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곡차를 마심으로 인한 해악 여섯 가지, 싱갈라까에 대한 훈계의 경(D31)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1. 23. 11:41

 

곡차를 마심으로 인한 해악 여섯 가지, 싱갈라까에 대한 훈계의 경(D31)

 

 

 

 

 

 

 

법우님들 모임방을 보면 종종 명구나 경구가 올라 온다. 유명인사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좋은 내용이 있음에도 동서양 성현들의 이야기나 유명인사들의 이야기를 올려 놓은 것이 약간은 불편하다. 불교법우님들의 모임이라면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어야 하나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는 말을 연상시킨다.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를 보면

 

성현이나 유명인들의 경구를 보면 부처님 가르침과 유사한 것이 많다.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라는 말이 있다. 이는 볼레즈 파스칼이 주장한 ‘기독교 변증론’을 말한다. 기독교의 변증론이란 기독교 사상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을 말한다.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보면 1세기 바울의 변증법, 가정법등을 말하는데 고대 그리스 문학을 활용하여 기독교사상을 해명한 것이다.

 

파스칼의 내기를 보면 신을 믿는 자는 신이 있을 때 천국에 가기 때문에 이득이라 하였다. 신을 믿지 않는 자는 신이 있을 경우 지옥에 가기 때문에 이득이 없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신을 믿는 것이 신을 믿지 않는 것 보다 이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파스칼의 내기는 이미 불교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M60)’을 보면 알 수 있다.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이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부처님 당시에 이 마을 저 마을로 유행하며 다니는 외도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스승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하였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누구의 가르침이 옳은지 커다란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이때 부처님은 믿을만한 스승이 없다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따르라고 하였다. 주로 단멸론적 견해를 부수기 위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파스칼의 내기와 유사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장자들이여, 이것에 대하여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된 뒤의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그러한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차라리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내세가 없다고 주장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비난받는다.

 

그러나 반대로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비난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실천하여 한 쪽만을 충족시키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버리고 있다.(M60)

 

 

부처님은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과 “저 세상이 있다면” 이렇게 두 가지로 말씀 하셨다. 저 세상이 있다는 것은 내세가 있고 윤회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저 세상이 없다면 내세도 윤회도 없다고 주장하는 단멸론적 견해를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단멸론적 견해가 매우 손해 보는 것임을 말한다. 단멸론자의 말을 믿고 내세를 부정하였을 경우 불운에 떨어질 것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파스칼의 내기는 1세기 바울의 변증법이라 하였다. 또 그리스 문학에서 유래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와 인도는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과 그리스문학에서 말하는 것과 내용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과연 어느 것이 먼저일까?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 당시는 고대 그리스 보다 역사적으로 앞서 있었다는 것이다.

 

재가자을 위한 가르침, 싱갈라까에 대한 훈계의 경(Sīgālakovadasuta, D31)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다양하다. 동서양 성현들이 말하였다는 경구 대부분이 빠알리니까야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재가자을 위한 가르침이라 알려져 있는 앙굿따라니까야를 보면 삶의 지혜를 위한 보고와 같다. 그렇다면 재가자를 위한 가르침으로 가장 적절한 경은 어떤 것일까? 아마 디가니까야에 있는 싱갈라까에 대한 훈계의 경(Sīgālakovadasuta, D31)’일 것이다.

 

재가불자의 교과서와 같은 싱갈라까의 경Sīgālakasutta)’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시갈라의 경(Sīgālasutta)’ 또는 싱갈라의 경(Sīngālasutta)’ 이라고도 한다. 한역으로는 선생경(대정1.70a-72c)’ 또는 호가라월육방예경또는 불설선생자경으로도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육방예경이라는 말이 익숙한다.

 

경은 장자의 아들 싱갈라까가 육방예경하는 것으로부터 시작 된다. 이는 장자의 아들 씽갈라까가 아침 일찍 일어나 라자가하 시에서 나와 옷을 적시고 머리를 적시고 합장하여 각 방향 곧, 동쪽방향, 남쪽방향, 서쪽방향, 북쪽방향, 아랫방향, 윗방향으로 절했다.”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을 부처님이 탁발하러 나갔다고 보았다.

 

부처님은 싱갈라까에게 왜 여섯방향으로 절하는지에 대하여 물었다. 이에 싱갈라까는 아버지가 임종할 떄 얘야, 방향을 향해 절을 해야 한다라고 말해서 절하고 있다고 하였다. 정확한 뜻을 모른 채 여섯 방향으로 절한 것이다.

 

왜 여섯 방향으로 절하라 하였을까?

