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신출가(身出家)와 심출가(心出家)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1. 8. 11:56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신출가(身出家)와 심출가(心出家)

 

 

 

 

어느 케이블 채널에서

 

사람들은 뭔가 잘 안 될 때 머리 깍고 중이나 될까?’ 라고 생각한다. 하다 하다 안되면 최후의 수단으로 산에 들어 가 사는 것도 생각한다. 그렇다면 산에 사는 사람들은 패배자, 루저, 무지랭이들이나 사는 곳일까? 아쉽게도 그런 인식이 있는 것 같다.

 

어느 케이블 채널에서 미래를 운명감정사에 대한 프로를 보았다. 모습만 보고도 과거의 행적은 물론 미래도 예측할 수 있는 용하다는 점쟁이 10명에 대한 프로이었다. 어느 점쟁이는 한 걸인을 보고서 이 사람은 절에 가서 있어야 할 사람인데 구걸 하고 있네요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절과 절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스님이 된다는 것은 능력 없는 자들의 집합소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은둔의 불교

 

절에 사는 사람, 산에 사는 사람은 인생패배자들일까? 가다 가다 갈데 없어서 절에 가는 것일까? 만일 이렇게 본다면 절에서 홀로 사는 것은 현실도피나 다름 없다. 세상이 싫어 세상을 떠난 자들이 다시 세상에 돌아와 세상사람들을 위한 일을 할 리 없을 것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출가 하면 세상을 등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도를 닦는 다는 명목으로 세상과 완전히 단절 된 채 깊은 산속에서 은둔자처럼 살아 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는 부처님 당시 출가와 다른 것이다. 부처님 당시 출가는 깊은 산이 아니었다. 마을과 가까운 숲이었다. 마을에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숲이었다. 왜 이런 곳에서 살았을까? 그것은 탁발하기 쉽기 때문이다.

 

출가하면 인연을 끊는 것이 보통이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나 애착을 버리고 홀로 가는 것이 출가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출가목적을 달성해야 할 것이다. 출가의 목적은 어떤 것일까? 이는 존자 쑨다리까 바라드와자는 구족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홀로 떨어져서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양가의 자제들이 그러기 위해 올바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 위없이 청정한 삶을 현세에서 스스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 (Sn3.4) 와 같은 정형구에서 알 수 있다.

 

만일 출가 목적 없이, 뚜렷한 출가 이유 없이 집을 떠났다면 현실도피가 되기 쉽다. 산에서 사는 자연인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은둔의 불교가 되기 쉽다.

 

몸은 출가 하였지만

 

사람들은 함께 살지만 결국 홀로 가게 되어 있다. 이 세상에 올 때 홀로 온 것처럼 갈 때도 홀로 가는 것이다. 홀로 가는 인생 여정에서 갖가지 애착이 생겨난다. 그래서 인연을 맺고 살아 간다. 그러나 인연이 족쇄로 작용하였을 때 매이는 삶을 살게 된다. 이럴 때 대자유를 갈망한다. 이렇게 대자유를 찾아 출가를 한다. 그러나 몸은 출가 하였지만 마음은 세속에 있다면 진정한 출가라 볼 수 없다. 그래서 숫따니빠따 무소의 뿔경(Sn1.3)’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Dussagahā pabbajitāpi eke
Atho gaha
ṭṭhā gharamāvasantā,
Appossukko paraputtesu hutv
ā
Eko care khaggavis
āakappo.

 

어떤 자들은 출가해도 섭수가 어렵고,

가정에서 사는 재가자와 같으니,

다른 사람들의 자식에게 관심을 두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stn43)

 

 

이 게송을 보면 ()출가자를 말하는 것 같다. 몸만 출가한 자를 말한다. 마음은 세상에 가 있는 것이다.

 

이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왜 세상에 미련을 두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왕궁의 생활에 혐오를 느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왕이 있었는데 대신들도 따라서 출가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몸은 출가하였어도 그렇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자들은 출가해도 섭수가 어렵고, 가정에서 사는 재가자와 같으니라 한 것이다.

 

네 가지 출가가 있는데

 

출가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크게 신출가와 심출가로 나뉜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네 가지가 있다.

 

 

1) 신심구출가(身心具出家)

몸과 마음이 함께 출가하는 것.

 

2) 신출가 심불출가(身出家 心不出家)

몸은 출가했어도 마음은 출가한 게 아닌 것.

스님들 중에도 왜 출가했는지 그 자각을 못하고 갈등하는 스님들.

 

3) 신재가 심출가(身在家 心出家)

몸은 재가 생활을 해도 마음은 스님들보다 더 깊은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

 

4) 신심구불출가(身心具不出家)

마음과 몸 둘 다 출가하지 못한 것.

