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일상에 적용되는 사띠(sati)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29. 12:40

 

일상에 적용되는 사띠(sati)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늘 알아차림을 강조 한다. 누군가 고민을 이야기하면 그 마음상태를 알아차리라고 한다. 한마디로 알아차림으로 시작해서 알아차림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대승불교에서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일체유심조를 말하며 마음타령하듯이, 위빠사나수행처에서는 알아차림타령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알아차리라는 말일까?

 

느낌의 종류를 보면

 

알아차린다는 것은 대상이 있어야 한다. 이는 접촉에 따른다. 눈으로 형상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의문(意門)으로 들어 오는 생각 역시 알아차릴 대상이다. 그런데 대상과의 접촉이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느낌이 수반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느낌은 어떤 것일까? 일반적으로 좋은 느낌, 싫은 느낌, 좋지도 싫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이다. 이런 느낌을 알아 차리라고 하다.

 

느낌은 세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분류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느낌을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총망라된 느낌

  

     

비고

두 가지의 느낌

dve vedanā

육체적인 느낌, 정신적인 느낌

(Kāyikā, cetasikā)

2

세 가지의 느낌

tisso vedanā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sukhā, dukkhā, adukkhamasukhā)

3

다섯 가지의 느낌

pañca vedanā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만족한 느낌, 불만의 느낌, 평정한 느낌

(sukhindriya, dukkhindriya, somanassindriya, omanassindriya, upekkhindriya)

5

여섯 가지의 느낌

cha vedanā

시각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청각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후각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미각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촉각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정신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cakkhusamphassajā vedanā, sotasamphassajā vedanā, ghānasamphassajā vedanā, jivhāsamphassajā vedanā, kāyasamphassajā vedanā,  manosamphassajā vedanā)

6

열여덟 가지의 느낌

aṭṭhārasa

여섯 가지 만족을 경험하는 느낌,

여섯 가지 불만을 경험하는 느낌,

여섯 가지 평정을 경험하는 느낌

(cha somanassupavicārā ,cha domanassupavicārā,  cha upekkhūpavicārā)

18

서른여섯 가지의 느낌

chattisa Vedanā

여섯 가지 재가의 만족

여섯 가지 출가의 만족

여섯 가지 재가의 불만

여섯 가지 출가의 불만

여섯 가지 재가의 평정

여섯 가지 출가의 평정

(cha gehasitāni somanassāni,

cha nekkhammasitāni somanassāni,

cha gehasitāni domanassāni,

cha nekkhammasitāni domanassāni,

cha gehasitā upekkho,

cha nekkhammasitā upekkhā)

36

백여덟 가지의 느낌

aṭṭhasata vedanā

서른여섯 가지 과거의 느낌,

서른여섯 가지 현재의 느낌,

서른여섯 가지 미래의 느낌,

(atītā chattisa vedanā,

anāgatā chattisa vedanā,

paccuppannā chattisa vedanā)

108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느낌이다. 이 중에서도 세 가지의 느낌(tisso vedanā)이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다.

 

관념을 말하지 말고 느낌을 이야기 하세요

 

느낌이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끄달려 가면 탐욕과 성냄으로 사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어리석음이다. 끄달려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알아아차려야 한다. 어떻게 알아차려야 하는가? 즐거운 느낌이 생겨났을 때는 , 나에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구나라고 알아차리면 된다. 싫은 느낌도 마찬 가지이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느낌에서 갈애로 발전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만일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림이 없다면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일어날 것이다. 갈애가 더욱 더 강화 되면 집착이 된다. 집착단계가 되면 업으로서 존재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수행처에서 늘 강조하는 것은 느낌단계에서 좋아함과 싫어함 등을 알아차리라고 한다. 느낌에서 못 알아 차려 갈애 단계로 진입하였을 때 이미 늦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루비콘강을 건넜다라고 말한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강을 건넜으면 그 관성으로 인하여 진격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항상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느낌 단계에서 호불호를 차단 하여야 한다. 그래서 수행처에서는 늘 느낌을 보라고 한다. 경행이든 좌선이든 인터뷰시간에 느낌을 이야기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참나, 불성 등을 이야기하면 웃음거리 밖에 안 된다. 그럴 경우 관념을 말하지 말고 느낌을 이야기 하세요라며 주의를 준다.