 

그렇다면 아버지는 왜 아들에게 여섯 방향으로 절하라고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씽갈라까의 부친인 장자는 대부호였고, 그의 집에는 4억금의 재산이 있었다. 그는 부처님에게 완전히 귀의하여 재가의 제자로서 흐름에 든 님이 되었다. 그의 아내도 흐름에 든 님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신심이 없었다. 그래서 부모는 그에게 반복해서 너는 스승을 찾아라. 싸리뿟따와 마하목갈라나와 마하 깟싸빠와 팔십명의 대제자들을 찾아가라.’라고 충고했다.

 

그는 저에게는 부모님이 아시는 수행자에게 찾아갈 의무가 없습니다. 수행자들 앞에 가면 인사를 해야하고, 굽혀서 절을 해야하고, 등을 괴롭혀야 합니다. 무릎이 아프게 되고 땅바닥에 앉아야 합니다. 그렇게 앉으면 옷이 더러워지고 낡아집니다. 가까이 앉으면, 대화가 생겨나게 되고, 그러면 친교가 생겨나고, 그렇게 되면, 초대하여 의복과 탁발음식 등을 보시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득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아시는 수행자를 찾아 갈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살아 있는 동안 충고를 했지만 부모는 가르침을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죽음의 침상에 누워서 아들에게 훈계를 해야 마땅하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이러이러한 방향으로 예배하라.’라고 훈계를 해보자. 그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예배를 할 것이다. 스승의 제자들이 그를 보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가 이러이러한 방향으로 예배하라.’고 저에게 훈계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그에게 당신의 부친은 그러한 방향에 예배하지 않았다. 그것이 아니라 이러한 방향에 예배해야 한다.’라고 가르침을 설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덕을 알고 공덕행을 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불러 너는 아침 일찍 일어나 여섯 방향에 예배를 하라.’라고 말했다. 죽음의 침상에서 한 말은 평생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장자의 아들은 부친의 말을 기억하고 그것을 실천한 것이다.

(2316번 각주, 전재성님)

 

 

각주를 보면 어느 주석에 근거하였는지 밝혀 놓지 않았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싱갈라까가 육방예경을 하게 된 동기가 인연담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족제도를 하라 하지만

 

인연담을 보면 자식은 매우 현실적이어서 이익을 따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모가 부처님 가르침을 따른다 하여 자신도 따른다는 법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더구나 신행을 하면 불편한 점이 너무나 많다고 하였다. 수행자를 만나면 절을 해야 하고 보시를 해야 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방편으로서 육방에 절하기를 유언으로 남긴다. 수행자에게 절하는 것이 이득이 없어서 싫지만 아버지의 유언이기도 해서 아무 의미도 모르면서 여섯 방향에 절 한 것이다. 

 

인연담을 보면 가족제도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있다. 부모가 신심있는 불자라도 자녀가 따라 주지 않는 케이스에 해당된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종종 스님들 법문을 들어 보면 가족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자신만 절에 나올 것이 아니라 남편이나 아내, 또는 자녀와 함께 오라는 것이다. 다행이 부부가 함께 절에 다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자녀와 함께 절에 오는 것은 쉽지 않다. 자녀제도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런 현상은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들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육방예경을 시킨 것이다.

 

물질문명의 시대에

 

싱갈라까는 아무 의미도 모른 채 육방예경을 하였다. 이를 본 부처님은 장자의 아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에서는 그와 같이 여섯 방향으로 절을 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 가르침에 육방예경은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여섯 가지 대상에 대한 예경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긴 가르침을 설한다.

 

디가니까야에서 싱갈라까에 대한 훈계의 경을 보면 매우 길다. 21페이지에 달한다. 육방에 대한 것은 6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신 재가의 삶의 방식과 친구와 우정에 대한 가르침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렇게 본다면 싱갈까의 경은 재가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결정판이라 볼 수 있다.

 

싱갈라까에 대한 훈계의 경을 보면 재가의 삶에 대한 다양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다. 오늘날 그대로 적용해도 어긋나지 않다. 진리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함 없는 것이 입증된다.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과학의 시대라 하여 경전을 등한시 하고 무시한다면 매우 경솔한 처사라 본다.

 

천상에 나기 위한 가르침

 

싱갈라까는 부처님에게 어떻게 여섯 방향으로 절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이는 죽은 아버지가 바라던 질문이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여섯 방향에 대하여 예경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설명한다.

