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젊었을 때 출가는 타당한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1. 5. 18:41


 

젊었을 때 출가는 타당한가

 






밥 먹듯이 하는 것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는 말이 있다. 매일 먹는 것이 밥이고 그것도 세 끼 먹는 것이 밥이다. 거짓말 잘 하는 사람을 밥 먹는 것으로 빗대어 말한 것이다. 다반사라는 말도 있다. 밥과 차는 늘 마신다. 이렇게 늘 때 되면 먹는 것이 밥이다.

 

밥은 가난한 자나 부자나, 천한 자나 귀한 자나 모두 먹는다.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도 매일 먹는 것이 밥이다. 부자라고 하여 열 끼, 백 끼 먹지 않는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세 끼 먹는다. 이렇게 매일 먹는 것이 밥이다.

 

밥을 먹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일까 비틀비틀 거리는 노인도 밥 먹는 것을 보면 젊은이와 다를 바 없다. 먹기 때문에 생존한다. 이왕이면 더 맛있게 더 질 높게 먹고자 한다. 하루 라도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감각적 쾌락도 밥먹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음식절제 이야기

 

부처님은 음식절제를 이야기 하였다. 식사에 적당량을 알아 욕심으로 먹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보면 음식절제 이야기가 무수히 등장한다.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Manujassa sadā satīmato

matta jānato laddhabhojane,
Tanu tassa bhavanti vedan
ā

sanika jīrati āyupālayanti.

 

언제나 새김을 확립하고

식사에 분량을 아는 사람은

괴로운 느낌이 적어지고

목숨을 보존하며 더디 늙어가리. (S3.13)

 

 

Ūnudaro mitāhāro

apapiccassa alolupo,
Sace icchoya nicch
āto

aniccho hoti nibbuto.

 

배를 가득 채우지 말고 음식을 절제하고,

욕심을 적게 하고 탐욕을 일으키지 마십시요.

욕망이 없어지고 버려져서

욕망이 여윈 것이 적멸입니다.(stn707)

 

 

Subhānupassi viharanta  

indriyesu asavuta,
Bhojanamhi amattaññu
,

kusīta hīnavīriya,

Ta ve pasahati Māro

vāto rukkha va dubbala.

 

아름다움에 탐닉하여

감관을 수호하지 않고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모르고

게을러 정진이 없으면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꺽어 버리듯,

악마가 그를 쓰러뜨리리. (dhp7)

 

 

음식절제하는 것은 출가수행자들에게만 해당 되는 것일까? 불교경전이 출가수행자들만의 것이라 볼 수 없다.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모두 부처님의 제자들이다. 재가자들 역시 부처님 제자들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당연히 음식절제가 일어나야 한다.

 

음식절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음식절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아들고기의 교훈(S12.63)이 있다. 황야를 지나는 부부가 아들을 음식삼아 생존한다는 끔찍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아들의 고기는 음식의 비통함을 상기하는 것이다. 제정신의 사람이라면 거기에 탐욕을 부릴 수가 없다.” (DhpA.I.374) 라 하였다. 그래서 음식을 대할 때 차축을 돌게 하는 윤활유나 상처를 치유하는 붕대나 아들의 고기처럼 바라본다.” (DhpA.I.374) 라 하였다.

 

음식이야기를 하지 말라

 

대부분 사람들은 음식을 즐긴다. 마치 인생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처럼 맛을 찾아 다닌다. 때로 욕망으로 먹고 때로 분노로 먹기도 한다. 그리고 음식이야기를 한다. 부처님은 음식절제를 말하였고 음식이야기를 하지 말라 하였다. 이는 여러 가지 잡담, 예를 들어 왕에 대한 이야기, 도적에 대한 이야기, 대신들에 대한 이야기, 군사에 대한 이야기, 공포에 대한 이야기, 전쟁에 대한 이야기, 음식에 대한 이야기, 음료에 대한 이야기,…” 라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 하였다. 그 중에 음식이야기도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달콤한 악마의 유혹

 

식욕과 성욕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모두 오감으로 즐기는 것들이다. 식욕과 성욕은 눈, , , , 감촉 등 오감이 총동원 된다. 매일 밥먹듯이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이 행복일까? 이런 삶은 달콤한 악마의 유혹과 같다. 특히 젊은 나이에 출가한 수행자가 대상이 된다. 상윳따니까야 많은 수행승들의 경(S4.21)’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악마가 유혹한다.

