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 다섯 가지 이룰 수 없는 것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0. 1. 12:33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다섯 가지 이룰 수 없는 것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살까?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에서 무엇을 위해 사는냐고 물어 본다면 그냥 살아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먹기 위해 살지요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먹고 사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걸작인 대답이 있다. 누군가 왜 삽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이에 우스개 소리 같지만 죽지 못해 삽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다섯 가지 이룰 수 없는 것

 

그냥 사는 사람, 먹기 위해 사는 사람, 죽지 못해 사는 사람 등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 분명한 사실은 세월과 함께 늙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병들어 마침내 죽음으로 종결된다는 사실이다. 괴멸이라는 종착지를 위하여 오늘도 내일도 한발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늙고 병들고 죽는 문제, 노병사야말로 모든 인생들이 해결해야 할 당면한 과제이다. 그럼에도 지금 젊고 건강하다고 해서 남의 일 보듯 한다.

 

사람들은 젊음의 교만, 건강의 교만에 의하여 서서히 다가 오는 노병사를 눈치 채지 못하고 살아 간다. 아니 알면서도 회피 하며 살아 가는지 모른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경우가 있다.”라고 말씀 하셨다. 다섯 가지는 무엇일까?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으로 알 수 있다.

 

 

Jarādhamma mā jīrīti' alabbhanīya hāna samaena vā brāhma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 'Vyādhidhamma mā vyādhīyī'ti alabbhanīya hāna samaena vā brāhma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 'Maraadhamma mā mīyī, ti alabbhanīya hāna samaena vā brāhma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vi vā lokasmi. Khayadhamma mā khīyī'ti alabbhaniya hāna samaena vā brāhma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 Nassanadhamma mā nassī'ti alabbhanīya hāna samaena vā brāhma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

 

[세존]

수행승들이여, 늙음에 종속된 자에게 늙지 말기를!’하고 바란다면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이룰 수 없다. 질병에 종속된 자에게 병들지 말기를!’하고 바란다면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이룰 수 없다. 죽음에 종속된 자에게 죽지 말기를!’하고 바란다면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이룰 수 없다. 괴멸에 종속된 자에게 괴멸하지 말기를!’하고 바란다면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이룰 수 없다. 멸망에 종속된 자에게 멸망하지 말기를!’하고 바란다면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이룰 수 없다.”

 

(Alabbhanīyahānasutta-이룰 수 없는 경우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4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다섯 가지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것은 늙음(Jarā), 병듦(Vyādhi), 죽음(Maraa), 괴멸(Khaya), 멸망(Nassana)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대림스님은 Khaya에 대하여 부서짐’, Nassana에 대하여 이라 번역하였다. 늙음이나 병듦, 죽음에 대하여 누구나 일어나지 않게 하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괴멸(Khaya), 멸망(Nassana)은 어떤 의미일까?

 

괴멸(Khaya)과 멸망(nassana)

 

괴멸을 뜻하는 카야(Khaya)에 대하여 빠알리사전 PCED194를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Khaya의 뜻은 ‘waste; destruction; decay; consummation of’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 단어가 경전에서는 어떻게 쓰였을까? 사전에서는 사용용법도 소개 되어 있다.

 

괴멸에 대하여 가장 먼저 달이 차고 기우는 것으로 설명된다.  khayaâtīta라는 말이 있는데 숫따니빠따에서 달이 차기 시작할 때, 그 달에 사람들이 두 손 모아 절하듯이, 세상사람들은 고따마께 예배하고 공경합니다.”(stn598)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달이 차기 시작하는 것에 대하여 khayaâtīta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달이 기우는 것과 반대의 말이다. 카야가 사용되는 또 하나의 용법은 khayañāa이다. 이는 지혜가 쇠퇴함을 말한다. khayadhamma라 하였을 때 이는 가르침이 쇠퇴하는 것을 말한다. 기울어져 사라져 없어져 버림을 말한다.

