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성직자에 대하여
앉아서 일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동이 없다. 거의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작업을 한다. 그리고 글을 쓴다. 만일 잠시라도 이동한다면 반나절 또는 하루가 깨지고 만다. 그렇게 되었을 때 아무것도 못한다. 길바닥에 시간을 뿌리는 것과 다름 없다. 그러나 앉아 있으면 일도 할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앉아서 일하는 직업이기에 글쓰기도 가능하다고 본다.
유튜브를 보고 있는데
일을 할 때 두 귀로 방송을 듣는다. 인터넷에서 제공되는 동영상 서비스를 말한다. 요즘 보고 듣는 것은 ‘유튜브’이다. 주로 단순한 작업일 때 귀에 들어 온다. 주의를 요하는 작업일 때는 귀에 들어 오지 않는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다는 말을 실감한다.
유튜브에는 온갖 것들이 넘쳐난다.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이 세상의 축소판이라 하는데 유튜브야말로 실감나는 이 세상의 축소판같다. 그런 유튜브에는 보석과 같은 것이 있는가 하면 쓰레기도 넘쳐난다.
현실세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유튜브는 육도윤회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듯 하다. 악하고 불건전한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그 중에는 새겨 보고 들을만한 것도 있다. 이런 유튜브의 세계는 바다로 비유할 수 있다.
인터넷바다는 위험한 곳
바다는 매우 넓다. 수평선 아득히 뻗어 있는 대양에는 어떤 생물들이 살고 있을까? 아마 이 세상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생명체도 있을 것이다. 특히 심해가 그렇다. 자연다큐에 따르면 대양의 깊은 심해에는 아직까지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심해에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연다큐 프로에서는 실제로 아귀같이 생긴 거대한 물고기를 보여 주고 있다.
인터넷을 흔히 바다로 비유하고 있다. 왜 이런 비유를 하였을까? 이는 바다의 특성이다. 바다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들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바다는 본래 위험한 곳이다. 초기경전에서는 바다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 되어 있기도 하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시각이야말로 인간의 바다로서 그 거센 흐름은 형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 형상으로 이루어진 거센 흐름을 견디어낸다면, 그는 파도와 소용돌이와 상어와 나찰이 많은 시각의 바다를 건너 그것을 뛰어넘어 피안에 도달하여 대지 위에 선 고귀한님이라 한다.”
(바다로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22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바다에는 상어와 나찰이 많다고 하였다. 여기서 상어와 나찰은 ‘여인’이라 각주 되어 있다. 이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 이렇게 여섯 가지 감역에 대한 수호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상어와 나찰의 바다에 뛰어든 것과 같다는 가르침이다.
더구나 그 바다는 파도와 소용돌이 까지 친다고 하였다. 폭풍우가 올 때 파도가 거세진다. 태풍이 불면 더욱더 거세져서 모든 것을 삼킬 듯 하다. 이렇게 바다는 무서운 곳이다. 여섯가지 감각능력을 수호 하지 않았을 때 폭풍의 바다에 빠져 상어 밥이 될지 모른다.
현자들은 이런 위험을 알기에 바다를 건너 안전한 곳으로 간다. 그곳은 섬이다. 이때 섬은 저 언덕과 같은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섬은 열반으로도 묘사 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위험한 바다를 건넌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 하였다.
Yo imaṃ samuddaṃ sagāhaṃ
Sarakkhasaṃ saūmibhayaṃ duttaraṃ accatari
Sa vedagu vusitabrahmacariyo
Lokannagu pāragatoti vuccatīti.
