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마음이 산산이 조각났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0. 3. 10:52

 

마음이 산산이 조각났을 때

 

 

 

지옥을 뜻하는 빠알리어 니라야(niraya)에 대하여 어원적으로산산이 조각난의 뜻이라 한다. 산산이 조각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산산이 조각날 때가 있다. 물질적 정신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부도가 나서 파산이 되었을 때 산산이 조각났다고 볼 수 있다. 한자로 破散 또는 破産이라는 말 자체가 산산이 부서지고 흩어진 것을 의미한다. 부부가 이혼하였을 때 파경(破鏡)을 맞았다고 한다. 이때 파경이라는 말은 거울이 깨짐을 말한다. 영어로 ‘a broken mirror’라 한다. 그리고 divorce 또는 separation이라 한다

 

 

 

puzzle

 

 

부도가 나면 감당 할 수 없는 빚더미를 앉게 된다. 그럴 경우 채권자들에게 시달린다. 실제로 부도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자살충동을 느낀다고 하였다. 그럴 경우 마음은 이미 지옥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부부싸움을 하여 파경에 이르렀다면 마음 역시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옥 같은 생활을 했었을 것임에 틀림 없다. 이렇게 본다면 산산이 조각난의 어원을 가진 빠알리어 니라야는 지옥의 상태를 잘 표현한 말이라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

 

화를 내면 나만 괴롭다. 상대방을 향하여 화를 내었지만 상대방이 받지 않았을 때 고스란히 내게로 돌아 온다. 상대방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하여 분노하였지만 상대방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마치 불어 오는 바람을 향해 재를 던진 것처럼 고스란히 자신에게 날아 왔을 때 마음은 산산조각난 것이나 다름 없다.

 

전쟁이 나면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렇다고 전쟁이 반드시 국가간의 전쟁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역시 전쟁과도 같기 때문이다. 부모 자식간의 갈등도 전쟁이고, 부부간의 갈등,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갈등, 상사와 부하와의 갈등도 일종의 전쟁이다미움과 분노와 증오를 바탕으로 한다. 이는 모두 성냄을 뿌리로 하는 마음이다.

 

전쟁은 증오를 바탕으로 한다. 증오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전쟁을 할 수 없다. 자애의 마음을 가진 자가 어떻게 싸움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전쟁광들은 증오심을 복돋는다.

 

어떤 형태로든지 싸움이 일어나면 산산조각이 난다. 국가간의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시설이 파괴되어 초토화 된다. 일상에서 부모자식 또는 부부 또는 조직원 간의 갈등이 일어났을 때 역시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마음이 산산조각 나는 것과 같다.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

 

분노로 마음이 산산조각 났을 때 괴롭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 역시 괴롭다. 괴로운 마음 그 자체가 사실 지옥이나 다름 없다. 만일 그 분노와 증오심을 가진 채 그 자리에서 죽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틀림 없이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마지막 마음이 다음 생을 위한 재생의 마음을 일으키기 위한 대상이 되기 때문에, 증오하는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났을 때 악처가 되기 쉽다.

 

초기경전에서 지옥과 관련된 정형구가 있다. 그것은 그가 신체적으로 나쁜 일을 하고 언어적으로 나쁜 일을 하고 정신적으로 나쁜 일을 하면 몸이 부서진 뒤 죽어서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다. (So kāyena duccarita caritvā vācāya duccarita caritvā manasā duccarita caritvā kāyassa bhedā parammaraā apāya duggati vinipāta niraya upapajjati.)” (S3.21) 라는 문구이다. 초불연에서는 처참한 곳[苦界], 불행한 곳[惡趣], 파멸처, 지옥에서 태어납니다.”라고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after death, he is reborn in the plane of misery, in a bad destination, in the nether world, in hell.” 하였다.