 

사띠(sati)와 삼빠자나(sampajāna)

 

호불호 등 느낌을 알아차린다고 하였을 때 이 알아차림이라는 말은 수행용어이다. 이는 사띠의 번역어라 볼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또 삼빠자노 (sato sampajāno) 또는 사띠마 삼빠잔노(satimā sampajāno) 라는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사띠삼빠자나라 한다. 이는  알아차리며 분명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사띠에 대하여 알아차림이라 하고, 삼빠자나에 대하여 분명한 앎이라 한다. 이는 대상에 대하여 알아차리고, 그 대상에 대하여 분명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대상이 즐거운 느낌인지 괴로운 느낌인지 알아차려야 한다. 이것이 알아차림, 사띠이다. 괴로운 느낌이라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 역시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이것이 분명한 앎, 삼빠자나이다.

 

대상을 접하였을 때 느낌을 안다는 것은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에것부터 시작 된다. 타종교인들이 대상을 보았을 때 알아차린다고는 하지만 분명한 앎이 될 수 없다. 불교에서 명상기법만 가져간 MBSR과 같은 것이다.

 

MBSR의 경우

 

MBSR의 경우 서구에서 개발된 명상기법이다. 일반적으로 마음챙김명상법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명상법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다. 대상에 대하여 마음챙긴다고는 하지만 그 대상이 무상하고 괴로운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 등의 가르침이 없는 것이다. 단지 명상기법만 도입하여 환자치료용으로 활용된다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는 마음챙김은 반쪽짜리 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사띠의 고유기능인 기억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다름 아닌 가르침이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기는 과정이 빠져 있는 마음챙김은 MBSR에서나 적용되는 반쪽짜리 수행용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띠가 왜 알아차림과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라는 두 개의 기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경전적 근거를 찾아 보았다.

 

몸에 대하여 관찰하였을 때

 

숫따니빠따에 라훌라의 경(Sn2.11)’이 있다. 사띠와 관련하여 이런 게송이 있다.

 

 

Savuto pātimokkhasmi

indriyesu ca ñcasu,
Sati k
āyagatātyatthu

nibbidā bahulo bhava.

 

계율의 항목을 지키고

다섯 감관을 지켜,

그대의 몸에 대한 새김을 확립하라.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 (stn34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아들 라훌라에게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nibbidā bahulo bhava)’고 하였다. 여기서 bhava‘kamma() upapatti(재생)’ 두 가지 뜻도 있다. the state of existence의 뜻도 있다. 그래서 몸을 싫어 하여 떠나라라고도 볼 수 있다. 주석에 따르면 윤회의 소용돌이에 아주 실망하여 모든 세상을 기뻐하지 않는 지각을 가져라.” (Prj.II.343)의 뜻이라 하였다.

 

부처님은 하나 밖에 없는 외동 아들에 대하여 세속에 되돌아 가지 말고 이 세상을 싫어 하여 떠나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몸에 대한 새김을 확립하라 (Sati kāyagatātyatthu)”라고 하였다. 여기서 사띠(sati)라는 말이 나온다.

 

사띠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올바른 새김(正念)을 말한다. 올바른 노력은 올바른 새김의 기반이 되는 것으로 거기에 필요한 힘을 제공하며, 올바른 새김은 주의력을 위한 안정된 기반을 제공하고 올바른 집중을 가능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새김을 실천하는 것은 마음이 활동을 일으키지 않고 평정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의도나 사유는 직접적인 체험을 방해하는 장애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것이 소멸됨으로써 새김 속에서 대상은 있는 그대로 나타난다.”라 하였다. 이는 수행으로서의 사띠를 말한다.

