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오동나무의 뿌리, 번뇌의 뿌리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25. 14:42

 

오동나무의 뿌리, 번뇌의 뿌리

 

 

선물로 받은 화분이 시름시름 말라 죽는다. 나무 보다는 화분이 더 값어치 나가는 선물을 받은 것은 지난 봄이었다. 평소대로 물만 열심히 주었을 뿐인데 기대와는 다르게 잎이 시들어 가며 하나 둘 씩 떨어지더니 이제 죽을 날만 남은 노인처림 보인다. 그러나 행운목 등 다른 식물은 잘 자란다. 뿌리가 없어서일까?

 

글을 쓰다 보면 유심히 관찰하게 된다. 사진을 보아도 TV를 보아도 인물 너머에 있는 것 까지 스캔하게 된다. 거리를 돌아 다닐 때도 눈에 띄는 것은 유심히 관찰한다. 그리고 늘 휴대하고 다니는 디카로 사진을 찍어 둔다. 일단 찍어 두면 언젠가 글 쓸 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자가게 앞 오동나무

 

늘 다니는 길목에 어느 날 갑자기 오동나무가 출현한 듯 보였다. 출현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없던 것이 나타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오동나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에서 오롯이 서 있다. 피자가게 앞 빈틈을 비집고 나온 것이다. 마구 세워져 있는 오토바이 앞에 있는 오동나무가 위태해 보였다. 언제 다시 그 곳을 유심히 지켜 본다면 아마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모텔 구석 한 켠에

 

식사하러 갈 때 늘 다니는 길이 있다. 모텔 구석 한켠에 오동나무가 올라 왔다. 보기에도 시원스럽게 큰 잎사귀를 가지고 있다. 그런 오동나무를 볼 때 마다 생명을 느낀다. 강인한 생명력 앞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그래서 글로도 남겼다. 불과 네 달전에 베인 자리에서 환생하듯이 솟구치는 오동나무(2015-06-22)’라는 제목으로 오동나무 찬탄을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지나는 길에 오동나무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배인 것이다. 보기에 처참 하였다.

 

베인 오동나무 밑동을 보니 커다란 밑동이 또 보인다. 아마 2014년 잘렸을 때 밑동일 것이다. 2013 7월 그 자리에서 솟구친 오동나무를 발견하였는데 2014년 잘리고 말았다. 일년 동안 자란 밑동인 것이다. 그러다 2015 6월 그 자리에서 환생 하듯이 올라 온 오동나무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두 달 여 후 오동나무는 또다시 잘리고 말았다.

 

잘린 자리에서 또 다시 잎사귀를 보았다. 잘린 것을 본지 2주도 지나지 잎이 올라 오기 시작 한 것이다. 또 다시 생명의 기적을 보여 주고 있다.

 

 

 

 

 

 

오동나무는 올라오면 잘리고 올라오면 잘린다. 그러기를 아마 여러 차례 하였을 것이다. 또 다시 잎이 올라온다. 가을임에도 마치 봄처럼 새순이 돋고 있는 것이다. 아마 몇 달만 지나면 사람 키만큼 자랄지 모른다.

 

오온에 대한 집착이 있는 한

 

오동나무의 생명력에 감탄한다. 아마 뿌리가 있는 한 계속 올라 올 것이다. 뿌리를 뽑기 전에는 잘리는 일도 반복 될 것이다. 사람도 마찬 가지 일 것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이 있는 한 모태에 들기를 거듭할 것이다.

 

사람들은 왜 존재하는가? 그것은 집착때문이라 볼 수 있다. 우리 몸과 마음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한 태어나고 죽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Yesa kho aha brāhmaa āsavāna appahīattā devo bhaveyya, te me āsavā pahīā ucchinnamūlā tālāvatthukatā anabhāvakatā āyati anuppādadhammā.

 

 

[세존]

바라문이여, 내가 모든 번뇌를 제거하지 못했다면, 신이 되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내게 그 모든 번뇌는 끊어지고, 뿌리째 뽑히고,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습니다.” (A4.36, 전재성님역)

 

 

번뇌를 끊지 못하면 새로운 태어남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뿌리가 뽑힌 종려나무처럼 번뇌가 뿌리째 뽑힌다면 미래 다시 생겨남이 없을 것이라 하였다. 오온에 대한 집착이 있는 한 나고 죽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부채모양의 나무 딸라(tālā : palmyra)

 

여기서 종려나무가 나온다. 종려나무는 tālā의 번역어이다. 영어로 ‘the palmyra tree’라 한다. Palmyra에 대하여 위키피디아에서는 Borassus (Palmyra palm) is a genus of six species of fan palms, native to tropical regions of Africa, Asia and New Guinea라 설명되어 있다. 사진으로 보면 상층부가 동그란 부채모양이다.

 

 

 

Asian palmyra (Borassus flabellifer in Karainagar, Sri Lanka)

 

 

Palmyra은 팬야자(fan palms)의 여섯 종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학명은 Borassus이다. 초불연에서는 야자수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들지 못했고라 하였다.

 

인도에서 딸라(tālā)나무는 생명력이 매우 강했던 것 같다. 줄기를 잘라도 뿌리가 남아 있으면 또 다시 올라 가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마치 도시에서 보는 오동나무처럼 자꾸 쳐 내도 계속 올라 오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뿌리째 뽑히고(ucchinnamūlā)라 하였다. 뿌리가 뽑혀야 다시는 성장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깨달은 님이네

 

번뇌가 뿌리 뽑히지 않는 다면 뿌리가 있는 딸라나무와 같다. 그런 번뇌는 집착이 대표적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으로 인하여 여기 있게 되었다. 미래에도 어떤 존재로든지 있게 될 것이다. 경에 따르면 그것이 신이 될 수도 있고, 건달바도 될 수도 있고, 인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모든 번뇌의 뿌리를 뽑아 버렸기 때문에 뿌리가 뽑혀지고 줄기만 남은 딸라나무 처럼 미래에 다시 생겨 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Yena devūpapatyassa

gandhabbo vā vihagamo,
Yakkhatta
yena gaccheyya

manussattañca abbaje,
Te mayha
āsavā khīā

viddhastā vinalīkatā.

 

Puṇḍarīka yathā vaggu

toyena nūpalippati,
Nūpalittomhi lokena

tasmā buddhosmi brāhmaāti.

 

 

[세존]

신으로 태어나거나

하늘을 나는 건달바가 되거나

야차의 세계로 가거나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나에게 그 모든 번뇌가

부서지고 파괴되고 멸진되었다.

 

마치 아름다운 백련이

물에 젖지 않듯

나는 세상에 물들지 않아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님이네.” (A4.36, 전재성님역)

 

 

 

2015-09-2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