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스님의 환속을 보고
혜문스님의 환속
불자들은 스님들을 얼마나 믿어야 할까? 모든 것이 인터넷으로 소통 되는 시대에 충격적인 뉴스를 접하였다. 그것은 ‘혜문스님’이 환속하였다는 기사이다.
교계뉴스에 따르면 문화재환수운동으로 잘 알려진 혜문스님이 아들을 가졌다고 하였다. 한겨레신문에 따르면 “최근 혜문은 더이상 승려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를 쏙 빼닮은 아들도 낳았다.”(‘가정 꾸리고 아들 얻은’ 혜문스님, ‘환속’을 결심한 사연, 한겨레신문 2015-10-23) 라고 보도 하였다.
대부분 불자들은 혜문스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누구도 할 수 없는 문화재 환수운동을 하여 성과를 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을 쏙 빼어 닮은 아들을 낳았다니 망연자실할 일이다.
혜문스님은 왜 환속하였을까? 기사에 따르면 계를 지킬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런 이유로 환속하였는데 전하는 기사에 따르면 “왜 나 같은 사람이 승려 그만두는 것에 이렇게 민감한 거죠? 원효대사가 아들(설총) 낳았을 때도 이렇게 주목받았을까? 하하하.”라 하였다. 신심 있는 불자들이 보았을 때는 허탈해 하였을 것임에 틀림 없다.
혜문스님은 올해 나이 42세라 한다. 승려생활을 18년 했다고 한다. 원대한 꿈을 품고 출가를 하였으나 도중에 그만 두었으니 ‘패배자’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환속의 변을 보면 원효이야기가 나오고 부처님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아들 낳은 것에 대하여 “아버지가 되는 게 종교적으로 얼마나 고귀한 일인가 생각한다”며 “석가모니도 라훌라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래서 불경에 아버지와 관련된 비유가 많다. 어쩌면 내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게 다 부처님 뜻일 수도 있겠다”고 주장했다.
출가한다고 하여 죽을 때 까지 승려로 산다는 보장이 없다. 출가한 스님들을 보면 십년이 지나면 절반으로 줄어 들고, 또 십년이 지나면 절반으로 줄어 드는 것이 일반적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계행을 지키며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 것 모른다. 그러나 불자들은 물론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던 스님이 어느 날 자신과 쏙 빼닮은 아들을 가졌다고 발표 하였을 때 실망시키기에 충분하다. 불자들은 누구를 믿고 신행할 것인가?
무엇에 대한 승리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스님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것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실패자 또는 패배자로 비추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승리할까? 숫따니빠따에 ‘승리의 경(Vijayasutta, Sn1.11)’이 있다. 여기서 승리(Vijaya)는 무엇을 뜻할까? 주석에 따르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승리’라 하였다.
더 이상 출가생활을 못하는 것도 결국 감각적 욕망에 굴복한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감각적 욕망에 대하여 승리하기 위하여 몸에 대한 관찰을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른바 32가지 신체기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열 가지 부정상이다.
승리의 경에 따르면 우리 몸에 대하여 “또한 그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나온다.”(stn197) 라고 하였다. 아홉 구멍은 두 눈구멍과 두 귀구멍, 두 콧구멍, 입과 항문, 그리고 요도를 말한다. 이 아홉가지 구멍에서는 나오는 것은 더러운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무명에 이끌려서 그러한 몸을 아름다운 것으로 여긴다.”(stn199) 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승리의 경에서 “이 세상에서 욕망과 탐욕을 떠난 그 지혜로운 수행승만이 불사와 적멸, 곧 사멸을 뛰어 넘는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다.”(stn204) 라고 하였다. 어리석은 자는 몸을 탐하지만 소수의 지혜로운 자만 몸의 더러움을 알아 불사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성자의 조건은 어떤 것일까?
“친밀한 데서 두려움이 생긴다”
숫따니빠따에 ‘성자의 경(Muni sutta, Sn1.12)’이 있다. 경의 첫 번째 게송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Santhavāto bhayaṃ jātaṃ
niketā jāyate rajo,
Aniketamasanthavaṃ
etaṃ ve munidassanaṃ.
[세존]
“친밀한 데서 두려움이 생기고,
거처에서 더러운 먼지가 생겨난다.