 

 

Yato kho gahapatiputta ariyasāvakassa cattāro kammakilesā pahīā honti, catūhi hānehi pāpakamma na karoti, cha ca bhogāna apāyamukhāni na sevati, so eva cuddasapāpakāpagato, chaddisāpaicchādī, ubhayalokavijayāya paipanno hoti, tassa aya ceva loko āraddho hoti paro ca loko. So kāyassa bhedā parammaraā sugati sagga loka upapajjati.

 

[세존]

장자의 아들이여, 고귀한 제자는 네 가지 행위의 오염을 제거하고, 네 가지 동기로 악업을 짓지 않고, 여섯 가지 재물의 파멸문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이와 같이 열 네 가지 악한 길을 떠나고, 여섯 방향을 수호하고, 두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길을 갑니다. 그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만족하게 됩니다. 그는 몸이 파괴되고 죽은 후에 좋은 곳, 천상세계에 태어납니다.”

 

(Sīgālakovadasuta -싱갈라까에 대한 훈계의 경, 디가니까야 D31, 전재성님역)

 

 

싱갈라까에 대한 훈계의 경을 보면 천상에 나기 위한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재가자의 삶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마치 암호문처럼 숫자를 이용하여 1)네 가지 행위의 오염(cattāro kammakilesā), 2)네 가지 동기(catūhi hānehi), 3)여섯 가지 재물의 파멸문(cha ca bhogāna apāyamukhāni), 4)열 네 가지 악한 길(cuddasapāpakāpagato), 5)여섯 방향을 수호(chaddisāpaicchādī), 6)두 세계를 정복 (ubhayalokavijayāya)가 있다고 하였.

 

네 가지 행위의 오염(cattāro kammakilesā)에 대하여

 

경에서는 여섯 가지 항목에 대하여 차례로 설명되어 있다. 가장 먼저 네 가지 행위의 오염(cattāro kammakilesā)’에 대한 것이다. 네 가지 행위는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Katamassa cattāro kammakilesā pahīā honti? Pāātipāto kho gahapatiputta kammakileso, adinnādāna kammakileso, kāmesu micchācāro kammakiloso, musāvādo kammakileso.

 

[세존]

어떠한 네 가지 행위의 오염을 제거한다는 것입니까? 장자의 아들이여,

1)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 행위의 오염이고,

2)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이 행위의 오염이고,

3)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행하는 것이 행위의 오염이고,

4) 거짓말을 하는 것이 행위의 오염입니다.”

 

(Sīgālakovadasuta -싱갈라까에 대한 훈계의 경, 디가니까야 D31, 전재성님역)

 

 

네 가지 행위의 오염을 보면 오계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빠져 있다. 그것은 음주에 대한 것이다. 왜 빠졌을까? 혹시 누군가는 이 네 가지를 보고서 환호할지 모른다. 재가자에 대한 삶의 지침에서 음주에 대한 것이 빠졌다고 하여 환호하면 큰 오산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가르침을 보면 음주에 대한 것만 별도로 다루어 매우 크게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취하는 것의 위험

 

여섯 가지 재물의 파멸문에서 첫 번째 항인 취하는 것의 위험에서 음주에 대한 항목이 나온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Cha kho'me gahapatiputta ādīnavā 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ānuyoge: sandiṭṭhikā dhanajānī, kalahappavaḍḍhanī, rogāna āyatana, akittisañjananī, kopīnanidasanī paññāyadubbalīkaraītveva chaṭṭha pada bhavati. Ime kho gahapatiputta cha ādīnavā 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ānuyoge.

 

[세존]

장자의 아들이여, 이와 같이 방일의 근본이 되는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가 있는 것에 취하는 것에는 여섯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1) 현세에서 재산을 손실하고.

2) 불화를 조장하고,

3) 질병의 소지가 되고,

4) 불명예를 낳고,

5) 뻔뻔스럽게 되고,

6) 지혜를 약화시키는

여섯 가지 경우가 생겨납니다.

장자의 아들이여, 이와 같이 방일의 근본이 되는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가 있는 것에 취하는 것에는 여섯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Sīgālakovadasuta -싱갈라까에 대한 훈계의 경, 디가니까야 D31, 전재성님역)

 

 

술을 마셔서는 안되는 여섯 가지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외에도 술을 마셔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출가자 뿐만 아니라 재가자에게도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는 불음주계를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이 평등함을 말한다.

 

출가수행자라 하여 허용해서는 안되고, 재가자라 하여 허용한다면 가르침에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부처님은 재가자를 위한 가르침에서도 일체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였다. 심지어 재가자 담미까를 위한 가르침에서는 술 마시는 것에 대하여 미친짓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또한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 이 가르침을 기뻐하는 재가자는 이 것은 마침내 미치게 하는 것임을 알고, 마시게 해도 안되고 마시는 것에 동의해서도 안된다.(stn398) 라 하였다.

