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가르침에 승속의 구별이 없다, 부처님의 뛰어난 재가불자 19명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0. 28. 11:11

 

가르침에 승속의 구별이 없다, 부처님의 뛰어난 재가불자 19

 

 

 

 

매일 글을 쓰는 것에 대하여

 

매일 글을 쓴다. 그것도 장문의 글이다. 한번 썼다 하면 열 페이지 가량 쓰니 반나절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비판도 많다. 너무 글쓰기에 집착한다고 말하고 죽을 때까지 글에서 손을 떼지 못할 것이라고도 한다. 아마 염려해서 하는 말일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무의미한 짓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돈도 안 되는 일에 시간 낭비한다는 것이다. 대게 먹고 마시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들이다.

 

올린 글이 너무 길다고 한다. 그래서 대충 읽는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섭섭하기 그지 없다. 5시간 걸려 작성한 글을 1분에 읽어 내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이제 글을 그만 쓰고 수행하라고 한다. 수행하면 글쓰는 것 보다 훨씬 더 지혜 얻는 것이 빠르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체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하며 글쓰기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건 말건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그렇게 습관 들여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행의 방편으로서 글을 쓰는 것이다.

 

교학보다 수행

 

가장 좋은 것은 교학과 수행을 양립하는 것이다. 교학만 하게 되면 지식이나 지혜는 늘어 날지 모르지만 번뇌를 소멸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고요한 경지를 맛 보아야만 번뇌를 근본적으로 소멸할 수 있다. 교학으로도 통찰지가 생겨 날 수 있지만 선정과 열반에 이를 수 없다.

 

교학으로도 지혜가 생겨 통찰지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빠른 길은 명상이다. 그래서 명상을 하면 광대한 지혜가 생겨난다.’(Dhp282)라 하였다.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 (Dhp372)라 하였다. 이 말은 선정에 들지 않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통일 되어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을 때 지혜가 생겨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교학보다 수행이다.

 

왜 교학보다 수행인가? 그것은 현재의 습관을 바꾸고 변화를 유도 하기 때문이다. 작은 고요만 맛 보더라도 현재의 삶은 변화된다. 교학으로는 더디게 작은 변화가 일어 날 수 있지만 수행을 하면 급격하게 큰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교학 보다 수행인 것이다.

 

수행만 강조하다 보면

 

수행만 강조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늘 해보면 알게 됩니다.”라는 말만 하게 될 것이다. ‘꿀을 먹어 보아야 꿀맛을 아는 것이다고 말한다. 마라톤을 하는데 이론 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해 보아야 안다고 말한다. 자동차를 이론적으로 아는 것 보다 운전을 해 보아야 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체험을 해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한다면 교학무용론이 되어 버린다.

 

수행이 교학 보다 수승하고 지름길임에 틀림 없다. 그렇다고 맛을 보아야 알 수 있다는 말만 한다면 교학에 대하여 무지할 수 있다. 한국불교가 그렇다. 스님들은 깊은 산중에서 참선수행만 하고 불자들은 기도만 하는 불교가 되어 버렸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교학과 수행을 병행 하는 것이다.

 

항상 신도에만 머물러 있어야 할까?

 

불자들은 늘 경전을 함께 하며 수행을 해야 한다. 기도만 하는 불자가 아니라 수행자로서의 불자이어야 한다. 그런 재가수행자를 우빠사까(upāsaka)와 우빠시까(upāsikā)라 부를 수 있다. 사부대중의 일원이다.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우빠사까(upāsaka)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sitting close by'의 뜻으로 바로 곁에 앉는다는 뜻이다. 이는 부처님과 가르침과 성스런 상가에 믿고 따르는 재가자를 말한다. 이와 같은 재가자에 대하여 청신사(upāsaka)와 청신녀(upāsikā)라 한다.

 

한국불교에서는 재가불자에 대하여 신도라고 한다. 그래서 스님들이 신도님이라 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항상 신도에만 머물러 있어야 할까? 스님과 신도 이렇게 이원화 된 구조, 때로 갑을 관계처럼 늘 기도만 하고 보시만 하는 불자로 머물러 있어야 할까?

 

한국불교에서 불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것은 신도로서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신도는 신도답게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스님은 스님답게라는 말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스님과 신도와 관계는 주종관계 또는 갑과 을의 관계가 성립된다. 특히 법회 할 때 그렇다.

 

한국불교에 법회가 있을까? 거의 없다고 본다. 절이 깊은 산중에 있는 원인이 가장 크다. 그러다 보니 절에 자주 갈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법회 할 수 있는 신도들이 없다. 설령 법회가 있다고 하여도 음력으로 치루고 있다. 그것도 기도라는 이름의 법회이다.

 

음력 24일이면 관음재일이라 하여 관음기도를 하고, 18일이면 지장재일이라 하여 지장 기도를 한다. 초하루가 되면 초하루 기도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 이렇게 법회는 없고 기도만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불자들은 기도만 열심히 한다. 실제로 절에서 스님들도 불자들에게 열심히 기도하세요라고 말한다. 이는 보시를 열심히 하라는 말과 같다.

 

한국불교에서는 보시공덕을 강조한다. 이는 육바라밀에서 보시바라밀이라 하여 보시를 강조하는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불자들에게 있어서 수행은 스님들이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 기도만 강조하다 보니 교학에 대하여 무지하다. 부처님이 어떤 말을 하였는지 알 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자신과 가족의 안위, 학업, 사업, 치유에 대한 기도만 한다. 이것이 불교신행의 전부 인줄 안다. 한국불자들은 신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다.

