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뭐? 깨달음은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0. 30. 10:14

 

 

? 깨달음은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고?

 

 

 

 

 

 

초기경전을 읽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의 위안을 받기 때문이다.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 아무 곳이나 열어 보면 산란하였던 마음이 금방 편안해진다. 왜 마음이 편할까? 그것은 이상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실현하지 못하고 있던 것들이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청정한 삶(brahmacariyā)’이다. 궁극적으로 열반(nibbana)’이다.

 

열반을 얻는 것은 외도나 하는 것이라고

 

열반을 빼 놓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논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대승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최근 교계신문에 따르면 무비스님은 “<화엄경>에서는 ‘열반을 얻는 것은 외도나 하는 것”이라고 했다. 선정에 떨어진 것은 마구니라고 이세간품에 나온다. 생사를 벗어나서 열반을 증득한다는 것은 외도, 마구니나 하는 짓이다.”(불교닷컴, 2015-10-27) 라 하였다.  참으로 놀랍고 충격적인 말이다. 불자들은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열반으로 알고 있는데 외도나 하는 짓이라니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대승불교의 경전을 보면 초기불교경전과 다르다. 또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과 동떨어져 있다. 어느 경우에는 전혀 반대의 말을 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열반’을 들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와 전혀 다른 불교이다. 그럼에도 대승불교와 초기불교를 회통하려는 자들이 있다. 이전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초기경전을 다시 평가 하면서 대승불교와 융합을 시도 하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원융불교이지만, 달리 말하면 비빔밥, 잡탕, 짬뽕불교라고 볼 수 있다.

 

대승부처님에 따르면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와 전혀 다른 불교이다. 그럼에도 대승불교는 초기불교를 뿌리로 하고 있다고 한다. 각산스님은 동영상 강의에서 대승경전은 부처님 직설은 아니더라도 부처님의 근본적 사상, 부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12) 라 하였다. 과연 그럴까? 화엄경에서 열반은 마구니나 하는 짓이라 하는데 이것이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을까?

 

대승불교 경전 중에 열반경이 있다. 초기경전에도 마하빠리닙바나경(D16)’이라 하여 열반경이 있다. 어떻게 다를까? 열반에 대하여 어떤 차이가 있을까? 대승열반경에 따르면 너희들이 먼저 익히던 무상하고 괴롭다는 생각은 진실하지 아니하다.”라 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부처님은 모든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 하였는데 정 반대로 표현하고 있다. 이어지는 문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너희들 비구도 그렇게 무상하고, 괴롭고, 내가 없고, 부정하다는 생각을 닦아 익힌 것은 참된 이치가 되지 못한다. 마치 여러 사람이 돌이나 기왓장이나 나무나 자살을 가지고 진짜 보배라고 생각하듯 하지 말고, 마땅히 좋은 방편을 배우되, 가는 곳마다 항상하고, 즐겁고, 참 나이고, 깨끗하다는 생각을 닦을 것이며 또 먼저 익히던 네 가지 법은 뒤바뀐 것임을 알아야 하니, 진실한 생각을 닦으려 하거든 저 지혜있는 사람이 보배를 집어내듯이 참 나이고, 항상하고, 즐겁고, 깨끗하다는 생각을 닦을 것이니라.

 

汝等比丘 不應如是修習無常苦無我想不淨想等以爲實義 如彼諸人各以瓦石草木沙礫而爲寶珠 汝等應當善學方便在在處處常修我想常樂淨想 復應當知先所修習四法相貌悉是顚倒 欲得眞實修諸想者 如彼智人巧出寶珠 所謂我想常樂淨想

 

(대발연반경 2권 수명품)

 

 

이것이 대승열반경에서 보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대승부처님은 무상하고, 괴롭고, 내가 없고, 부정하다는 생각을 닦아 익힌 것은 참된 이치가 되지 못한다.”라고 하여 초기불교의 부처님 즉,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면 부정하고 있다.

 

대승열반경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상락아정이라 하였다. 그리고 상락아정을 닦을것을 말하였다. 그래서 참 나이고, 항상하고, 즐겁고, 깨끗하다는 생각을 닦을 것이니라.”라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이다. 왜 반대인가? 상윳따니까야 바까브라흐마경(S6.4)을 보면 알 수 있다.