세속에서 살면서 가치, 의미를 생각 못하고 하루하루 세월 보내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

 

 

네 가지 출가를 보면 반드시 삭발하고 승복을 입는 것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몸은 출가 하였어도 마음은 세속에 있다면 신출가 심불출가(身出家 心不出家)’가 될 것이다. 비록 유발과 속복을 입고 살아도 가르침을 실천하며 산다면 신재가 심출가(身在家 心出家)’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불자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을 살고 있다. 세상에 살며 가르침을 접하지도 실천하지도 않는 삶이다. 이를 신심구불출가(身心具不出家)’라 하였다.

 

재가자가 출가자가 되고, 출가자가 재가자가 되고

 

초기경전은 출가자들만을 위한 가르침일까? 경에서 빅카웨(bhikkhave: 비구들이여)”라고 부르는 말이 나온다 하여 비구들만의 가르침일까? 만일 출가자들만을 위한 가르침이라면 재가자들에게는 금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율장에 대하여 재가자가 보아서는 안되는 금서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

 

초기경전은 누구나 읽을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부대중, 즉 비구와 비구니와 청신사와 청신녀에 대한 가르침이다. 만일 출가자들만을 위한 가르침이라면 동방의 성서라 불리우는 법구경과 원음이 실려 있는 숫따니빠다는 재가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가르침일 수 있다. 전세계인들이 법구경과 숫따니빠따를 즐겨 읽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보편적임을 말한다.

 

부처님이 비록 출가수행승들을 위하여 주로 가르침을 펼쳤지만 재가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출가자가 재가자로부터 나온 다는 사실이다. 출가자가 외계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출가자가 나오는 것이다.

 

한번 출가하면 영원히 출가자로 사는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도중에 환속하는 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스님들의 경우 구족계를 받고 십년이 지나면 절반으로 줄어 들고, 또 십년이 지나면 또 절반으로 줄어 든다고 하였다. 계행을 지키기 힘들면 환속하는 것이다.

 

출가자에게도 제행무상의 법칙이 적용된다. 재가자가 출가자가 되고, 또 출가자가 재가자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경에서 빅카웨(bhikkhave: 비구들이여)”라 하였다 하여 반드시 출가자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혼자서 가라 하였는데

 

재가자가 출가자가 되고 출가자가 재가자가 되는 현실에서 가르침에 출재가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수 많은 가르침 중에 숫따니빠따 무소의 뿔의 경을 보면 출재가 구분없이 공감한다. 비록 재가의 삶을 사는 자일지라도 가르침을 접함에 따라 청정해짐을 느낀다. 그래서 매일 읽고 때로 암송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소의 뿔의 경을 보면 후렴구가 있다. 그것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ko care khaggavisāakappo)”라는 말이다. 이 문구를 접하면 고독한 수행자를 연상케 한다. 세상과 모든 인연을 끊고 홀러 사는 무소처럼 앞길을 뚜벅뚜벅 걷는 고독한 수행자를 떠 올리게 한다.

 

혼자서 가라고 하였을 때 이를 오해 할 수도 있다. 오로지 숲속에서 또는 산에서 홀로 사는 은둔자를 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경을 보면 교제가 있으면 애착이 생기고”(stn36) 라 하여 애착으로 인한 괴로움이 생겨난다고 하였는데 이는 홀로 사는 수행자,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수행자로 오해의 소지가 있다. 과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 하였을 때 이를 소승이라 볼 수 있을까?

 

부처님은 어리석은 자를 사귀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무소의 뿔의 경에서도 현명하고 성숙한 벗을 얻지 못한다면,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stn46) 라 하였다. 훌륭하거나 비슷한 친구를 사귀되, 이런 벗을 만나지 못하면 허물없음을 즐기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stn47)라고 하였다. 자신과 동등하거나 자신보다 나은 자를 친구로 하여 사귀라는 말이다.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할까? 그것은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이다. 단지 산에서 나홀로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성장을 위해서 친구를 가려 사귀라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반드시 출가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사는 유발자에게도 적용된다. 자신보다 동등하거나 나은 자와 교제함으로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해 하기 쉬운 말 혼자서 가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말은 빠알리어 Eko care khaggavisāakappo”를 번역한 것이다. 가장 오해 하기 쉬운 말이 혼자서 가라라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주석을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Eko care khaggavisāakappo: 이 구절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다. 카가비사나(khaggavisāa)에 대해서는 Prj.II.65에서는 무소(=코뿔소)라는 동물의 뿔(khaggamigasiga)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칵가(khagga)는 원래는 칼이라는 뜻으로 무소라고 쓰여진 것은 후기의 빠알리문헌(Jat.IV.497, 532, 578)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것이다.