 

라훌라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몸의 관찰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이는 염처경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한다.(M10)”라고 한 것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몸에 대해서만 관찰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몸을 관철할 때 느낌이나 마음이나 법은 대상이 아니다. 어떤 것을 관찰해야 할까? 32가지 몸의 기관과 10가지 부정상을 말한다

 

수행은 외는 것부터

 

팔정도 정념에서는 올바른 새김이라 하여 네 가지 수행방법이 소개 되어 있다. , , 느낌, 마음, 사실()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맞지마니까야와 디가니까야에 염처경 또는 대념처경이라는 제목으로 소개 되어 있다. 이외 니까야에서는 단편적으로 이곳 저곳에 수 없이 소개 되어 있다.

 

사념처의 가르침을 어떻게 해야 이해 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외워야 할 것이다. 부처님은 아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반복하였을 것이다. 이는 사념처의 가르침이 모든 니까야에서 발견되고 인용되고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더구나 사념처에 대하여 열반을 실현시키는 하나의 길이라고 하였다. 초불연에서는 유일한 길이라고 번역하였다. 그 정도로 중요하다는 말이다.

 

부처님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가르침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념처를 닦기 위해서는 사념처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외는 것부터 시작된다. 몸에 대한 관찰에서 여러 가지 부정관이 나오는데 외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법에 대한 관찰에서 오온에 대하여 그리고 칠각지 등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는데 이를 외지 않고는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고 수행을 한다면 MBSR의 마음챙김처럼 반쪽짜리 수행이 되어 버릴 것이다.

 

사띠는 철저하게 수행용어라고?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곳도 있다. 초불연 각묵스님에 따르면 마음챙김에 대하여 사띠는 철저하게 수행용어이기 때문에 기억이라고 번역하면 안된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30:, 제18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사념처) (하)) 라고 하였다. 이는 새김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 ‘운나바 바라문경’를 근거로 하여 사띠는 우리 마음을 해탈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했죠. 그렇게 문답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해탈과 열반으로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마음을 챙기는 역할을 한다. 혹은 마음이 대상을 챙겨서 해탈 열반으로 지향한다. 이래 되기 때문에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라 하였다. 이외 여러 가지 근거를 들고 있다. 과연 사띠가 반드시 수행용어로만 사용되는 것일까? 일상에서는 사용될 수 없는 것일까?

 

각묵스님은 초기불교전도사로 잘 알려져 있다. 인도유학 후에 초기불전연구원을 만들어 빠알리 번역에 착수하였다. 이미 전재성박사에 의하여 출간된 바 있는 상윳따니까를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후발로 번역작업에 착수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번역작업을 하고 강연을 하고 각종 책을 출간하면서 용어사용에 있어서 혼란을 초래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초불연에서만 사용되는 독특한 용어에 대한 것이다.

 

초불연 번역을 보면 사전에 등재 되어 있지 않은 용어도 많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새로 만든 용어도 있다. 이를 각종 강연이나 책에서 기정사실화 함으로 인하여 굳어 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빠알리 원문과 타번역을 대조 해 보면 많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도 그 중에 하나이다.

 

화두챙김이나 마음챙김이나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대체 어떻게 생겨 났을까? 유래를 보면 영어의 마인드풀니스를 우리말화 시켜 놓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사띠라는 빠알리원어를 근거로 한 것이라기 보다 영어의 Mindfullnes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정착된 말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덧 붙여 각묵스님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냥 멋대로 지 생각나는대로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옮긴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적어도 이런 두가지 충분한 근거가 있기 때문에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옮겼고, 그리고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거의 대부분 마음챙김으로 통일 되고 있다는 겁니다.