거처도 두지 않고 친밀한 것도 두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성자의 통찰이다.”(stn207, 전재성님역)
첫 번째 구절에서 ‘친밀한 데서 두려움이 생긴다. (Santhavāto bhayaṃ jātaṃ)’라고 하였다. 그런데 친밀을 뜻하는 빠알리어 ‘Santhavāto’ 보면 번역어 보다 더 많은 뜻을 가지고 있다. 빠일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santhava’는 ‘intimacy; acquaintance; sexual intercourse’로 되어 있다. 친밀이라는 뜻도 있지만 ‘성교(sexual intercourse)’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단순한 친밀이 아니라 남녀 간의 사랑을 뜻한다. 그런 친밀에서 두려움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생사해탈을 목적으로 출가한 자에게 여자는 장애와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서 아난다에게 세 가지를 말씀 하셨다. 그것은 여인을 보지도 말고, 보았거든 말 걸지 말고, 말하였거든 사띠하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교제를 통하여 출가의 목적이 파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교제를 통하여 덤불이 생겨나고 교제를 여의면 덤불이 잘린다.”(It.70) 라 하였다.
남녀 사이는 알 수 없다. 우정이 사랑으로 발전 될 수도 있다. 이는 친밀로부터 시작 된다. 모든 남녀 관계가 그렇듯이 처음에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 된다. 그 다음 단계는 대화이다. 대화 하다 보면 친밀감을 느낀다. 이렇게 친밀감이 더욱 더 강화 되면 사랑으로 발전 된다. 이것에 남녀 교제의 특징이다. 그런데 이 것 이상인 경우가 있다.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근친상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자근친상간 이야기
게송에 대한 인연담이 있다. 주석에서는 출가한 아들과 출가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남녀 간 친밀감이 발전 되면 어떤 결과에 이르는지 극단적 상황을 전하고 있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께서 싸밧티 시의 한 마을에 계실 때에 불행한 한 여인이 지아비를 잃고 자식을 출가시키고 자신도 수행녀교단에 들어왔다. 모자는 사왓티시에서 우기를 보내면서 비구니와 비구로서 자주 만났는데, 서로 무엇인가 손안에 얻으면, 찾아가서 가져다주곤 했다. 서로 자주 만나고 보는 사이에 욕정이 생겨나 출가신분이라는 생각이나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한계를 넘어서서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게 되었다. 그들은 비난을 받고는 속퇴하였다. 이 이야기를 수행승에게 들은 세존께서는 이것과 관련하여 ‘맹독이나 끓는 기름이나 작열하는 청동처럼 여성을 피하라.’라고 하면서 이 네 편의 시를 읊은 것이다.
( Prj.II.254-255, stn207 인연담, 법구경 1805번 각주, 전재성님)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이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도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회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회가 되었을 때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다라고 정의할 수 없을 것” (It.36)이라 하였다. 한마디로 동물 같은 세상을 말한다. 그래서 “세상은 염소, 양, 닭, 돼지, 개, 승냥이이처럼 혼란에 빠질 것이다.” (It.36) 라 하였다.
동물 같은 사회는 이성이 모두 성적 대상으로 보일 것이다. 이는 인연담에서 두 모자가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모자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욕정이 생겨났다고 하였다. 그 주된 이유로서 ‘친밀감(santhava)’을 들었다. 그런 친밀감은 일반적 교제를 너머 ‘sexual intercourse’까지 발전 된다.
남녀교제가 발전하는 양상을 보면
각주에 따르면 인연담과 동일한 내용이 앙굿따라니까야에도 실려 있다고 하였다. 찾아 보면 ‘어머니와 아들의 경(A5.55)’라 되어 있다.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 하였다.
'idha bhante sāvatthiyaṃ ubho mātā puttā vassāvāsaṃ upagamiṃsu bhikkhu ca bhikkhuṇī ca. Te aññamaññassa abhiṇhaṃ dassanakāmā ahesuṃ. Mātāpi puttassa abhiṇhaṃ dassanakāmā ahosi. Puttopi mātaraṃ abhiṇhaṃ dassanakāmo ahosi. Tesaṃ abhiṇhaṃ dassanā saṃsaggo ahosi. Saṃsagge sati vissāso ahosi. Vissāse sati otāro ahosī. Te otiṇṇacittā sikkhāṃ apaccakkhāya dubbalyaṃ anāvīkatvā methunaṃ dhammaṃ patiseviṃsu'.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여기 싸밧티 시에서 어머니와 아들 두 사람이 수행녀와 수행승으로 안거에 들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자주 보기를 원했습니다. 어머니도 아들을 자주 보기를 원했습니다. 아들도 어머니를 자주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자주 본 뒤에 서로 접촉하게 되었고 서로 접촉한 뒤에 친밀해지고 친밀해진 뒤에는 애욕에 빠지고, 애욕에 빠진 뒤에 수행자의 배움을 버리지 않고 타락을 숨기고 성적인 교섭을 했습니다.”
