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행과 함께 스쿼트(Squat)를
꿈에 심취한 적이 있었는데
한 때 꿈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꿈을 통해서 무언가 알아 보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꿈과 관련 사적을 탐독하였다. 그 중에서도 ‘융 심리학’을 설명해 놓은 이부영교수의 책을 즐겨 읽었다.
이부영교수의 책에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우리마음 속의 어두운 반려자’라는 부제의 ‘그림자’이고, 둘째는 ‘남성속의 여성 남성 속의 여성’이라는 부제의 ‘아니마와 아니무스’이다. 셋째는 ‘하나의 경지 하나가 되는 길’이라는 부제의 ‘자기와 자기실현’이다. 이 세 종류의 책을 여러 번 읽어 보았다.
융심리학은 주로 꿈에 대한 것이다. 꿈을 통하여 인간의 무의식세계를 분석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 무의식은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으로 나뉜다. 마치 양파껍질을 까듯이 벗겨 나가면 근원에 도달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자기(Selbst, Self)’라 하였다.
융은 무의식을 의식화 함으로써 자기와 만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를 ‘대극합일’이라 하고 또 ‘자기완성’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차라리 꿈이었으면!” 융의 분석심리학과 마음의 메커니즘(2014-04-0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마음의 구조
더 이상 꿈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다. 또 꿈에 대하여 의미도 두지 않는다. 꿈을 꾸지 않으려 하는 것이 맞을지 모른다. 꿈은 꿈일 뿐이다. 이렇게 꿈에 관심이 없다 보니 꿈꾸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종종 꿈을 꾼다. 그것도 생생한 꿈이다. 주로 악몽일 때가 많다. 융심리학에 따르면 꿈도 예지력이 있다고 설명되지만 악몽은 괴로운 것이다.
악몽을 꿀 때
악몽을 꿀 때가 있다. 주로 잠자리가 편치 않았을 때이다. 컨디션이 엉망일 때 주로 꾼다. 이렇게 몸과 마음상태가 좋지 않을 때 꿈 역시 좋지 않다. 이는 몸과 마음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몸과 마음은 항상 좋은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꿈을 꾸다 보면 꿈속에서 꿈을 꾸는 등 자꾸 꿈에 빨려 들어 갈 때가 있다. 이렇게 꿈속에서 살다 보면 현실과 꿈이 구별되지 않는 듯하다. 악몽을 꾸면서 마치 현실과도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이 상황이 꿈이었으면”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면 정말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안도한다.
꿈은 어떤 것일까? 꿈의 특징은 꿈속의 나와 꿈꾸는 나, 이렇게 두 개의 나가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꿈꾸는 나는 꿈속의 나를 포함하여 꿈속의 기세간을 다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깨달음에 대하여 꿈을 깨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초기경전에서 꿈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드물다. 부처님은 꿈 이야기를 거의 하지않았다고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늘 깨어 있는 삶을 강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새김을 확립하고(Manujassa sadā satīmato)” (S3.13)라 하였고, 또 “깨어 있음에 전념(jāgariyaṃ anuyutto)” (A4.37) 하라고 하였다.
깨어 있지 않는 삶은 잠자리에서도 괴롭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꿈자리도 사납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늘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왜 잠자리가 사나운가?
잠을 잘 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몸과 마음이 편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잠자리가 편하면 아름다운 꿈을 꿀지 모른다. 가장 좋은 것은 ‘사띠’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띠를 놓쳤을 때 악몽을 꿀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새김을 잃어 버리고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잠들면,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재난이 있다.(añcime bhikkhave ādīnavā muṭṭhassatissa asampajānassa niddaṃ okkamato)”(A5.210) 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새김을 잃어 버림이라는 말은 ‘muṭṭhassati’를 말한다. 빠알리어 muṭṭhassati는 ‘forgetful’로 설명 된다. muṭṭhassati는 ‘muṭṭha( forgotten)+ sati(memory)’의 형태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어 버림을 말한다. 또 asampajānassa는 ‘a+sampajāna’의 형태로서 ‘분명히 알지 못함’을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muṭṭhassatissa asampajānassa”라는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어 버려서 분명히 알지 못함’의 뜻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새김을 잃어 버리고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라 하였고, 초불연에서는 “마음챙김을 놓아버리고 알아차림 없이”라 하였다. 분명한 사실은 사띠와 삼빠잔나를 잠들기 전까지 하지 않았을 때 괴로운 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Dukkhaṃ supati,
dukkhaṃ paṭibujjhati,
pāpakaṃ supinaṃ passati,
devatā na rakkhanti,
asuci muccati.
