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오늘 밤까지 살라, 동시에 영원히 살라” 석영중교수의 ‘톨스토이, 성장을 말하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0. 26. 13:04

 

 

오늘 밤까지 살라, 동시에 영원히 살라석영중교수의 톨스토이, 성장을 말하다

 

 

 

 

 

유튜브를 즐겨 듣고 있다.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듣는데 더 의미가 있다. 불교관련 법문이나 인문학강좌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도 듣고, 운전하면서도 듣고, 일 없을 때 듣고, 집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듣는다.

 

온갖 쓰레기로 가득한 유튜브의 바다에서 종종 진주를 발견한다. 진주와 같은 콘텐츠는 한번 듣기 아깝다. 필요에 따라 여러 번 듣기도 한다. 기억하고 싶은 내용이면 메모한다. 공유하고 싶으면 녹취하기도 한다. 그런 프로가 있다. 인문학 강좌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석영중 교수의 톨스토이, 성장을 말하다이다.

 

석영중 교수의 톨스토이 성장을 말하다

 

고려대 노문학과 석용중 교수의 강연을 들어 보면 군더더기가 없다. 마치 교과서를 보는 것처럼 매끈 하다. 그렇게 된 데에는 수 없이 많은 강의를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톨스토이박사처럼 보이는 석교수의 강연을 들어 보면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를 다시 보게 된다.

 

톨스토이 하면 떠 오르는 것이 전쟁과 평화이다. 영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요즘은 잊을 만하면 TV에서 방영하기 때문에 누구나 아는 영화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소설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것은 내용도 방대할 뿐만 아니라 수 천 페이지에 달하고 더구나 이름도 외기 힘든 이유도 있다고 한다.

 

톨스토이의 대표작으로 전쟁과 평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안나카레니나, 부활 등과 작품도 있다. 이번 유튜브에서 본 강연은 안나카레니나에 대한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하여 톨스토이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그래서 강연 제목을 톨스토이, 성장을 말하다라 하였다.

 

톨스토이 나이 50이 되었을 때

 

강연의 키워드는 성장이다. 왜 성장일까? 이에 대하여 석교수는 톨스토이의 회심에 따른 것이라 한다. 톨스토이가 나이 50이 되었을 때 뒤돌아 보게 된다. 그리고 크게 반성한다. 그것에 대한 내용이 참회록이라 하였다. 

 

톨스토이는 모든 것을 갖춘 남자라 하였다. 러시아 백작이었던 톨스토이는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아내와 여러 명의 자녀들과 함께 80여세를 살며 건강하게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그런데 나이 50세에 갑자기 회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날을 되돌아 보았을 때 너무나 못 살아 온 자신에 대하여 크게 후회하였다고 한다. 석영중 교수의 강연에 따르면 참회록의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포와 혐오와 아픔을 느끼지 않고는 나는 그 시절을 회상 할 수가 없다. 나는 전쟁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죽이기 위해 남에게 결투도 신청했다. 노름 때문에 돈을 크게 탕진한 적도 있었다. 농부들이 땀 흘려 수확한 것으로 무위도식하면서도 그들을 저버렸다. 간음도 했고 거짓말도 했다. 기만, 절도, 폭행, 만취, 살인 등등 내가 저지르지 않은 죄악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톨스토이의 참회록 중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석영중 교수의 톨스토이, 성장을 말하다’)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보면 불교에서 오계를 어긴 삶과 같다. 러시아 귀족이라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살인, 폭행, 간음 등 온갖 못된 짓은 다 하고 산 것이다. 그런데 나이 50이 되었을 때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대하여 통렬히 반성하고 오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참회록을 남겼다고 한다.

 

불교이야기를 하는 듯

 

톨스토이는 50세를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 50세 이전에는 막행막식하며 살았지만 50세 이후에는 구도자로 산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가 남긴 글을 보면 구도자로서 삶에 대한 자세가 엿보인다고 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장에 대한 것이다.

