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성철스님 백일법문 서문을 보면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1. 10. 18:36

 

성철스님 백일법문 서문을 보면

 

백일법문 서문에서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보면 실참수행을 강조 하고 있다. 그럼에도 말로서 법문을 하였다. 이에 불교의 근본을 이론과 언설을 가지고 이렇게도 설명하고 저렇게도 설명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니, 이 법문이 선문의 골수가 아닌 줄 알고 들어야 합니다.”라 하였다. 깨달음은 말과 언어로서 이룰 수 없음을 말한다.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을 하는 것에 대하여 선가의 본분을 버리고 이론과 언설로서 불교의 근본 뜻을 말해보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말이나 언어는 방편에 지나지 않다는 말이다. 진리에 대하여 또는 깨달음에 대하여 아무리 말이나 언어로 설명해 보았자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들과 역대의 모든 조사(祖師)스님들이 자기 성품, 자기 마음을 깨쳐서 부처를 이루었지 절대신이나 언어문자에 의지해서 부처를 이룬(成佛)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 하였다.

 

성철스님은 백일법문 서문에서 언설과 이론만 가지고는 성불하지 못합니다.”라며 거듭강조한다. 그리고 팔만사천 법문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노정기(路程記)”라 하였다. 그럼에도 언어문자의 기록이 있기 때문에 불교를 알게 되고 마침내는 부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노정기에 의지하여 실제로 길을 가서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라 하여 언어와 문자의 필요성도 강조 하였다.

 

경전탐구만 하면

 

성철스님의 법문을 보면 실제로 수행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언어와 문자의 필요성을 말한다. 아무리 깨달았어도 표현을 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한편 또 다시 만약 입으로는 말하나 마음에 깨침이 없는 사람은 곧 미친 사람과 같은 것이다.”라 하였다. 경전에만 천착하는 자를 미친자로 본 것이다.  법성. 자성은 일체 언설과 이론을 떠나 있으므로 언어문자로서 표현할 수 없고 말로서 형용할 수 없는데 어떻게 언어문자에 의지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성철스님은 언어와 문자에 매달려 있는 자에 대하여 바보같다고 하였다. 그래서바보는 달은 쳐다보지 아니하고 손가락 끝만 쳐다보고 달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라고 하였다. 경전탐구만 하는 자에 대하여 천년 만년 손가락 끝만 보아서는 달은 못보고 손가락 끝만 보는 바보와 같은 자라 하였다.

 

깨달음을 강조 하는 한국불교에서 성철스님과 같은 말을 많이 듣는다. 백날 이론서만 들여다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음을 말한다. 지금 당장 좌선하여 선정에 들어야만 진정한 맛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말에 동의 한다. 그렇다고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이 수행에 대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행자가 화를 내었을 때

 

만일 수행의 가르침만 있다면 성철스님의 지적이 많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다양하다. 수행의 가르침을 포함하여 근본 가르침, 계율에 대한 가르침, 자비실천의 가르침, 평등의 가르침, 현실직시의 가르침, 사띠수행의 가르침, 우정의 가르침, 재가자를 위한 가르침 등 매우 많다. 이와 같은 많은 가르침이 있음에도 오로지 깨달음 하나만을 위한 수행의 가르침만을 강조한다면 매우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수행의 가르침만 있고 교학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출가하여 강원에 가지 않고 오로지 선방에서만 공부한 스님이 있다. 스님에 따르면 수행을 통하여 번뇌가 소멸 되어 깨달음에 이루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수행만 있고 가르침을 몰랐을 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수행을 한 스님이 화를 내었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스님이 화를 내었을 때 이는 화를 낼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화를 내었다는 그 자체는 수행이 덜 된 것으로 본다. 왜 그런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행만 있었지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이다.

 

화를 내는 자는 상대방이 잘못을 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한마디로 맞을 짓을 했기 때문에 때린다라는 말과 같다. 이런 현상은 바른 견해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학적 지식이 없다 보니 자신의 견해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대하여 수 없이 말하였다.

 

모든 교육에 있어서 반복학습이 중요하다. 부처님 역시 니까야 도처에서 하던 말을 반복적으로 말씀 하시고 있다. 그래서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바른 견해를 갖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오로지 수행만 강조하고 언어와 문자로 된 경전을 등한시 한다면 자신의 견해만 내 세울 뿐이다. 그래서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만 한다. 경전을 근거로 하는 이야기에 대하여 하수로 본다.

