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계속 진화해 왔다고? 퇴보의 길을 걸어온 불교사
불자들은 가르침에 목말라 한다. 그러나 마땅히 갈증을 해결할 만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절에 찾아 가서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나 너무 먼 곳에 떨어져 있다. 절에 불교교양대학이 있다고는 하지만 산중에 있어서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 도심에는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절이 있긴 있지만 기도 위주이어서 역시 가르침을 배우기가 쉽지 않다.
요즘은 인터넷시대이다. 산중에 있는 절에 가지 않아도 인터넷 검색만 하면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홍수와 같은 정보 속에서 어느 것이 정법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불교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무늬만 불교인 것도 많다. 단멸론이 대표적이다. 또 인터넷, 특히 유튜브에는 수 많은 동영상 강좌가 있지만 정법에서 벗어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럴 때 불자들은 어디에 의지해야 하는가?
각산스님의 유튜브 동영상 강좌에서
각산스님의 동영상 강좌를 다시 듣고 있다. 이전에 한번 들었지만 이번에 유튜브에 올려져 있어서 일없이 듣고 있다. 유튜브에 수 많은 불교관련 동영상 강의가 넘쳐 나고 있지만 그래도 각산스님의 강의는 들을만하다. 이는 실참수행과 초기경전에 입각한 강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연 도중에 수용할 수 없는 것도 있다. 물론 초기불교적 관점에서이다.
스님의 4강 ‘각산스님의 호흡명상의 수행단계’를 보았다. 강연에서 스님은 절의 법당에 걸려 있는 주련을 소개 하였다. 그것은 우리나라 절의 주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神光不昧 萬古徽猷(신광불매 만고휘유) 入此門來 莫存知解(입차문래 막존지해)’라는 문구이다. 이를 풀이하면 “신령스런 광명이 어둡지 않아 만고에 빛나니 이 문에 들어 오거던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라는 문구이다. 이 문구에 대하여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알음알이를 내려 놓을 때 텅빈 그릇으로 모든 것을 넣는다. 그런데 이 문에 들어 오기 전에 모든 사람이 똑 같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광불매라 우리 마음밭에 빛나는 것, 본래면목 이게 선불교의 아주 뛰어난 초기불교도 훌륭하죠 베이스니까 초기불교 보다 뛰어났던 사상들이 첨가 됩니다. 딱 한마디로 신광불매라 우리 본래 면목은 절대 매하지 아니 한다. 만고에 휘황찬란하게 빛낸다 그것이다. 그래서 강원의 스님들이 이 글귀를 꼭 가슴속에 넣죠
(각산스님, 불교방송 명상강좌 -제4강- 각산스님의 "호흡명상의 수행단계)
절에 가면 세속의 지식은 알음알이에 지나지 않다고 한다. 사량분별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속의 지식을 내려 놓아야 공부가 된다고 말한다. 이런 말에 공감한다. 이는 부처님도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본래면목을 강조한 각산스님
부처님이 사함빠띠 범천의 간청으로 진리를 설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Apārutā tesaṃ1 amatassa dvārā ye sotavante pamuñcantu saddhaṃ)” (S6:1)라 하였다. 여기서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라 하였는데 이는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예전에 잘못된 자기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의 뜻이라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려면 먼저 자신의 신앙을 내려 놓으라는 말이다. 이 말은 선불교에서 말하는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라는 말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오리지널 버전은 초기불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기존의 신앙이나 지식을 내려 놓아야 한다. 이는 잘못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 삿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 조건으로 유신견과 법에 대한 의심과 계금취견이 타파 되어야 한다.
각산스님은 깨달음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神光不昧 萬古徽猷(신광불매 만고휘유) 入此門來 莫存知解(입차문래 막존지해)를 소개 하였다. 이 문구를 소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들이 이제까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을 내려 놓자는 것이다. 마치 부처님이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pamuñcantu saddhaṃ)”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각산스님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놀랍게도 ‘본래면목’이다
각산스님은 본래면목을 강조하였다. 선종의 불성사상에 대한 것이다. 더구나 초기불교를 폄하하기 까지 하였다. 이는 “초기불교 보다 뛰어났던 사상”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중국에서 탄생된 선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 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대체 이런 말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불교는 계속 진화해 왔다고
빠알리니까야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유통되고 있다. 그래서 누구나 부처님 원음을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깊은 산중에 사는 선사들은 세상 밖으로 나올 줄 모른다. 아직 공부가 아직 덜 되어서일까 입산한지 10년, 20년, 30년 이 되어도 산 높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신선처럼 살아 간다. 그러면서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아 간다.