“수행승들이여,
괴롭게 잠자고,
괴롭게 깨어나고,
악한 꿈을 꾸고,
신들이 수호하지 않고,
부정한 것을 누설하는 것이다.” ((A5.210, 전재성님역)
사띠와 삼빠자나를 하지 않고 잠들었을 때 괴로운 밤이 된다. 괴롭게 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쉽게 잠들지 못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잠들기 전 호흡을 지켜 보면 잠들기가 어렵지 않다. 누워서 가장 강한 대상인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였을 때 자연스럽게 잠들 수 있다. 이렇게 누워서 호흡관찰하는 것을 ‘와선’이라 한다.
괴롭게 잠들면 깨어나는 것도 괴로울 것이다. 잠이 오지 않아 힘겹게 잠을 자면 자는 둥 마는 둥 하다. 그러다 보면 괴롭고 긴 밤이 된다. 아침이 되어 일어나기도 힘들다. 그저 멍하게 누워 있게 된다. 자는 것도 아니고 깬 것도 아닌 상태가 되었을 때 괴롭게 잠자고 괴롭게 깨어난다고 볼 수 있다.
자는 둥 마는 둥, 자는 것도 아니고 깬 것도 아닌 상태로 긴 밤을 보낸 다면 어떻게 될까? 꿈만 꾸게 될 것이다. 잠 못 이루는 밤이 되었을 때 온 밤을 꿈속에서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괴로운 밤에 아름다운 꿈을 기대할 수 없다. 대게 악몽이기 쉽다. 그래서 ‘악한 꿈을 꾼다(pāpakaṃ supinaṃ passati)’라고 하였을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도 신장(神將)개념이
경에서 ‘신들이 수호하지 않는다.(devatā na rakkhanti)’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신들(devatā)은 한국불교식으로 말하면 ‘신장(神將)’과도 같은 개념이다. 불법을 수호하는 하늘의 신들이다. 절에 가면 초입에 볼 수 있는 사대왕천 등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불교에서도 신장개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장과 관련하여 디가니까야에 ‘아따나띠야의 경(D32)’이 있다. 초기경전에서좀처럼 볼 수 없는 수호경이다. 주인공은 ‘벳사바나(Vessavana)’이다. 사대왕천 중에서 북쪽을 관장하는 신이다. 한역으로 ‘비사문천(毘沙門天)’ 이라고 한다.
비사문천은 일본에서 ‘전쟁의 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일본 전국시대 당시 현재 니가타현에 본거지를 두었던 에치고의 영주 ‘우에스기 겐신’이 신봉하였다. 그래서 겐신은 자신을 비사문천의 화신으로 여기고 전국을 통일하고자 하였다. 겐신의 전쟁의 신으로서 비사문천을 신봉하고 있었는데 겐신군이 출진할 때는 깃발에 비사문천을 뜻하는 ‘毘’자 군기를 사용하였다.
경에 따르면 벳사바나는 불법의 수호자가 되기를 자처 하였다. 네 하늘나라 대왕(사대왕천)들이 군대를 이끌고 부처님 처소에 찾아 왔다. 그 중에 대표격인 북방을 지키는 벳사바나 대왕이 부처님에게 귀의 하면서 아따나띠야 보호주를 수용해 주기를 간청한다. 이에 부처님은 ‘침묵으로 허락하였다’고 되어 있다. 벳사바나 대왕이 읊은 아따나띠야 보호주는 어떤 것일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벳싸바나]
“눈 있는 님, 길상의 님
비빳씬께 영광이 있기를!
모든 존재를 애민히 여기시는
씨낀께 영광이 있기를!
