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아라한의 미소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1. 15. 15:04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아라한의 미소

 

 

 

 

 

 

길이 막힐 때

 

서울과 수도권에서 교통난은 극심하다. 토요일 오후 40키로미터를 가는데 세 시간 걸렸다. 왕복으로 여섯 시간 걸렸다. 이렇게 길바닥에서 시간을 허비 하다 보니 허무하게 시간만 낭비 되었다.

 

길이 막힐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동승한 사람이 있으면 대화라도 할 수 있다. 홀로 간다면 음악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히는 상황에서 음악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럴 경우 데이터 무제한의 스마트폰을 활용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이동 중에 스마트폰을 들었다. 모든 기능이 이라 이름으로 통합된 스마트폰은 매우 편리한 기기이다. 반면 디카나 MP3 등의 기기를 앱으로 하여 집어 넣기 때문에 산업을 축소 하는 좋지 않은 면도 있다. 그럼에도 스마트폰 하나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전화도 앱기능으로 격하된 스마트 폰은 손안에 작은 컴퓨터이다. 당연히 인터넷이 되기 때문에 데스크탑이나 노트북이 고스란히 옮겨 온 듯 하다. 그런 스마트폰에서 즐겨 보고 듣는 것이 있다. 그것은 유튜브이다.

 

온갖 쓰레기로 가득한 유튜브에서 잘 검색하면 볼만한 것, 들을 만한 것도 많다. 그런 것들 중에 인문학강좌법문이 있다. 이런 강좌는 마치 라디오 듣는 것처럼 들을 수 있다. 특히 운전중에 들으면 효과적이다. 길이 막혔을 때 들으면 더욱 더 효과적이다.

 

데이터 무제한의 스마트폰에서 일묵스님의 아비담마 강좌를 들었다. 봉녕사 학인 스님들을 대상으로 한 강좌이다. 여러 편 되는 강좌에서 마음의 구조에 대한 강좌를 들었다. 수 년 전 개인적으로 공부하였던아비담마 길라잡이를 복습 하는 듯 하였다.

 

스님들 법문을 들어 보면

 

스님들 법문을 들어 보면 마음이야기를 많이 한다. 마음이라는 말이 수도 없이 나오는 것을 보면 불교는 마음의 종교임에 틀림 없다. 더구나 불자들은 불교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마음공부한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법문을 들어 보아도 마음타령이다.

 

법사들은 마음에 대하여 얼마나 아는 것일까? 들어 보면 받아 적을 것이 없다. 거의 대부분 개인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경전을 근거로 한 법문도 아니고, 논장을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자신이 체험한 것이나 신도들로 들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수퍼히어로(Super hero)

 

일묵스님의 강좌를 들으면서 수퍼히어로(Super hero)’라는 말을 떠 올렸다. 수퍼히어로는 초영웅을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초인(超人)’이 될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 위버멘쉬를 말한다.

 

초인은 초인적인 힘을 발하 하는 자이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능력을 가졌을 때 초인이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정진하였을 것이다. 일묵스님의 아비담마 강좌를 들으면서 내공을 보았다. 그것도 학인 스님들에게 어렵다는 아비담마를 마치 피를 토하듯이강의 하는 것을 보고 초인을 떠 올린 것이다.

 

우리 사회에 초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향상된다. 초인이 나타났을 때 다른 사람들을 자극한다. 그래서 초인과 같이 되려 한다. 초인의 등장은 긴장관계를 형성하여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수퍼히어로가 많은 사회는 발전하게 되어 있다. 그런 초인의 모습을 일묵스님으로부터 보았다.

 

마음은 본래 빛나는 것

 

오랜 만에 아비담마 강좌를 들었다. 그래서 예전에 보았던 책을 다시 열어 보았다. 일묵스님의 강좌를 떠 올리면서 관련 부분을 보니 더 이해가 잘 되었다. 이전에는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졌던 마음의 구조에 대한 것이 이제 틀이 잡힌 것 같다. 그런 마음이란 무엇일까?