(Mātāputtasutta- 어머니와 아들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55, 전재성님역)
경을 보면 친밀감이 어떻게 상승하였는지에 대하여 보여 주고 있다. 모자근친상간이라는 극단적인 예를 들고 있기는 하지만 남녀교제가 발전하는 양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남녀관계는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 된다. 빠알리 원문을 보면 dassanakāma라 되어있는데 이는 ‘보고 싶은 갈애’를 뜻한다. 가장 먼저 ‘보는 것에 대한 갈애(dassanakāma)’부터 시작 한다. 그 다음이 접촉이다. 이에 대하여 saṃsaggo라 하였다. 이는 ‘Connection, conjunction, association’의 뜻으로 연결 또는 교제를 의미한다. 그래서 손목을 잡는다든가 하여 더욱더 가까워짐을 말한다. 이어서 친밀(vissāso)이라 하였다. 이는 ‘Intimacy, confidence, trust. Sincerity, faith’의 뜻이다. 교제함으로 신뢰가 믿음과 신뢰가 생겨남을 말한다. 그 다음 단계는 애욕(otāro)이라 하였다. 이는 ‘Descent; entrance; a landing-place; a defect, fault’의 뜻으로 진입단계를 말한다. 매우 가까워 졌음을 뜻한다. 최종적으로 ‘성적교섭(methuna)’이다. 경에서 언급된 남녀교제단계를 보면 오늘날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자주 보기를 원한다.(dassanakāma)
2) 서로 접촉한다.(saṃsaggo)
3) 친밀해진다.(vissāso)
4) 애욕에 빠진다.(otāro)
5) 성적인 교섭을 한다.(methuna)
여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상
경에서 극단적인 모자근친상간의 예를 들었다. 그러나 경의 내용을 어떻게 남녀관계가 발전하는지 잘 보여 준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의 이야기를 듣고 “수행승들이여, 무엇이라고 했는가? 저 어리석은 자가 어머니가 아들에 대하여 애욕을 일으켜서는 안되고 아들이 어머니에 대하여 애욕을 일으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 못했단 말인가?”(A5.55) 라 하였다. 한번 애욕이 감정이 일어나면 물불을 가리지 못함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일까?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어머니와 아들의 경’에서는 다섯 가지에 대하여 말씀 하신다. 그 중에 형상에 관한 것이다.
Nāhaṃ bhikkhave aññaṃ ekarūpampi samanu passāmi yaṃ evaṃ rajanīyaṃ evaṃ kamanīyaṃ evaṃ madanīyaṃ evaṃ bandhanīyaṃ evaṃ mucchanīyaṃ evaṃ antarāyakaraṃ anuttarassa yogakkhemassa adhigamāya, yathayidaṃ bhikkhave itthirūpaṃ. Itthirūpe bhikkhave sattā rattā gathitā giddhā mucchitā ajjhopannā. Te dīgharattaṃ socanti itthirūpavasānugā.
[세존]
“수행승들이여, 여자의 형상처럼, 수행승들이여, 애욕을 일으키고 욕망을 일으키고 광기를 일으키고 속박을 일으키고 넋을 잃게 하고 위없는 멍에로부터의 안온을 성취하는데 장애로 작용하는 다른 형상을 보지 못했다. 수행승들이여, 여자의 형상 때문에 뭇삶들은 애욕에 물들고 속박되고 탐욕스럽게 되고 넋을 잃고 집착한다. 그들은 오랜 세월 여자의 형상에 사로잡혀 근심한다.”
(Mātāputtasutta- 어머니와 아들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55, 전재성님역)
여자라는 형상에 애욕을 넘어 ‘광기(madanīyaṃ)’ 라 하였다. 또 ‘넋을 잃게 한다(mucchanīyaṃ)’고 하였다. 그래서 “위없는 멍에로부터의 안온을 성취하는데 장애로 작용하는 다른 형상을 보지 못했다. (anuttarassa yogakkhemassa adhigamāya, yathayidaṃ bhikkhave itthirūpaṃ)”라 하였다. 여기서 ‘멍에부터 안은’은 ‘요가케마(yogakkhema)’를 뜻한다. 초불연 대림스님은 이 구절에 대하여 “위없는 유가안은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라 하여 ‘유가안은’이라 하였다.