 

석영중 교수는 톨스토이의 성장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강연을 들으면 들을수록 불교이야기 하는 것처럼 느꼈다. 석영중 교수가 불교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강연 중에 톨스토이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틀림 없는 불교이야기이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죽음에 대하여

 

톨스토이는 모든 것을 다 갖춘 남자라 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죽음이었다. 마치 천상에 사는 것처럼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 톨스토이에게 죽음이라는 불청객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면 화가 나요, 내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왜 죽어야 하는가?”라며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죽음에 대하여 분노하였다고 한다.

 

지금 천상과 같은 행복을 누리고 있는 자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불쾌한 것이다. 톨스토이도 마찬가지이었다. 그래서 도저히 죽음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사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면 절망하게 된다. 이 세상의 어떤 권력자라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안나카레니나에서 레빈의 말을 빌어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의 앞길에는 고뇌와 죽음과 망각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했다.”라고 되어 있다

 

그냥 사는 것이다

 

소설 안나카레니나에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레빈은 갑자기 죽음을 생각하였다. 죽음 앞에서 무엇을 한들 의미가 있을까? 무엇을 해도 허무하고 아무 것도 의미가 없는 상태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고민하고 좌절하다가 어느 날 농부와 만났다. 이때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였다. 그것은 어떤 것일까? 석영중 교수의 말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그냥 사는 것이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이 한마디에 레빈은 크게 깨달았다. 그래서 레빈은 선하게 사는 것에서 죽음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여기서 소설속의 레빈은 톨스토이가 투사 된 것이다.

 

농부의 삶은 단순하다. 때 되면 씨 뿌리고 때 되면 일하고 때 되면 수확한다.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반복적이고 단순한 삶이다. 땅에 의지하여 그냥 살아 갈 뿐이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뿌린대로 거두는 것이다. 그래서 농부들은 밭을 갈며 자연의 흐름대로 살아간다. 그런 농부의 삶은 그냥 사는 것이고 선한 것이다. 이처럼 평화로운 삶의 모습에서 소설속의 레빈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단초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죽음도 삶의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임종을 앞둔 어머니가  죽음도 삶의 하나의 과정이란다라며 오히려 아들을 위로 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농부의 자연스런 삶, 흐름대로 사는 삶 역시 하나의 과정이라 볼 수 있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듯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런 사실을 인정하였을 때 죽음은 삶에 있어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에서

 

사람들은 좀처럼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죽음에 종속된 자에게 ‘죽지 말기를!’하고 바란다면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이룰 수 없다.” (A5.48)라 하였다. 그래서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1.

이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있습니다. (stn574)

 

2.

태어나 죽지 않고자 하나,

그 방도가 결코 없습니다.

늙으면 반드시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뭇 삶의 운명은 이런 것입니다. (stn575)

 

3.

결국 익은 과일처럼

떨어져야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 (stn576)

 

4.

이를테면,

옹기장이가 빚어낸 질그릇이

마침내 모두 깨어지고 말듯이,

사람의 목숨도 그렇습니다. (stn577)

 

5.

젊은이도 장년도

어리석은 이도 현명한 이도

모두 죽음에는 굴복해 버립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stn578)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sabbe maccuparāyanā)”라 하였다. 누구 하나 예외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젊은이도 장년도 어리석은 이도 현명한 이도 모두 죽음에는 굴복해 버립니다.”라 하였다.

 

가난한 자나 부자나 모두 죽음 앞에서 무력하다. 이 세상을 호령하던 영웅호걸도 죽음을 맞이 하면 제힘으로 손가락 하나 까닥 할 수 없다. 모든 것을 다 갖춘 행복한 자라도 죽음을 거역할 수 없다. 그래서 죽음을 받아 들일 수밖에 없다.

 

오늘 밤까지 살라 동시에 영원히 살라

 

모든 것을 다 갖춘 남자 톨스토이 역시 죽음을 삶의 과정으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석영중교수에 따르면 톨스토이가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라 하였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란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하여 모순어법이라 하였다. 왜 그럴까?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을 떠 올리는 것을 말하는데 아직 오지 않는 죽음을 기억하라니!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은 모순어법이다. 그러나 이는 죽음을 대하는 지혜를 뜻한다. 우리가 늘 죽음을 기억하는 삶을 산다면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톨스토이는 인생의 길에서 오늘 밤까지 살라 동시에 영원히 살라라고 하였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죽음을 기억하는 만큼 더욱 소중해지는 현재와 오늘을 말한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죽음을 미워하고 혐오하고 분노하는 대신에 죽음을 기억하라!’라고 하였다.