 

 

[빠삐만]

“존자들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 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 (S4.21)

 

 

악마(마라) 빠삐만은 한 성직자의 모습으로 바꾼 후 젊은 수행승 앞에 나타난다.그런데 모습이 형편 없다. 늙어 굽은 등과 함께 콜록콜록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젊었을 때 감각적 쾌락을 즐기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자신처럼 살지 말라는 것과 같다.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감각적 쾌락을 억제 하며 살았으나 남는 것은 늙고 병든 몸만 남았을 뿐이라는 것을 강조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 날 욕망을 억제하며 헛되이 보내지 말고 젊었을 때 즐기라는 말이다. 이것인 개인적 견해이다. 또 하나는 바라문 인생사주기에 대한 것이다. 젊어서 할 일을 다 한 다음에 출가해도 늦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악마는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고 말한다.

 

시간에 매인 것이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는 말은 빠알리어 “Mā sandiṭṭhika hitvā kālika anudhāvīti.를 번역한 것이다. 난해한 이 문장은 두 파트로 나눌 수 있다. 현재를 버리지 않는 것(Mā sandiṭṭhika)과 시간에 매인 것을 좇는 것(hitvā kālika anudhāvīti)을 말한다.

 

현재를 버리지 않는 것에서 현재는 sandiṭṭhika 를 말한다. sandiṭṭhika지금, 여기를 뜻한다. Mā‘do not’을 의미한다. 그래서 Mā sandiṭṭhika은 현재를 버리지 말라는 뜻이 된다. 지금 이순간을 즐기라는 말이다.

 

다음으로 hitvā kālika anudhāvīti이다. 여기서 kālika‘belonging to time, in time’을 뜻한다. ‘시간에 매여 있는또는 제때를 의미한다. Anudhāvi‘ran after’의 뜻이고, hitvājahāti와 같은 의미로서 ‘To leave’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hitvā kālika anudhāvīti의 뜻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는 것을 말한다. 감각적 욕망을 즐기라는 뜻이다.

 

각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Mā sandiṭṭhika hitvā kālika anudhāvīti(빠알리 원문)

2)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전재성님역)

3) 목전에 분명한 것을 제쳐두고 시간이 걸리는 것을 추구하지 마십시오.(각묵스님역)

4) do not abandon what is directly visible in order to pursue

what takes time.(빅쿠보디역)

 

 

각묵스님역과 빅쿠보디역을 보면 유사하다. 그것은 목전에 분명한 것곧바로 보이는 것(directly visible)’이다. 이런 것을 포기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걸리는 것을 추구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See 1:20. Here Mara appears as a proponent of the brahmanical idea that renunciation (sannyasa) must be postponed until after one has enjoyed a full married life. On how young bhikkhus, lads "in the prime of life, who have not dallied with sensual pleasures," can live the holy life without being overcome by sensual desire, see 35:127.

 

(CDB 303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바라문 인생사주기에 대한 것이다. 학습기와 가주기, 그리고 임서기와 유행기를 말한다. 이것은 정통바라문의 인생관이다. 학생 때는 공부를 하는 것이다. 가주기 때는 결혼을 하여 일가를 이룬다. 나이가 들어 때가 되면 숲에서 살며 유행하는 삶이다.

 

부처님 당시 사문들은 젊은 나이에 출가 하였다. 바라문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젊음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콜록콜록 하며 유행하는 바라문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한편으로 안되 보이고 또 한편으로 못 마땅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젊었을 때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마음껏 즐기고 수행은 나중에 나이 들어 늙어서 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악마의 유혹에 대하여 젊은 수행승은 어떻게 받아 들일까?

 

 

[수행승들]

“성직자여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성직자여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성직자여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더 큰 것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 하셨습니다. (S4.21)

 

 

젊은 수행승들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쫒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na kho maya brāhmaa sandiṭṭhika hitvā kālika anudhāvāma)라 하였다.

 

깔리까(kālika)와 아깔리까(akālika)

 

여기서 악마가 한 말과 수행승들이 한 말은 약간 차이가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악마 빠삐만

mā sandiṭṭhika hitvā kālika anudhāvīti

시간에 메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

 

2) 수행승들

na kho maya brāhmaa sandiṭṭhika hitvā kālika anudhāvāma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쫒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악마가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Mā sandiṭṭhika)” 하였을 때 mā ‘do not’의 뜻이다그런데 수행승들은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na sandiṭṭhika)”라 하였다. 여기서 na‘never’ 또는 indeed not’의 뜻이다.

