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압빠마다(appamāda)와 사띠(sati)는 동의어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1. 7. 13:15

 

압빠마다(appamāda)와 사띠(sati)는 동의어

 

 

 

 

 

 

 

압빠마다에 대하여

 

묘원법사의 글을 읽다가 압빠마다(appamāda)’에 대한 글을 발견하였다. 글에 따르면 붓다께서 설하신 경전에는 아빠마다가 무려 1970번이나 기록되었습니다.”라 하였다. 이는 사띠에서 기억과 함께 잊지 않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사띠의 제1의미가 기억이고, 그 다음이 잊지 않음인데, 이 잊지 않음에 대하여 압빠마다로 설명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불방일로 번역되는 압빠마다가 초기경전에 무려 1970번 등장한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다.  이런 압빠마다는 사띠와 동의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묘원법사는 압빠마다에 대하여 잊지 않음, 끈질기게 잡고 있음, 가볍게 넘기지 않음, 주저함 없이 알아차림이라는 의미가 있다라고 하였다. , 느낌, 마음, 법이라는 네 가지 대상에 대하여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법구경에서 본 압빠마다

 

압빠마다는 얼마나 중요한 용어일까? 이는 법구경을 보면 알 수 있다. 법구경 26개 품 중에 두 번째로 압빠마다왁가(appamādavagga)’가 있다. 이를 방일하지 않음의 품이라 하여 12개의 게송이 소개 되어 있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Appamādo amatapada,

pamādo Maccuno pada,

Appamattā na mīyanti,

ye pamattā yathā matā.

 

방일하지 않음이 불사의 길이고

방일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니

방일하지 않은 사람은 죽지 않으며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 (Dhp21, 전재성님역)

 

 

방일과 불방일에 대하여 죽음과 불사로 설명하였다. 방일한 자는 이미 죽은 자와 다름 없다는 것이다. 살아 있지만 마치 좀비처럼 죽은 것과 다름 없음을 말한다. 이때 빠마다에 대하여 게으름으로, 압빠마다에 대하여 부지런함으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일부는 맞지만 원래의 뜻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왜 그런가? 압빠마다는 사띠의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늘 깨어 있는 상태, 늘 알아차림이 유지 되는 상태가 압빠마다 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깨어 있지 못하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 없고 죽음을 맞이 할 수 밖에 없다. 육체적 죽음은 방일한 자에게 찾아 오는 것이다. 그러나 늘 깨어 있다면 살아 있는 것과 같고 불사의 길(열반)로 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빠알리 사전 PCED194에 따르면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이 있다. 그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은 부서지고야 마는 것이니,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vayadhammā sa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ā)” (D16) 라는 문구이다. 여기서 appamādena sampādethā 에 대하여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라 하였다. 이는‘Strive zealously!’의 뜻이다.

 

appamādena sampādethā에 대한 주석을 보면 새김을 잃어버리지 말고 모든 해야 할 일을 성취하라” (Smv.593) 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압빠마다가 사띠와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빠알리사건에 표현된 영문주석을 보면 “it is often explained as the presence (lit. 'non-absence') of mindfulness (satiyā avippavāsa).” (appamāda, PCED194) 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로 보았을 때 압빠마다가 단지 부지런함의 의미를 넘어 늘 깨어 있는 상태, 늘 알아차림이 유지 되어 있는 상태, 즉 사띠와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빠알리 사전 PCED194에 따르면 압빠마다에 대하여 제1의 뜻으로 ‘zeal’라 하였다. 이는 열의라는 뜻이다. Concise P-E Dict에서는 ‘vigilance; earnestness’라 하였고, PTS P-E dictionary에서는 ‘thoughtfulness, carefulness, conscientiousness, watchfulness, vigilance, earnestness’라 하였다. 압빠마다가 거의 사띠와 같은 뜻임을 알 수 있다.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압빠마다에 대하여  “non-laxity, earnestness, diligence, is considered as the foundation of all progress.”라고 부가 설명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압빠마다가 모든 성장(향상)의 바탕이 됨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법구경 주석을 보면 두 가지 비유를 들고 있다. 그것은 코끼리발자국의 비유와 새벽의 비유이다.

 

코끼리발자국의 비유

 

코끼리발자국 비유는 사성제를 설명할 때 사용되고 있다. 코끼리 발자국에 모든 동물의 발자국이 들어 가듯이,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이 사성제에 포섭 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코끼리발자국 비유가 압빠마다를 설명하는데도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걸어 다니는 뭇삶의 발자국이든지 그 모든 것들은 코끼리의 발자국에 들어가므로 그들 가운데 그 크기에 관한 한 코끼리의 발자국을 최상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 있든지 그 모든 것들은 방일하지 않음을 근본으로 하고 방일하지 않음을 귀결로 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 가운데 방일하지 않음을 최상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방일하지 않으면,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닦고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익히라는 것은 자명하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방일하지 않으면, 어떻게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닦고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익히는가?

