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분노를 품고 있지 않은 욕설 “이 천민아(vasala)”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1. 14. 10:25


 

분노를 품고 있지 않은 욕설 이 천민아(vasala)”

 

 

 

야 쪼다야

 

입사 해서 몇 년 되지 않았을 때이다. 선배사원이 야 쪼다야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몹시 기분이 상했다. 좋은 말 놔두고 쪼다라니 너무 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 말을 늘 가슴에 품고 다녔다. 어느 날 동료에게 그 선배사원이 쪼다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이에 그 친구는 그 선배는 늘 그런 식으로 말해라는 것이었다.

 

어느 연예인이 있다. 개그맨 출신인 여자 연예인은 자식에게 늘 야 새끼야라한다고 하였다. 말할 때 마다 새끼라는 말이 입에 붙은 것이라 한다. 그렇다고 악의적으로 한 말은 아니라 하였다. 이름을 부르든지, 아들이면 아들, 딸이면 딸이라 부르든지 하면 될 것을 굳이 욕설 비슷하게 새끼야라 한 것은 왜 그런 것일까?

 

이 천민아(vasala)”

 

우다나에 삘린다밧차의 경(Ud28)’이 있다. 부처님당시 삘린다 밧차라는 빅쿠가 있었다. 그는 늘 수행승들을 부를 때 마다 이 천민아라고 욕설 비슷하게 불렀다. 이에 수행승들이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존자 삘린다 밧차는 수행승들을 이 천민아라고 부르고 돌아다닙니다.”라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삘린다 밧차를 불렀다. 부르고 나서 밧차여, 그대가 수행승들을 이 천민아라고 부르고 돌아다니는 것이 사실인가?”라며 물어 보았다. 밧차는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삘린다 밧차는 만나는 수행승들에게 왜 이 천민아라고 경멸적인 말을 하였을까? 이에 부처님은 삘린다 밧차의 전생을 숙고하였다. 그리고 수행승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mā kho tumhe bhikkhave Vacchassa bhikkhuno ujjhāyitvā, na bhikkhave Vaccho dosantaro bhikkhū vasalavādena samudācarati. Vacchassa bhikkhave bhikkhuno pañca jātisatāni abbokiṇṇāni brāhmaakule paccājātāni. So tassa vasalavādo dīgharatta samudāciṇṇo.  Tenāya Vaccho bhikkhū vasalavādena samudācaratī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밧차에게 화내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수행승들을 이 천민아라고 부르고 돌아다니지만 밧차는 분노를 품고 있지 않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 밧차는 계속해서 오백생을 바라문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랜 세월 이 천민아라고 말하며 돌아다녔다. 그래서 그가 수행승들을 이 천민아라고 말하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Pilindivacchasutta-삘린다밧차의 경, 우다나 Ud28, 전재성님역)

 

 

삘린다 밧차가 만나는 사람마다 이 천민아(vasala)”라고 한 것은 악의가 없는 것이라 하였다.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바라문 가문에서 무려 오백생을 살았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나오는 말이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악의가 없이 뱉은 말은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방을 싫어하거나 경멸하여 이 천민아라고 하였을 때 이는 분노의 마음에 기반한 것이다. 분노는 제거해야 할 오염원에 속하기 때문에 구업이 된다. 그러나 악의 없이 야 쪼다야라든가, “야 새끼야라고 말하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있음을 말한다.

 

숫따니빠따 천한 사람의 경(Sn1.7)’에서

 

천민을 뜻하는 빠알리어 vasala‘an outcast; a person of low birth’의 뜻이다. 카스트 바깥에 있어서 사성계급에도 들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을 뜻한다. 와살라는 문자적으로 ‘little man’의 의미이고, 기본적으로 더러운(foul)’ 사람이라는 뜻이다. Vasala가 들어간 문구를 보면 숫따니빠따 천한 사람의 경(Sn1.7)’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Kodhano upanābhi ca

pāpamakkhī ca yo naro, 
Vipannadi
ṭṭhi māyāvī

ta jaññā vasalo iti.

 

[세존]

화를 내고 원한을 품으며,

악독하고 시기심이 많고

소견이 그릇되어 속이기를 잘 한다면,

그를 천한 사람으로 여기십시오.” (stn116)

 

 

Vasala sutta

 

 

 

분노하면 천한 사람과도 같다는 것이다. 아무리 도를 많이 닦아 존경받는다고 하여도 화를 낸다면 불가촉천민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가촉천민이라 하여도 어떤 경우에서든지 화를 내지 않는다면 성자라 할 것이다. 그래서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인 것이 아니고, 태어나면서부터 바라문인 것도 아니오,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행위에 의해서 바라문도 되는 것이오.”(stn136) 라 하였다.

 

삘린다 밧차와 관련된 이야기가 법구경에도

 

숫따니빠따 천한 사람의 경에 따르면 천한 사람의 유형에 대하여 설명 되어 있다. 그 중에 자기를 칭찬하며, 타인을 경멸하며, 스스로 교만에 빠진다면, 그를 천한 사람으로 여기십시오.”(stn132) 라 하였다. 자만에 빠진 자는 모두 천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만에는 태생적 자만, 부자의 자만, 배움의 자만이 있다. 좋은 가문에 태어나 많이 배운 자가 가난하고 못 배운 자를 무시하였을 때 이는 태생적 자만, 부자의 자만, 배움의 자만에 따른 것이다. 이런 자들이 천한 자들이다. 그러나 악의가 없이 이 천민아라든가, “이 새끼야하였을 때는 예외이다. 삘린다 밧차와 관련된 이야기가 법구경에도 있다. 법구경 408번 게송이 그것이다.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kakkasa viññapani 

gira sacca udīraye, 
Y
āya nābhisaje kañci,

tam-aha brūmi brāhmaa.