 

멸망을 뜻하는 nassana에 대하여 ‘disappearance; loss; destruction’라 설명되어 있다. 괴멸이나 멸망 모두 사라져 없어져 버림을 뜻한다. 이는 인간의 몸이 차츰 늙어 병들고 결국 죽어감과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나이를 한탄하는 노인

 

경에 따르면 그가 성자이든 범부이든, 천신이든,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늙음과 병듦과 죽음과 괴멸과 멸망에 종속되어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벗어 날 수 있는 자는 단 한사람도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배우지 못한 일반 범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나 늙어 간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억울해 하는 사람도 있다. 언젠가 하천공원 쉼터에서 누군가 늙음에 대하여 한탄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거나 하게 취했는지나는 억울해. 내 나이가 73세야. 이게 말이나 되. 엇그제 제대한 것 같은데 이게 말이나 되냐고?”라며 세월을 한탄하였다.

 

노인은 흘러간 세월을 인정하지 않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감을 한탄 하는 것 같았다. 이제 조금 지나면 80이 될 텐데 그나마 안심하는 것은 기대수명이 85세 가량 된다 하니 앞으로 10여년은 더 살 것으로 기대하는 듯 하다. 그때까지 어떻게 살까? 열심히 즐기며 살아 갈까?

 

늙음에 종속되면

 

사람들은 좀처럼 자신의 나이를 인정하지 않는 듯 하다. 자신의 나이가 이렇게 많이 먹은 것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고 마음만은 청춘이다라느니 나이에 곱하기 0.8을 한다든가 하여 아직도 젊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늙음에 종속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 것이다. 그래서 일반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Assutavato bhikkhave puthujjanassa jarādhamma jīrati. So jarādhamme jiṇṇe na iti paisañcikkhati: na kho mayhamevekassa1 jarādhamma jīrati. Atha kho yāvatā sattāna āgati, gati, cuti, upapatti' sabbesa sattāna jarādhamma jīrati. Ahañceva kho pana jarādhamme jiṇṇe soceyya, kilameyya, parideveyya, urattāi kandeyya, sammoha āpajjeyya, bhattampi me nacchādeyya. Kāyepi dubbaṇṇiya okkameyya. Kammantāpi nappavatteyyu. Amittāpi attamanā assu. Mittāpi dummanā assū' ti. So jarādhamme jiṇṇe socati, kilamati, paridevati, urattāi kandati, sammoha āpajjati. Aya vuccati bhikkhave, assutavā puthujjano viddho savisena sokasallena attāna yeva paritāpeti.

 

[세존]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들도 늙음에 종속되어 늙어 간다. 그는 늙음에 종속되어 늙어 가면서도 나만이 늙음에 종속되어 늙어 가는 유일한 자가 아니다. 뭇삶들이 오고 가고 죽고 태어나는 한, 모든 뭇삶들은 늙음에 종속되어 늙어간다. 그런데 나는 늙음에 종속되어 늙어 갈 때, 슬퍼하고 비탄해하고 울부짖고 가슴을 쥐어 뜯고 미혹에 빠지고, 식사도 감미롭지 않을 것이고, 몸도 용모도 추악해질 것이고, 일도 계속하지 못할 것이다. 적들은 기뻐하고 친구들은 슬퍼할 것이다.’라고 성찰하지 못한다. 그는 늙음에 종속되어 늙어 갈 때 슬퍼하고 비탄해하고 울부짖고 가슴을 쥐어 뜯고 미혹에 빠진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자를 두고 독이 묻은 슬픔의 화살에 맞아 스스로 괴로워하는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이라고 한다.”

 

(Alabbhanīyahānasutta-이룰 수 없는 경우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48, 전재성님역)

 

 

일반사람들의 늙음에 대한 인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언급되어 있는 병듦, 죽음, 괴멸, 멸망도 같은 내용이다. 경에서 중요한 말은 슬픔의 화살(sokasalla)’이다. 왜 슬픔의 화살이라 하였을까? 그것도 독화살을 맞았다고 하였다.