목욕재개하신 님, 고행의 님인
벳싸부께 영광이 있기를!
악마의 군대를 쳐 부순
까꾸싼다께 영광이 있기를!
바라문으로서 성취한
꼬나가마나께 영광이 있기를!
모든 것에서 해탈하신
깟싸빠께 영광이 있기를!
싸끼야 족의 아들로 길상의 님,
일체의 고통을 제거하는
원리를 가르쳐주신 님,
앙기라싸께 영광이 있기를!
세상에서 적멸에 들어
있는 그대로 통찰한 님들,
그들은 두 말을 하지 않고
광대하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신들과 인간들에게 이익을 주고
명지와 복덕을 구족하시고
광대하고 두려움이 없는
고따마께 영광이 있기를!
광대하고 둥근 태양
아딧짜가 떠오르는 곳,
그곳에 태양이 떠오르자마자
밤은 사라집니다.
태양이 솟아오르면,
낮이라고 불립니다.
거기에 깊은 호수
물결치는 바다가 있습니다.
물결치는 바다라고
그 때 사람들은 그것을 압니다.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동쪽이다.’라고 설명합니다.
그 방향을 수호하여
대왕은 명성을 얻습니다.
건달바의 주인으로
다따랏타라고 불리고
건달바의 존경을 받고
그들의 춤과 노래를 즐깁니다.
그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는데,
여든 명, 열 명, 한 명
광대한 힘을 지닌 인드라라는 이름을 따라
하나의 이름을 가졌다고 나는 들었습니다.
그들 또한 깨달은 님을 뵙고
태양의 후예인 부처님,
광대한 님, 두려움 없는 님께
멀리서 귀의합니다.
고귀한 님이여, 당신에게 귀의합니다.
위없는 님이여, 당신에게 귀의합니다.
착하고 건전한 것으로 살피시니
인간이 아니라도 당신을 예배합니다.
우리는 항상 그것을 듣고
이처럼 공경하여 말합니다.
‘당신들은 승리자 고따마께 예배합니까?’
‘우리는 승리자 고따마께 예배합니다.
명지와 덕행을 구족하신
고따마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이간하는 자들, 험담하는 자들,
살생자들, 잔혹한 자들,
도적들, 교활한 자들은
망자들이라고 불립니다.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이곳이 남쪽이다.’라고 설명합니다.
그 방향을 수호하여
대왕은 명성을 얻었습니다.
꿈반다들의 주인으로
비룰라까라고 불리고,
꿈반다들의 존경을 받고
그들의 춤과 노래를 즐깁니다.
그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는데,
여든 명, 열 명, 한 명
광대한 힘을 지닌 인드라라는 이름을 따라
하나의 이름을 가졌다고 나는 들었습니다.
그들 또한 깨달은 님을 뵙고
태양의 후예인 부처님,
광대한 님, 두려움 없는 님께
멀리서 귀의합니다.
고귀한 님이여, 당신에게 귀의합니다.
위없는 님이여, 당신에게 귀의합니다.
착하고 건전한 것으로 살피시니
인간이 아니라도 당신을 예배합니다.
우리는 항상 그것을 듣고
이처럼 공경하여 말합니다.
‘당신들은 승리자 고따마께 예배합니까?’
‘우리는 승리자 고따마께 예배합니다.
명지와 덕행을 구족하신
고따마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광대하고 둥근 태양
아딧짜가 지는 곳,
그곳에서는 그가 지자마자
낮은 사라집니다.
그 태양이 지면,
‘밤이다.’라고 불립니다.
거기에 깊은 호수
물결치는 바다가 있습니다.
물결치는 바다라고
그 때 사람들은 그것을 압니다.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서쪽이다.’라고 설명합니다.
그 방향을 수호하여
대왕은 명성을 얻었습니다.
용들의 주인으로
비루빡카라고 불리고,
용들의 존경을 받고
그들의 춤과 노래를 즐깁니다.
그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는데,
여든 명, 열 명, 한 명
광대한 힘을 지닌 인드라라는 이름을 따라
하나의 이름을 가졌다고 나는 들었습니다.