 

챙긴다는 것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에서 수행법인 화두 챙기는 것, 화두를 챙긴다, 챙김이라는 말을 따와가지고 마음챙김이라 했습니다. 마음챙김이라는 단어 하나에 한국불교 전통수행법을 초기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수행법하고 연결시켜 주는 번역입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30:, 제18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사념처) (하))

 

 

각묵스님의 주장에 따르면 멋대로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였다. 그 하나의 예로서 화두챙김을 들고 있다. 우리나라 선사들이 화두를 들 때 항상 화두를 챙기듯이 마음 역시 챙겨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화두챙김이나 마음챙김이나 챙겨야 할 것이 따로 있는 것 같다.

 

마음챙김 용어의 모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반론도 많다. 전재성님은 니까야 해제글에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의 모순에 대하여 지적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모든 가르침의 요소들이 마음과 관계되는 것인데 유독 싸띠에만 별도로 원래 없는 마음이라 단어가 부가될 이유가 없다.

 

둘째, 올바른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이라는 말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지향하는 올바른 정진과 특히 내용상 구분이 어려워 질 수 있다.

 

셋째, 네 가지 새김의 토대(사념처)에서 토대가 되는 명상주제의 하나에 마음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을 두고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챙김’이나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지킴’이라고 삼중적으로 번역하는 잘못이 발생할 수 있다.

 

넷째, 싸띠라는 빠알리어 자체는 마음은 커녕 챙김이나 지킴이라는 뜻도 어원적으로 없다.

 

(싸띠(sati:)와 새김, 맛지마니까야 해제, 중요한 번역 술어에 대한 설명, 전재성님)

 

 

전재성님에 따르면 싸띠는 내용적으로, 마음이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것이며, 분별적 사유나 숙고에 휩싸이지 않고 대상을 알아채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대상을 아는 것이다. 대상을 아는 기능이 사띠인 것이다. 대상을 알았다면 그 다음 단계는 분명히 아는 것이다. 이를 삼빠자나라 한다. 그래서 사띠는 수행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항상 사띠삼빠자나라 하여 함께 사용된다.

 

왜 기억인가?

 

사띠에 대한 번역어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그것은 모두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기억이다. 이는 빠알리 사전 PCED194에서도 ‘[f.] memory; mindfulness’라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외 ‘Recollection; active state of mind, fixing the mind strongly upon any subject, attention, attentiveness, thought, reflection, consciousness’의 의미가 있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다. MemoryRecollection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좋은 예이다.

 

기억으로서 사띠의 의미는 무엇일까? 가르침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anussarati anuvitakketi), 그 때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한다.(S45:3)”라는 경을 근거로 하여 번역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사띠에 대하여 범어의 스므리띠(smurti)의 빠알리어 형태로 원천적으로 ‘기억’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나,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 분명한 앎’이란 의미도 갖고 있으므로 그 둘 다의 의미를 지닌 우리 말을 찾던 역자는 ‘새김’이란 가장 적당한 번역어라고 생각했다.”라고 해제에서 밝힌 바 있다.

 

사띠에 대하여 새김이나 마음챙김 등 여러 용어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기억의 기능이 빠진 사띠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가르침은 없고 오로지 명상기법만 남은 MBSR과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사띠가 기억, 가르침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경전적 근거가 많이 있다. 그 중에 오력에 대한 것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새김의 힘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힘이라 한다.”(A5.14) 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일상에 적용되는 사띠

 

사념처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사념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념처의 가르침을 잘 기억 하고 있어야 한다. 잘 기억하여 사유하고 되새겨서 외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중요가르침, 사성세와 팔정도, 십이연기, 오온, 사념처 등과 같은 근본 가르침은 외우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름 아닌 사띠가 기억의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띠의 힘에 대하여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A5.14)이라 하였다.

 

사띠라는 말은 광범위하게 쓰인다. 이를 크게 수행의 측면과 일상의 측면으로 구별해 볼 수 있다, 사념처와 같이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에서 사용되는 사띠는 삼빠자나와 결합하여 사띠삼빠자나라는 정형구로 활용된다. 이는 대상을 알아차려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사띠가 일상에서 사용될 때는 기억의 의미가 더 크다고 본다. 그것은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다. 일상에서는 호흡관찰 등에 집중하기 힘들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다. 그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 차리는 것이다. 주로 느낌에 대한 것이다. 호불호를 알아 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가르침을 기억해 내는 것이다. 이것이 일상에 적용되는 사띠의 중요기능이라 본다.