경에서는 여자의 위험성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이는 남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래서 남자에게는 여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상이고, 여자에게는 남자가 가장 아름다운 형상이다.
“여자의 형상은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경에 따르면 여자만큼 유가안은을 성취하는데 장애로 작용하는 어떤 다른 형상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여자가 수행에 매우 방해 되는 요소임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앙굿따라 제1장제1절이라 볼 수 있는 A1.1에 따르면 이렇게 되어 있다.
Nāhaṃ bhikkhave aññaṃ ekarūpampi samanupassāmi, yaṃ evaṃ purisassa cittaṃ pariyādāya tiṭṭhati. Yathayidaṃ bhikkhave itthirūpaṃ. Itthirūpaṃ bhikkhave purisassa cittaṃ pariyādāya tiṭṭhatīti.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여자의 형상처럼 남자의 마음을 사로 잡는 다른 하나의 형상을 보지 못했다. 수행승들이여, 여자의 형상은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여자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1.1, 전재성님역)
경에서 “여자의 형상은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라 하였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가장 첫 번째 경으로 남녀간의 문제를 가장 먼저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일반인은 물론 수행자도 감각적 욕망의 노예가 되기 쉬움을 말한다.
죽었더라도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데
경에서는 여자의 형상에 마음을 사로 잡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눈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귀, 코 등 오감이 모두 사로 잡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들의 경을 보면 ‘여자의 소리처럼, 여자의 냄새처럼, 여자의 맛처럼, 여자의 감촉처럼, 애욕을 일으키고 욕망을 일으키고 광기를 일으키고 속박을 일으키고 넋을 잃게 하고 위없는 멍에로부터의 안온을 성취하는데 장애로 작용하는 다른 형상을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쯤 되면 여자에게 완전히 침몰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막말로 치마만 둘러도 여자로 보이는 것이다. 근친이라도 여자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Itthi bhikkhave gacchantī'pi purisassa cittaṃ pariyādāya tiṭṭhati. Ṭhitā'pi nisinnā'pi2sayānā'pi hasanti'pi bhaṇantī'pi gāyantī'pi rodantī'pi ugghānitā'pi matā'pi purisassa cittaṃ pariyādāya tiṭṭhati. Yampi taṃ bhikkhave sammā vadamāno vadeyya samannapāso mārassā'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여자는 걸어가더라도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서 있더라도, 앉아 있더라도, 누워 있더라도, 웃더라도, 말하더라도, 노래하더라도, 울더라도, 기절했더라도, 죽었더라도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수행자들이여, 여자에 대하여 올바로 말하자면, 악마의 완전한 족쇄라고 말해야 올바로 말하는 것이다.”
(Mātāputtasutta- 어머니와 아들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55, 전재성님역)
경을 보면 여러 가지 유형의 여자형상이 등장한다. 반드시 젊고 아름다운 여인만이 아니다. 여자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는 것도 마음을 사로잡고 심지어 기절하고 죽었다고 하더라도 사로 잡는다고 하였다.
과연 죽은 자에 대하여 애욕을 낼 자가 있을까? 경에 따르면 충분히 가능하다. 근친에 애욕을 느낀다면 죽은 자에 대하여 욕망도 충분히 일어 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여자인 것 그 자체에 대하여 애욕을 느끼는 것에 대하여 ‘악마의 완전한 족쇄(samannapāso mārassā)’라 하였다. 초불연에서는 ‘이것은 마라의 그물의 화신이다.’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samannapāso는 samanna(수행자)+pāso(족쇄)형태이다. 수행자의 족쇄를 말한다. 그래서 samannapāso mārassā는 수행자에 대한 악마의 족쇄를 뜻한다. 여자의 형상, 여자의 소리, 여자의 냄새, 여자의 맛, 여자의 감촉에 애욕을 일으키고 욕망을 일으키고 광기를 일으킨다면 악마의 완전한 족쇄에 채워져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악마가 하자는 대로 할 것이다.