“상어와 나찰 그리고 무서운 파도가 출몰하는
건너기 어려운 바다를 건넌 자,
청정한 삶을 이루고 세계의 끝에 이른
지혜의 완성자를 피안에 도달한 님이라 부르네.” (S35.228)
진기한 보물들로 가득한 인터넷바다
바다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다. 더구나 어두운 깊은 심해에는 어떤 생명체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바다는 두려운 것이다. 한편 바다는 고마운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바다에 의지하여 살아 가기 때문에 고마운 바다이다. 가까운 바다에서는 미역, 전복을 채취하고 먼 바다에서는 때에 따라 물고기를 잡는다. 이렇게 고마운 바다는 온갖 진기한 것들로 가득차 있다. 긍정적 의미의 바다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커다란 바다에는 많은 보물 다양한 보물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보물로서 진주, 보석, 수정, 묘안석, 소라, 석영, 산호, 은, 금, 루비, 에메랄드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커다란 바다에는 많은 보물 다양한 보물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보물로서 진주, 보석, 수정, 묘안석, 소라, 석영, 산호, 은, 금, 루비, 에메랄드가 있다는 사실이 커다란 바다를 볼 때 마다 아수라들이 커다란 바다를 좋아하는 일곱 번쨰 아주 놀랍고 경이로운 이유이다.” (Ud.51,A8.19)
우다나와 앙굿따라니까야에 실려 있는 바다의 공덕 여덟 가지 중의 하나이다. 그런 바다에는 진주, 보석 등 온갖 진기한 보물들로서 가득하다고 하였다. 이런 바다에 대하여 놀랍고 경이롭다고 하였다.
인터넷을 바다로 비유하여 인터넷의 바다라고 한다. 그런데 바다 중의 바다가 유튜브이다. 유튜브에는 흔히 하는 말로 ‘없는 것 빼고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실세계의 축소판이라 볼 수 있다. 현실세계는 온갖 잡것 들로 가득하다. 대부분 무익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진주와 같은 보물이 간혹 있다는 사실이다.
각산스님의 진주같은 법문
각산스님의 법문을 유튜브로 보았다. 불교방송에서 이미 본 바 있다. 그런데 온갖 것들이 다 있는 유튜브에서 각산스님의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 법문은 참으로 진주와 같은 법문이다. 모두 21개의 법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산스님의 법문은 언제 들어도 유익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실참수행의 바탕에서 이루어진 법문이기 때문이다. 또 경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른 스님들과의 법문과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인터넷의 바다, 유튜브에는 수 많은 불교관련 동영상이 올려져 있다. 누구나 자유롭게 올릴 수 있기 때문에 막말로 어중이 떠중이도 올려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대게 자신의 이야기만 한다. 경전을 근거로 하는 자는 극히 드물다. 한소식했다하여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지만 자기의 이야기만 있을 뿐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다.
길고 짧은 것은 대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유튜브에서 사성제, 팔정도, 열반 등 불교관련 키워드를 넣으면 자칭 법사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의 법문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결같이 힘이 없다. 막말로 ‘매가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래 지속하여 보기 힘들다. 그러나 강연에 힘이 있으면 다르다.
염불 잘하는 스님이 있다. 대게 목소리가 좋다. 그러나 목소리만 좋다고 해서 대중이 좋아 하지 않는다. 목소리에 힘이 있어야 한다. 이를 박력이라 해도 좋다. 그래서 어느 스님은 관세음보살이나 지장정근 할 때 박력이 넘친다. 그런 힘이 있어서일까 신도들도 힘을 받는 것 같다.
각산스님의 법문을 보니 힘이 넘쳐난다. 어떤 이유일까? 가장 큰 이유는 실제로 체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수행담을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더구나 경전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힘이 실린다. 이렇게 박력 있는 법문은 사자후라 볼 수 있다.
당당하고 의미 있는 선언, 사자후
사자후라는 말은 불교용어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에서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열 가지 힘을 모두 갖추고 네 가지 두려움 없음을 함께 지니며 모우왕의 지위를 차지하고 무리 가운데 사자후를 하며 하느님의 수레바퀴(梵輪)를 굴린다.” (S12:21) 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십력을 갖춘 부처님이 설법하는 모습에 대하여 사자가 포효하는 듯 하다고 하였다.
