은 낙수, 고수, 불고불낙수이다. 그런데 주석에서는 이 세가지가 모두 괴로움의 조건이라 하였다. 즐거운 느낌도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왜 그럴까? 즐거운 느낌은 오래 가지 않기 때문이다. 조건이 바뀌면 사라진다. 결국 불만족 상태가 된다. 그래서 괴로움이라 한다.

 

병적인 삶

 

두 번째 구절을 보면 질병을 자기라고 부른다. (Roga vadati attato)”라고 하였다. 참으로 난해한 말이다. 이 말뜻은 무엇일까? 이럴 때 주석을 보아야 한다. 주석에 따르면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난 느낌이라는 괴로운 질병을, 또는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오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나는 즐겁거나 괴로운 것이다.’라는 잘못된 견해를 붙잡아서 라고 지각하거나 갈애에 의한 집착을 통해서 나의 것이라고 전도된 지각하는 것을 말한다. (UdA.209)”라고 되어 있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 집착하는 것에 대하여 질병과도 같은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질병이란 빠알리어 ‘Roga’를 번역한 것이다. Roga‘disease; illness’의 뜻이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에 대하여 병적 현상으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정도로 병적일까? 전재성님은 역자주라 하여 별도의 주석을 달았다. 맛지마니까야 MN.I.507의 문둥병환자의 예를 든 것이다. 불을 만지면 보통사람들은 고통스럽게 느끼지만 감관의 조건이 달라진 문둥병환자에게는 쾌감으로 다가 오는 전도된 인식과도 같은 것이다.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세존]

마간디야여, 예를 들어 한 나병환자가 사지가 헐고, 사지가 썩어 들어가고, 벌레에 먹혀 들어가고, 손톱으로 상처의 구멍을 할퀴고, 숯불구덩이에 몸을 태우는 것과 같습니다.

 

마간디야여, 그 나병환자가 사지가 헐고, 사지가 썩어 들어가고, 벌레에 먹혀 들어가고, 손톱으로 상처의 구멍을 긁고, 숯불구덩이에 몸을 태울수록, 점점 더 그 상처 구멍은 더욱 더럽고 더욱 악취가 나며 더욱 썩어 들어가지만, 상처 구멍의 가려움 때문에 그 쾌감에만 만족하는 것입니다.

 

마간디야여, 이와 같이 뭇 삶들은 감각적 쾌락의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의 갈애에 사로잡혀, 감각적 쾌락의 타는 듯한 고뇌에 불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합니다.

 

마간디야여, 뭇 삶들은 감각적 쾌락의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의 갈애에 사로잡혀, 감각적 쾌락의 타는 듯한 고뇌에 불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할수록, 점점 더 그들 뭇 삶들에게 더욱 더 감각적 쾌락의 갈애가 증가하고, 더욱 더 감각적 쾌락의 타는 듯한 고뇌에 불타게 되지만,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 때문에 그 쾌감에만 만족하는 것입니다.” (M75)

 

 

불과의 접촉은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문둥병환자에게는 쾌감을 가져 온다. 이는 전도된 인식이다. 실제로 괴로운 것임에도 문둥병환자에게 즐거운 것은 전도된 지각이다. 이렇게 본다면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삶은 사실상 문둥병 환자와 같다. 그래서 오온에 집착하는 삶에 대하여 질병같다라 하여 병적현상으로 본 것이다.

 

생각이 꼬리를 물었을 때

 

세 번째 구절에서 아무리 어떻게 생각하더라도(Yena yena hi maññati)”라 하였다. 어떤 생각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이 질병인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오온)을 자기라고 스스로 말하는 세상은 물질, 느낌 등을 원인으로 해서 영원론 등의 형태로 아만과 갈애에 입각한 견해를 통해서 생각한다. (UdA.209)”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빠알리 maññati가 있다. 이를 전재성님은 생각으로 번역하였다. 만냐띠는 ‘imagines; is of opinion; deems.’의 뜻이다. 주석에서는 영원론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생각 이상을 말한다.

 

생각을 하면 생각이 꼬리를 물어 전개 되어 나간다. 그래서 거대한 사념의 구조물을 형성한다. 이를 빠짠짜라 한다. 우리말로 희론또는 망상으로 번역된다. 만냐띠는 빠빤짜의 출발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만냐띠는 철저하게 자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온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한 만냐띠가 발생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왜곡된 사유를 유발시킨다. 영원론이나 단멸론이 대표적이다. 이런 사견은 모두 자아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만냐띠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왜곡된 사유또는 허황된 생각이라 하였다. 모두 유위적으로 조작된 것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의 경(M1)’에서 땅을 땅으로 여기고 땅을 땅으로…”라고 시작 되는 법문을 하였다.

