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칠일(七日)이면 깨달을 수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1. 7. 18:47



칠일(七日)이면 깨달을 수 있을까?

 





깨달음에 출재가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깨달음은 요원한 것일까? 출가하여 10, 20, 30년 아니 평생을 수행해도 깨달았다는 사람이 드물다고 한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7이면 된다고 하였다.

 

7일과 관련된 구절이 있다사띠빳타나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누구든지 이 네 가지 새김의 토대를 육개월, 오개월, 사개월, 삼개월, 이개월, 일개월, 반달 동안만이라도 이와 같이 닦으면, 아니, 수행승들이여, 누구든지 이 네 가지 새김의 토대를 칠일 동안만이라도 이와 같이 닦는다면, 지금 여기에서의 궁극적인 앎이나 집착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돌아오지 않는 경지라는 두 가지 열매 가운데 하나의 열매가 기대된다.”(M10)라 되어 있다.

 

맛지나니까야 사띠빳따나경에 실려 있는 문구를 보면 최단 7일이면 깨달음이 가능하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누구든지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토대를 칠 년 동안 이와 같이 닦으면라고 되어 있어서 7년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누구든지(yo hi ko ci)’라고 한 것은 주석에 따르면 어떤 비구든 비구니든 청신사든 청신녀든 다 포함하는 말이다.”(MA.i.301)라 하였다깨달음에 출재가의 구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후대에 삽입되었다고

 

여기서 깨달음에 대한 열매()에 대하여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궁극적인 앎(aññā)과 돌아오지 않는 경지(anāgāmitā)를 말한다. 아라한과 불환자이다. 사념처 수행을 하면 최단 7일 이내에 아라한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못되도 아나함이다. 이런 문구는 정형화 되어 있어서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정말 7일이면 깨달음이 가능한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Brm의 주석을 들어 육개월, 오개월, 사개월, 삼개월, 이개월, 일개월, 반달 동안만이라도라는 구절은 부처님께서 한 말이 아닌데 삽인된 것이다.”(245번 각주) 라 하였다. 여기서 Brm‘Buddhas Reden,  Majjiamanikaya.von Kurt Schmidt.’의 약어를 말한다. 독일어판 맛지마니까야를 말한다.

 

초불연 번역에서는 7일에 대한 언급이 없다. MDB에서도 각주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육개월 이하 7일이라는 문구는 정말 후대에 삽입 된 것일까?

 

상윳따니까야에도 사띠빳타나상윳따(S47)가 있다. 수 많은 경이 있는데 맛지나니까야 사띠빳타나경(M10)과 디가니까야 마하사띠빳타나경(D22)에서처럼 기간이 나와 있지 않다. 그 대신 M10 D22에서 볼 수 없는 풍부한 가르침이 실려 있다. 그 중에 인상적인 것 두 가지를 들라면 다음과 같다.

 

하나로 통하는 길

 

부처님이 베살리 근처 벨루가마까에서 우안거에 들었을 때 심한 질병에 걸렸다. 부처님은 어떻게 질병을 극복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세존께서는 그곳에서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면서 지치지 않고 그것을 견뎌내셨다.”(S47.9) 라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사념처 수행을 하면 질병도 극복 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질병을 극복한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아난다여, 어떻게 수행승이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지 남을 귀의처로 삼지말고, 가르침을 섬으로 삼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삼지 남을 귀의처로 삼지 않는가?”라고 말씀 하시면서 사념처를 설한다. 여기서 가르침을 섬으로 삼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삼는다는 것은 구분법을 말하는데 사향사과의 열반을 뜻한다.

 

부처님은 사념처를 닦는 것이 깨달음으로 이끄는 가장 빠른 길이라 하였다. 그래서 열반을 실현시키기 위한 하나로 통하는 길, , 네 가지 새김의 토대이다.”(S47.28) 라 하였다. 초불연에서는 유일한 길이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하나로 통하는 길이라는 것은 존재의 청정 하나로 통하는 길, 괴로움에서 벗어남 하나로 통하는 길, 열반의 깨달음 하나로 통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사념처가 없으면 정법(saddhamma)도 없다

 

사념처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열반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정법이 사라짐을 뜻한다. 이는 밧다와 아난다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밧다가 벗이여, 아난다여, 여래께서 완전한 열반에 드신 후에 정법이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고 그 조건은 무엇입니까?”(S47.22) 라고 물어 본다. 이에 아난다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Catunna kho āvuso, satipaṭṭhānāna abhāvitattā abahulīkatattā tathāgate parinibbute saddhammo na ciraṭṭhitiko hoti. Catukkañca āvuso satipaṭṭhānāna bhāvitattā bahulīkatattā tathāgate parinibbute saddhammo ciraṭṭhitiko hoti. 

 

[아난다]

벗이여, 네 가지 세김의 토대를 닦지 않고 익히지 않는 다면 여래가 완전한 열반에 드신 뒤에 정법은 오래 지속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네 가지 세김의 토대를 닦지 않고 익히면 여래가 완전한 열반에 드신 뒤에 정법은 오래 지속할 것 입니다.”(S47.22)

 

 

아난다는 사념처가 없으면 정법(saddhamma)도 사라질 것이라 하였다. 정법의 쇠퇴가 사념처를 닦고 익히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왜 사념처가 없으면 정법도 없을까?

 

정법시대란?

 

일반적으로 정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첫째,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이 있는 시대이다.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니까야' '아미담마'와 같은 빨리어 경전이 전해지고, 그 경전에 대한 주석서등 '교학'이 있으면 정법시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수행을 할 수 있는 '팔정도'가 있으면 정법시대이다.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을 말하고, 계정혜 삼학은 '알아차림'을 하는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말한다. 그러므로 팔정도와 위빠사나 수행이 있으면 정법시대라고 볼 수 있다.