신선처럼 살아 가는 스님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보다 중국 조사 스님들의 가르침을 더 따른 다는 것이다. 사실상 전혀 다른 불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그것은 선종의 선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습게 본다는 사실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다음과 같은 어느 산중승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자꾸만 [초기불교]를 들먹이시는데, 과연 [초기불교]라는게 있었습니까? 혹시 [원시불교]를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이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지요. 그냥, 샤카무니'의 설법시대'였을 뿐이죠.
샤카모니 열반하신 후에 10대불제자를 중심으로, [불교적 교리]가 체계화되고, [불경]이 집대성 된후에 비로소 컬리큘럼이 만들어지면서 [佛敎]라는 宗敎가 성립되어진 것이지요. 그때로 부터 수천년을 지나오면서 [불교]는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즉, 사카무니'께서 확연하게 다 말씀 못하고 가신, 우주의 진리 아눝따라 삼먁삼보리'에 대한 이해 체계가, 그 수많은 히말라야 수행승들과 [대승불교의 중국 불교계]에서 수많은 고승들이 '깨달아 얻은 진리들로서, 불교교리는 엄청나게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감히 초기(원시)불교'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
불교는 믿음'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여여하게 있는 우주의 진리]를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는 진화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은 無常한 것이고 一體唯心造'인 것입니다.
끝없이 진화하는 교리체계'가 대승적인 현대불교입니다. 아무런 교리체계도 없던 시절의 초기불교'는 종교적인 수준이 아닌, 샤카무니의 개인적인 '깨달음'에 대한 견해 일뿐입니다. (산중승)
이 글은 어느 스님이 블로그에 남긴 글이다. 산중승의 이력을 보면 강원을 나오고 긴 세월 선방에서 수행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히말라야 깊은 숲속에서도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런 스님의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미완성’으로 본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완전하지 않음을 말한다. 또 부처님의 깨달음 역시 완전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불교는 부처님의 작은 깨달음 이래 수 많은 깨달은 자가 나타나 오늘날과 같은 불교가 되었다고 한다.
산중승의 글을 보면 초기불교는 불교도 아니다. 그저 2600년 전 샤카무니라는 성자의 작은 개인적 깨달음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미완성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불교는 계속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산중승 뿐만 아닐 것이다. 한국불교 대부분 스님들이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본다. 산중의 절에서 볼 수 있는 주련에 ‘神光不昧 萬古徽猷(신광불매 만고휘유) 入此門來 莫存知解(입차문래 막존지해)’라는 문구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각산스님도 4강 모두에서 “이 마음과 부처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내가 부처라는 것을 바로 믿고 들어갈 때 초기불교 보다 더 꽃이 핍니다.”라 하였을 것이다.
“불교는 부처님 믿는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을 믿는 것 입니다”라는데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 그래서 삼보에 귀의한다. 만일 불자들이 조사스님들의 본래면목을 믿고 따른다면 불자라기 보다 조사불교를 믿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선종의 전통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을 부처님 가르침 보다 더 높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선종의 종지인 견성성불이라는 말이 이를 말해 준다. 그래서일까 선사들은 한결같이 본래면목을 말한다.
선종에서는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알고,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수행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선종에서 수행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각산스님 역시 조사스님의 가르침에 기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다만 초기불교를 거론 하는 것은 본래불사상을 보완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내가 부처라는 것을 바로 믿고 들어갈 때 초기불교 보다 더 꽃이 핍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각산스님은 초기불교를 말하면서도 본래면목을 강조한다. 그래서 대승경전의 문구를 이용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그래서 4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이 부처라는 것, 법화경이라든가 다른 경전을 참조한다면 부처님은 이 사바세계에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기독교적 논리하고 똑같죠. 저는 그렇게 안 봅니다. 부처님은 이미 우리가 성불 돼 있다는 것을 자각시키기 위해서 왔다 이게 선불교의 핵심입니다. 내 안에 다 구족 되어 있습니다. 불교는 부처님 믿는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을 믿는 것 입니다. 내가 부처라는 것을 믿을 때 부처의 화현이 나옵니다. 그래서 ‘신광불매 만고휘유’하다 저는 그렇게 말씀 드리고 싶고요.