 

알아차림과 계행의 관계

 

앙굿따라니까야에 사띠왁가(Sativagga)가 있다. 여덞 번째 법수에 실려 있다. 이렇게 사띠에 대하여 하나의 품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 중에 사띠삼빠잔냐경(satisampajañña, A8.81)’이 있다. 이를 전재성님은 새김과 알아차림의 경이라 이름 하였다.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새김을 확립하지 못하고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며 새김의 확립과 올바로 알아차림의 결여로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하는 것이 토대를 잃는다.” (A8.81)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알아차림이 없을 때 계행을 지킬 수 없음을 말한다. 이는 라훌라의 경에서 부처님이 계율의 항목을 지키고 다섯 감관을 지켜, 그대의 몸에 대한 새김을 확립하라.” (stn340) 라고 말씀 하신 것과 일치한다.

 

매사에 늘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매사에 늘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계행은 자동적으로 지켜 진다고 하였다. 이런 말은 수행처에서 늘 듣는 말이다. 그런데 앙굿따라니까야를 보니 그렇게 말한 것에 대한 경전적 근거가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나무는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갖춤으로 그 나무껍질도 완성시키고, 나무껍질도 완성시키고, 나무속껍질도 완성시키고 나무심도 완성시키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면 새김의 확립과 올바로 알아차림의 확립으로 부끄러움을 아는 것과 창피함을 하는 것이 토대를 확보한다. 감각능력의 수호가 있으면 감각능력의 수호를 갖춤으로 계행이 토대를 확보한다. 계행이 있으면 계행을 갖춤으로 올바른 삼매가 토대를 확보한다. 올바른 삼매가 있으면 올바른 삼매을 갖춤으로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이 그 토대를 확보한다. 그대로의 앎과 봄이 있으면 그대로의 앎과 봄을 갖춤으로 싫어하여 떠남과 사라짐이 토대를 확보한다. 싫어하여 떠남과 사라짐이 있으면 싫어하여 떠남과 사라짐을 갖춤으로 해탈에 대한 앎과 봄이 그 토대를 확보한다.” (A8.81, 전재성님역)

 

 

경에 따라면 사띠와 삼빠잔나는 해탈의 토대가 됨을 알 수 있다. 대상을 알아차려 그 대상에 대하여 분명하게 안다면 가장 먼저 부끄러움을 아는 것과 창피함을 하는 것의 토대가 된다고 하였다. 이어서 감각능력의 수호를 갖춤으로 계행이 토대를 확보한다라 하였다.

 

이렇게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는 것에 대하여 1)부끄러움을 아는 것과 창피함을 하는 토대, 2)계행의 토대, 3)삼매의 토대, 4)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의 토대, 5)싫어하여 떠남과 사라짐의 토대, 6)해탈에 대한 앎과 봄의 토대가 된다고 하였다.

 

부처님이 법을 설하는 조건은?

 

사띠가 수행의 측면으로 사용되었을 때는 삼빠잔나와 결합하여 궁극적으로 해탈에 대한 앎과 봄의 토대가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일상에서 사띠의 역할도 있다는 사실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사띠왁가에서 뿐니야의 경(A8.82)’이 바로 그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세 번 청해야 법을 설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삼 세번의 법칙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청한다고 하여 모두 법을 설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뿐니야존자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어떤 때는 여래께서 가르침을 기꺼이 설하시고 어떤 때는 설하지 않는 원인은 무엇이고 조건은 무엇입니까?” (A8.82) 라고 묻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설법을 할 때 조건이 있음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부처님은 세 번 청해야 법문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 않다.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의 경우 제자들이 법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부처님 스스로 설법하였다. 이는 법을 들을만한 조건이 갖추어 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뿐니야 존자의 질문에 부처님은 이렇게 답하였다.