 

괴로운 곳(apāya)은 고처(苦處)라 하여 축생의 세계를 말한다. 나쁜 곳(duggati)은 악취(惡趣)라 하여 아귀의 세계를 말한다. 타락한 곳(vinipāta)이란 타처(墮處)라 하여 아수라의 세계를 말한다. 지옥(niraya)은 모든 지옥의 동의어이다. 그런데 경전에 따르면 지옥을 뜻하는 니라야는 네 가지 세계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네 가지 하층의 세계를 모두 지칭할 때도 사용된다. 이에 대하여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어

apāya

duggati

vinipāta

niraya

전재성님역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

빅쿠보디역

the plane of misery

a bad destination

the nether world

hell

각묵스님역

처참한 곳[苦界]

불행한 곳[惡趣]

파멸처

지옥

한역

苦處

惡趣

墮處

地獄

형상의 세계

축생

아귀의 세계

아수라의 무리

지옥

 

 

 

불교의 지옥

 

지옥을 뜻하는 니라야에 대하여 빠알리사전 PCED194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niraya

: lit. 'the downward-path', the nether or infernal world, usually translated by 'hell', is one of the 4 lower courses of existence (apāya, q.v.). The Buddhists are well aware that on account of the universal sway of impermanence a life in hell, just as in heaven, cannot last eternally, but will after exhaustion of the kamma which has caused the respective form of rebirth, necessarily be followed again by a new death and a new rebirth, according to the stored-up kamma.

 

(Niraya, 빠알리사전 PCED194)

 

 

사전에 따르면 문자적으로 아래로 향하는 길이라 하였다. 그것은 지하의 세계, 극악무도한 세계를 의미하는데 보통 지옥(hell)이라 한다. 그런 지옥에는 네 가지 코스가 있다고 하였다. 축생, 아귀, 아수라, 지옥 이렇게 네 가지를 모두 지칭하는 것이 지옥이라 하였다.

 

불교의 지옥은 업이 다하면 빠져 나올 수 있다. 유일신교처럼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것과 다르다. 이는 업의 법칙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천상 역시 업이 다하면 나가야 한다. 한번 천국이면 영원한 천국이고, 한번 지옥이면 영원한 지옥이 될 수 없다.

 

마음의 지옥

 

끊임 없는 재생의 과정에서 누구나 한번쯤 천상과 지옥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누군가 산산이 조각난 지옥을 체험하였다면 본능적으로 오계를 지키려 할 것이다. 살생을 하여 산산이 조각나는 괴로움을 맛 보았다면 다시는 살인을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음행을 하여 죽을 만큼 고통을 겪었다면 다시는 음행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사업을 하여 부도가 나서 마음이 산산조각 나는 괴로움을 겪었다면 다시는 사업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날이면 날마다 전쟁 같은 부부싸움 끝에 이혼하였다면 다시는 결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잊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또 다시 산산이 조각나는 것처럼 지옥과 같은 괴로움을 겪는다. 이는 마음의 지옥이다. 그렇다면 몸이 무너져 과보로서 태어나는 지옥은 실제하는 것일까?

 

악업이 다 하지 않는 한

 

초기경전에서 지옥은 어떻게 묘사 되어 있을까? 어원적으로 산산이 조각나는 곳이 지옥이라 하는데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맛지마니까야 천사의 경(M130)’에서는  지옥이 실감나게 묘사 되어 있다.

 

경에 따르면 지옥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그에게 지옥의 옥졸들은 다섯 가지 종류의 계박이라는 이름의 형벌을 가한다. 시뻘겋게 달궈진 쇠막대로 한손을 지지고, 시뻘겋게 달궈진 쇠막대로 다른 손을 지지고, 시뻘겋게 달궈진 쇠막대로 한 발을 지지고, 시뻘겋게 달궈진 쇠막대로 다른 발을 지지고, 시뻘겋게 달궈진 쇠막대로 가슴 한 가운데를 지진다. 그때에 그는 괴롭고 아프고 격렬한 고통을 느낀다. 그렇지만 그에게 악업이 다하지 않는 한, 그는 죽지도 못한다.” (M130) 라고 묘사 되어 있다.

 

지옥에서는 죽지도 못한다고 하였다. 차라리 죽어 버리면 고통이 덜 할텐데 악업이 다 하지 않는 한 죽지도 못한다고 하였다. 이외 똥이 가득한 대지옥, 숯불이 시뻘겋게 달궈진 대지옥 등 다양한 지옥이 묘사 되어 있다. 아마 지옥도의 모티브가 이 경에서 시작 되었는지 모른다.