그들 또한 깨달은 님을 뵙고
태양의 후예인 부처님,
광대한 님, 두려움 없는 님께
멀리서 귀의합니다.
고귀한 님이여, 당신에게 귀의합니다.
위없는 님이여, 당신에게 귀의합니다.
착하고 건전한 것으로 살피시니
인간이 아니라도 당신을 예배합니다.
우리는 항상 그것을 듣고
이처럼 공경하여 말합니다.
‘당신들은 승리자 고따마께 예배합니까?’
‘우리는 승리자 고따마께 예배합니다.
명지와 덕행을 구족하신
고따마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즐거운 웃따라꾸루 대륙,
아름다운 대수미산이 있는 곳,
그곳에 태어난 자들은
아집이 없고 탐착이 없습니다.
씨앗을 뿌리지도 않고
쟁기질을 하지도 않고
사람들은 경작하지 않아도
익은 쌀을 먹습니다.
속겨도 없고 겉겨도 없고
깨끗하고 향기로운 쌀알,
뜨거운 단지에 요리한 뒤에
음식을 먹습니다.
암소를 하나의 발굽의 탈 것으로 만들어
이쪽저쪽으로 타고 다니고
짐승을 하나의 발굽의 탈 것으로 만들어
이쪽저쪽으로 타고 다닙니다.
여자를 탈 것으로 만들어
이쪽저쪽으로 타고 다니고
남자를 탈 것으로 만들어
이쪽저쪽으로 타고 다닙니다.
여자아이를 탈 것으로 만들어
이쪽저쪽으로 타고 다니고
남자아이를 탈 것으로 만들어
이쪽저쪽으로 타고 다닙니다.
그들은 탈 것에 올라
모든 방향으로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대왕을 위해서는
코끼리의 탈 것, 말의 탈 것,
천상의 탈 것, 그리고 궁전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대왕의 수행원을 위해
화려한 가마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의 도시들은 허공에
잘 건축되어 있는데
아따나띠야, 꾸씨나따, 빠라구씨나따,
나따뿌리야, 빠라꾸씨따나따입니다.
북쪽으로 까씨반따가 있고
서쪽으로는 자노가,
나바부띠야, 암바람바라바띠야,
그리고 수도인 알라까만다가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대왕 꾸베라에게는
비싸나라는 왕도가 있는데
그러므로 대왕 꾸베라는
벳싸바나라고 불립니다.
직무를 행하는 자들을 밝히면,
따똘라, 땃딸라, 따또딸라,
오자씨, 떼자씨, 따또자씨,
쑤라, 라잔, 아릿따, 네미입니다.
다라니라는 호수가 있는데
그곳에서 구름이 일어나고
그곳에서 비가 내립니다.
그곳에 쌀라바띠라는
회당이 있고, 그곳에
야차들이 함께 모입니다.
거기에는 항상 열매가 열리는 나무와
온갖 새의 무리가 가득 하고
공작과 백로의 울음소리와
뻐꾸기 등의 아름다운 노래가 가득 합니다.
거기에는 지바지바 새가 지저귀고
또한 옷타바찟따까 새가 있습니다.
숲속에는 꾸꿋타까 새와 꾸릴라까,
뽁카라싸따까 새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앵무새와 구관조가 지저귀고
지팡이소년이라는 새들이 있고
항상 언제나 아름다운
꾸베라 연못이 있습니다.
‘여기부터 그 방향이 북쪽이다.’라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영광스러운 하늘의 대왕은
그 방향을 수호합니다.
야차들이 주인으로
꾸베라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야차들의 존경을 받고
그들의 춤과 노래를 즐깁니다.
그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는데,
여든 명, 열 명, 한 명
광대한 힘을 지닌 인드라라는 이름을 따라
하나의 이름을 가졌다고 나는 들었습니다.
그들 또한 깨달은 님을 뵙고
태양의 후예인 부처님,
광대한 님, 두려움 없는 님께
멀리서 귀의합니다.
고귀한 님이여, 당신에게 귀의합니다.
위없는 님이여, 당신에게 귀의합니다.
