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불사(不死)에 대한 게송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14. 09:19

 

 

불사(不死)에 대한 게송

 

 

 

 

죽겠다는데

 

두 가지 극단이 있다. 하나는 죽고 싶은 것이고, 또 하나는 살고 싶은 것이다. 어떤 이들은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영화에서 어떤 이는 죽는 것이 소원이다.’라 하였다. 또 어떤 이는 아침에 일어 났을 때 죽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이런 류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접한다. KBS에서 방영하는 조손(祖孫)가정의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죽겠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좋으면 좋아 죽겠다.”라고 하고, 싫으면 미워 죽겠다.”라고 말한다. 삶이 힘들면 힘들어 죽겠다.”라고 말한다. 슬프면 슬퍼 죽겠다.”라 하고, 아프면 아파 죽겠다.”라고 말한다. 과연 죽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진짜 죽고 싶은 것일까? 역으로 죽겠다라는 말은 살고 싶다라는 말은 아닐까? 죽는 것이 소원이라거나 아침에 죽음으로 발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단멸이고 하나는 영원이다.

 

두 가지 극단

 

일반적으로 삶이 힘들 때 죽고 싶어 한다. 이는 막연한 죽음에 대한 동경이다. 어쩌면 삶에 대한 욕망이 더 강할지 모른다. 만약 조건이 바뀌어 삶이 안락하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도 죽겟다라는 말이 나올까? 아마 더 오래 살고 싶어 할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 살고 싶어 할 것이다.

 

죽고 싶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단멸을 말한다.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육체의 장기나 내부 기능의 파괴로 인하여 몸이 무너지면 정신도 흩어져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허무주의이다. 일반적으로 허무주의와 단멸론은 동의어로 본다. 반면 지금 천상과도 같은 호사를 누리며 산다면 그는 지금 이대로 영원히 살고 싶어 할 것이다. 이를 상견이라 하고 다른 말로 영원주의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두 가지 극단을 가지고 있다. 허무주의 아니면 영원주의이다. 허무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종교가 없다. 내세와 윤회도 믿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인생을 원타임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 느끼고 지각하고 생각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인생을 원타임으로 본다면 그 어떤 일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내세와 윤회를 믿지 않은 자에게 그 어떤 도덕적으로 금하는 항목도 거리낄 것 없을 것이다. 대부분 막행막식하며 살아 가게 된다. 그러다 늙어 병들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죽고자 한다.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계속 되기를 바란다. 그런 자에게 죽음은 불청객이나 같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고 나에게 일어나서는 안될 것으로 본다. 설령 죽었다고 하더라도 영혼만은 계속 사는 것으로 본다. 마치 옷을 갈아 입듯이 몸을 바꾸어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영원주의의 전형이다.

 

자아를 기반으로 하였을 때

 

죽기를 원하는 자나 영원히 사는 자나 공통적인 사항이 있다. 그것은 철저하게 자아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어도 내가 죽는 것이고, 살아도 내가 사는 것이다. 자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죽으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본다. 또 자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영혼만은 살아 남아서 또 다른 존재로 태어나는 것으로 본다.

 

이는 양극단이다. ‘절대무절대유에 대한 것이다. 이런 양극단은 성립할 수 없다. 이는 연기법으로 증명된다. 단멸이라 하지만 행위가 남아 있는 한 뒤이어 일어나는 법이 있기 때문에 단멸은 거짓이 된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삶을 조건으로 또 다른 존재로 태어나게 된다. 영혼이 있다고 하지만 이는 조건에 따라 소멸 되는 법을 보면 성립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기 때문에 절대무와 절대무는 거짓이 된다.

 

죽지 않으려면

 

부처님이 발견하신 연기법에 따르면 우리는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는 존재이다. 이는 고정불변하는 자아가 성립 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아를 설하였다. 그런데 무아이어야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의 법칙을 알았을 때 열반이 실현된다. 그런 열반은 어떤 것일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가장 현실적으로 와 닿는 말은 불사(不死: atama)’라는 것이다.

