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금강석처럼 단단한 지혜로 벼락이 내려치듯이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1. 13. 11:49

 

금강석처럼 단단한 지혜로 벼락이 내려치듯이

 

 

 

금강(金剛)과 능단(能斷)

 

금강경은 한국불교에서 의지하는 소의경전이다. 불교인들의 교과서와 같은 금강경의 원래 명칭은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能斷金剛般若波羅密多經)’이다. 이에 대하여 불교신문에서는 금강석이 능히 모든 것을 끊을 수 있음과 같이 완벽한 지혜인 반야의 지혜로 번뇌를 끊고 피안에 이를 수 있음을 설한 경전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무비스님의 금강경 강의에 따르면 금강경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최초로 번역한 구마라집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이라 하였고, 현장은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密經)’이라 하였다. 또 산스크리트본은 ‘Vajracchedika-Prajna-Paramita-Sutra’라 하였다. 그렇다면 금강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초기경전을 근거로 금강이라는 말과 끊음을 뜻하는 능단이라는 말의 뜻을 추적해 보았다.

 

전재성님의 금강경이 있다. 명칭은 범보대조 서장본에 의한 신역금강경이다. 산스크티어를 티벳어로 번역한 금강경을 말한다. 서문에 거룩한 금강으로 능단하는 자인 반야바라밀이라는 대승경을 시설합니다.”라 되어 있다. 이는 산스크리트어로 ārya vajracchedikā prajñāpārāmitā nāma mahāyāna sutra”를 말한다. 이를 한역하면 聖能所金剛般若波羅蜜經(성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이 된다. 금강과 능단이라는 말은 대체 어떤 관계가 있을까?

 

마음이 금강과 같은 사람

 

빠알리니까야에도 금강이라는 말이 보인다. 앙굿따라니까야와 맛지마니까야, 그리고 디가니까야에 금강이라는 말이 실려 있다. 먼저 앙굿따라니까야을 보면 부처님은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마음이 종기와 같은 사람, 마음이 번개와 같은 사람, 마음이 금강과 같은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금강과 같은 사람은 무엇을 말할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Katamo ca bhikkhave vajirūpamacitto puggalo: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āsavāna khayā anāsava cetovimutti paññāvimutti diṭṭheva dhamme saya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i. Seyyathāpi bhikkhave vajirassa natthi kiñci abhejja, mai vā pāsāo vā. Evameva kho bhikkhave idhekacco puggalo āsavāna khayā anāsava cetovimutti paññāvimutti diṭṭheva dhamme saya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ī. Aya vuccati bhikkhave vajirūpamacitto puggalo.

 

수행승들이여, 누가 마음이 금강과 같은 사람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번뇌를 부수고 번뇌 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현세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아 깨닫고 성취한다.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금강이 어떠한 보석이나 어떠한 돌도 부술 수 있는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번뇌를 부수고 번뇌 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현세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아 깨닫고 성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을 두고 금강과 같은 사람이라 한다.” (종기와 같은 사람의 경, A3.25)

 

 

경을 보면 금강과 같은 사람에 대하여 심해탈과 혜해탈을 성취한 자라 하였다. 번뇌를 부순자를 말한다. 그런데 번뇌를 부술 때 금강석이 다른 돌을 부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금강석이 가장 단단한 광석이기 때문이다. 이때 금강은 빠알리어로 ‘vajira’이다.

 

‘vajira’에 대하여 ‘diamond; a thunder-bolt’라 한다. ‘vajira’가 금강석을 뜻하는 다이아몬드의 뜻도 있지만 벼락이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능단금강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금강경에 대하여 금강석과 같은 단단한 지혜를 뜻하기도 하지만 삿된 견해를 부수는 벼락같은 지혜를 뜻하기도 한다.

 

금강석처럼 단단한 지혜로 벼락이 내려치듯이

 

흔들리지 않는 지혜, 깨지지 않는 지혜를 상징하는 말이 ‘vajira’이다. 그런데이 말이 사람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상윳따니까야 빅쿠니상윳따를 보면 수행녀 바지라(vajira)’를 말한다.

 

악마 빠삐만이 누가 이 뭇삶을 만들었는가? 뭇삶을 만드는 자는 어디에 있는가? 뭇삶은 어디에서 생겨나고 뭇삶은 어디로 사라지는가?”(S5.10) 라고 묻는다. 이에 수행녀 와지라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한다.

 

 

Kinnu sattoti paccesi

māradiṭṭhigatannu te, 
Suddhasa
khārapuñjoya

nayidha sattūpalabbhati.