 

무명에 빠졌을 때

 

고작 일겁을 사는 망상적 유형의 범천 바까는 자신이 영원히 산다고 착각하였다. 너무 오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다 보니 자신의 전생을 잊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것만이 항상하고, 이것만이 견고하고, 이것만이 영원하고, 이것만이 완전하고, 이것만이 진리입니다.”(S6.4) 라고 말한다.

 

이에 부처님은 바까의 전생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만약 그대가 무상한 것을 실로 항상하다고 말한다면, 견고하지 않은 것을 실로 견고하다고 말한다면,영원하지 않은 것을 실로 영원하다고 말한다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실로 완전하다고 말한다면,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 (S6.4)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현상에 대하여 상락아정으로 보는 것은 무지함을 말한다. 그래서 무명에 빠진 것이라 하였다.

 

무명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은 숫따니빠따 두 가지 관찰의 경(Sn3.12)’에서 이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거듭하여 나가며 나고 죽는 윤회를 받는 다면 그 근본 원인은 무명에 있다.” (Stn729)라고 하였다. 무명이 윤회의 원인이 됨을 말한다.

 

범천 바까는 무명에 빠져 있기 때문에 윤회 할 수밖에 없다. 또 윤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갈애이다. 상락아정을 추구하는 자들은 갈애를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갈애를 벗삼는 사람은 이 존재에서 저 존재로 오랜 세월 유전하며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Stn740)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범천 바까는 무명에 덮여 있기 때문에 윤회 해 왔고, 갈애에 묶여 있기 때문에 윤회할 수밖에 없다.

 

회색승복 입은 스님들은

 

불자들은 대승불교의 교리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또 초기불교의 근본가르침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불교의 경전은 방대하기 때문에 모두 다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다르지 않다고 한다. 또 대승불교는 초기불교를 계승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부처님 말씀이라 한다. 그렇다면 의문이 하나 있다. 대승이 초기불교를 계승하였다면 굳이 대승불교를 믿어야 할까? 차라리 초기경전을 믿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무엇인가 하다 안되면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종교도 타락하면 초기를 이야기 한다. 초기에서 변질 되어 가는 것이 종교의 역사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한계를 느낀 불자들이 원음을 찾는 것도 부처님 그 분이 어떤 말씀을 하였는지 알고 싶어서일 것이다.

 

오리지널 원본 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후대에 나온 경전들은 대부분 변질 되었거나 위작이다. 그럼에도 대승을 기반으로 하여 초기불교를 원융이라는 이름으로 회통시키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회색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대승을 기반으로 초기불교를 말할 때 이다.

 

회색승복 입은 대승의 스님들이 초기불교를 거론 할 때 공통적 사항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반야심경의 문구를 자주 활용한다는 것이다반야심경의 문구를 정당화 하기 위하여 초기불교 경전을 인용하기도 한다. 반야심경에서 오온개공에 대하여 초기불교의 오온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식이다.

 

반야심경에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모조리 부정하고 있다. 물론 공의 입장에서이다.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사성제도 없고 십이연기도 없다. 오온도 없고 십이처 십팔계도 없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모조리 부정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열반도 부정된다

 

따로 열반이라는 업을 지을 필요가 없다고

 

한때 불교방송의 불교강좌를 열심히 듣던 때가 있었다. 강좌에서 어느 스님은 사성제에 대하여 “대승에서는 평등을 보기 때문에 따로 지혜와 어리석음을 구별하는 사성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불교방송 경전공부 유마경, 만권스님 강의) 라 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더구나 스님은 “이 사성제가 중요한 진리이긴 하지만 참으로 깨달아서 알고 보면 사성제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더욱 더 놀라운 말이 있다. 그것은 “본래 자성청정하기 때문에 생사도 번뇌도 알고 보면 진여의 마음을 아주 여의어서 있는 것이 아니고,중생의 분별심 그 자체도 본래 맑고 깨끗한 그 마음 즉, 열반을 떠나서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마음 바탕이 그대로 열반이기 때문에 다시 얻어야 할 열반이 없다는 것이다.”라 하였기 때문이다.