 

시간에 매인 것을 쫒는 것(hitvā kālika anudhāvīti)’은 모두 동일하다. 여기서 시간에 매이다라는 말은 kālika’를 뜻한다. 이는 시간성을 말한다. 그런데 이와 반대 되는 말이 있다. 그것은 akālika이다. 이는 무시간성을 말한다. 시간을 초월하는 것 또는 즉시적 효과를 가져 오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andiṭṭhiko akāliko ehipassiko opanayiko paccatta veditabbo viññūhīti) (S4.21)   한다. 여기서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라는 말이 akālika이다. 이는 성스런 길을 실천하면 그 결과가 즉시나타남을 말한다. 무시간성이다. akālik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시간을 초월하는의미로 번역하였다. 초불연에서는 시간이 걸리지 않고라고 번역하였다.

 

시간을 초월하거나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 특징이다. 그래서 무시간을 의미하는 akālika라 한다. 그러나 악마 빠삐만은 kālika라 하여 시간을  의미한다. 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 또는 시간과 함께 있는 것, 시간에 매여 있는 것의 의미이다. 이는 다름 아닌 감각적 욕망이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쾌락은 영원하지 않다. 일시적이다. 무상한 것이다. 시간과 함께 있어서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악마 빠삐만은 시간에 메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 하였다. 반면 수행승들은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쫒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같은 시간이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것이다. 악마 빠삐만은 젊을 때 즐기며 살고 수행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음을 말한다. 반면 수행승들은 지금 여기서 수행을 해야 하며 나중에 하는 것은 맞지 않음을 말한다.

 

젊었을 때 출가는 타당한 것일까?

 

바라문 인생사주기에 따르면 출가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젊었을 때는 가업을 잇는 의무를 다하고 노년에 출가해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들은 머리가 칠흑같이 젊은 나이에 출가하였다. 그렇다면 젊었을 때 출가는 타당한 것일까? 이에 대한 게송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사밋디의 경이 그것이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Abhutvā bhikkhasi bhikkhu

na hi bhutvāna bhikkhasi,

Bhutvāna bhikkhu bhikkhassu

mā ta kālo upaccagāti.

 

[하늘사람]

“수행승이여그대는 향락 없이 걸식하네.

향락을 누리고 나서 걸식하지 않네.

수행승이여시절이 그대를 지나치지 않도록

향락을 누리고 나서 걸식하시오.” (S1.20)

 

Kāla vo'ha na jānāmi

channo kālo na dissati,

Tasmā abhutvā bhikkhāmi

mā ma kālo upaccagāti.

 

[싸밋디]

“그대가 말하는 시절을 나는 모르네,

그 시간은 감추어져 있고 볼 수도 없으니,

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나는 향락 없이 걸식하며 사네.” (S1.20)

 

 

하늘사람은 젊은 수행승에게 젊어서 향락을 누릴 것을 말한다. 출가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음을 말한다. 이에 수행승 사밋디는 나는 향락 없이 걸식하며 사네라 하며 거절한다. 거절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시간은 감추어져 있고 볼 수도 없으니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하늘사람이나 사밋디 모두 시간(kāla)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 시간이라는 것은 입장에 따라 다르다. 악마에게 있어서 시절(kāla)은 향락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을 말한다. 젊은 시절이 다시 돌아 오지 않으니 마음껏 향락을 누리고 수행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시절이 그대를 지나치지 않도록 향락을 누리고 나서 걸식하시오라고 말한다.

 

사밋디가 말하는 시간(kāla)은 악마가 말하는 시절(kāla)과 다르다. 주석에 따르면 사밋디가 말하는 시간은 다가 오는 죽음에 대한 것이다. 그런 죽음의 시간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시간은 감추어져 있고 볼 수도 없으니 (channo kālo na dissati)”라 한 것이다.

 

오늘 밤까지만 산다고 생각한다면

 

사람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가난한 자 부자나, 천한자나 귀한자나,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언제 어떻게 죽음의 시간이 들이 닥칠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먼 훗날을 기약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지금 젊다고 하여 마음껏 감각적 쾌락을 누리고 수행은 출가는 나이 들어 해도 늦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지금 식욕, 성욕 등 오욕락을 마음껏 즐기는 살며 수행은 나이 들어 해도 늦지 않다는 것 역시 잘못된 생각이다. 왜 그런가 죽음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

 

악마의 말대로 젊어서 마음껏 감각적 욕망을 누리다가 공덕을 쌓지 못한채 급작스럽게 죽게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그 때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을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내일이 올지 오지 않을지 알 수 없다. 오늘 밤까지만 산다고 생각한다면 욕망을 즐길시간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루하루가 소중한 것이다. 젊어서 출가하여 수행하는 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사밋디는 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나는 향락 없이 걸식하며 사네.”라 한 것이다.

 

 

 

2015-11-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