 

슬픔의 화살(sokasalla)

 

화살을 맞으면 아플 것이다. 그것도 독화살을 맞으면 독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 서서히 죽어 갈 것이다. 그런 독화살은 어떤 것일까? 다름 아닌 갈망에 대한 화살이다. 그것은 나에게만 늙음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 나에게만 병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고, 나만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룰 수 없는 것임에도 인정하지 않고 슬퍼하고 비탄해하고 울부짖고, 심지어 가슴을 쥐어 뜯었을 때 이는 독화살을 맞은 것으로 보고 있다.

 

초기경전에서 화살은 어떤 의미일까? 숫따니빠따 뱀의 경(Sn1.1)’에서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리고, 동요 없이 의혹을 넘어 화살을 뽑아버린 수행자는,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stn17)라는 게송이 있다. 오장애를 버린 수행승은 동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동요는 탐진치를 말한다. 이런 수행승에 대하여 화살을 뽑아 버렸다라 하였다.

 

경에서 말하는 화살은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이렇게 세 가지에다 자만과 견해를 더하여 다섯 가지 화살로 설명한다. 탐욕의 화살, 성냄의 화살, 어리석음의 화살, 자만의 화살, 사견의 화살을 뽑아 버린 것이다.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는다

 

법사들이 법문할 때 흔히 2의 화살을 맞지 말라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정신적 화살을 말한다. 지금 몸이 아프다고 하여 몸의 아픔이 정신적인 아픔으로 전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좋은 경이 있다.

 

나꿀라삐따의 경에서 부처님은 그대는 그것에 관해 이와 같이 나의 몸은 병들어도 나의 마음은 병들어서는 안된다라고 배워야 한다. 장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S22.1)라 하였다. 이것이 제1화살과 제2화살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라 볼 수 있다.

 

몸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제1의 화살을 맞았다면 그것으로 그쳐야 한다. 그런데 몸이 아프다고 하여 아이고 아파 죽겠네라고 소리지르고 슬퍼한다면 이는 제2의 화살을 맞은 것이나 다름 없다. 육체적 화살이 정신적 화살로 전이 된 것이다.

 

육체적 화살을 맞았을 때 아이고 아프다라고 그쳐야 한다. 그러나 아이고 아파 죽겠네라 하여 죽겠네가 붙게 된다면 이는 정신적 화살을 맞는 것으로 본다. ‘죽겠네라고 하는 것은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갈애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정신적 화살을 맞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나꿀라삐따 장자에게 물질이 나이고 나의 것이 물질이고 나 가운데 물질이 있고 물질 가운데 내가 있어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내지 않습니다.” (S22.1) 라는 오온무아의 가르침을 알려 준다. 이런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에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는다.’라 하였다. 오온이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면 육체적 제1의 화살은 맞을지언정 정신적 제2의 화살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독화살을 맞은 자는 오온이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느낌, 지각, 형성, 의식 등 오온이 자신의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 때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늙음, 병듦, 죽음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나이가 들면 늙지 않기를!’ ‘병들지 않기를!’ ‘죽지 않기를!’라고 바란다. 이 바라는 행위 자체가 갈애이기 때문에 화살을 맞은 것이나 다름 없다.

 

왕비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왕에게

 

화살을 맞으면 괴로울 것이다. 더구나 독화살이라면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울 것이다. 이런 괴로움에 대하여 왕비의 죽음을 들어 설명한 경이 있다. ‘슬픔의 화살을 뽑아 버림의 경(A5.50)’이다. 그런데 이 경의 오리지널 버전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룰 수 없는 경우의 경(A5.48)’이다. 그래서 모두 세 개의 경이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다.

 

경을 보면 왕이 왕비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있다. 어느 정도인가? 경에 따르면 왕은 왕비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목욕도 하지 않고 식사도 하지 않고 밤낮으로 죽은 왕비의 시신 곁에서 넋을 있고 살았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재무대신 삐야까가 나라다존자에게 왕을 위하여 설법해 주기를 요청한다.

