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악마의 유혹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12. 09:34

 

악마의 유혹

 

 

봄이 되면

 

봄이 되면 새들은 짝짓기를 한다. 새에 대한 다큐프로를 보면 상세하게 공개 된다. 새는 번식철이 되면 짝을 짓고 알을 낳아 정성껏 품는다. 알을 깨고 나온 새끼에게 부모새는 번갈아 가며 부지런히 먹이를 날라다 준다. 이런 덕에 새끼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여 새집이 비좁을 정도가 된다.

 

다큐프로의 하일라이트는 비상이다. 어미만큼이나 부쩍 자란 새끼는 둥지 밖에 나와 있다. 이제 스스로 먹이를 찾아야 할 때이다. 마침내 새끼새는 비상한다. 그리고 다시는 둥지로 돌아 오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이 불과 3개월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다.

 

도시의 하늘에서도 날아 다니는 수 많은 새들을 볼 수 있다. 하천에는 팔뚝만한 잉어들이 떼지어 몰려다닌다. 쓰레기 장 한켠에는 도둑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린다. 사람의 눈길 닿지 않은 곳에도 생명이 있다. 아무도 보아 주지 않지만 때 되면 알을 품고 새끼를 낳는다.

 

화려한 도시의 뒷골목에도 삶이 있다. 죽은 듯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곳에도 사랑이 있고 가족이 있다. 저 깊은 산골짝에도 사람이 살아 간다. 저 먼 바닷가에도,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섬에서도 사람들이 살아 간다.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생명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한마디로 욕망으로 살아 간다. 그것의 바탕은 식욕과 성욕이다. 먹어야 몸을 지탱할 수 있다. 짝짓기를 해야 자신의 디엔에이(DNA)를 전달 할 수 있다. 개체가 성숙되면 짝을 찾는 것은 본능에 가깝다. 식욕과 성욕, 이 두 가지는 모든 생명체를 지탱케 하는 기본중의 기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식욕과 성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일 모래 죽을 것 같은 늙은이에게도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은 생리적 욕구이다. 이 욕구가 충족 되지 않으면 불만이다. 이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일생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생리적 욕구의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

 

내가 지금 이렇게 존재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욕망으로 인한 것이다. 밥을 먹지 않는다면 3일도 지탱하기 힘들 것이다. 하루 세 번 먹어야 한다. 그래서 밥 먹는 것도 일이다. 그래서 식사(食事)라 했을 것이다.

 

끌리는 대로 살다 보면

 

밥을 먹는 행위는 욕구에 따른 것이다.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기 때문에 끊임 없이 먹어야 한다. 이렇게 먹는 행위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나의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이는 집착이다. 몸과 마음이 내 것이라는 집착이 있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욕망을 내려 놓으라 한다. 생리적 욕구를 내려 놓으라는 말과 같다. 존재는 생리적 욕구로 살아 가는데 이를 내려 놓으라니 이를 따를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세상의 흐름은 욕망의 충족을 위해 사는데 흐름과 거슬러 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세상의 흐름대로 살면 세세생생 거듭 태어나게 될 것이다. 욕망대로, 끌리는 대로 살다 보면 윤회의 땔감을 많이 축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현자들은 감각적 쾌락의 위험성을 알고 있다. 감각적 욕망에서 재난을 볼 줄 안다. 그래서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살고자 한다.

 

욕망대로 한 세상 살았을 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늙어 죽을 때가 되었을 때 참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해 보고 싶은 것 다 해 보았기 때문에 원 없이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부분 욕망충족을 할 수 없어서 괴로움을 겪었을 것이다. 늙으면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이빨 때문에 먹을 수 없다. 어떻게 먹었다 하더라도 소화기관에 장애가 있다면 고통을 받는다. 하물며 성욕에 대한 충족은 기대난망이다.