 

스님은 본래 없음을 강조하였다. 이는 반야심경의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에 대한 내용이라 볼 수 있다. 본래 없는 열반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를 하지 말자는 것이다. 분별심을 내지 않고 깨끗한 마음이 되었을 때, 진여 불성을 깨달았을 때 추구해야 할 열반은 본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따로 열반이라는 업을 지을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미완성이라고

 

대승불교를 알면 알수록 접하면 접할수록 부처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승열반경에서는 상락아정이라 한다.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사성제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한다. 또 “따로 열반이라는 업을 지을 필요가 없다”라고 한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석가모니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부정된다.

 

선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미완성된 것으로 본다. 또 부처님은 덜 깨달은 것으로 본다. 그래서일까 선사들은 한결 같이 초기불교를 원시불교라고 칭한다. 어느 산중승은 불교교리는 엄청나게 진화되어온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더구나 초기불교'는 종교적인 수준이 아닌, 샤카무니의 개인적인 '깨달음'에 대한 견해 일뿐입니다.”라 하였다. 이런 견해는 대승불교와 선종을 기반으로 한 한국불교 스님들의 견해와 일치한다.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의 원융을 시도하고 있는 각산스님이 있다. 각산스님은 정각원 동영상 강좌에서 각산스님도 신광불매라 우리 마음밭에 빛나는 것 본래면목 이게 선불교의 아주 뛰어난 초기불교도 훌륭하죠 베이스니까 초기불교 보다 뛰어났던 사상들이 첨가 됩니다.”라 하였다. 더구나 내가 부처라는 것을 바로 믿고 들어갈 때 초기불교 보다 더 꽃이 핍니다.”라 하여 사실상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미완성된 것 또는 덜 깨달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예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현응스님 말하기를

 

최근 교계신문에 따르면 교육원장 현응스님은 충격적인 말을 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부처님 그 분의 깨달음으로 완성되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다. 깨달음이란 부처님 이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는 보는 입장이다.…(중략) 깨달음은 스케일, 부피와 무게, 깊이, 색깔과 디자인 면에서 점점 더 커지고 넓어지고, 깊어지고, 다양해지고, 멋있어져야 한다는 게 나의 견해이다.

 

(현응스님, 조계선풍은 선정수행 배격” 현응 스님 ‘깨달음과 역사, 이후’ 반론에 답하다, 불교닷컴 2015-10-26)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이렇게 대승불교 스님들은 놀라게 하는 말을 많이 한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듯 하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교육을 총괄하여서 마치 문교부장관 같은 위치에 있는 분이 현응스님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하여 깨달음으로 완성되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다.”라 하였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마디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덜 완성된 것이고, 부처님의 깨달음은 덜 깨우친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한국스님들에 따르면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후에도 세월이 흘러 감에 따라 나이를 먹게 됨에 따라 계속 깨침이 일어났음을 말한다. 이를 믿어야 할까? 더구나 부처님 사후에도 부처님 못지 않는 자가 출현하여 깨달음을 보완했다는 것이다. 2의 석가라 불리우는 용수가 대표적이라 볼 수 있다.

 

한국스님들은 부처님 이후 수 많은 깨달음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중국 조사 스님들에 의해서 깨달음이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그래서 송담스님은 불교강좌에서 간화선 수행에 대하여 최상승선이라 하였다. 현응스님의 깨달음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부처님의 깨달음 그 자체는 완전하다

 

초전법륜경에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이 있다. 이를 세 번 굴려서 열두가지 형태(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라 한다. 이는 네 가지 진리로 되어 있는 사성제를 세 번 굴렸기 때문에 열 두가지 형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초전법륜경과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2013-03-0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삼전십이행상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부처님의 깨달음 그 자체는 완전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 (S56.11) 라 하였다. 부처님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선언한 것이다. 만일 깨달음이 불완전하게 여겼다면 선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 (anuttara sammāsambodhi)’ ,‘무상정등각이라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위없는것이다. 또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위없이(anuttara)’는 무엇을 말하는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깨달음을 이루었고 더구나 그 깨달음은 원만하고 바른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상정득각이라 한다. 그럼에도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덜 깨친 것이라 하여 불교는 진화해 왔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배신이다.

 

 

 

2015-10-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