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연기법적 추론으로 알 수 있는 것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0. 30. 14:27


연기법적 추론으로 알 수 있는 것들

 



행운목꽃 향기는

 

무엇이든지 체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맛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냄새를 맡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런 예가 하나 있다.

 

사무실에 행운목이 있다. 거의 매년 연말이면 핀다. 어느 해에는 두 번 피기도 한다. 행운목꽃이 필 때 향기가 매우 강렬하다. 매우 독특한 냄새가 나는데 밀폐된 공간에서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그래서 행운목꽃이 절정일 때는 환기시켜 주어야 한다. 그런 행운목꽃 향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행운목꽃 향기는 맡아 보아야 알 수 있다. 굳이 글로 표현 하자만 상큼하다. 마치 상큼한 방향제를 연상케 한다. 특유의 냄새가 어떤 이에게는 좋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냄새가 싫어서 꽃대를 잘라 버린다고 하였다.

 

행운목꽃 향기를 글로 표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어느 정도 표현 하면 상상이 가기도 할 것이다. 깨달음 또는 열반도 마찬 가지 일 것이다. 그럼에도 깨달음 또는 열반에 대하여 체험해 보아야만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체험 하지 않아도 경전에 표현된 문구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팔만사천 법문이 나왔을 것이다.

 

굽어진 것으로부터

 

범부들은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이해 하기 힘들다. 특히 연기법이 그렇다. 그래서 연기법은 현자들만이 알 수 있는 법이라 하였다. 그런데 일반사람들은 죽음도 잘 모르고 재생도 잘 모른다. 이에 대한 게송이 숫따니빠따 성자의 경에 있다.

 

 

yo ve hatatto tasarava aujju 
Jigucchati kammehi p
āpakehi, 
V
īmasamāno visama samañca 
Ta
vāpi dhīrā muni3 vedayanti.

 

베틀의 북처럼 바르게 자신을 확립하여

모든 악한 행위를 싫어하고,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을  잘 아는 님,

현명한 님들은 그를 또한 성자로 안다.”(stn215, 전재성님역)

 

 

첫 번째 구절에서 베틀의 북처럼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성자를 표현할 때 정형구로 자주 나온다. 경에서는 베틀의 북처럼 곧은 님들” (stn464)  또는 베틀의 북처럼 바르게” (stn215) 라는 형식으로 표현된다. 베틀을 성자로 비유한 것이다. 이때 베틀은 곧은 이미지이다. 베를 짤 때 베틀은 곧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곧은 것이 있다면 굽은 것이 있을 것이다. 굽은 것은 범부를 상징한다. 그래서 테리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오자유정말로 나는 벗어났다. 세 가지 굽은 것들에서 벗어났다. 절구절구공이그리고 마음이 비뚤어진 남편으로부터 벗어났다. 나는 생사에서 벗어났다. 윤회로 이끄는 것은 뿌리째 뽑혔다.(테리가타 11, 뭇따비구니)라 되어 있다.

 

굽은 것은 비뚤어진 것이다. 비뚤어진 것은 곧은 것의 반대어이다. 범부의 삶이 비뚤어진 것이라면 성자의 삶은 곧은 것이다. 그래서 곧은 것을 상징하는 베틀로 성자를 비유하였다. 베틀의 북처럼 올 곧게 나아가는 성자의 이미지를 떠 올리게 한다.

 

인연담을 보면

 

게송 stn215에 대한 인연담이 있다. 단지 게송만 보아서는 게송의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럴 때에는 주석을 보아야 한다.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Prj.II.266에 따르면, 이 시는 세존께서 알라비 시에 사는 길쌈하는 일곱 살 소녀와 관련된 가르침이다.

 

어느 날 직조공이 일곱 살 된 딸에게 길쌈을 시키고 있었는데 부처님이 대자비의 삼매에 들어 세상을 살피다가 그 소녀가 진리의 흐름에 든 이가 될 것을 알고 알라비 시를 방문하였다. 소녀는 많은 사람에 둘러싸인 부처님을 보자 다섯 번 절을 올렸다.