 

이 자리에 있게 된 이유는

 

나이가 들어서도 욕망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 젊어서 버릇 그대로 가는 것이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식으로 막행막식으로 살아 온 삶이다. 그런 모습은 보기에도 추해 보인다. 노인이 욕심부리고 분노하는 모습은 흉하다. 늙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혜로워져야 한다. 생리적 욕망, 감각적 욕망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지혜로운 현자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봄이 되면 새들은 부지런히 할 바를 다한다. 사람도 때 되면 시집장가 가서 일가를 이룬다. 먹고 번식하는 삶이다. 그리고 새끼들을 정성으로 돌본다. 그것으로 끝난다면 동물과 다를 바 없다. 동물들도 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동물보다 못한 면도 있다. 새는 새끼가 둥지를 떠날 때 까지만 먹이를 주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동물은 필요한 양만큼만 먹지만 인간은 축적해 둔다. 욕심으로 보았을 때 인간은 동물만도 못한 것이다.

 

대체로 인간은 동물과도 같은 삶을 산다. 심지어 동물보다 못한 삶이 인간이다. 동물보다 나은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살아 가야 한다. 남들이 술과 담배, 섹스 등으로 세월을 보낼 때 반대로 살아 가는 삶이다. 남들이 욕망으로 살아 갈 때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것이다.

 

욕망대로 살면 욕망을 연료로 하여, 욕망을 동력으로 하여 세세생생 윤회 하게 된다. 또 태어나고 싶거든 욕망으로 살아 가면 된다. 이렇게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욕망으로 살아 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남는 것은 괴로움뿐이다. 그러나 욕망의 위험과 감각적 쾌락의 재난을 아는 현자들은 이쯤에서 멈출 줄 안다.

 

악마의 유혹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살아 가면 죽지 않는다. 이 몸과 마음이 내 것이라는 유아론자에게는 육체적 죽음과 정신적 죽음이 찾아 오지만, 이 몸과 마음이 내것이 아니라 조건지워진 것을 아는 무아론자’에게는 육체적 죽음과 정신적 죽음이 찾아 와도 내것이 아니다. 이런 사실을 알아 젊은 나이에 출가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악마(마라)는 집요하게 방해한다. 어떻게 방해 하는가?

 

악마는 젊었을 때 감각적 쾌락을 마음껏 누리고 나이들어 수행을 해도 늦지 않는다고 말한다. 초기경전에서는 이렇게 표현 되어 있다.

 

 

[빠삐만]

“존자들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메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 (S4.21)

 

 

악마 빠삐만은 비참한 고행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수행승들을 유혹하고 있다. 특히 나이가 젊은 수행승들에게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십시오.(bhuñjantu bhonto mānusake kāme)”라고 타락을 부추기고 있다. 더구나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젊었을 때 즐기라고 한다.

 

초기경전에서는 출가하는 아들을 붙들어 매기 위하여 어머니가 만류하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들 랏타빨라야, 먹고 마시고 놀고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누리고 공덕을 쌓으며 즐겨라. 우리는 네가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M82)”라는 내용이다. 재가자로서 감각적 욕망을 마음대로 누리되 다만 공덕 짓는 것은 게을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랏타빨라는 부모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한다. 이유는 존재에서 허망함과 무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묶임에서 위험을 보고(M82)”라 하였다. 

 

수바 비구니 이야기

 

감각적 쾌락에서 재난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지금 이 몸과 이 마음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수행해야 한다. 먼 날로 미룰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악마는 젊은 수행자를 감각적 쾌락으로 유혹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수바 비구니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아름다운 지와까의 망고 숲을 비구니 수바가 걸어가고 있는데 한 남자가 길을 가로 막았다. 수바 비구니가 말하였다.

 

[수바 비구니]

“그대는 왜 길을 막고 있습니까? 내가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출가 비구니에게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나의 스승께서는 계율을 정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존중하고 따릅니다. 나는 티 없는 청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대는 왜 길을 막고 있습니까? 그대는 마음을 절제하지 못하고 욕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평온합니다. 그대는 왜 길을 막고 있습니까?

 

[남자]

“당신은 젊고 아름답습니다. 청정한 삶에서 무엇을 구합니까? 가사를 벗어 던지고  ! 어서 꽃이 만발한 이 숲에서 즐깁니다. 숲에 혼자 들어가서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맹수들이 출몰하는 인적이 드문 두려운 숲에 당신은 동행 없이 혼자 들어가려는 것입니까? 금빛 인형처럼, 천상 정원의 여신 처럼 당신은 걷고 있습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까시산의 옻을 입으면 당신은 더욱 빛날 것입니다. !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여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그대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소. 하녀의 시중을 받으며 궁전에 삽시다. 온갖 금은 보화로 당신을 입혀드리겠소.