(각산스님, 불교방송 명상강좌 -제4강- 각산스님의 호흡명상의 수행단계)
각산스님은 법화경을 인용하여 본래불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대승불교 경전의 꽃이라 불리는 법화경을 인용하고 있다.
법화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이미 우리가 성불 돼 있다는 것을 자각시키기 위해서 왔다”라 하였다. 이를 선불교의 본래불 사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박경준 교수가 불교평론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알 수 있다.
박경준 교수는 법화경을 인용하여 본래면목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는 “석가세존은 보드가야에서 처음 붓다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겁 전에 깨달음을 성취한[구원실성] 본래부처[본불],다시 말해 구원본불(久遠本佛)이라는 것이다. 석가모니불은 중생들에게 불지견(佛知見)을 개(開)·시(示)·오(悟)·입(入)하기 위한 근본원(根本願)을 가지고 태자의 몸으로 화현하였고, 열반에 들지도 않았지만 일부러 열반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이며, 여래의 수명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불교평론 44회 2010-09-06) 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각산스님은 법화경 문구를 인용하여 본래불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불교는 부처님 믿는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을 믿는 것 입니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전형적인 선종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지 않고 선종의 조사스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각산스님은 우리가 호흡명상 등을 하는 것은 결국 내안의 불성을 확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초기불교사상을 말하고 있지만 결국 선종의 가르침인 불성, 본래불, 본래면목 사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대승경전, 특히 법화경에 바탕을 둔 사상이다. 이런 사상은 모두 여래장 사상에 기반한 것들이다.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다
여래장 사상은 부처님의 가르침일까? 이런 의문에 대하여 일본불교학자 마쓰모토 시로는 불교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래장 사상을 기반으로 한 것이 불성사상이다. 불성사상은 중국에서 발생된 사상이다. 인도의 여래장 사상과 중국의 전통사상이 합쳐져서 중국이라는 환경에서 독특한 불성사상이 생겨난 것이다. 선사들이 말하는 본래불, 본래면목, 내가 부처라는 사상은 모두 중국적 환경에서 새롭게 생겨난 사상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래서 선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 부정한 것이 아닐까? 부처님 가르침을 덜 완성된 것으로 보고 선불교가 가장 수승한 불교라고 보는 것이 증거일 것이다.
일본 불교학자 마쓰모토 시로는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라고 하였다. 여래장사상은 왜 불교가 아닐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마쓰모토교수는 ‘여래장 사상은 차별적인 아트만론을 구조로 한다.’고 하였다. 또 여래장사상은 ‘불교의 본질인 연기설과 동일하지 않다.’고 하였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2011-09-0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여래장사상이 불교가 아닌 이유는 분명하다. 마쓰모토 시로에 따르면 여래장사상은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을 부정하고 성립된 힌두교의 ‘아뜨만사상’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본다면 본래불사상은 힌두교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후대 사람들은 부처님의 연기법을 다시 부정함으로서 자아, 개아, 진아로 불리우는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부처님이 아뜨만을 부정하였지만, 후대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여 다시 아뜨만을 부활시켜 놓았다.
본래불사상은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여래장 사상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그 마쓰모토교수는 여래장사상에 대하여 힌두교 아트만이론의 복사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심지어 대승불교가 성립한 이후에 힌두교가 불교로 위장하여 침투한 사상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그런 여래장사상은 빠알리삼장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빠알리삼장이 주류 불교로서 본류이고, 여래장 사상은 이교도로 부터 들어온 지류와 같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여래장사상을 불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원융이라 하지만
선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는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을 말한다. 산문에 들어 올 때는 모두 내려 놓으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을 접하기 위해서는 사량분별에 지나지 않는 알음알이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神光不昧 萬古徽猷(신광불매 만고휘유) 入此門來 莫存知解(입차문래 막존지해)’라 하였을 것이다.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 그래서 불자라 한다. 그러나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무어라 불러야 할까?
