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무명이 대죄?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대죄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0. 29. 11:11

 

무명이 대죄?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대죄

 

 

 

 

 

불교에서는 알고 짓는 죄보다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크다고 한다. 세속과 정 반대의 말이다. 세상에서는 알고 짓는 죄가 더 크다고 하였다. 범죄도 우발적인가 고의적인가에 따라 죄값이 달라진다. 우발적 살인은 정상참작이 되지만 계획적 살인은 극형에 처해진다. 같은 깡패라도 조직폭력배는 엄벌에 처해 진다. 의도된 것이거나 계획적인 것은 알면서 지은 죄에 해당된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알고 짓는 죄가 모르고 짓는 죄보다 더 크다고 하였다.

 

불교에서는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크다고 하였다. 모르고 죄를 지으면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계속 죄를 짓지만,  알고 짓는 죄는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쳐질 가능성이 있다. 여기 낚시 하는 자가 있다. 그가 살생이 나쁜 것을 안다면 그만 둘 수 있다. 그러나 살생이 죄를 짓는 것인 줄 모른다면 계속 낚시 하게 될 것이다. 도둑질 하는것, 음행하는 것, 거짓말 하는 것, 술 마시는 것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래서 무명이 대죄라 하였다.

 

무명(avijjā)이 이끌었을 때

 

무명이 대죄라는 말은 불가에서 통용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명이 대죄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무명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무명이 앞서가면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에 도달하며 그것과 더불어 부끄러움도 모르게 되고 창피스러움도 모르게 된다. (avijjā bhikkhave pubbagamā akusalāna dhammāna samāpattiyā anvadeva ahirika anottappa)라 하였다. 여기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무명이란 무엇일까? 막가상윳따(S45)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vijjāgatassa bhikkhave aviddasuno micchādiṭṭhi pahoti. Micchādiṭṭhissa micchāsakappo pahoti. Micchāsakappassa micchāvācā pahoti. Micchāvācassa micchākammanto pahoti. Micchākammantassa micchāājīvo pahoti. Micchāājīvassa micchāvāyāmo pahoti. Micchāvāyāmassa micchāsati pahoti. Micchāsatissa micchāsamādhi pahoti.

 

[세존]

수행승들이여, 무명을 따르는 무지한 자에게는 잘못된 견해가 생겨난다. 잘못된 견해를 지닌 자에게는 잘못된 사유가 생겨난다. 잘못된 사유를 지닌 자에게는 잘못된 언어가 생겨난다. 잘못된 언어를 지닌 자에게는 잘못된 행위가 생겨난다.  잘못된 행위를 지닌 자에게는 잘못된 생활이 생겨난다. 잘못된 생활을 지닌 자에게는 잘못된 정진이 생겨난다. 잘못된 정진을 지닌 자에게는 잘못된 새김이 생겨난다. 잘못된 새김을 지닌 자에게는 잘못된 집중이 생겨난다.” (S45.1,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말씀 하신 무명은 잘못된 견해에서 시작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첫 단추를 잘못 꿰다 보니 그 다음부터 줄줄이 어긋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잘못된 견해(micchādiṭṭhi)’는 무엇을 말할까?

 

무명과 잘못된 견해(micchādiṭṭhi)

 

잘못된 견해는 정견(sammādiṭṭhi)’의 반대말이다. 정견은 무엇인가? 막가상윳따 분별의 경에 따르면 정견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란 무엇인가수행승들이여, 1)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 2) 괴로움의 발생에 대하여 알고, 3)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고, 4)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알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견해라고 한다.” (S45.8) 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무명은 잘못된 견해에서 시작된 것이다. 잘못된 견해는 정견의 반대이다. 그래서 무명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인연의 모음(S12)’에서 또한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것을 수행승들이여, 무명이라고 부른다.” (S12.2) 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무명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중층적 무지의 구조로 인하여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고 무지이다. 이렇게 사성제를 모르다 보니 모르고 짓는 죄가 많다.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죄를 짓는 것이다. 그래서 무명이 대죄라 하였다.

 

무지한 자들은 사성제에 대하여 모른다. 사성제가 있는 것 조차 모른다. 이렇게 사성제의 내용에 대하여 모르고 사성제가 있는 것 조차 모른다면 무지에 무지를 더한 것이다. 그런데 무지에 대한 무지는 또 무지에 대한 무지이다. 이러한 중층적 무지의 구조 때문에 무명이라 불린다.

 

무명을 타파 하려면

 

무명을 타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빛이 필요할 것이다. 깜깜한 방에서 촛불이나 전구, 또는 형광등을 켜는 것과 같다. 그러면 일시에 밝아 질 것이다. 그래서 명지(vijja)’라 하였다.

 

무명(avijjā)과 명지(vijja)는 반대 개념이다. 명지를 뜻하는 윗자에 대하여 ‘(higher) knowledge’라고 설명되어 있다. ‘보다 높은 앎이라는 뜻이다. 주석에서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궁극적인 앎(kammassakatañña)”이라 하였다. 반면 아윗자는 ‘ignorance’의 뜻으로 ‘unknowing(모르는 것)’이 된다.