 

톨스토이는 죽음을 기억하는데서 답을 찾았다. 죽음을 기억하면 삶이 더욱 풍요로워 진다는 것이다. 한 순간 순간이 선물처럼 느껴지고 그 순간 순간에 충실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순간에 충실한 삶은 영원한 삶이라 볼 수 있다. 왜 영원한 삶인가?

 

정신과 전문의 전현수박사에 따르면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멈추어 있으면 된다고 하였다. 지금 여기서 알아차림이 유지 된 채 그대로 있다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서 현재의 삶에 충실한다면, 하루를 일생처럼 산다면 죽음은 극복 된다. 그것은 늘 죽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밤까지 살라 동시에 영원히 살라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명상

 

톨스토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마치 불교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초기경전에서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수 없이 등장한다. 특히 죽음에 대한 명상이 그렇다. 이는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대전제로 한다. 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는 이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다.(Animittamanaññāta maccāna idha jīvita)” (stn574) 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다.

 

늙은이나 젊은이나 언제 죽을 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나이 어린 학생들이 떼죽음 당한 것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최근 길거리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던 캣맘이 옥상에서 떨어진 벽돌에 맞아 죽은 것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예에 속한다.

 

누구도 기대수명까지 살도록 보장 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죽음은 늘 우리 앞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늘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라고 하였다. 어느 정도일까? 초기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날이 저물고 밤이 오면 이와 같이 ‘나에게 죽음의 조건은 많다. 뱀이 나를 물거너, 전갈이 나를 물거나, 지네가 나를 물면, 그 때문에 나는 죽을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 나는 걸려 넘어져서 떨어지거나, 점액이 나를 막히게 하거나, 날카로운 바람이 나를 괴롭히면, 그 때문에 나는 죽을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라고 성찰한다.” (A6:20)

 

 

경에 따르면 우리가 죽을 수 있는 요인은 매우 많다. 밤에 잠을 자다가 뱀이나 독사나 전갈에 물려 죽을 수 있다.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자동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다 추락해서 죽을 수 있고, 배를 타고 가다가 배가 침몰해서 죽을 수 있고,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화재가 나서 죽을 수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바닥이 꺼져서 죽을 수 있고 천정이 무너져서 죽을 수 있다. 강한 바람에 간판이 떨어져 즉사할 수 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이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올지 내생이 시작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톨스토이는 알았다. 그래서 오늘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고 하였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톨스토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야기 하고 있는 듯하다.

 

영원히 살자는 것은

 

톨스토이는 죽음을 기억하라고 하면서 동시에 영원히 살자고 하였다. 여기서 영원히 살자는 것은 끝 없이 지속되는 시간 즉, 영원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영원이라는 것은 양의 개념이 아니라 충만한 시간을 의미한다.

 

죽음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이는 죽음의 명상을 함으로 인하여 현재를 충실하게 충만되게 풍요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죽음의 명상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고 익히면 불사에 뛰어들고 불사를 궁극으로 하는 커다란 과보와 커다란 공덕을 얻는다수행승들이여그대들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아라.” (A6:19)

 

 

죽음의 명상을 하면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불사(不死)’라는 말로 대변된다. 이는 톨스토이가 오늘 밤까지 살라 동시에 영원히 살라라는 말과 유사하다. 부처님이 불사라한 것은 열반을 뜻한다. 다시 태어나지 않음에 대하여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여 불사라 한 것이다. 그렇다고 불사가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다. 열반이라는 것이 영원히 존재하거나 단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죽음의 명상을 하였을 때 궁극적으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였을 때 현실에 충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 하루를 일생처럼 산 자에게 하루는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헛되이 버릴 수 없다.

 

하루 하루 살다 보면 번뇌가 소멸되어 거룩한 경지에 이를 것이다. 이렇게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었을 때 그 삶 자체는 행복이다. 이는 일반사람들의 누리는 감각적 행복이 아니다. 청정한 삶을 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지고의 행복이다.