 

나라다 존자는 왕을 위하여 법문하였다. 그것은 부처님 설한 오리지널버전 이룰 수 없는 경우의 경(A5.48)’을 근거로 한 것이다. 다섯 가지 중에 죽음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Puna ca para mahārāja sutavato ariyasāvakassa nassanadhamma nassati. So nassanadhamme naṭṭhe iti paisañcikkhati: na kho mayhamevekassa nassanadhamma nassati. Atha kho yāvatā sattāna āgati gati cuti upapatti, sabbesa sattāna nassanadhamma nassati. Ahañceva kho pana nassanadhamme naṭṭhe soceyya, kilameyya, parideveyya, urattāi kandeyya, sammoha āpajjeyya, bhattampi me nacchādeyya. Kāye 'pi dubbaṇṇiya okkameyya. Kammantā 'pi nappavatteyyu. Amittā' pi attamanā assu. Mittā' pi dummanā assū 'ti. So nassanadhamme naṭṭhe na socati, na kilamati na paridevati, na urattāi kandati, na sammoha āpajjati. Aya vuccati. Mahārāja sutavā ariyasāvako abbahi savisa sokasalla yena viddho assutavā puthujjano attāna yeva paritāpeti. Asoko visallo ariyasāvako attāna yeva parinibbāpeti.

 

[나라다]

대왕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도 죽음에 종속되어 갑니다. 그는 죽음에 종속되어 죽어 가면서도 나만이 죽음에 종속되어 죽어 가는 유일한 자가 아니다. 뭇삶들이 오고 가고 죽고 태어나는 한, 모든 뭇삶들은 죽음에 종속되어 죽어간다. 그런데 나는 죽음에 종속되어 죽어 갈 때, 슬퍼하고 비탄해하고 울부짖고 가슴을 쥐어 뜯고 미혹에 빠지고, 식사도 감미롭지 않을 것이고, 몸도 용모도 추악해질 것이고, 일도 계속하지 못할 것이다. 적들은 기뻐하고 친구들은 슬퍼할 것이다.’라고 성찰합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에 종속되어 죽어 가더라도, 슬퍼하지 않고 비탄해하지 않고 울부짖지 않고 가슴을 쥐어 뜯지 않고 미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이러한 자를 두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이 스스로 괴로워 하는 독이 묻은 슬픔의 화살을 뽑아 버린 고귀한 제자라 합니다. 고귀한 제자는 슬픔을 여의고 화살을 여의어 스스로 안온에 듭니다.”

 

(Sokasallaharaasutta- 슬픔의 화살을 뽑아 버림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50, 전재성님역)

 

 

경에서 고귀한 제자는 ariyasāvaka를 말한다. 성문제자라고도 한다. 사쌍팔배의 성자를 말한다. 성자들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과 일반범부들이 대하는 방식을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래서나만이 죽음에 종속되어 죽어 가는 유일한 자가 아니다. 뭇삶들이 오고 가고 죽고 태어나는 한, 모든 뭇삶들은 죽음에 종속되어 죽어간다.”라고 성찰한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가르침을 잘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기고

 

나라다존자는 법문을 끝내고 게송을 읊었다. 이는 부처님이 읊었던 게송과 동일하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기고 있다가 그대로 전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

Na socanāya paridevanāya

attho alabbho1 api appakopi
Socantamena
dukhita viditvā

paccatthikā attamanā bhavanti.

 

[나라다]

슬픔이나 비탄으로는

결코 적은 이익도 얻을 수 없다.

슬픔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알고

적들만이 만족할 뿐이네.

 

 

2.

Yato ca kho paṇḍito āpadāsu

na vedhati atthavinicchayaññū,
Paccatthik
āssa dukhitā bhavanti

disvā mukha avikāra purāa.