 

[바지라]

“그대는 왜 뭇삶에 집착하는가?

악마여그대의 사견일 뿐,

그것은 단순한 형성의 집적이니

거기서 뭇삶을 찾지 못하네.

 

 

Yathā hi agasambhārā

hoti saddo rato iti, 
Eva
 khandhesu santesu

hoti sattoti sammuti.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은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

 

 

Dukkhameva hi sambhoti

dukkha tiṭṭhati veti ca, 
N
āññatra dukkhā sambhoti

nāññatra dukkhā nirujjhatīti.

 

괴로움만이 생겨나고

괴로움만이 머물다가 사라진다.

괴로움밖에 생겨나지 않으며

괴로움밖에 사라지지 않는다.(S5.10)

 

 

수행녀 바지라는 창조주를 가정한 질문에 반박하고 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단지 오온의 결합에 지나지 않은 것임에도 중생이니 또는 뭇삶이니 하는 명칭에 집착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실체도 없는 명칭에 집착하는 것에 대하여 삿된견해에 불과한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이처럼 오온에 실체를 부여 하는 삿된 견해에 대하여 마치 금강석처럼 단단한 지혜로 벼락이 내려치듯이 부수어 버렸다. 그래서 이름을 금강을 뜻하는 바지라(vajira)’ 라 하였을 것이다.

 

기둥도 떨게 만든다는 삿짜까

 

금강을 뜻하는 바지라라는 말이 들어간 또 하나의 경이 있다. 그것은 맛지마니까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M35)’이다. 자이나교도 삿짜까와 부처님과의 대론을 말한다.

 

경에 따르면 삿짜까는 기둥도 떨게 만든다고 하였다. 이는 삿짜까가 “무릇 수행자나 성직자로서 승가를 이끌고, 대중을 이끌고, 무리의 스승으로, 또한 거룩한 이,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자라고 인정되더라도 나와 토론하여 논쟁하면, 떨지 않고 전율하지 않고 크게 감동 받지 않고, 겨드랑이에 땀을 흘리지 않는 자를 보지 못했다. 내가 무심한 기둥에다가 말을 걸어 논쟁을 해도 나와 토론하여 논쟁하면, 기둥도 떨고 전율하고 크게 감동 받을 것인데, 하물며 인간의 존재이랴. (M35) 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과연 부처님과의 토론에서는 어떠했을까?

 

자신만만한 니간타교도(자이나교도) 삿짜까는 부처님과의 대론에서 오온에 대하여 자아가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많은 사람들도 그것을 말합니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자아나 영혼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신도 그렇게 본다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통치권의 예를 들어 지배력을 행사 할 수 없는 자아가 없음을 설명해 준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대는 ‘물질은 나의 자아이다.’고 말합니다. 그대에게 그 물질에 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어야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까? (M35) 라고 묻는다.

 

삿짜까는 침묵했다. 이에 부처님은 , 해명해 보십시오. 그대는 지금 침묵할 때가 아닙니다.”라며 다그치듯이 밀한다. 이어서 여래가 여법하게 세 번 질문할 때까지 답변하지 않으면,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터질 것입니다.”라 하였다. 세 번 질문해도 답을 하지 않았을 때 머리가 산산조각 날 것임을 경고 하는 것이다. 이는 삿된 견해를 부수기 위하여 한 말이다.

 

머리가 일곱 조각 날 것

 

머리가 일곱조각 날 것이라는 말은 정형구이다.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주로 삿된 견해를 부술 때 정형구로 사용되는 말이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금강저를 든 야차가 등장한다. 경에 따르면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Tena kho pana samaye vajirapāī yakkho āyasa vajira ādāya āditta sampajjalita sajotibhūta saccakassa nigaṇṭhaputtassa uparivehāsa hito hoti: " sacāya saccako nigaṇṭhaputto bhagavatā yāvatatiya sahadhammika pañha puṭṭho na byākarissati. Etthevassa sattadhā muddha phālessāmī"ti.

 

이때에 야차 바지라빠니가 불타고 불꽃이 이글거리고 빛을 방출하는 쇠로 된 금강저를 가지고 니간타의 교도 쌋짜까의 머리 위에 공중에서 서서 말하길 ‘악기베싸나여, 여래가 여법하게 세 번 질문했는데 답변하지 않으면, 내가 여기서 그대의 머리를 일곱 조각으로 터지게 할 것이다.(M35)

  

 

Saccaka

 

 

초기경전에서 금강저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는 āyasa vajira를 말한다. 그런데 이 금강저를 들고 있는 자에 대하여 바지라빠니(vajirapāī)’라 하였다. 이를 금강수(金剛手)’라 한다. 이는 금강의 손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더구나 무시무시한 형상을 한 야차이다. 이 야차는 신들의 제왕 제석천(Sakka)을 말한다. 금강수 바지라빠니는 디가니까야 암밧타의 경(D3)’에도 등장한다.