 

죽음의 명상을 한 자는 불사를 성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커다란 과보와 커다란 공덕을 얻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대들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아라.”라 하며 늘 죽음의 명상할 것을 말씀 하였다. 어느 정도로 죽음의 명상을 해야 할까? 경에 따르면 하루 밤 하루 낮이 아니다. ‘내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이라 하였다. 지금 호흡하는 이 순간에도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여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메시지, 변화를 수용하는 삶

 

석영중 교수에 따르면 톨스토이가 말한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변화에 대한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변화를 수용하는 삶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시간과 함께 사는 것이라 하였다. 이를 톨스토이의 마지막 메시지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톨스토이는 처음에 죽음을 기억하라!’라 하였고, 이어서  오늘 밤까지 살라!’라 하였고, 마지막으로 시간과 함께 하라라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똑 같은 말이다.

 

시간은 흘러 간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변함에 대하여 거부하고 싶어 한다. 지금 행복한 자는 영원히 이대로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하고 만다. 상대방으로부터 변함 없는 사랑을 기대하지만 조건이 바뀌면 식어 버린다. 늙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도 늙어 가는 것을 싫어한다. 그럼에도 어느 누구도 늙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는 변화에 따른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기억하며 산다면 변화를 받아 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영중 교수는 우리가 죽음을 기억하고 살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시간과 함께 더불어 살면 시간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가차 없는 어떤 것이 아니라 모든 지나간 상처를 치유해주는 치유의 힘이자 신의 선물입니다.”라고 하였다.

 

강연의 핵심 주제어, 성장

 

톨스토이의 인생관을 보면 불교적 사유와 매우 유사하다. 50세에 회심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된 톨스토이는 안나카레니나에서 레빈에 투사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생활전체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매 순간순간이

이전처럼 무의미 하지 않을 것이다.”

(톨스토이 안나카레니나 마지막 문장에서)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이라는 말은 내일도 모래도 똑 같은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런 일과 상관 없이 매 순간순간이 이전처럼 무의미 하지 않을 것이다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석영중 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성장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한다. 강연의 핵심 주제어이다.

 

톨스토이는 늘 어떻게 살 것인가?’라며 사유하였다. 그런데 결론적인 말이 바로 성장이라는 말이다. 이 말이 톨스토이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다. 그렇다면 왜 성장을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톨스토이의 답은 성장은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성장은 타인과 소통하였을 때 기쁨, 죽음을 기억하고 시간과 더불어 현재에 충실할 때 느끼는 기쁨을 말한다. 이런 기쁨과 행복은 단지 욕구가 충족 되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석영중 교수는 수퍼 행복, 수퍼 기쁨이라 하였다. 그리고 저는 이를 지복이라 표현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지복이라는 말은 지극한 행복, 더 없는 행복을 말한다. 톨스토이가 말한 성장은 결국 지복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일시적인 아닌 지속되는 기쁨이라 하였다.

 

불교의 지복

 

이와 같은 석영중 교수의 톨스토이에 대한 강연 성장을 말하다를 보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 올렸다. 석영중 교수가 성장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지만 이는 향상으로 이해 한다. 왜 그런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구를 막론하고 향상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항상 부처님 가르침 안에서 살면 향상 될 것이고 궁극적인 목적에 도달 할 수 있다. 이는 세존께서 잘 설하신 이 가르침이며 1)현세의 삶에 유익한 가르침이며, 2)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3)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4)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5)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다.”(S11.3) 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톨스토이가 말한 성장은 향상과 동의어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강연에 따르면 성장이라는 말은 또 지복과 같다고 하였다. 이때 지복을  더 없는 행복, 궁극적 행복이라 한다. 이미 불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이는 숫따니빠따의 망갈라경(Sn 2.4)’에서 알 수 있다.

 

위대한 축복의 경이라 번역되는 망갈라경에서 한 게송을 보면 감관을 수호하여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라 하였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모두 지복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각 게송마다 후렴구가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eta magalamuttama)”라 되어 있다.