 

 

[세존]

뿐니야여, 수행승이 믿음을 갖추었더라도 찾아오지 않으면, 그 때까지 여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 뿐니야여, 수행승이 믿음을 갖추었고 찾아 오면, 여래가 기꺼이 가르침을 설한다.” (A8.82)

 

 

부처님은 찾아 와서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에게 법을 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부로 찾아 다니며 법을 설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말은 매우 타당하다. 요즘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전도사들이 청하지도 않았는데 말을 건다면 누구나 짜증 낼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찾아 와야 가르침을 설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다 그런 것은 어니다. 찾아 와도 가까이 앉지 않으면, 그 때까지 여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경의 내용을 정리 해 보면 1)찾아오지 않으면, 2)가까이 앉지 않으면, 3)질문하지 않으면, 4)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지 않으면, 5)가르침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6)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여섯 가지가 된다.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법을 설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띠에 대한 경전적 근거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5)가르침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6)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지 않는다면이 두 가지 항목이다. 이는 사띠와 관련되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사띠왁가라 하여 별도의 품이 있고 그것도 두 번째 경에서 가르침을 기억하고,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해야 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사띠에 대한 것이다. 기억의 의미로서 사띠에 대한 경전적 근거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중요한 가르침에 대하여 반복설명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잘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가르침을 잘 귀담아 듣고 기억하여 되새기는 것은 수행승의 일과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 하였을 것이다. 마치 공부잘하는 학생이 선생님 말씀을 잘 귀담아 듣고 필기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 당시에는 필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잘 귀담아 듣고 기억하고 외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사띠에서 기억의 기능이다. 그래서 경에서도 뿐니야여, 수행승이 믿음을 갖추었고, 찾아와서, 가까이 앉아, 질문하고,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고, 가르침을 기억하더라도, 기억한 의미를 탐구하지 않는다면, 그 때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 (A8.82)라 하였다.

 

사띠를 잃어 버렸을 때

 

부처님은 자나깨나 사띠를 강조하였다. 만일 수행자가 사띠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고양이의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을 하기 위해 마을이나 거리로 들어가는데 몸을 가다듬지 않고 말을 조심하지 않고 마음을 수호하지 않고 주의 깊음에 머물지 않고 감관을 제어하지 않고 간다고 하자.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했기 때문에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S20.10) 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일상에서 알아차림의 중요성에 대한 것이다.

 

일상에서 늘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해 내야 할 것이다. 부정관을 닦았다면 부정관에 대한 가르침을 떠 올려야 할 것이다. 대상을 알아차리며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이것이 일상에서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기는 기억의 의미로서 사띠에 해당될 것이다.

 

부처님은 사띠를 잃어 버렸을 때 불이익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새김을 잃음의 경(A5.210)’에서 알 수 있다. 사띠를 잃어 버렸을 때 괴롭게 잠자고, 괴롭게 깨어나고, 악한 꿈을 꾸고, 신들이 수호하지 않고, 부정한 것을 누설하는 것이다.” (A5.210)라 하였다. 여기서 부정한 것을 누설한다는 것은 몽정을 말한다.

 

사띠를 놓쳤을 때 몽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율장대품에서도 볼 수 있다. 옮겨 보면 한때 수행승들이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새김을 잃고 알아차리지 못하고 잠에 떨어졌다. 새김을 잃고 알아차리지 못하고 잠에 떨어진 그들은 꿈을 꾸다가 몽정을 했다.”(율장대품 Vin.I.294) 라 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음식이다. 음식을 먹을 때 알아차리지 못하면 마구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항상 음식 절제를 강조하였다. 이는 알아차림을 유지 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일상에서의 사띠는

 

부처님은 모든 번뇌의 소멸에 근본이 되는 세가지 원리가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 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 (S35:239) 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모두 사띠와 관련 된 것이다.

 

일상에서의 사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기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금 내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림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야 한다. 이것이 일상에서 사띠의 역할이라 본다.

 

 

2015-09-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