 

지옥의 왕 야마왕도

 

그런데 경에 따르면 지옥의 왕이라 불리는 야마왕은 지옥중생들을 보고서 ‘참으로 세상에서 갖가지 악업을 저지르는 자는 이와 같은 갖가지 형벌을 받는다. 내가 인간의 지위를 얻어, 이렇게 오신 분, 거룩하신 분, 올바로 깨달은 분이 세상에 출현하면, 그 세존을 기다렸다가 세존께서 가르침을 주셔서, 그 가르침을 알 수 있다면!”(M130)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실제로 지옥을 관장하는 야마왕 자신도 언젠가 이런 형벌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부처님 법을 접하지 않은 자는 이생에서 저생으로 유전하고 윤회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옥을 관장하는 자신도 언젠가 산산이 조각나는 운명에 처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부처가 출현한 시기에 태어나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다시는 나고 죽는 윤회의 사슬을 끊고자 발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바라면 이루어진다

 

바라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기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런 노력이 없이 공물을 바치며 기도한다고 이루어진다면 뇌물을 주고 좋은 결과를 얻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자신이 지은 행위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고자 발원하는 경우는 단지 초월적 존재에게 바라는 기도와는 다르다. 맛지마니까야 형성의 생겨남에 대한 경(M120)’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발원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수행승이 믿음을 갖추고, 계행을 갖추고, 배움을 갖추고, 보시를 갖추고, 지혜를 갖춘다. 그는 ‘서른셋 하늘나라 신들이 오래 살고 아름답고 아주 행복하다.’라고 듣는다. 그는 ‘내가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서른셋 하늘나라 신들의 일족으로 태어났으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그것에 마음을 정하고 그것에 마음을 집중하고 그것에 마음을 계발한다. 그의 소망과 계발은 이와 같이 닦여지고 이와 같이 익혀져서 그곳에 다시 태어남으로 이끈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그곳에 다시 태어남으로 이끄는 길이고 방도이다.”  (M120, 전재성님역)

 

 

사람이 죽으면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란다. 한평생 가난하게 살았다면 부자로 태어나기를 바랄 것이고, 한평생 불구로 살았다면 온전한 몸으로 태어나기를 바랄 것이다. 이렇게 바라는 세계에 대하여 경에서는 형성의 생겨남 (Sakhāruppatti)’이라 하였다.

 

여기서 형성(sakhāra)이라는 말은 윤회와 업과 관계되는 포괄적 용어이다. 그래서 불교적 세계관 31개 대하여 형성조건에 따라 발생된 것이라 보고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오계를 준수해야 하고, 욕계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믿음과 보시와 지계의 생활을 하면 그곳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색계선정을 닦으면 색계에 태어나고, 무색계선전을 닦으면 무색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에 마음을 정하고 그것에 마음을 집중하고 그것에 마음을 계발한다. 그의 소망과 계발은 이와 같이 닦여지고 이와 같이 익혀져서 그곳에 다시 태어남으로 이끈다.”라고 하였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지장보살이라면 모를까

 

인간이나 인간이상으로 태어나려면 발원을 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계발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하의 세계, 즉 사악처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시 대승불교에서 지옥중생을 모두 구제하리라라며 발원한 지장보살이라면 모를까 축생, 아귀, 아수라, 지옥에 태어나고자 하는 일부로 가는 사람은 없다.

 

사악처에 태어나는 것은 철저하게 자신의 행위에 따른 것이다. 사악처에 태어날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세계에 적합한 세계에 자신도 모르게 태어나는 것이다. 살생을 하며 잔인하게 산 자는 지옥에, 한평생 먹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살았다면 축생으로, 인색한 자는 아귀로, 항상 화만 내며 산 자는 아수라의 세계에 자신도 모르게 태어날 것이다.

 

대부분 탐진치로 살아 간다. 탐진치로 살아 가는 대부분 사람들은 사람의 몸 받기 힘들 것이다. 대부분 사악처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지 않은 자에 대하여 몸이 부서진 뒤 죽어서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다.”라 하였다. 이는 악처가 실제함을 말한다.

 

지옥은 실제로 있을까?