사자가 포효하면 모든 동물들은 숨을 죽인다. 경에서는 “든 짐승들은 짐승의 왕인 사자의 포효하는 소리를 듣고 대부분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 (S22:78) 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사자후 역시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라고 하였다. 왜 그럴까? 그것은 당당하고 의미 있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최상의 지혜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확신에 차 있기 때문이다.
각산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힘이 있다. 또 한편으로 말하면 박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자신감 넘치고 힘이 있는 이유는 체험을 말한 것이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자주 들어도 지루하지 않다. 더구나 강연 내용 하나하나가 놓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유명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그러나 받아 적을 것이 없다. 무언가 열심히 이야기하는데 알맹이 없다. 필기구를 준비하여 메모할 준비를 하고 있으나 메모할 내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꼭 빠지지 않는 말이 있다. 그것은 ‘보시’에 대한 이야기이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법문에서 보시이야기를 빼 놓지 않는다. 이렇게 보시이야기 조짐이 나오면 속으로 “또 돈 이야기 하는구나”라며 경계하게 된다.
각산스님의 법문을 일하면서 들었다. 두 눈과 두 손으로는 작업 하면서 양 귀로는 법문을 청취한 것이다. 40분 가량의 법문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들을 만 하다. 그래서 계속 듣게 되었다. 아마 몇 번 반복해서 듣게 될 것 같다. 이는 건질 것이 있기 때문이다.
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참으로 유익한 내용이 많다. 직접 수행지도를 하는가 하면 개별면담을 한다. 이른바 점검을 말한다. 그런데 점검 해 줄 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주는 듯하다. 마치 하나라도 더 알려 주고 싶어 하는 모습이 역력 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 같다. 그런 각산스님의 법문에서 사자후를 연상하였다.
수행의 삼요소, 스승과 수행처와 도반
스님의 주옥 같은 법문을 여기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그것은 ‘수행처’에 관한 것이다. 하산한지 일년 되었다는 스님의 법문에 따르면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삼요소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스승과 도반과 수행처라 하였다. 이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한국불교에서 수행은 스님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재가자는 신행만 하는 것으로 알 고 있다. 그러나 각산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이런 관행을 깨는 것 같다. 재가자들도 얼마든지 수행을 하여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수행처가 없으면 가능하지 않다.
스승과 수행처가 있더라도 훌륭한 도반이 없다면 삼요소가 갖추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도반의 중요성을 말한다. 도반을 통해서 배울 수 있기 때문에 도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좋은 도반은 청정한 삶의 전부와도 같다고 하였다.
어느 수행처에서는 신도조직이 없다. 그래서 신도간 교류가 없다. 마치 학원수강생들처럼 강사의 말만 듣고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가는 것과 같다. 이렇게 신도조직을 만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절에서 신도조직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신도들이 뭉치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신도조직이 너무 커지면 부수는 작업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새롭게 신도회를 구성하거나 아예 구성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스승을 통해서 향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도반들과의 소통으로도 향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수행처는 스승과 도반모임이 있는 곳이다. 각산스님은 이런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재가성직자에 대하여
또 하나 감명 받은 내용이 있다. 그것은 성직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성직자라 하면 대게 목사나 신부를 떠 올린다. 스님도 성직자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 그러나 각산스님에 따르면 스님은 성직자에 넣을 수 없다고 하였다. 스님은 수행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누가 성직자가 되어야 할까? 놀랍게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여러분은) 각 분야에서 대가입니다. 나이가 60이 되든 70이 되든 그 분의 인생이 다시 시작 됩니다. 여러분들은 오랫동안 이 세계에서 너무너무 고준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인류를 빛낼 수 있는 이 고철학적 불교를 배운분들 입니다. 이 분들이 이만큼 배웠는데 왜 여러분들이 성직자가 못 됩니까?”