 

셋째, 깨달음을 통하여 열반을 성취한 성자인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있으면 정법시대이다. 열반을 성취한 성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빠알리어경전과 위빠사나 수행이 함께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정법시대가 유지 된다는 것은 사향사과의 성자들이 출현하였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이는 빠알리 경전이 전승되고 팔정도를 실천하였을 때 가능함을 말한다. 특히 팔정도 중에서도 사념처를 닦고 익혔을 때 아홉가지 출세간법, 즉 사향사과와 열반의 실현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사념처가 없으면 정법도 없다. 정법이 사라지면 사향사과의 성자가 출현하지 않아 열반을 실현 되지 않는다. 다음 부처님이 출현할 때 까지 암흑시대가 되는 것이다.

 

바라문 셀라의 경우

 

사띠빳타나경에서처럼 7일이면 깨달을 수 있을까? 전재성님은 Brm을 근거로 하여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7일만에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경전에 실려 있다. 사념처라는 말은 없지만 일곱 이라는 숫자가 7일 만에 깨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숫따니빠따 셀라의 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a ta saraamāgamma

ito aṭṭhami cakkhuma,
Sattarattena bhagav
ā

dantambha tava sāsane.

 

[쎌라]

눈을 갖춘 님이시여, 당신께

귀의한지 오늘로써 여드레 되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레가 지나서

당신의 가르침에 길들여졌습니다. (stn570)

 

 

바라문 셀라는 삼백명의 제자를 데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셀라는 정진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아라한이 되고 나서 부처님께 찾아와 이와 같은 게송을 읊은 것이다.

 

여기서 이레가 지나서 당신의 가르침에 길들여졌습니다.(Sattarattena bhagavā  dantambha tava sāsane.)”라 하였다. 여기서 이레(Satta), 7일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깨달았을까? 이는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조건이 성숙되었기 때문이라 본다. 셀라는 바라문으로서 학문을 닦고 수행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7일만에 깨달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해탈과 열반의 기쁨

 

칠일 만에 깨달았다는 이야기는 테리가타(장로니게)에서도 보인다.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에 따르면 사마비구니와 아노빠마비구니에 대한 게송이 실려 있다.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Paṇṇavīsativassāni yato pabbajitāya me 
N
ā÷ijānāmi cittassa sama laddha kudācana.

 

Aladdhā cetaso santi citte avasavattinī 
Tato sa
vegamāpādi saritvā jinasāsana.

 

Bahūhi dukkhadhammehi appamāsaratāya me 
Ta
hakkhayo anuppatto kata buddhassa sāsana 
me sattam
ī ratti yato tahā visositāti.

 


출가한지 25년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아직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였다.

 

마음의 평화, 마음을 다스림,

오랜 세월 찾아 헤맸으나 얻을 수 없었다.

그때 언뜻 승리자(부처님)의 말씀

떠올리고는 전율하였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정적으로 분투노력하였다.

 

그리고 갈애를 부수어 버렸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성취되었다.

오늘은 갈애를 끊은 지 7일째 날.

 

(테리가타 39-41, sāmā-다른 사마 비구니)

 

 

2.

Ucce kule aha jātā bahuvitte mahaddhane 
Va
ṇṇarūpena sampannā dhītā meghassa atrajā.

 

152. Patthitā rājaputtehi seṭṭhiputtehi bhijjhitā1 
Pitu me pesay
ī dūta detha mayha anopama. 

Yattaka tulitā esā tuyha dhītā anūpamā. 
Tato a
ṭṭhagua dassa hirañña ratanāni ca.

 

Sāha disvāna sambuddha lokajeṭṭha anuttara 
Tassa p
ādāni vanditvā ekamanta upāvisi.

 

So me dhammamadesesi anukampāya gotamo 
Nisinn
ā āsane tasmi phussayi tatiya phala.

 

Tato kesāni chetvāna pabbaji anagāriya 
Ajja me sattami ratti yato ta
hā visositā.

 


나는 상당한 재산과 부를 가진 지체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름다운 용모의 나는 금융업자 맛자의 딸이었다.

 

왕자들도 나와 사귀기를 열망하였고,

부잣집 자제들도 나를 갈망하였다.

한 사람은 아버지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였다.

아노빠마를 주십시오. 그러면 그녀 몸무게의

여덟 배의 금과 보석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세상에서 으뜸이며 능가할 자 없는

온전히 깨달으신 분을 뵙고

그분의 발에 절을 하고 한쪽에 앉았다.

 

부처님은 자비심으로 가르침을 설해 주셨다.

그 자리에서 나는 제3과위를 얻었다.

그리고 머리를 삭발하고 출가하였다.

오늘이 갈애를 소멸한지 7일째 되는 밤이다.

 

(테리가타 151-156, anopamā-아노빠마 비구니)

 

 

두 게송을 보면 공통적으로 ‘7일째 날(sattami)’라 하였다. 또 공통적으로 갈애의 소멸(tahā visositā)’이라 하였다. 이는 사성제 멸성제를 연상시킨다. 멸성제를 보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S56.11)라 되어 있다

 

깨달았는지 깨닫지 못하였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본인 자신이 안다. 자신에게 번뇌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자신이 잘 안다. 번뇌가 다 소멸되었다면 해탈지견이 생겨나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안다고 표현 되어 있다.

 

각자 능력에 따라

 

맛지마니까야 사띠빳타나경에서 칠일만에 최단 7일만에 깨달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후대 삽입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사띠빳타나상윳따에서는 기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에도 맛지마니까야와 디가니까야에서는 최장 7년 최단 최단 7일이 언급되어 있어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각자 능력에 따라 다른 것이라 볼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경전에 7일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며 능력에 따라 7일만에 깨닫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2015-11-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