 

지옥은 실제로 있을까? 이런 의문을 하면 좀 배웠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웃는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라 말하는가 하면 과학적으로 검증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학자나 스님들도 거침 없이 말하는 것을 보았다. 논문으로 말하는 학자들이야 그렇다쳐도 스님들이 지옥과 천상, 내생과 윤회를 부정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지옥과 천상, 내생과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인과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확인된 것만 믿는다면 저 심해에 사는 괴생명체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경전에 묘사 되어 있는 지옥 역시 믿지 않을 것이다. 회의론자들이 보기에 아직까지 죽어서 살아온 사람들이 없기에 믿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과연 부처님이 말씀 하신 지옥은 실제 하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단호하게 수행승들이여, 나는 다른 수행자나 성직자로부터 듣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알고, 실제로 보고, 실제로 발견한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M130)라 하였다. 부처님은 실제로 지옥이 있다고 한 것이다.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믿어야 할 것이다.

 

경전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

 

지옥과 천상, 내생과 윤회를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경전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누군가 경전을 근거로 이야기하면 하수로 본다. 깨달은 자는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대승불교권의 스님이나 학자들이 특히 그렇다. 그러다 보니 백인백색이다. 백사람에게 백사람의 불교가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경전에 쓰여 있는 말이라 하여 모두 믿지 말라는 것이다. 부처님도 경전에 쓰여 있는 것을 다 믿지 말라고 하였다고 말한다.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깔라마의 경에서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우리의]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A3:65) 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라는 말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이 아니다. 바라문교의 베다성전을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 하셨어도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가르침이고 이것이 계율이고 이것이 스승의 교시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들의 말에 동의 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 (D16) 라는 말을 경전적 근거로 든다. 하지만 이것도 잘못된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다만 이견이 있을 때 경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경전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 한다면

 

경전은 헙법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모든 판단 기준은 경전에 따라야 한다. 부처님은 다른 견해를 말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 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D16)”라고 당부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을 확인 해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말한 것이 맞는지 틀리는지에 대하여 경전을 보고서 판단하라는 말과 같다. 불자들이 믿고 의지해야 될 대상은 가르침이 들어 있는 경전임을 말한다.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오로지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S22:43)”라고 말씀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믿고 의지할 것은 초기경전 밖에 없다. 그럼에도 경전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 한다면 다른 것에 의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태어나지 않는 삶을 위하여

 

부처님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이는 자신의 행위에 따른 것이다. 욕계천상이나 색계 또는 무색계에 태어나고자 한다면 그 세계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행위를 하면 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 들이라면 윤회의 세계에 나기만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발원해야 할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수행승이 믿음을 갖추고, 계행을 갖추고, 배움을 갖추고, 보시를 갖추고, 지혜를 갖춘다. 그는 ‘나는 참으로 번뇌를 부수고 번뇌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금 여기서 곧바로 알아 깨닫고 성취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참으로 번뇌를 부수고 번뇌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금 여기서 곧바로 알아 깨닫고 성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수행승은 어디에서도 다시 태어나지 않고 어디로 가서도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M130,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라면 좀 더 큰 발원을 세울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고작 ‘내가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부유한 장자들의 일족으로 태어났으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해탈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의한 해탈(心解脫)과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열반을 지향하는 삶을 말한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삶을 발원하는 것이다.

 

왜 자신이 의지처인가?

 

마음이 괴롭고 심난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눈으로 매혹적인 형상을 쫓거나 귀로 아름다운 음악을 들어서 벗어 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 뿐이다. 서로 다툼으로 인해 마음이 산산조각이 날 때가 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가르침에 의존하는 것이 좋다. 조각난 마음이 다시 합쳐 질 것이다. 믿을 것은 경전뿐이다.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것이 못된다. 사람에게 의지하였을 때 상처 받는다. 그래서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고 하였다. 가르침과 자신에게 의지할 뿐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의지할 것은 자기자신이다.

 

 

Attā hi attano nātho,

attā hi attano gati,
Tasm
ā sayamayattāna

assa bhadra va vāijo.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이고

자신이 자신의 안내자이다.

그러므로 상인이 훌륭한 말을 다루듯,

그대는 자기자신을 다스리라. (Dhp380, 전재성님역)

 

 

타인을 시켜서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할 수 없다. 타인을 통해서 천상에 날 수도 없고 타인을 통해서 길을 닦아 경지에 오를 수도 없다. 오로지 자기자신만이 할 수 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 말을 잘 다루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듯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일으키지 말고 알아차림을 유지하며 자기자신을 다스린다는 것은 자기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르침에 의지하고 자신에 의지하며 다른 것에 의지 하지 않는다.

 

 

 

2015-10-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