(각산스님, 불교방송 명상강좌 -제18강- 각산스님의 "선정의 행복, 팔풍")
누구나 성직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스님만이 성직자이여야 한다는 관념을 깨는 것이다. 마치 스님만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을 깨는 것 같다. 재가자라도 수행을 하여 깨달음에 이루고 경전을 공부하여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을 때 지도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더구나 육십대나 칠십대의 경우 그 동안 배운 것도 많고 인생경험도 풍부하기 때문에 수행을 익혀 놓으면 모두 성직자의 후보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각산스님이 말하는 불교성직자는 재가자에서 나와야 함을 말한다. 스님은 출가한 수행자이기 때문에 세속일에 깊게 관여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님이 재가자를 지도할 때 마치 천주교고해성사 듣듯이 들어 주었을 때 모두 만족 시켜 줄 수 없음을 말한다. 이럴 때 재가성직자가 지도 해 주면 훨씬 더 낫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틀어 쥐고 있는 스님들
한국불교에서는 모두 스님만 바라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스님들은 산에서 내려올 줄 모른다. 세상이 싫어서 출가한 스님들이 다시 세상에 내려 오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모든 것을 스님들이 하고 있다. 특히 총무원과 종회를 보면 국가조직을 보는 듯 하다. 총무원은 행정부와 같고, 종회는 국회와 같다. 또한 학교나 단체도 스님들이 차지 하고 있다. 스님이 이사 또는 이사장을 하고 있다. 어느 스님은 회사의 대표이사까지 하고 있다.
한국불교에서는 모든 것을 스님들이 하고 있다. 스님들이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그러나 스님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수행과 포교이다. 특히 포교가 그렇다.
스님의 본분사는 무엇일까? 이구동성으로 수행과 포교를 들고 있다. 그러나 수행은 가능한 일일지 몰라도 포교는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 오늘날 도시의 밤하늘을 보면 알 수 있다. 도시의 밤하늘에는 온통 십자가천지이다. 일요일 오전에는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이 교회로 향한다. 가끔 절이 있긴 하지만 교회와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 많은 스님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스님들은 공부가 다 되었으면 이제 도시로 내려 와야 한다. 그러나 출가자에게 그런 희망은 무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이 싫어서 입산한 자가 하산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온통 기독교의 세상이 되어 버린 도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10년 만에 종교조사한다는데
스님들은 산에서 내려 올 줄 모른다. 무주공산과도 같은 도시에서는 하나 둘 교회의 영역이 되어 간다. 스님들은 아직 공부가 덜 되었는지 입산한지 10년, 20년, 30년이 되어도 도무지 내려올 줄 모른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재가자에게 있다.
최근 교계뉴스에 따르면 출가자가 두 자리에 머물렀다고 한다. 교계뉴스에 따르면 2015년 사미와 사미니계 수계교육에 참여한 행자는 96명이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두 자리 숫자대로 떨어진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불교가 망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로 한국불교는 쇠퇴의 길로 가고 있다. 이는 인구감소에 따른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틀어 쥐고 있는 스님들은 아무런 대책이 없는 듯 하다.
인구조사가 곧 시작 된다. 그런데 이번 2015년 인구조사는 종교조사를 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종교인구조사는 매 10년마다 시행된다. 지난 2005년 시행되었으니 이번 25일부터 시작 되는 조사는 10년만이다.
십년 만에 실시 되는 종교인구조사에서 불교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한마디로 비관적이다. 왜 비관적인가? 그것은 수도권에서 3등 종교로 전락할 조짐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천과 경기는 천주교에 추월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종교인구와 관련하여 몇 차례 글을 올렸다. 2005년 전국민의 종교인구 조사에서 서울과 수도권의 종교비율을 보면 다음 표와 같다.