 

사띠는 법에 대한 기억

 

초기경전을 읽어 보면 다양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선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언어와 문자에 의지하는 것에 대하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비유한 경우는 없다. 또 직접 수행을 해 보아야 맛을 알 수 있지 말이나 글로 아무리 헤아려 보았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식으로 쓰여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부처님은 말씀 하신 것을 잘 새겨 듣고 기억 해 두었다가 사유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사띠이다. 가르침을 잘 새겨 듣고 기억하는 것이다.

 

초기경전 도처에 사띠라는 말이 나온다. 숫따니빠따 무소의 뿔의 경에서 만일 어질고 단호한 동반자. 성숙한 벗을 얻는 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쁘게 새김을 확립하여 그와 함께 가라.”라는 게송이 있다. 여기서 새김이라는 말은 ‘satima’로서 이는 기억을 뜻한다. 사띠가 단순히 마음챙김이나 알아차림이 아니라 법에 대한 기억을 필수적으로 함을 말한다. 그렇다면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앗티까박가의 16경을 모두 외운 제자

 

우다나에 쏘나의 경(Ud57)’이 있다. 재가신자 쏘나가 있었는데 그는 출가자가 되고자 하였다.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가정생활이 걸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내 출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부처님이 계신곳과 먼 곳인 서부지방 아반띠에서 살았다.

 

어느 날 쏘나는 가부좌를 하고 명상하다가 부처님을 친견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래서 먼 길을 떠났다.

 

쏘나는 부처님을 친견하였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수행승이여, 그대가 가르침을 외워보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가르침이란 부처님이 설법한 내용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숫따니빠따를 말한다. 그래서 존자 쏘나는 세존께 대답하고 <앗티까박가> 16경의 전체를 외웠다.”(Ud57)라고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 당시에도 숫따니빠따를 제자들이 외고 있었음을 말한다. 부처님이 설한 것을 모두 잊지 않기 위하여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기며 수행에 활용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사띠가 기억으로서 일차적 의미에 해당된다.

 

쏘나눈 부처님 앞에서 숫따니빠따를 <앗티까박가> 16경을 모두 외웠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그러자 세존께서는 존자 쏘나가 독송이 끝나자 아주 기뻐했다.” (Ud57) 라고 되어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을 변방에서 구족계를 받은 제자가 모두 외웠을 때 흐뭇해 하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대는 <앗티까박가> 16경을 잘 배웠고 잘 숙고했고 잘 기억했다. 그대는 의미를 밝혀 주는 미묘하고 분명한 목소리를 지녔다.” (Ud57) 라고 칭찬해 주었다.

 

모든 공부는 외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구구단을 외듯이 학문을 할 때는 기본적인 가르침은 외워야 한다. 외국어도 외는 것부터 시작 된다. 하물며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과 같은 근본 가르침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경전과 함께 해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언어와 문자에 집착하는 것에 대하여 하수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교학이 없이 수행만 있다면

 

새는 양날개로 난다. 교학과 수행은 양날개와 같다. 교학이 없이 수행만 있다면 잘못된 견해를 가질 수 있다. 이는 수행의 방향이 잘못될 수 있음을 말한다. 방향이 잘못되어 있을 때 결과도 잘못 될 수밖에 없다. 바른 견해를 갖기 위해서는 가르침에 의지해야 한다. 정견을 가졌을 때 수행도 바른 방향을 가지게 된다.

 

깨달음 타령과 수행타령만 하는 곳이 한국불교이다. 그러다 보니 수행은 출가자만 하는 것으로 알고 깨달음은 신비화 되었다. 성철스님은 백일법문 서문에서 내가 항상 말하는 것인데 팔만대장경 속에서 불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얼음 속에서 불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라 하였다. 물론 팔만대장경에 무슨 잘못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언어문자에 집착되어 그러한 언어문자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죄가 있을 뿐이라 하였다. 언어와 문자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에서는 사교입선의 선종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한다.

 

가르침은 다양하다

 

선종에서는 깨달음에 대하여 언어와 문자로는 알 수 없고 뜻과 마음으로만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왜 이렇게 강조하는 것일까? 선종에서는 내가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이 수행이라 하였다. 그래서 내가 부처임을 증명하기만 되는 것이다. 그런 수행에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은 얼음 속에서 불을 찾는 것과 같은 것이 될 수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수행의 가르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계율에 대한 가르침, 자비실천의 가르침, 평등의 가르침, 현실직시의 가르침, 사띠수행의 가르침, 우정의 가르침, 재가자를 위한 가르침 등 매우 다양하다. 그런 가르침 안에서 불자들은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을 찾고 지혜를 얻는다.

 

 

 

2015-11-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