 

열반을 성취하면 죽지 않는다. 오온을 자기 것이라 여기는 유아론자에게 육체적 죽음과 함께 정신적 죽음은 진짜 죽음을 의미 한다. 자신의 몸이 파괴 되어 죽는 것이고, 자신의 느낌, 지각이 파괴 되면 죽는 것이다. 왜 그런가? 몸과 느낌, 지각, 형성, 정신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파괴가 죽음이 된다. 그러나 오온을 내 것이라고 집착하지 않는 아라한에게 죽음이 있을 수 없다. 무아론자에게 오온의 파괴는 죽음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아라한은 이미 자아에 취착된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오언)의 짐을 완전히 모두 내려 놓은 상태(ohitabharo)에 있기 때문이다.(Itv.38-39, 702번 각주)”라 하였다.  아라한에게 죽음은 애초에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불사(不死)에 대한 게송

 

불사는 열반으로 성취된다. 그런 열반의 세계는 어떤 곳일까? 우다나에서는 열반의 세계에 대하여 게송으로 설명해 놓았다. 우다나 세상의 관찰의 경을 보면 비존재와 존재에 대한 갈애를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죽고 싶은 욕망,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이 아닌 불사의 경지에 대한 게송이다. 긴 길이의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Aya loko santāpajāto

phassapareto Roga vadati attato,
Yena yena hi maññati
Tato ta
hoti aññathā.

 

[세존]

“고통속에서 태어나 접촉에 시달리니

이 세상은 질병을 자기라고 부른다.

아무리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그것과 다른 것이다.

 

 

2.

Aññathābhāvī bhavasatto loko,

Bhavapareto bhavamevābhinandati;

Yadabhinandati ta bhaya,

Yassa bhāyati ta dukkha;

Bhavavippahānāya kho

panida brahmacariya vussati

 

세상은 존재에 집착하여

다른 것으로 존재하게 된다.

존재에 패배당하여

존재라고 즐거워한다.

존재를 즐기는 것은 두려운 것이고

두려워하면 그것이 괴로움이다.

존재를 버리기 위해

사는 것이 청정한 삶이다.

 

 

3.

Ye hi keci samaā vā brāhmaā vā

bhavena bhavassa

vippamokkhamāhasu,

sabbe te avippamuttā bhavasmāti vadāmi

 

누구든지 어떤 수행자이든 성직자든

존재를 통해서 존재로부터의

완전한 해탈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면,

이들 모두는 존재로부터 완전한 해탈을

이루지 못했다고 나는 말한다.

 

 

4.

Ye vā pana keci samaā vā

brāhmaā vā vibhavena

bhavassa nissaraamāhasu,

sabbe te anissaā bhavasmāti vadāmi.

 

누구든지 어떤 수행자이든 성직자든

비존재를 통해서 존재로부터의

완전한 여읨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고 하더라도,

이들 모두는 존재로부터 완전한 여읨을

이루지 못했다고 나는 말한다.

 

 

5.

Upadhiñhi paicca dukkhamida sambhoti,

sabbupādānakkhayā natthi dukkhassa sambhavo.

Lokamima passa puthū

avijjāya paretā bhūtā

bhūtaratā aparimuttā

 

집착의 대상을 조건으로

이 괴로움이 생겨난다.

모든 집착을 부수면,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는다.

이 세상을 널리 보라.

무명에 패배하여 존재가 되어

존재에 즐거워하고

존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6.

ye hi keci bhavā

sabbadhi sabbatthatāya

sabbe te bhavā aniccā

dukkhā vipariāmadhammā

 

어느 곳에서든 어떠한 경우이든

어떠한 존재이든

그 모든 존재는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

 

 

7.

Evameta yathābhūta,

sammappaññāya passato;

Bhavatahā pahīyati,

vibhava nābhinandati.

Sabbaso tahāna khayā,

Asesavirāganirodho nibbāna

 

이와 같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보면,

존재에의 갈애는 버려지고

비존재에도 환희하지 않는다.

일체의 갈애가 부수어진 곳에

남김없는 사라짐, 소멸, 열반이 있다.

 

 

8.

Tassa nibbutassa bhikkhuno,

Anupādā punabbhavo na hoti;

Abhibhūto māro vijitasagāmo

Upaccagā sabbabhavāni tādī ti

 

수행승이 열반에 들면,

집착을 여의고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

악마는 정복되고 전투는 승리하고

여여한 님은 모든 존재를 뛰어넘는다.”

 

(Lokavolokanasutt-세상의 관찰에 대한 경, 우다나 Ud.32, 전재성님역)

 

 

 

2015-09-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