 

무아의 가르침으로

 

금강저를 든 무시무시한 형상의 바지라빠니는 불법을 수호하는 수호신이다. 부처님이 외도와 대론하여 삿된 견해를 부술 때 금강저를 들고 나타나 머리를 일곱조각으로 낼 것이라 경고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떤 방법으로 논파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M35)’에서는 문답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금강경에서 부처님과 수보리와의 문답식 대화와 내용이 다른 것이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악기베싸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물질은 나의 자아이다.’고 말합니다. 그대에게 그 물질에 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어야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까?

 

[삿짜까]

“존자 고따마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악기베싸나여, 잘 숙고하여 보십시오. 악기베싸나여, 잘 숙고하여 답변하십시오. 그대의 말은 앞은 뒤와 일치하지 않고 뒤는 앞과 일치하지 않습니다.(M35)

 

 

여기서 악기베싸나는 삿짜까에 대한 호칭이다. 부처님은 물질, 즉 몸에 대하여 지배력을 행사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자이나교도들은 물질이 내 것이라 하여 나의 자아라 하였다. 그런데 자아론을 주장하던 삿짜까가 부처님의 권한행사에 대한 질문에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모순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앞뒤가 맞지 않는 답이라 하였다. 부처님은 또 다시 삿짜까에게 묻는다.

 

 

[세존]

“악기베싸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물질은 영원합니까, 무상합니까?

 

[삿짜까]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입니까, 즐거운 것입니까?

 

[삿짜까]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입니까?

 

[삿짜까]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M35)

 

 

부처님은 문답식으로 무아상경을 설하고 있다. 무아상경은 부처님의 두 번째 설법으로 알려져 있다. 오비구가 무아상경을 듣고 아라한이 되어서 무아상경은 아라한이 되는 경으로 알려져 있다.

 

부처님은 물질에 대하여 영원한지를 묻는다. 이렇게 묻는 목적은 오온이 내것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올바른 지혜로써 관찰해야함을 말씀 하셨다. 이는 무아에 대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세상에 어떤 종교에서도 볼 수 없고 어떤 가르침에서 들을 수 없는 불교만의 독특한 부처님만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금강과 같고 벼락과도 같은 무아의 가르침으로 기둥도 떨게 만든다는 외도 삿짜까를 굴복 시켰다.

 

금강과도 가르침으로

 

빠알리니까야에도 금강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금강석처럼 단단한 것이고 또한 벼락처럼 삿된 견해를 부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앙굿따라니까야 종기와 같은 사람의 경(A3.25)’에서는 번뇌를 부수고 번뇌 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한 사람에 대하여 금강과도 같은 사람이라 하였다.

 

상윳따니까야 바지라의 경(S5.10)’에서는 금강을 뜻하는 수행녀 바지라의 입을 통해서 오온에 실체가 없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나온다.

 

디가니까야 암밧타의 경(D3)’에서는 금강수 야차가 금강저를 나타나는데 이는 바라문의 오만불손한 태생적 우월성을 부수는데 이용되었다.

 

맛지마니까야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M35)’에서는 자이나교도의 유아론을 부수는데 역시 금강수 야차가 금강저를 들고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초기경에 등장하는 금강이라는 말은 주로 부처님의 금강과 같은 가르침으로 벼락처럼 외도의 견해를 논파 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성자들의 제왕 지혜의 불 밝혀 섭수하셨네

 

자야망갈라가타 여섯 번째 게송이 삿짜까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외도의 삿된 견해를 마치 금강저로 머리를 일곱조각 내듯이 부수어 버린 것에 대한 찬탄이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Sacca vihāya  mati-saccaka-vāda-ketu      

Vādābhiropita-mana  ati-andhabhūta        

Paññā-padīpa-jalito  jitavā munindo          

Ta-tejasā  bhavatu  te  jaya-magalāni  

 

삿짜까가 진리를 버리고 진리에서 벗어난
논쟁에 맹목적으로 뛰어들었을 때,
성자들의 제왕 지혜의 불 밝혀 섭수하셨네.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

 

(자야망갈라가타 게송 6)

 

 

 

2015-11-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