 

톨스토이에 대하여 검색하여 보니

 

톨스토이에 대한 강연을 들어 보니 불교의 가르침과 너무나 유사하다. 톨스토이는 불교를 알았을까? 검색해 보았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으로 소개 되어 있다. 1828년 부터 1910년 까지 살았다.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시인, 개혁가,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설명문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자신의 관념을 통하여 그리고 그 관념의 실천을 통하여 절대적 지각자로서의 자기완성에 이르고자 하고, 자기 구원과 인간 구원에 도달하고자 했다.”라 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종교관은 어떤 것일까? 설명문에 따르면  1894년에 저서한 <하느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 에서 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돕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개인개인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선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고했다.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 신앙은 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톨스토이와 불교

 

궁금한 것은 불교와의 관계이다. 검색창에 톨스토이와 불교, 이렇게 두 개의 키워드를 넣고 검색 해 보았다.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았다.

 

 

『참회록』에서 톨스토이는 동양의 우화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길을 가던 나그네가 맹수의 습격을 받자 우물 속으로 피해 들어가는데, 우물 아래에서는 용 한 마리가 입을 벌리고 그를 삼켜 버릴 듯이 노려보고 있다. 진퇴양난에 빠진 나그네는 틈새에 자라고 있는 나무 넝쿨을 잡고 버티지만, 이번에는 흰색과 검은색의 쥐 두 마리가 나타나서 그 풀을 갉아먹는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그네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관목 잎사귀에서 흘러내리는 꿀을 핥아먹는다. 불교의『열반경』에서 인용한 이 이야기는 인간 생활의 어리석음을 말해 주는 비유로서, "나그네는 인간이고 우물은 가정이며 맹수는 죽음의 신"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죽음의 맹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생이라는 가지에 매달려 있다. 죽음은 인간을 위협하고 두려움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현실의 안락함에 안주한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죽음의 공포를 회피하려 하지만, 이것이 결코 죽음 자체로부터의 벗어남이 될 수는 없다. 벌꿀로 상징되는 오욕향락의 세계에 탐닉함으로써 인간은 인생 무상을 잊고 죽음을 잊고 있는데 불과한 것이다.

톨스토이가 이 이야기를 인용한 것은 동양의 우화를 통해 자신이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톨스토이 역시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유일한 진리로서의 죽음에 맞닥뜨렸고, 가정과 예술이라는 두 가지의 꿀이 더 이상 그를 위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죽음의 공포를 적극적으로 극복해야만 했다. 우물 안에 매달인 채 벌꿀을 핥고 있는 나그네의 어리석음을 더 이상 반복하지는 않겠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생각이다. 모든 인간은 가능한 모든 위기에 사로잡혀 있으며 시시각각 죽어 가고 있지만, 지나치게 구원에 집착하기 때문에 오히려 구원을 받지 못한다. 구원은 결국 인간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이 불교의 우화를 통해 톨스토이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내면적 구원을 찾는 데 도움을 얻는다. 

(박혜경, ['구도자' 톨스토이와 동양 사상](『서양문학에 비친 동양의 사상』, 예문서원, 2000) 중에서)

 

 

글을 보면 톨스토이가 불교에 심취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불교우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비유경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톨스토이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유튜브에 톨스토이도 감동한 석가모니의 인간의 실상(https://www.youtube.com/watch?v=IC1v3HNFSqY )라는 제목의 동영상으로도 알 수 있다.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석영중 교수의 인문학강좌 톨스토이 강연은 매우 유익하였다. 그동안 막연히 소설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톨스토이는 말년에 구도자와 같은 삶을 살았다. 소설 속에 투사된 이야기를 보면 그것은 틀림 없는 불교적 가르침이다. 그것은 죽음을 기억하라!’라 하였고, 이어서  오늘 밤까지 살라!’라 하였고, 마지막으로 시간과 함께 하라라는 세 가지 구호로 요약된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죽음의 명상을 떠 올리게 한다. 또 오늘 밤까지 살라는 것은 열심히 사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과 함께 한다는 것은 변화를 수용함을 말한다. 이렇게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하루를 일생처럼 살았을 때 인생을 풍요롭게 산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대군을 거느린 죽음의 신

그에게 결코 굴복하지 말라.

 

이와 같이 열심히 밤낮으로

피곤을 모르고 수행하는 자를

한 밤의 슬기로운 님

고요한 해탈의 님이라 부르네.” (M131)

 

 

 

2015-10-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