 

세존께서는 소녀에게 물었다. ‘소녀여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세존이시여, 모릅니다.’ ‘소녀여 그대는 어디로 갈 것인가?’ ‘세존이시여,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는가?’ ‘세존이시여, 압니다.’ ‘아는가?’ ‘세존이시여, 알지 못합니다.’ 이것을 듣고 사람들은 화를 내었다. 부처님께 당돌하게 대답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그렇게 대답한 이유를 묻자 소녀는 대답했다. 소녀는 부처님이 ‘어디서 왔느냐’는 집에서 온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결생(結生: paisandhi)에 관해 물은 것이라 알지 못한다고 했으며, ‘어디로 갈 것이냐’는 죽음에 대해 물은 것이라 알지 못한다고 했으며 ‘알지 못하는 가’라는 것은 죽음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가라고 물은 것인데 모든 존재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라고 대답한 것이며, ‘아는가.’라고 물은 것은 죽음에 대하여 언제 죽는 가를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존께서는 그 소녀를 칭찬하고 때가 되었음을 알고 가르침(Dhp.174)을 주었는데, 이 때에 진리의 흐름에 든 이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소녀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그녀를 보자 ‘너무 시간이 지났다’고 화를 내면서 엉겁결에 북을 던졌는데 딸의 배에 맞아 딸이 죽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딸을 죽였다’생각했고 아버지는 왕의 처벌이 두려워 출가해서 수행승이 되었다.

 

그러자 수행승들 사이에서도 딸을 죽인 것이 문제가 되자 세존께서는 ‘이 수행승이 딸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녀는 자신의 업에 의해 죽은 것이다’라고 하면서 수행승들에게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번뇌를 부순 성자의 상태에 관하여 밝히면서 이 시를 설한 것이다.

 

(게송 stn215에 대한 인연담, 전재성님역)

 

 

인연담을 보면 법구경에도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법구경 174번 게송을 보면 이 세상은 암흑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보는 자는 드물다. 그물을 벗어난 새와 같이 하늘을 나는 자들은 드물다.”(Dhp174) 라고 되어 있다여기서 세상을 암흑이라고 한 것은 일반사람들은 통찰의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말한다. 분명하게 보는 자는 드물다다고 하였는데, 이는 소수의 사람만이 무상, 괴로움, 실체 없음을 통찰한다는 뜻이다.

 

표로 만들어 보면

 

일반사람들은 무엇을 보지 못하고 현자들만이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인연담에 실려 있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No

부처님 질문

소녀 답변

해 설

1

소녀여,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세존이시여,

모릅니다.

결생(結生: paisandhi)에 관해 물은 것이라 알지 못한다.

2

소녀여, 그대는 어디로 갈 것인가?

세존이시여,

알지 못합니다.

죽음에 대해 물은 것이라 알지 못한다.

3

알지 못하는가?

(죽음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가?)

세존이시여,

압니다.

모든 존재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4

아는가?

(언제 죽는가?)

세존이시여,

알지 못합니다.

언제 죽는 가를 알지 못한다.

 

 

부처님의 네 가지 질문에 일곱 살 먹은 소녀는 척척 답하였다. 그런데 아는 것은 모든 존재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 하나 밖에 없다. 나머지는 모르는 것들이다.

 

누구나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일곱살 먹은 아이도 안다. 그러나 아이를 포함하여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언제 죽을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추론으로 알 수 있다

 

일반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 중에 결생(結生: paisandhi)이 있다. 이를 재생연결식이라 한다. 그러나 현자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 어떻게 알까? 아직까지 죽어서 돌아온 사람들이 없는데 재생연결식을 어떻게 알까? 이에 대하여 경과 주석에서는 추론으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연기법으로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연기법을 아는 현자들은 일반사람들은 알기 어려운 네 가지 법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진리(sacca), 중생(satta), 재생연결 (paisandhi), 조건(paccaya)을 말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이 네 가지 법은 보기 어렵고 가르치기도 어렵다.”(Vism.17.25) 고 하였다.

 

알기 어려운 네 가지 법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윤회한다는데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전승된 가르침을 통달하거나 수행하여 법을 증득한 자가 아니면 연기의 주석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빠알리 삼장에 통달한 삼장법사나 수행을 하여 도와 과를 성취한 성자가 아니면 심오한 연기법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회의론자들은 자신들이 체험하지 않은 것들 즉, 내생, 윤회, 재생연결식, 열반 등 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이에 주석서에서는 이렇게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UdA.390에 따르면열반의 세계는 승의(勝義: paramatthato)로서 존재한다는 뜻이다이 가르침에서 열반을 제외한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조건지어진 것으로 나타나지 조건지어지는 것과 무관하게 나타나지 않는다그런데 그 열반의 세계는 어떠한 조건에 의해서 발견되는가형상 등이 시각의식 등의 객관적 조건을 구성하는 것처럼열반은 길과 그 경지 등과 관련된 앎의 객관적 조건을 구성하기 때문에 원인이라는 의미에서 세계이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승의의 의미에서 존재하는 무조건적인 세계에 대하여 가르쳐 준다이것은 사실과 관계된 추론(dhammanayo)이다조건지어진 것들이 여기에 발견되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그것과 반대가 되는 무조건적인 세계가 존재해야 한다괴로움이 있을 때 그 반대가 되는 즐거움이 있고 뜨거운 것이 존재하면찬 것도 존재하고 악한 것이 존재하면선한 것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996번 각주우다나전재성님)