 

모르는 것이 무명이고, 아는 것은 명지이다.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 가르침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가르침을 알면 윗자이고 모르면 아윗자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빛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 즉, 사성제를 모르면 무명이고, 사성제를 알면 명지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사성제를 모르고 짓는 죄는 매우 큰 죄가 된다. 그것은 무명의 속성 때문이다. 이는 무명이 앞서가면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에 도달하며(avijjā bhikkhave pubbagamā akusalāna)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무명이 동시조건적 무명과 선구적 무명의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선구적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선구적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pubbagamā’를 말한다. 이는 ‘going at the head’의 뜻으로 앞서 이끈다라는 말이다. 무명이 앞장 섰을 때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akusalā)가 줄줄이 역인다. 특히 경에서는 부끄러움도 모르게 되고 창피스러움도 모르게 된다.(samāpattiyā anvadeva ahirika anottappa)라고 하였다.

 

부끄러움(hiri)과 창피함(ottappa)을 모르면 짐승과도 같은 삶이다. 부끄러움이 부끄러움인 줄 모르고, 창피함이 창피함인 줄 몰랐을 때 어떻게 될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그리고 약육강식의 세계가 될 것이다. ‘도덕적으로 죽은 세계로서 동물의 삶과 다름 없다.

 

무명의 반대는 명지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명지에 대하여 명지가 앞서가면 착하고 건전한 상태에 도달하며 그것과 더불어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창피함을 알게 된다.”(S45.1)라 하였다.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았을 때 동물적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사성제를 알면 깜깜한 방에 불이 켜진 것 같아서 부끄럽고 창피한 짓을 못하게 된다. 살생을 하라고 해도 그것이 나쁜 것인 줄 알기 때문에 하지 못한다. 도둑질 하는 것, 음행 하는 것, 거짓말 하는 것, 술을 마시는 것 등 오계를 어기는 행위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명지(vijjā)가 이끌었을 때

 

무명을 따르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잘못된 견해가 생겨나 잘못된 생활을 하게 된다. 결국 파멸로 이끌고 만다. 그러나 명지를 따르는 자에게는 올바른 견해가 생겨나 올바른 생활을 하게 된다. 그래서 향상으로 이끈다. 이것이 팔정도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명지를 따르는 지혜로운 자에게는 올바른 견해가 생겨난다. 올바른 견해를 지닌 자에게는 올바른 사유가 생겨난다. 올바른 사유를 지닌 자에게는 올바른 언어가 생겨난다. 올바른 언어를 지닌 자에게는 올바른 행위가 생겨난다. 올바른 행위를 지닌 자에게는 올바른 생활이 생겨난다. 올바른 생활을 지닌 자에게는 올바른 정진이 생겨난다. 올바른 정진을 지닌 자에게는 올바른 새김이 생겨난다. 올바른 새김을 지닌 자에게는 올바른 집중이 생겨난다.” (S45.1, 전재성님역)

 

 

팔정도가 순차적으로 설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팔정도가 동시적 발생일 수도 있고 순차적일 수도 있다. 여기서는 순차적 발생으로 연쇄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명지가 원인이 되어 이끌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는 것이 대죄

 

무명이 대죄라 하는 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이끌기 때문이다. 특히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 보니 도덕적으로 금하는 행위도 서슴없이 한다. 도둑놈이 도둑질을 계속 하는 것도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도둑질 하는 것이 나쁜 것인 줄 알면서 한다면 가능성이라도 있다. 그러나 도둑질이 나쁜 것인 줄 몰랐을 때 이는 어둠에 쌓여 있는 것과 같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듯이 나쁜 것이 나쁜 것인 줄 몰랐을 때 계속 하게 된다. 그러나 도둑질이 나쁜 것인 줄 알고 하는 자들이 있다. 버릇이 그렇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훔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손이 갔을 때 잘못을 안다. 그래서 죄값을 받는다. 그러나 그 때 뿐 이다. 그러나 일말의 양심과 수치심이 있기 때문에 언젠가 그만 둘 것이다. 그래서 모르고 짓는 죄가 알고 짓는 죄 보다 더 크다고 하였을 것이다.

 

모르고 짓는 죄는 잘못된 견해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는 사성제를 모르는 무지에서 기인한다. 더구나 사성제가 있다는 그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또 무지하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무지하다. 이렇게 무지에 무지, 또 그 무지에 무지하기 하기 때문에 무명이다. 그래서 양심과 수치심을 모르는 자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삶이 무명이고 대죄에 해당된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는 것이 대죄이고, 특히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가장 큰 죄에 해당된다.

 

 

Sukara sādhunā sādhu ~

sādhu pāpena dukkara, 
P
āpa pāpena sukara ~

pāpam-ariyehi dukkaran

 

선한 자가 선을 행하는 것은 쉽다.

악한 자가 선을 행하는 것은 어렵다.

저열한 자가 악을 행하는 것은 쉽다.

고귀한 자가 악을 행하는 것은 어렵다.” (Ud60, 전재성님역)

 

 

 

2015-10-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