착하고 건전한 것으로 살피시니
인간이 아니라도 당신을 예배합니다.
우리는 항상 그것을 듣고
이처럼 공경하여 말합니다.
‘당신들은 승리자 고따마께 예배합니까?’
‘우리는 승리자 고따마께 예배합니다.
명지와 덕행을 구족하신
고따마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수행승들과 수행녀들과 재가 남자신도들과 재가의 여자신도들이 수호되고 보호되고 해코지 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는 수호주 아따나띠야입니다.”
(Āṭānāṭiyasutta-아따나띠야의 경, 디가니까야 D32, 전재성님역)
꽤 긴 길이의 보호주이다. 벳사바나 대왕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부처님에게 찾아 와서 불법의 수호자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보호 하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보호주를 잘 익혀서 완전히 외우면 야차나 비인간 등으로부터 보호 받을 것이라 하였다. 예를 들어 비인간이 헤코지 하였을 때 “그의 머리를 일곱조작으로 분쇄할 것입니다.”(D32) 라고 하였다.
아라한에게도 몽정이 일어날까?
경에서 ‘부정한 것을 누설한다. (asuci muccati)’라 하였다. 여기서 ‘부정한 것(asuci)’은 ‘dirt; excrement; dung; semen. (adj.) impure; unclean’의 뜻이다. 주석에서는 정액을 누출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잠자면서 정액을 방출하는 몽정을 말한다.
몽정과 관련하여 율장대품에 이야기가 있다. 대품에 따르면 “한 때 수행승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새김을 잃고 알아차리지 못하고 짐에 떨어졌다. 새김을 잃고 알아차리지 못하고 잠에 떨어진 그들은 꿈을 꾸다가 몽정을 했다.”(Vin294) 라 되어 있다.
음식절제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양껏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가르침을 잊어 버리고 알아차리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몽정을 하여 처소가 불결해 졌을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여, 왜 이 처소가 불결해졌는가?”라며 묻는다. 그러자 아난다는 “세존이시여, 여기 수행승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새김을 잃고 알아차리지 못하고 짐에 떨어졌습니다. 새김을 잃고 알아차리지 못하고 잠에 떨어진 그들은 꿈을 꾸다가 몽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처소가 불결해졌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아난다여, 그렇다. 아난다여, 그렇다. 새김을 잃고 알아차리지 못하고 짐에 떨어지면 꿈을 꾸다가 몽정을 하게 된다. 아난다여, 그 수행승들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잠에 들면, 그들에게 몽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난다여, 일반사람들도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을 제거하면, 그들에게 몽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난다여, 거룩한 님이라면 몽정을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Vin295, 전재성님역)
율장대품에 따르면 아라한에게는 몽정이 일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아라한에게 몽정이 일어난 것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필원 교수의 ‘[아라한 다시읽기]5사(五事)’에 따르면 대천(大天, Mahadeva)이라고 하는 스님이 주장한 5사(五事)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상좌부의 ‘논사’와 설일체유부의 ‘대비바사론’에 실려 있다고 한다. 5사는 어떤 내용일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아라한들 중에는 천마에게 유혹당하여 부정을 흘리는 자가 있다.
(2) 아라한들 중에는 자신이 해탈하고 있어도 이를 모르는 자가 있다.
(3) 아라한들 중에는 자신이 해탈하고 있어도 여전히 의문이나 의혹이 있는 자가 있다.
(4) 아라한들 중에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서만 깨닫는 자가 있다.
(5) 아라한들 중에는 ‘도(道) 및 도지(道支)는 ‘고이다’라는 말에 의해 도달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진 자가 있다.
아라한에 관한 부정적 시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부파불교시대에 아라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졌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첫째항을 보면 “아라한들 중에는 천마에게 유혹당하여 부정을 흘리는 자가 있다.”라 하였다. 이는 몽정을 의미한다. 아라한도 인간인 이상 몽정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아라한은 몽정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몽정이 일어났다면 아라한이라 볼 수 있을까? 모든 번뇌로부터 해탈한 아라한에게서 몽정이 일어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후대 부파불교시대 논서에서는 그런 일이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거룩한 님이라면 몽정을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 하여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였다.