 

현명한 자는 재난 속에서도

자기의 판단에 슬기로워 동요하지 않는다.

그러면, 전과 다름없는 얼굴을 보고

그의 적은 괴로워하네.

 

 

3.

Jappena mantena subhāsitena

anuppadānena paveiyā vā,
Yath
ā yathā yattha labhetha attha

tathā tathā tattha parakkameyya.

 

찬탄과 진언과 훌륭한 설법이나

보시와 가문에 의해서

언제나 그때마다 유익을 얻는다면,

거기에 그때마다 헌신해야 하리.

 

 

4.

Sace pajāneyya alabbhaneyyo

mayā ca aññena vā esaattho
Asocam
āno adhivāsayeyya kamma

daha kinti karomi'dānīti.

 

자기나 타인의 이익을

얻을 수 없다고 분명히 안다면

슬퍼하지 말고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견고한 일에 종사해야 하리.”

 

(Sokasallaharaasutta- 슬픔의 화살을 뽑아 버림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50, 전재성님역)

 

 

세 번째 게송을 보면 진언(manta)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진언을 왼다고 하여 슬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 진언을 외워 주고 그에 대한 댓가로서 보시를 하지만 그때 뿐이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슬픔의 화살을 뽑아 버릴 수 없음을 말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네 번째 게송을 보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이 들어간 게송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이렇게 각주 하였다.

 

 

Mrp.III.254에서 붓다고싸는 시 뒷부분 ‘kamma daha kinti karomi'dānīti’윤회와 강하게 연결된 업을 지어 왔다. 이제 내가 거기에 대해 무엇을 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해석하고 있다. 역자는 Lba.III.47에 따라서, 이 문장이 출세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근심과 걱정 때문에 일상적인 일에 종사하지 못하는 세간적인 의미에서 기술한 것으로 파악했다.

 

(170번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은 붓다고사의 주석과 달리 해석 하였다. 경에서 늙음과 병듦, 죽음 등에 대하여 근심 걱정하는 것에 대하여 일반 범부들에게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세간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붓다고사는 출세간적으로 해석하여 윤회와 강하게 연결된 업을 지어 왔다. 이제 내가 거기에 대해 무엇을 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주석하였다는 것이다.

 

네 번째 게송과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찾아 보니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이익은 나도 남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근심하지 말고 ‘이제 이 굳센 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견뎌내야 합니다.”라고 번역 되어 있다.

 

전재성님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 하였고, 대림스님은 이제 이 굳센 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 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영문번역을 보니 “When you understand, that it cannot be gained, by me or by others Endure it, without grieving, do merit, there is nothing else to do.”라 되어 있다. 여기서 “there is nothing else to do”가 이에 해당된다.

 

어떻게 해야 슬픔을 이겨 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슬픔을 이겨 낼 수 있을까? 나만이 늙어가고, 나만이 병들어 가고, 나만이 죽어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아야 한다. 출세간적으로 본다면 나꿀리삐따의 경에서처럼 오온이 내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일반 배우지 못한 범부들에게는 현실적인 가르침이 필요하다. 그것은 나이 들어 간다고 근심하고, 병들어 간다고 걱정하고, 죽었다고 하여 슬퍼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근심 걱정하고 슬퍼 해 보았자 자신만 손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Sn3.8)’을 들 수 있다.

 

화살의 경에서는번뇌의 화살을 맞지 말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근심, 걱정, 슬픔이라는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번뇌의 화살을 맞지 않을 수 있을까? 경의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렇듯 세상 사람들은

죽음과 늙음에 삼켜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들은

세상의 이치를 알아 슬퍼하지 않습니다. (stn581)

 

그대는 오거나 가는 사람의

그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대는 그 양극을 보지 않고

부질없이 슬피 웁니다. (stn582)

 

미혹한 자가 자기를 해치며,

비탄해한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라도 생긴다면,

현명한 자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stn583)

 

울고 슬퍼하는 것으로서는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더욱 더 괴로움이 생겨나고

몸만 여윌 따름입니다. (stn584)

 

스스로 자신을 해치면서

몸은 여위고 추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죽은 자들을 수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비탄해 하는 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stn585)

 

사람이 슬픔을 버리지 않으면,

점점 더 고통에 빠져듭니다.