 

 

핵심구절은 ‘승의’와 ‘추론’이다이는 “열반의 세계는 승의(勝義: paramatthato)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실과 관계된 추론(dhammanayo)”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알기 어려운 법 네 가지는 승의와 추론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추론으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연기법에 따른다. 십이연기에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S12.3) 이라는 정형구를 보면 알 수 있다.

 

연기법적 추론으로 논파된 허무주의와 영원주의

 

연기법은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라는 구절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심오한 연기법을 부처님이 발견하였다. 이런 연기법은 현자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의 연기법으로 삿된 견해를 모두 부수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 당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가 모두 논파되었다. 대표적인 경이 깟짜야나곳따의 경 (S12.15)’ 이다.

 

깟짜야나곳따의 경에 따르면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면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라 하여 허무주의가 논파되었다.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라 하여 영원주의가 논파 되었다. 이렇게 허무주의와 영원주의가 논파된 것은 연기법적 추론에 따른 것이다.

 

열반도 연기법적 추론으로

 

일반사람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고 실천하면 알기 어려운 법을 알 수있다. 알기 어렵다는 것은 죽음 이후를 말한다. 그러나 연기법에 따르면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연기법적 추론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열반역시 연기법적 추론으로 성립한다.

 

열반은 체험해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는 체험 할 수 있는 수행법이 묘사 되어 있다. 상윳따니까야 까마부의 경에 따르면 “장자여,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수행승에게는 언어적 형성이 먼저 소멸하고 그 다음에 신체적 형성이 소멸하고 그 다음에 정신적 형성이 소멸합니다.”(S41.6) 라 하였다.

 

호흡관찰을 하여 멸진정 상태에 들어 가는 순서에 대한 것이다. 가장 먼저 사유와 숙고가 사라진다. 이는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이다. 다음으로 신체적 형성인 호흡이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정신적 형성인 지각과 느낌이 사라진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사라졌을 때 열반에 드는 것으로 본다.

 

초기경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잘 설명되어 있다. 이런 설명문으로 열반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외에도 수 많은 열반에 대한 표현이 있다. 이와 같은 열반 역시 연기법적 추론으로도 알 수 있다. 이는 조건이 다 하면 연기의 고리가 끊어지기 때문에 열반으로 본다.

 

숫따니빠따 두 가지 관찰의 경(Sn3,12)’에 따르면 연기의 특정 고리가 끊어 졌을 때 괴로움과 윤회가 소멸 된다고 하였다. 그 중에 한 고리를 보면 “어떤 괴로움이 생겨나더라도 모두 접촉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 이 하나의 관찰이고, 그러나 접촉을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여 소멸시켜 버린다면,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두 번째 관찰이다.”라 하였다. 그래서 접촉에 대하여 두루 알아 최상의 지혜와 그침을 즐기는 사람은, 접촉을 고요히 가라앉혀 바램 없이 완전히 열반에 든다. (stn737)라 하였다.

 

연기의 고리가 끊어 졌을 때 열반이 실현 되는 것이다. 이는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구성되어 있는 연기법에서, 조건이 다 하였을 때 열반이 실현된다는 것을 연기법적 추론으로 알 수 있다.

 

이것이 불교의 진화인가?

 

대승에서는 부처님 깨달음 자체도 불완전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불교는 시대에 따라 계속 진화해 왔다고 한다대승불교 관점으로 본다면 불교는 앞으로도 계속 진화해 갈 것이다. 어디까지 진화해 갈까? 아마 모든 종교는 하나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이미 그런 조짐을 보였다. 2011년 조계종에서 추진하였던 종교평화선언이 그것이다.

 

종교평화선언을 보면 조계종 스님들과 일부 불교학자들이 불교를 새롭게 해석하였다. 관련 문구를 보면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축약본) - 21세기 아쇼카 선언, 2011-08-23) 라 하였다. 이와 같은 선언문을 보면 불교와 유일신교는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진화일까? 미래에도 계속 불교가 진화된다면 기독교의 교리와 똑같이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왜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하는지 자명하다.

 

 

2015-10-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