 

왜곡된 사유의 전개과정

 

근본법문의 경에서 왜곡된 사유에 따른 유위적 조작의 과정을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왜곡된 사유에 따른 유위적 조작의 과정

단계

   

  

비 고

1

땅을 땅으로 여기고

일반사람은 X X로 지각한다.

대격

있는 그대로 지각

2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 땅을 생각하고

그는 X X로 지각하면서 X를 생각한다.

지각의 사유화

3

땅 가운데 생각하고

그는 X가운데 생각한다.

처격

‘나’처럼 여김

4

땅으로부터 생각하며

그는 X로부터 생각한다.

탈격

‘나’에 대한 관심이 더욱 증폭

5

‘땅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그는 ‘X는 나의 것(또는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유격

‘나의 소유’란 자아관념의 기초가 형성

6

땅에 대해 즐거워한다.

그는 X를 즐거워 한다.

‘나의 소유’를 향수함

 

 

 

이것이 일반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지각하는 단계이다. 보고, 듣는 등 여섯 가지 감각능력에 따라 생각이 일어나면서 생각이 왜곡되는 과정이다. 이를 창조주에 대입 하면 그는 창조주를 창조주으로 여기고 창조주를 창조주으로 여기고 나서, 창조주를 생각하고 창조주 가운데 생각하고 창조주로부터 생각하며 ‘창조주는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창조주에 대해 즐거워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나는 말한다.(M1)”이 된다. 이것이 왜곡된 사유, 즉 만냐띠를 말한다.

 

오온과 오취온은 어떻게 다른가?

 

네 번째 구절에서 그것은 결코 그것과 다른 것이다. (Tato ta hoti aññathā)”라 하였다. 여기서 앞의 그것과 뒤의 그것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주석에서는 자아라고 사유 되는 것과 그 기초로서의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오온)은 다른 것이다. 그 자아의 지배아래 놓이지 않기 때문에 나 만들기(mamakāra)에 실패한다. 영원한 것 등으로 생각되었던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오온)은 무상한 것등의 특징을 가진 것으로 드러난다. (UdA.209)”라고 설명 되어 있다. 오온과 오취온은 다르다는 말이다. 앞의 그것은 오취온을 말하고 뒤의 그것은 오온을 말한다.

 

오온과 오취온은 다른 말이다. 오온에 집착 된 것이면 오취온이다. 오온과 오취온의 구별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교리문답의 작은 경에 설명이 되어 있다. 재가신자 비싸카가 “존귀한 여인이여, 그 집착은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는 별도로 집착이 있는 것입니까? (M44)”라고 묻는다. 이에 담마딘나 비구니는 “벗이여 비싸카여, 그 집착은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 동일한 것도 아니며,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는 별도로 집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벗이여 비싸카여,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에 대하여 욕망과 탐욕을 지니면, 그것에 대한 욕망과 탐욕이 바로 그 집착입니다. (M44)”라고 답한다.

 

담마딘니는 오온과 오취온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 하였다. 그래서 오온에 대하여 탐욕을 지니면 오취온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오온이 따로 있고 오취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들이 욕망과 탐욕에 집착하였을 때 오취온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오취온이 곧 고성제

 

오온과 오취온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명쾌하게 정리 되어 있다. 오온에 대해서는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물질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탁월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무엇이든지 이와 같은 것을 물질의 다발이라 한다.(S22:48)”라 하였다. 오온 그 자체를 말한다. 여기에 그 어떤 집착도 개입 되어 있지 않은 것을 말한다. 그런 오온은 무상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취온이란 무엇일까? 오취온에 대하여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물질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탁월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번뇌와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물질의 집착다발이라고 한다. (S22:48)”라고 정의해 놓았다. 오온에 대하여 집착된 상태가 오취온인 것이다.

 

오온에 집착되었을 때 괴로움을 유발하고 만다. 그래서 고성제에 따르면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라 하였다. 생노병사 등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오취온으로 본 것이다.  십이연기에서는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오취온이 곧 고성제인 것이다.

 

 

2015-09-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