 

술을 마심으로 인한 해악

 

술을 마심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여섯 번째 항 지혜를 약화시키는(paññāyadubbalīkaraītveva) 위험이 있다고 하였다. 술을 마시면 흐리멍덩 해지기 때문에 지혜가 나올 수 없다. 어리석은 상태임을 말한다. 이는 불선업을 짓는 것이다. 만약 그런 상태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악처에 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

 

술을 마시면 지혜가 약화 되는 것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업자성을 아는 지혜(kammassakatajanapañña)’가 약화 되는 것으로 보았다. 업이 자신의 주인을 아는 것이 업자성정견이다. 이를 세속적 정견이라 한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지혜가 약화 된다고 하였을 때 이는 세속적 정견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세속적 정견이란 보시를 하면 과보를 얻는다는 등의 가르침을 말한다.

 

술을 마시면 업자성을 아는 지혜가 약화된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길의 지혜(magapañña)’는 약화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왜냐하면 취기있는 것이 길을 획득한 자들의 내부로 들어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Smv.945) 라 하였다. 취한 상태가 이미 획득한 출세간적 지혜를 파괴 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깨달은 성자의 음주에 대하여 정당하게 보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부처님은 음주를 금하였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항을 보면 뻔뻔스럽게 되고(kopīnanidasanī)”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왜냐하면, 음부를 노출해도 창피함을 모르고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Smv.945)라고 설명하고 있다. 성기등을 가리는 옷을 제거한 상태에 대하여 뻔뻔스런 것이라 한다. 이렇게 술을 마시면 평소에 하지 않던 짓도 하게 된다. 그래서 술을 마시면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에 개가 된다고 하였을 것이다.

 

네 번째 항을 보면 불명예를 낳고(akittisañjananī)”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술을 먹고 어머니를 구타하고 아버지를 구타하고 다른 많은, 말해서는 안될 말을 말하고 행해서는 안될 일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비난을 얻거나 처벌을 받거나 손발이 잘리기도 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불명예를 얻는다.” (Smv.945)라 하였다. 술을 마시면 실수가 나게 마련이다. 아무리 조심한다 하지만 말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 지면 해서는 안될말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어떤 행위가 나올지 모른다. 그래서 부모를 구타하는 일까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물리는 것이 없는 세 가지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세 가지 물리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아무리 해도 만족을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잠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가 있는 것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성적은 교섭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A3.104)라 하였다. 슬리핑, 알코올, 섹스 이 세 가지는 해도 해도 물리지 않는 것이라 한다. 이 세 가지 중에 음주행위가 들어가 있다. 그래서일까 일상에서 술은 다반사와도 같다.

 

공부를 점검한다고

 

술로 인한 폐해는 이루 말 할 수 없다. 그래서 오계에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는 불음주계항목이 들어가 있다. 그것도 살생, 도둑질 등과 같이 중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살생을 하면 중죄를 짓듯이 마찬가지로 술을 마시면 중죄를 짓는 것이다.

 

술을 마시는 행위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불선업이다. 불선업을 많이 지으면 악처에 태어난다고 하였으므로 술을 매일 마시는 행위는 불선업을 짓게 되어 악처에 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불가에서 하는 말 중에 곡차라는 것이 있다. 이 곡차에 대하여 불자들 뿐만 아니라 타종교인도 아는 것에 놀랐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승가에 술을 마시는 행위가 만연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실제로 스님들은 술을 마시고 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어느 스님은 자신의 경계를 시험해 보고자 술도 마시고 창녀촌에도 가 본다고 하였다. 심지어 도둑질도 해 보았다는 스님도 있다. 오계를 어기는 행위를 한번씩 다 해 보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공부를 점검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스님이 자신의 경계를 시험한다고 하여 도둑질까지 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본다. 만일 그런 식이라면 소설가가 감옥이 어떤 곳인지 체험하기 위하여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체험하는 것과 같다. 이는 넌센스이다.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

 

자신의 공부를 점검하기 위하여 오계를 어기는 행위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오계를 어긴 것이 분명하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과 같다. 무명이 대죄라 하지만 알면서도 일부로 오계를 일부로 어겼다면 중죄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오계 어기는 것이 다반사인 것 같다.

 

오계는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자도 지켜야 할 도덕적 규범이다. 누가 강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계를 어기면 불선업을 쌓게 되어 그에 대한 과보를 받을 수밖에 없다. 오계를 어기는 자는 매우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오계를 어기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부처님 가르침이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2015-11-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