눈을 뜨자 마자 일어나야
부처님은 늘 깨어 있음을 말씀 하셨다. 그것은 사띠와 삼빠자나라는 말로 나타난다. 앉거나 서거나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깨어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깨어 있지 못할 때 잘못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방심하였을 때 실수 하는 것과 같다. 잠들 때도 마찬가지이다.
잠들기 전에도 깨어 있어야 하고 잠자고 나서도 깨어 있어야 한다. 잠들기 직전 까지도 깨어 있어야 하고 잠에서 막 깨어 나도 깨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깨어 있을 때 꿈꾸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에서는 꿈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 단 앙굿따라니까야 ‘커다란 꿈의 경(A5.196)’ 하나를 제외하고 볼 수가 없다.
초기경에서 꿈은 부정적이다. 그래서 늘 사띠하고 삼빠자나 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유지하였을 때 즐겁게 잠자고, 즐겁게 깨어나고, 악한 꿈을 꾸지 않고, 신들이 수호하고, 부정한 것을 누설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눈을 뜨자 마자 일어나야 할 것이다. 잠을 깬 상태에서 잠자리를 유지한다면 꿈속에 빠져 들 것이기 때문이다.
경행과 함께 스쿼트(Squat)를
잠이 들어 눈을 뜨면 잠이 깬 것이다. 특히 잠자리가 편치 않을 때 악몽을 꾸었을 때 계속 잠자리에 있으면 괴롭게 된다. 그럴 경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기 싫지만 막상 일어나서 경행을 하면 찌뿌둥하고 불쾌한 몸과 마음 상태에 변화가 오게 된다.
가볍게 경행 하면서 한발 한발 내딛고 발바닥의 감촉을 느낄 때 혼란스러웠던 마음은 평온을 되찾는다. 여기에 하나 더 플러스하면 금상첨화이다. 그것은 새벽운동이다. 그렇다고 달리기나 헬스장에 가는 것과 같은 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행과 더불어 가볍게 하는 운동을 말한다. 그 중에 하나가 ‘스쿼트(Squat)’이다.
스쿼트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약 두 달 전 친척으로부터 들었다. 아파트에서 헬스장을 운영하고 있는 그 분은 간단한 동작 몇 개를 알려 주었다. 기구 없이도 맨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스쿼트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스쿼트는 원래 바벨을 들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는 운동이다. 스쿼트와 함께 벤치 프레스(Bench press), 데드리프트(Deadlift) 는 대표적인 근력 강화 운동으로 꼽힌다. 그러나 경행과 함께 하는 스쿼트는 기구가 필요 없다. 그 대신 자신의 체중을 실어 운동하는 ‘맨손스쿼트’이다.
방법은 허벅지가 무릎과 수평이 될 때까지 앉았다가 일어나는 것을 반복한다. 이때 무릎을 굽히지 않고 엉덩이를 아래로 쭉 내리는 자세를 취한다. 이때 팔을 어깨높이까지 올린 상태에서 앞으로 나란히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뒷짐자세를 취한다. 한타임 할 때 20회 가량 반복한다. 세 번 내지 다섯 타임 하면 장딴지서부터 다리 근육이 뻐근해진다. 더울 때는 땀이 나기도 한다.
경행을 하면 잡념이 없어진다. 발바닥의 감촉을 느낌에 따라 잡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스쿼트를 하면 더욱 더 몸에 집중이 된다. 허리를 세운 상태에서 엉덩이를 최대한 내렸을 때 근육이 뻐근해진다. 이렇게 수십회 반복하다 보면 잡념은 사라지고 몸은 활성화 된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매우 편안해진다.
잠을 잘 잤건 못 잤건 눈만 뜨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경행과 스쿼트를 병행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스쿼트도 일종의 수행이라 볼 수 있다. 게으름과 늦잠으로 꿈속에서 헤매는 것 보다 일찍 일어나는 것이 좋다. 좌선도 좋고 경행도 좋지만 스쿼트 하는 것도 좋다. 새벽에 일어나 경행과 스쿼트 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2015-10-2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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