 

가르침에 승속의 구별이 없다

 

재가불자들은 사부대중의 일원이다. 출가자인 빅쿠와 빅쿠니와 더불어 우빠사까와 우빠시까로서 사부대중을 구성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님과 재가불자가 주종관계 또는 갑을관계가 아님을 뜻한다. 재가불자도 승가를 구성하는 당당한 일원인 것이다. 출가자나 재가자 모두 부처님의 제자로서 가르침을 믿고 따르고 실천하는데 있어서 동등한 관계이다. 이는 부처님의 뛰어난 제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제일의 품(A1.196-275)’를 보면 부처님의 뛰어난 제자 80명이 소개 되어 있다. 마하 목갈라나의 경우 수행승들이여, 나의 제자 가운데 마하 목갈라나는 신통을 지닌 님 가운데 제일이다.”(A1.98)라는 식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80명 중에 재가자도 들어 있다는 것이다. 사리뿟따와 같은 뛰어난 빅쿠, 담마딘나와 같은 뛰어난 빅쿠니 등과 함께 욱가따와 같은 뛰어난 우빠사까(청신사)와 수자따와 같은 뛰어난 우빠시까(청신녀)가 소개 되어 있다.

 

부처님의 뛰어난 80명의 제자 중에서  빅쿠가 47명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빅쿠니는 14, 우빠사까는 9, 우빠시까는 10명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승속의 구별이 없음을 말한다. 부처님의 뛰어난 재가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빠사까(청신사)

 

1) 수닷따 아나타삔디까(Sudatta anāthapiṇḍika)

 보시하는 님 가운데 제일(dāyakāna)

 

2) 찟따 맛치까산디까(Citta macchikāsaṇḍik)

가르침을 설하는 님 가운데 제일(dhammakathikāna)

 

3) 핫타까 알라와까(Hatthaka ālavaka)

네 가지 섭수의 기초로 대중을 돕는 님 가운데 제일(catūhi sagahavatthūhi parisa sagahantāna)

 

4) 마하나마 삭까(mahānāmo sakka)

뛰어난 것을 보시를 하는 님 가운데 제일(paītadāyakāna)

 

5) 욱가 웨살리까(Uggoa vesālika)

즐거운 보시를 하는 님 가운데 제일(manāpadāyakāna)

 

6) 욱가따(Uggata)

참모임에 시중 드는 님 가운데 제일(saghupaṭṭhākāna)

 

7) 수라 암밧타(sūra ambaṭṭha)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을 내는 님 가운데 제일

 

8) 지와까 꼬마라밧짜(jīvaka komārabhacca)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님 가운데 제일(puggalappasannāna)

 

9) 나꿀라삐따(Nakulapitā)

친절하게 말하는 님 가운데 제일(vissāsakāna)

 

 

우빠시까(청신녀)

 

1) 수자따(Sujātā)

먼저 귀의한 님 가운데 제일(pahama saraa gacchantīna)

 

2) 위사카 미가라마따(visākhā migāramātā)

보시하는 님 가운데 제일(dāyikāna)

 

3) 쿳줏따라(khujjuttarā)

많이 배운 님 가운데 제일(bahussutāna)

 

4) 사마와띠(sāmāvatī)

자애를 닦는 님 가운데 제일(mettāvihārīna)

 

5) 웃따라 난다마따(uttarā nandamātā)

선정을 닦는 님 가운데 제일(jhāyīna)

 

6) 숩빠와사 꼴리야디따(suppavāsā koliyadhītā)

뛰어난 것을 보시하는 님 가운데 제일(paītadāyikāna)

 

7) 숩삐야(suppiyā)

환자를 돌보는 님 가운데 제일(gilānupaṭṭhākīna)

 

8) 까띠야니(kātiyānī)

청정한 믿음을 지닌 님 가운데 제일(aveccappasannāna)

 

9) 나꿀라마따(nakulamātā)

친근하게 대하는 님 가운데 제일(vissāsikāna)

 

10) 깔리(kāī)

소문을 듣고도 청정한 믿음을 내는 님 가운데 제일(anussavappasannāna)

 

 

부처님의 가르침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승과 속, 출가와 재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누구나 가르침을 실천하면 부처님의 경지 즉, 아라한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기도만 강조하고 보시공덕만 이야기 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신도들이 무지할수록

 

불자들은 부처님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부처님 그분이 어떤 분이며 어떤 말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절에서는 잘 알려 주지 않는다. 오로지 기도와 보시공덕만 강조하다 보니 절에 10, 20, 30, 평생을 다녀도 향상이 없다. 이는 일차적으로 스님들 책임이 크다. 기도와 보시만 강조 할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근본가르침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수행을 하게 해야 한다.

 

어느 종교이든지 신자들이 많이 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신도들이 이것 저것 많이 알아 따진다면 난감해 할 것이다. 그래서 기도만 강조하는지 모른다. 신도들이 무지하면 무지할수록 성직자의 권위가 올라 가기 때문일 것이다.

 

불자들은 신도가 되기 보다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학과 수행을 함께 해야 한다. 교학으로 이치를 알고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이렇게 수행자가 되었을 때, 그것도 스님보다 더 수행자다운 수행자가 되었을 때 불교개혁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201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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