오늘날 한국에서는 선불교의 맥을 이어 받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임제선사의 맥을 이어 받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이다. 그러다 보니 초기불교가 도입 되었어도 조사불교를 보완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원융주의자들이 있다. 이는 대승불교와 초기불교가 어우러지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체일까? 그것은 나중에 생겨난 것이라 본다. 대승이 주체가 되어 원융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초기불교는 선불교를 보완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각산스님의 강의에서도 알 수 있다.
각산스님은 명상강연을 하였다. 그러나 몸체는 선종이다. 본래면목이 있다고 하며 “불교는 부처님 믿는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을 믿는 것 입니다”라 하였다. 각산스님이 초기불교를 말하지만 일부만 가져 온 것이다.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한국불교에서 회색승복을 입은 스님이 초기불교를 하면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초기불교 한다면 승복부터 바꾸어야 할 것이다.
퇴보의 길을 걸어온 불교의 역사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다르다. 그래서일까 러시아 불교학자 체르바츠키는 “마하야나 (대승) 주의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중국에서 중국적 문화와 토양에서 생겨난 선종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다르다. 그래서 전혀 다른 불교라 볼 수 있다.
선종에 대하여 조사불교, 줄여서 조교라고도 한다. 그럼에도 선종주의자들은 초기불교와 원융을 시도 하고 있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부처님의 가르침은 폄하 된다. 산중승이 말한대로 “수많은 고승들이 '깨달아 얻은 진리들로서, 불교교리는 엄청나게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감히 초기(원시)불교'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이라든가, 또 “아무런 교리체계도 없던 시절의 초기불교'는 종교적인 수준이 아닌, 샤카무니의 개인적인 '깨달음'에 대한 견해 일뿐입니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이에 각산스님도 “내가 부처라는 것을 바로 믿고 들어갈 때 초기불교 보다 더 꽃이 핍니다.”라 하여 산중승의 견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 그 자체는 완전한 것이다. 그럼에도 후대 사람들은 불완전한 것, 미완성이라 폄하 하고 있다. 하지만 후대로 가면 갈수록 본래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변질 되었다. 급기야 힌두교와 구별이 없게 되었다. 이는 불교의 퇴보이다.
여래장 사상에 기반한 선종은 진화된 가르침이 아니다. 초기불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퇴보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보 된 것이 아니라 퇴보의 길을 왔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은 부처님 살아 법을 설할 때 가장 완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부처님 사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여러 나라에 전파 되면 될수록 퇴보 하였다. 마치 ‘이어듣기 놀이’를 보는 듯 하다.
이어듣기 놀이를 보면 귀를 막고 입모양만 보고서 알아 듣는다. 그런데 최초 사람에게 말한 내용과 마지막 사람이 말한 내용이 전혀 다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과 선종의 가르침은 하늘과 땅 보다 차이가 크다.
판단 기준은 부처님의 원음에서
그래서 부처님은 마지막 유훈에서 이렇게 당부하였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벗들이여, 나는 이것을 세존 앞에서 듣고 세존 앞에서 받았습니다. 이것이 가르침이고 이것이 계율이고 이것이 스승의 교시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의 말에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고, 그 말마디와 맥락을 잘 파악하여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 법문에 들어맞지 않고 계율에 적합하지 않다면, ‘이것은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말이 아니다. 이 수행승은 잘못 파악한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해서 그것을 물리쳐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벗들이여, 나는 이것을 세존 앞에서 듣고 세존 앞에서 받았습니다. 이것이 가르침이고 이것이 계율이고 이것이 스승의 교시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의 말에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고, 그 말마디와 맥락을 잘 파악하여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 법문에 들어맞고 계율에 적합하다면, ‘이것은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말이다. 이 수행승은 올바로 파악한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첫 번째 탁월한 논증이라고 새겨야 한다.” (D16, 전재성님역)
누군가 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또 어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이라 말하고 있다. 모두 자신의 이야기가 옳다고 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야 할까? 이에 부처님은 먼저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일단 들어 보긴 보되 판단은 유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위를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 하신 경전을 보아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비추어 보아 맞으면 부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면 된다고 하였다. 역으로 맞지 않으면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법에 대하여 말 할 수 있다. 누구나 수행에 대하여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판단 기준은 경전에 따른다. 그것도 부처님의 원음이라 불리우는 빠알리니까야에 따른다. 그래서 니까야에 실려 있는 가르침과 맞으면 받아 들이고 틀리면 내쳐야 할 것이다.
201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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