스님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혜문스님의 환속은 실망스런 것이다. 오랜 출가생활을 접고 자신을 쏙 빼닮은 아들을 낳은 것에 대하여 원효스님도 설총을 낳았고 부처님도 라훌라를 낳았다는 말로 대신 하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패배자’이다. 이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패배를 뜻한다. 이런 패배는 불자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한다. 그 동안 스님을 믿고 성원한 것에 대한 일종의 배신을 느끼고 허탈하게 한다.
법정스님은 생전에 스님을 믿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스님의 다큐프로 ‘의자’를 보면 “믿을 게 없어서 중들 말을 믿어 ?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중놈 말을 어떻게 믿어 ”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에게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스님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스님을 부처님처럼 믿고 따랐는데 어느 날 그 스님이 환속하였다면 심정은 어떠할까? 마성스님의 글에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잡아함경 제30권 제837경에 실려 있는 ‘과환경(過患經)’ 을 인용한 것이다. 사람 뿐만 아니라 스님을 믿어도 실망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에 경에서는 모두 다섯 가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 중에 네 번째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다음에는 그가 믿고 공경하는 사람이 계를 버리고 속세로 돌아가면, 그를 공경하고 믿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사람은 나의 스승으로서 나는 스승을 존중하고 공경하는데, 그는 계를 버리고 속세로 돌아갔으니, 나는 이제 그 절에 들어갈 수 없다.' 그리하여 그가 절에 들어가지 않으면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고,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면 법을 듣지 못하게 되며, 법을 듣지 못하면 착한 법에서 물러나거나 그것을 잃게 되어 바른 법 가운데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생기는 네 번째 허물이라고 하느니라.” (과환경(過患經), 잡아함경 제30권 제837경)
부처님 법이 쇠퇴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출가자들이 계행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 스님이 계행을 지키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신심이 떨어진다. 그래서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고,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면 법을 듣지 못하게 되며, 법을 듣지 못하면 착한 법에서 물러나거나 그것을 잃게 되어 바른 법 가운데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왜 삼보에 의지해야 하나?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법귀의 자귀의를 말씀 하시면서 그 어떤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고 하였다. 삼보 이외 의지의 대상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설령 그가 성자의 지위에 있다 하더라도 의지해서는 안된다. 오로지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의지해야 한다.
불자들은 절에 갈 때 스님 보고 절에 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스님이 지금 청정비구라 하여 끝까지 유지 될지 알 수 없다. 왜 그런가? 제행무상이기 때문이다. 아라한이 아닌 한 감각적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언제 어떻게 환속할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스님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법정스님 말대로 중들을 믿어서는 안된다. 불자들은 철저하게 삼보에 의지 하여야 한다.
1.
Salalape asihatthena pisācenapi sallape,
Āsīvisampi āside yena daṭṭho na jīvati
[세존]
“손에 칼을 쥔
악귀들과 말하는 것이 낫다.
물려죽더라도
독사를 만지는 것이 낫다.
2.
Natveva eko ekāya mātugāmena sallape,
Muṭṭhassatiṃ tā bandhanti pekkhitena sitena ca,
결코 혼자서
한 여인과 대화하지 말라.
눈빛과 미소로 여인은
새김을 잃은 자를 묶어버리네.
3.
Athopi dunnivatthena mañjunā bhaṇitena ca,
Neso jano suvāsīdo4 api ugghānito5 mato.
또한 얇은 옷으로나
매혹적인 목소리를 내더라도
기절하였거나 죽었더라도
접근하는 것은 좋지 않다네.
4.
Pañcakāmaguṇā ete itthirūpasmiṃ dissare,
Rūpā saddā rasā gandhā phoṭṭhabbā ca manoramā.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를
여인의 몸에서 보고
향상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에 매혹된다네.
5.
Tesaṃ kāmoghavuḷhānaṃ kāme aparijānataṃ,
Kālaṃ gatiṃ6 bhavābhavaṃ saṃsārasmiṃ purakkhatā.
욕망의 거센 흐름에 표류하면서
욕망을 보지 못하고
윤회속에서 시간과 운명과
여러 존재에 이끌리네.
6.
Ye ca kāme pariññāya caranti akutobhayā,
Te ve pāragatā loke ye pattā āsavakkhaya'nti.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완전히 알아
두려움 없이 유행하는
세상에서 피안에 도달한 자들이
번뇌의 멸진에 이르렀네.” (A5.55)
2015-10-2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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