죽은 사람 때문에 울부짖는 자들은

슬픔에 정복당한 것입니다. (stn586)

 

 

전재성님의 번역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하여 마냥 슬퍼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하였다. 몸만 축나고 몰골만 사나워질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임에도 죽음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죽음에 종속된 자임을 말한다.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해가 가고 달이 감에 따라 늙어 간다. 그럼에도 늙음을 한탄한다면 늙음에 종속된 자라 볼 수 있다. 누구나 나이 들면 몸의 기능이 망가져서 병이 걸리게 된다. 그럼에도 병에 걸리지 않기를!’라고 바라는 자는 질병에 종속된 자라 하였다. 이는 오온이 자신의 것이라는 자아관념에 따른다. 그래서 매번 화살을 맞는다.

 

사람들은 탐욕을 부려 탐욕의 화살을 맞고, 분노함으로써 분노의 화살을 맞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어리석음의 화살을 맞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내가 누군데!”라는 자만의 화살을 맞고, 잘못된 견해에 빠져서 견해의 화살을 맞는다. 더구나 매번 죽겠네타령을 하다 보면 정신적 화살을 맞는다. 이렇게 매일화살을 맞는다. 아니 매순간 화살을 맞는다. 그것도 독화살이다. 이렇게 매번 번뇌의 화살, 슬픔의 화살을 맞다 보면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화살을 피해 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에서는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 (Aññepi passa gamine yathākammupage nare)” (stn588) 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사람들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만한 이유가 있어서 태어난 것이다. 한번 태어난 이상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그래서 스스로 지은 업으로 인해 태어날 운명에 처한 다른 사람들, 죽음에 정복당해 전율하는 뭇삶들을 보십시오. (Yena yena hi maññanti tato ta hoti aññathā, Etādiso vinābhāvo passa lokassa pariyāya.” (stn587) 라 하였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면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이 업의 상속자임을 반조 하는 것이다.

 

40살 까지만 살겠다고?

 

어떤 사람은 40살 까지만 살겠다고 하였다. 40살 이상의 삶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아마 재미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존재의 이유에 대하여 재미, 즐거움에서 찾는 것이다. 그래서 먹는 재미 등이 없으면 이 세상을 무슨 재미로 살아 갈까 하며 걱정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늙어 가면 서러울 것이다. 주변의 노인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냄새 난다고 하여 아무도 쳐다 보지 않고 옆에 오는 것조차 싫어한다. 더구나 나이가 들면 기능이 약화 되어 각종 질병이 끊이지 않는다. 그럴 때 노인들은 무슨 재미로 살아 갈까?

 

살아 가는 재미가 없다면 죽지 못해서 산다고 볼 수 있다. 먹는 재미도 없다는 이 세상을 사는 낙이 없다. 그래서 어서 죽어야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거짓말이라 하였다. 어느 누구도 죽고 싶은 사람이 없다. 장사꾼이 믿지고 판다고 하지만 곧이 듣지 않는 것과 같다.

 

대부분 사람들은 늙지 않기를 바라고, 병들지 않기를 바라고 죽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것이 항상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바라고 갈망하는 마음 때문에 번뇌가 생겨난다. 그럴 때 번뇌의 화살을 맞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탐진치로 살아 간다. 때로 교만하고 때로 사견에 사로 잡혀 살아간다. 그럴때 마다 화살을 맞는다.

 

화살을 맞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해야 한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게송에서와 같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항상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존재를

결코 만나보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바라문이여, 나는 올바로 깨달은 자.

위없는 자, 화살을 뽑아버린 자입니다.”(stn560)

 

 

 

2015-10-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