구 분 |
서울 | 인천 | 경기 |
9,762,546 | 2,517,680 | 10,341,006 | |
불교 | 1,642,667 (16.8%) |
348,361 (13.8%) |
1,741,401 (16.8%) |
개신교 | 2,222,831 (22.7%) |
563,433 (22.3%) |
2,260,594 (21.8%) |
천주교 | 1,382,264 (14.1%) |
345,843 (13.7%) |
1,286,104 (12.4%) |
출처; 2009 문화관광부 한국의 종교현황(2005년 인구총조사 자료)
표를 보면 수도권에서 1등 종교는 개신교이다. 불교는 2등이고, 천주교는 3등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2등 불교와 3등 천주교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사실이다. 인천의 경우 불과 0.1% 차이로 앞서 있다. 경기의 경우 4.4%, 서울의 경우 2.7% 차이로 앞서 있을 뿐이다. 개신교와는 격차가 크게 벌어져 절대적 열세이다.
문제는 2015년 인구총조사이다. 매 10년 마다 종교인구가 조사 되는데 천주교에 우세를 유질할까? 결론적으로 비관적이다. 이는 천주교의 가파른 상승세 때문이다.
불교는 정체 되고 있다. 그러나 천주교는 지난 이삼십년 사이에 신자수가 대폭으로 늘었다. 이렇게 본다면 수도권에서 불교와 천주교 간에 ‘데드크로스’가 발생될 확률이 매우 높다. 이런 문제를 의식해서일까 조계종에서는 설문에 적극적으로 응하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성직자의 감관은 다르다
스님들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한국불교는 스님들의 불교라고 볼 수 있다. 재가자들은 열심히 기도나 하고 보시나 하는 존재들로 알고 있다. 그래서 참선은 스님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제 하산한지 일년 되었다는 각산스님의 법문서 놀라운 말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새겨 들을 만한 말을 많이 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성직자에 대한 것이다. 재가가자 성직자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이는 개신교의 목사를 견주어 한 말이라 보여진다.
카페테리아에서 식사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일단의 칠십대 가량 되는 노인들이 어느 젊은 사람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 사람은 목사이다. 단체로 카페테리아에 식사하러 왔는데 목사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면서 비좁은 곳에서 “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하는 것이었다. 그 목사를 보니 감관이 맑았다. 머리를 기르고 일반인과 같은 복장을 하였지만 얼굴 모습으로 보아 성직자 임을 알 수 있었다.
수행자와 성직자로 구분해야
한국불교는 수행자와 성직자로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은 수행에만 전념하고 재가의 덕망 있는 자들이 성직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 성직자는 ‘상구보리’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하화중생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불교에서 출가한 자는 수행자의 길로 가고, 재가자 중에서 성직자가 나와야 한다.
한국불교인구가 천만이라 한다. 현재 스님은 이만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약 삼심만명에 달하는 개신교 성직자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천만 인구 중에 1%만 잡아도 10만명이다. 백명 중에 한명은 우리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인재라 볼 수 있다. 그 10만명에 달하는 불교인재를 활용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천만의 1%인 학식 있고, 덕망 있고, 지혜 있는 10만명을 성직자로 활용한다면 한국불교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불교성직자가 되려면
각산스님으로부터 유익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온갖 쓰레기로 난무 하는 유튜브에서 진주보석과도 같은 법문은 빛난다. 특히 재가자 중에서 성직자가 나와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런 성직자는 상구보리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쭌다여, 스스로 진흙에 빠진 사람이 다른 진흙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쭌다여, 스스로 진흙에 빠지지 않은 사람만이 참으로 진흙에 빠진 다른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이 가능하다. 쭌다여, 자신을 제어하지 않고 수련시키지 않고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킬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쭌다여, 자신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킨 사람만이 참으로 다른 사람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킬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 (M8) 라고 말씀 하셨다.
진흙탕 속에 있는 자가 진흙탕속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다. 이는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불교성직자가 되려면 진흙탕속에서 빠져 나온 자 이어야 할 것이다. 천만의 1%인 10만명은 가능할 것이라 본다.
“마치 사람이 물이 넘치고, 홍수가 져서,
물결이 거센 강에 빠지면,
그 물결에 휩쓸려 떠 내려가는 것과 같다.
그런 이가 어찌 남을 건네 줄 수 있겠는가.” (stn319)
2015-10-2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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