 

(Padasuttā-발자국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14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코끼리 발자국이 불방일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모든 동물의 발자국이코끼리 발자국에 포섭되듯이 압빠마다(불방일)가 성장의 밑바탕이라 하였다. 그래서 압빠마다가 기본중의 기본이기 때문에 모든 것들 가운데 방일하지 않음이 최상이라 하였다. 이는 사성제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압빠마다는 사띠와 동의어라는 사실이다. 늘 깨어 있다는 것은 모든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

 

 

새벽의 비유

 

압빠마다가 두 번째 비유로 활용된 것은 새벽이다. 아침에 해가 뜨기 전에 먼저 동트는 것을 압빠마다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상윳따니까야와 앙굿다라니까야에 실려 있는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태양이 떠 오를 때 그 선구이자 전조가 되는 것은 바로 새벽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생겨날 때 그 선구이자 전조가 되는 것은 방일하지 않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계행을 지키면,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닦고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익히라는 것은 자명하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방일하지 않으면, 어떻게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닦고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익히는가?

 

(Appamādasutta- 방일하지 않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54, 전재성님역)

 

 

아침에 해가 뜨기 전 전조가 있다. 해가 동쪽 하늘에 아직 솟구치지 않았지만 이미 날은 훤하게 밝아 있다. 이것이 새벽이다. 그래서 새벽이 되어 날이 밝아지면 해가 떠 오른다는 전조이다. 압빠마다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모든 성장이나 향상에 압빠마다가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압빠마다가 없다면, 즉 방일한다면 성장이 이루어질 수 없다.

 

부지런함과 마음집중?

 

압빠마다는 꼬끼리발자국과 같고 새벽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모든 성장과 향상에 밑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띠와 같은 의미이다. 그런 압빠마다에 대한 번역어는 불방일이다. 이에 대하여 나까무라 하지메는 라 하여 힘쓰다또는 전심하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つとめむのは不死境地である。라 하였다. 이는 영어 zeal이라는 뜻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나까무라 하지메역을 중역한 법정스님은 부지런함으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부지런함은 생명의 길이요 게으름은 죽음의 길이다.”(Dhp21)라 하였다. 압빠마다에 대하여 부지런함이라 하였는데 이는 사띠를 뜻하는 압빠마다의 본래의 의미를 다 표현한 단어는 아니다.

 

거해스님은 압빠마다에 대하여 마음집중으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마음 집중은 죽음을 벗어나는 길 마음 집중이 되어 있지 않음은 죽음의 길” (Dhp21) 라 하였다. 사띠의 의미를 가진 압빠마다에 대하여 마음집중이라 한 것이다. 이는 원문과 매우 동떨어진 번역이다.

 

압빠마다와 사띠는 동의어

 

압빠마다는 초기경전에 무수하게 등장한다. 사띠의 의미로서 주로 사용된다. 이는 법구경에서 방일하지 않음을 기뻐하고 자신의 마음을 수호하라(Appamādaratā hotha ~ sacittam-anurakkhatha)” (Dhp327)  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다. 주석에 따르면 새김을 확립하고 주의 깊은 것에 기뻐함을 의미한다. “ (DhpA.IV.26) 라 하였다. 이에 대한 빠알리 주석문구는 “appamādo vuccati satiyā avippavāso”이다. 여기서 압빠마다는 ‘appamāda = satiyā avippavāsa’의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예를 들 수 있다. 숫따니빠따 용맹정진의 경(Sn2.10)’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Pamādo rajo pamādo

pamādānupatitā ajo,
Appamattena vijj
āya

abbahe sallamattanoti.

 

방일하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티끌이다.

티끌은 방일하는 것 때문에 생긴다.

방일하지 않고 명지로써

자기에게 박힌 화살을 뽑아라.”(stn334)

 

 

방일하는 것은 티끌이고 티끌은 방일에서 생겨난다고 하였다. 여기서 티끌(rajo) 이란 오염원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방일에 영향을 받아 연속적으로 생겨나는 방일을 말한다. 한번 사띠를 놓치면 연속해서 놓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불방일하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불방일의 의미는새김이 부재 하지 않은 조건으로 생겨나는 불방일(sati-avippavāsa-sakhāta)”(Prj.II.339) 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압빠마다와 사띠는 동의어라 볼 수 있다.

 

 

2015-11-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