 

Nidd.II.248에서는 칵가비싸나깝뽀(khaggavisāakappo)에 대하여 무소의 뿔이 동반자가 없이 홀로인 것처럼,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이도 그와 같이라고 주석을 달고 있다. 파우스뵐이나 하레는 그러한 주석에 의문을 표시하고 칵가비싸나깝뽀를 단순히 ‘[하나의 뿔이 달린] 무소처럼이라고 해석을 했다.

 

자야빅끄라마도 그것이 무소의 뿔이 아니라 동물을 지칭한다고 말했으나 그의 Jst.15에서는 무소의 외뿔이라고 번역했다. 노만은 God.146에서 인도의 무소는 독특하게 하나의 뿔을 가지고 있어서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라고 번역을 택해도 무방하다고 보고 있다.

 

(1332번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고대주석가와 현대주석가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이는 무소라는 동물을 고독한 수행자로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다.

 

왜 고독한 수행자인가? 그것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기 때문이다. 욕망과 분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오욕락이다. 눈이나 귀 등 오욕락을 말한다. 또 세상사람들은 식욕, 성욕,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과 같은 세속적인 오욕락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수행자는 두 개의 오욕락을 떠났다. 그래서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살기 때문에 고독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마음에 맞는 동료, 자신과 동등하거나 나은 자를 만나면 벗을 할 수 있다. 그러지 않았을 경우 홀로 가는 것이다.

 

혼자서 가라의 진정한 의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출가자나 재가자나 고독한 것이다. 그래서 동등하거나 나은 자가 없다면 홀로 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산에 들어가 은둔하며 자연인처럼 살라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떠나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살고 있지만 탁발에 의존하는 것처럼 세상을 완전히 떠나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가지만 은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혼자서 가라라고 하였을 때 가라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짜레(care)걸어가라.’라고 번역할 수 있으나 Prj.II.65에 보면, ‘행하라, 삶을 실천하라.’라는 뜻임을 알 수 있는데, 여덟 가지의 삶이 있다:

 

1) 네 가지 행주좌와에서 위의를 지키는 삶의 실천(위의행)

2) 감각능력을 수호하는 삶의 실천(처행)

3) 네 가지 새김의 토대를 닦는 삶의 실천(염행)

4) 네 가지 선정에서 집중을 닦는 삶의 실천(정행)

5)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한 앎의 삶의 실천(지행)

6) 네 가지 거룩한 길(四向)을 닦는 삶의 실천(도행)

7) 네 가지 수행자의 경지(四果)를 닦는 삶의 실천(성취행)

8) 모든 중생을 유익하게 하는 삶의 실천(이세간행)

 

(1332번 각주, 전재성님)

 

 

여덟 가지 사항을 보면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누구나 실천해야 할 것들이다. 그래서 “Eko care khaggavisāakappo”라 하였을 때 가라는 뜻의 care, Carati‘walks or roams about’의 뜻이지만 또 한편으로 ‘behaves; practises; performs’의 뜻이다. 실천의 의미가 강한 것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의 길을 갈 때 마치 무소가 외뿔을 가지고 오로지 앞으로만 가는 것과 같다. 이는 다름 아닌 실천이다. 그 실천이라는 것이 여덟 가지라 하였다. 이는 사성제등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이다.

 

여덟 번째 항을 보면 모든 중생을 유익하게 하는 삶의 실천(이세간행)”이라 하였다. 이는 대승에서 회향하는 것과 같다. 초기불교가 먼저 나왔으므로 대승에서 말하는 회향이라는 말의 오리지널 버전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불교와 테라와다불교를 소승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한국불교가 소승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요익중생도 실천하지 않는 은둔자의 불교라고 볼 수 있다.

  

인터넷불사가 많을수록

 

인터넷의 발달로 사실상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공간이 무너졌다. 더구나 손안의컴퓨터 스마트폰의 보급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기 더 쉬워졌다. 깊은 산중으로 시간을 내서 선지식을 찾아 가서 가르침을 들을 수도 있지만 초분을 다투며 살아 가는 현대인들에게, 시간이 돈인 세상에서 사이버공간을 활용하면 매우 효과적이다. 그래서 인터넷으로도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고 주옥 같은 가르침을 공유할 수 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도 사이버세계에서 가능한 것이다.

 

절이라고 하여 반드시 기와집이 있는 전통건축형식일 필요가 없다. 절이라고 하여 반드시 현실세계에 있으리라는 법이 없다. 현실세계와 사이버세계를 넘나들며 사는 시대에 사이버상에서도 절이 있을 수 있다.

 

하나의 불교사이트는 모두 절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돈이 드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불사이다. 또 반드시 출가자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심출가자, 즉 마음으로 출가한 자라도 불사를 할 수 있다. 인터넷불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부처님 원음은 멀리 퍼져 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세간행(利世間行), 즉 모든 중생을 유익하게 하는 삶의 실천이 아닐까?

 

 

 

2015-11-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