 

거칠지 않고 교훈적인

진실한 말을 하므로

누구에게도 화내지 않는 님,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 (Dhp408)

 

 

 

바라문의 품(26)’에 있는 게송이다. 게송에서 화내지 않는 님이 바라문이라 하였다. 여기서 바라문이라 한 것은 부처님이 정통바라문을 재해석하여 아라한과 동급으로 본 것이다.

 

번뇌가 다한 아라한은 어떤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는다. 깨달은 자가 화를 내었다면 진정한 깨달음이라 볼 수 없다. 어느 유명선사가 자비의 분노로써 제자들을 다스렸다고 한다. 하지만 화를 낸 것임에 틀림 없다. 그렇게 본다면 그 선사는 초기불교적 입장에서 보았다면 탐진치가 소멸이 되어 있지 않아 깨달았다고 볼 수 없다.

 

인연담 삘린다 밧차와 관련된 이야기(Pilindavaccavatthu)

 

법구경 게송 408번에 대한 인연담이 있다. 우다나에 실려 있는 삘린다 밧차의 경을 원본으로 구성된 것이라 보여진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시가 설해진 데는 이와 같은 인연담이 있다 : DhpA.IV.181-182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라자가하 시의 벨루 숲에 계실 때, 장로 삘린다 밧차와 관련된 이야기(Pilindavaccavatthu)이다.

 

장로 삘린다 밧차는 , 놈아, 가라.’라는 말을 하면서 재가자나 출가자에게 욕설의 말을 건넸다. 그러자 하루는 많은 수행승들이 세존이시여, 존자 삘린다 밧차는 수행승들에게 욕설의 말을 건넵니다.’라고 일렀다.

 

부처님께서는 그를 불러서 확인한 결과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그 존자의 전생의 삶에 정신활동을 기울인 결과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수행승 삘린다 밧차를 나무라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삘린다 밧차는 안에 성냄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는 오백생 계속해서 바라문의 가문에서 태어나면서 오랜 세월 욕설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번뇌를 부순 자는 거칠고 잔인한 말은 사용하지 않고, 또한 남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나의 아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순전히 습관의 힘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로써 거칠지 않고 교훈적인 진실한 말을 하므로 누구에게도 화내지 않는 님,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흐름에 든 경지 등을 성취했다.

 

(법구경 408번에 대한 인연담, 장로 삘린다 밧차와 관련된 이야기(Pilindavaccavatthu), 전재성님역)

 

 


인연담을 보면 우다나 삘린다 밧차의 경을 근거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법구경 인연담이 이처럼 경전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연담을 보면 게송에 맞도록 이야기가 첨가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밧차가 이 천민아또눈 야 이놈아라고 하는 말은 모욕을 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태생에 따른 습관에서 나온 말이라 하였다. 내부에 분노가 표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삘린다 밧차는 분노가 소멸된 아라한이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해도 분노가 개입 되지 않은 말이라 볼 수 있다.

 

성직자(brāhmaa)와 수행자(samaa)와 수행승(bhikkhū)

 

우다나 삘린다 밧차의 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감흥어로 마무리 되어 있다.

 

 

Yamhi na māyā vasati na māno
Yo vītalobho amamo nirāso
Panunnakodho  abhinibbutatto
So brāhma
o so samao sa bhikkhū

 

[세존]

환상을 여의고 자만이 없고

탐착을 여의고 나의 것이 없고 바램을 여의고

분노를 여의고 자아가 지멸된다면,

그가 성직자이고 수행자이고 수행승이다.”(Ud28)

 

 

여기서 성직자이고 수행자이고 수행승이다.”라는 말이 있다. 성직자(brāhmaa)와 수행자(samaa)와 수행승(bhikkhū)을 동급으로 본 것이다. 공통적으로 환상, 자만, 탐착, 자아를 여읜 자라 하였다. 주석(UdA.195)에 따르면 성직자는 일체의 악을 제거했으므로 성직자이고, 수행자는 악을 제거 하고 평정하게 지냄으로 수행자라 하였고, 수행승은 일체의 오염을 파괴 했으므로 수행승이라 하였다.

 

성직자라 하면 빠알리어로 브라흐마나(brāhmaa)하는데 일반적으로 바라문교의 제관을 뜻한다. 수행자를 사마나(samaa)라 하는데 부처님 당시 유행하며 다닌 모든 출가자를 말한다. 육사외도의 출가자도 사마나이고 불교의 빅쿠도 사마나라 한다. 수행승이라 하면 빅쿠(bhikkhū)를 말하는데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 온 자를 말한다. 그런데 주석을 보면 빅쿠가 가장 수승하다. 일시적으로 번뇌를 소멸한 것이 아니라 번뇌라는 오염원의 뿌리가 완전히 뽑혔기 때문이다.

 

 

 

2015-11-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