 

 

 

 

 

[수바 비구니]

“결국은 부서질 이 육신은 시체로 가득찬  무덤의 묘지리만 하나 더 늘려 주겠지요그런데 그대는 이런 육신에게 무슨 가치를 보았기에 나를 그렇게 쳐다보는 것입니까? 그대는 정신이 돌았습니다.

 

[남자]

“그대의 눈은 어린 사슴과 같고, 산 속의 요정과 같소. 당신의 눈을 보면 나의 감각적 쾌락은 더욱 더 솟아납니다. 티 없는 금빛 얼굴위에 당신의 눈은 연꽃 봉우리 같이 청초하고 빛납니다. 그대가 설령 멀리 있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대의 긴 눈섭, 청순한 눈빛, 그대의 눈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수바 비구니]

 

“그대는 길이 없는 곳을 걸으려 하오. 달을 잡으려 하고, 수메르산 뛰어 넘으려 하고 있소. 그대는 부처님의 자녀를 쫒고 있습니다. 천상에서도 이 지구상에서도  나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여 욕망은 뿌리째 뽑혔습니다. 마치 그릇 속의 독이 증발하듯이.

 

이런 것을 성찰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스승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유혹 하시지요. 그러나 이런 것을 아는 사람을 유혹한다면 그대는 괴롭기 만 할 것입니다. 내 마음은 괴로움이나 즐거움, 칭찬이나 비방에도 흔들림 없이 굳건히 마음챙김에 머뭅니다. ‘인연따라 생긴 것을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나는 부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훌륭한 팔정도를 타고 갑니다. 번뇌의 화살은 뽑혔습니다.

 

나는 막대기와 줄로 만든 화려하게 색칠한 춤추는 꼭두각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만일 이 꼭두각시의 막대기나 줄들을 떼어내고 던져 버리면 흩어져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꼭두각시의 형체를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까요? 어느 것을 꼭두각시라 하겠습니까?)

 

나의 몸도 이와 같습니다. 육신의 특성을 떠나서 육신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특성들을 제거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까요? (어느 것을 육신이라 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이여,  그대는 사라진 신기루 같은 꿈속의 황금나무 같은, 군중속에서 보여주는 마술 같은 있지도 않은 것을 맹목적으로 쫒고 있습니다.

 

(그대가 그렇게 찬탄나는)눈은 구멍 속의 작은 구()로서 중앙에 거품이 있고 눈물도 나고 눈꼽도 낍니다. 다양한 양상들이 눈의 모양에서 만들어 집니다.

 

그때 그토록 아름다운 눈을 수바 비구니는 아무런 애착도 없이 뽑았다. 그리고 말하였다.

 

“여기 이 눈을 가져가시오.

 

그리고 그것을 그 남자에게 주었다. 그 남자의 욕정은 즉시 사라졌다. 그리고 용서를 빌었다.

 

“그대의 눈은 원래대로 복구되기를 빕니다. 청정한 삶의 여인이여.

이런 일은 두번 다시 없을 것입니다

그대와 같은 사람을 해치려는 것은

마치 불길을 끌어 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마치 독사를 움켜쥔 것 같습니다.

그대의 눈이 원래대로 복구되기를 빕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수바 비구니는 그 남자에게서 벗어나 온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 나아갔다. 부처님의 거룩한 공덕을 보는 순간 그녀의 눈은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테리가타 366-399 수바비구니,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

 

 

젊어서 즐기라는 것은 악마의 유혹이다. 또 늙어서도 나이 들어서 수행해도 늦지 않다는 것 역시 악마의 휴혹이다. 어는 누구도 기대수명까지 사는 것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지금 젊음의 청춘을 구가 하는 자라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지금 임종을 맞이 한다면

 

만일 지금 임종을 맞이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선행보다 악행이 더 많다면 두려움에 떨 것이다.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지금 이순간 죽음을 맞이 한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수행은 나이 들어서 해도 된다는 것은 달콤한 악마의 유혹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수행해야 하는 것이 정답이다.

 

 

2015-09-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