 

부처님은 마음은 빛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은 빛나지 않다. 왜 그럴까? 앙굿따라니까에 따르면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로 오염된다. Pabhassaramida bhikkhave citta, tañ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upakkiliṭṭhanti.”(A1.49) 라 하였다. 마음은 원래 빛나는 것이지만 번뇌로 오염 되었기 때문에 더러운 마음이 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에서 벗어난다.”(A1.49) 라 하였다. 번뇌에서 벗어나면 다시 빛날 것이라는 말이다.

 

빛나는 마음은 무엇일까? 이를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한마음(一心)’이나 불성등으로 하면 엉뚱한 길로 빠진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빛나는 마음이란 바왕가의 마음 (bhavagacitta, 有分心)’을 말한다. 여기서 바왕가의 마음은 윤회속에서 개인적인 삶의 연속성을 말한다. , 바왕가의 마음이란 모든 존재에게 있는 마음으로서 태어나면서 죽을 때 까지 한 존재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마음이다. 이는 논장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받아 적을 것이 없다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이 법문할 때 경전을 근거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 더구나 논장을 근거로 하는 법문을 더욱더 드물 것이다. 그럼에도 스님들은 마음타령하고 업타령한다.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은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다.

 

마음과 업의 원리에 대하여 밝혀 주는 가르침이 논장(Abhidhamma Pitaka)’이다. 그런 논장은 경장과 율장과 함께 삼장(Tipitaka)’이라 한다. 논장을 알았을 때 방향을 잡을 수 있다.

 

논장도 경장이나 율장 못지 않게 중요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빠알리 삼장은 부처님 당시부터 중시 되었고 빅쿠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 온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삼장을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스님들 법문을 보면 오로지 깨달음만 강조 하고 수행만 강조한다. 율장이나 논장이야기는 아예 보이지 않는다. 이는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서도 확인 된다.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에서 “언설과 이론만 가지고는 성불하지 못합니다.”라며 거듭 강조 하였다. 실참 수행을 해야 깨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말에 공감 하지만 마치 지도 없이 목적지를 찾아 가는 것 같다. 비록 성철스님이 팔만사천 법문에 대하여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노정기(路程記)”라 하였지만 또 한편으로 “법성. 자성은 일체 언설과 이론을 떠나 있으므로 언어문자로서 표현할 수 없고 말로서 형용할 수 없는데 어떻게 언어문자에 의지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과연 그럴까?

 

백일법문 어디에도 아비달마 구사론 등과 같은 논장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바보는 달은 쳐다보지 아니하고 손가락 끝만 쳐다보고 달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라 하는가 하면 “내가 항상 말하는 것인데 팔만대장경 속에서 불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얼음 속에서 불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라 하였다.

 

초기불교가 도입 되면서 경장 뿐만 아니라 논장도 도입 되었다. 특히 아비담마논장의 경우 마음의 구조를 밝혀 놓았기 때문에 정확한 지도 내지는 가이드와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선사들은 법문할 때 마다 마음타령하면서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다는 식의 일체유심조를 말한다. 그런 법문 어디에도 논장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스님들이 경장 공부는 물론 논장공부도 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법문 할 때는 늘 마음타령아니면 업타령이다. 법문이라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야기나 신변이야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받아 적을 것이 없다.

 

아비담마논장과 위빠사나수행과의 관계는?

 

아비담마논장을 접할 때 마다 늘 경탄하게 된다. 그것은 마음의 지도를 보는 듯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을 도표로 분류해 놓은 것을 보면 수행의 방향이 보인다. 만일 아비담마논장을 모르고 수행에 임한다면 마치 나침반 없이 길을 떠나는 것과 같다. 경장이 교과서와 가이드와 같은 것이라면, 아비담마논장은 경장을 설명해 주는 참고서와 갖고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참고서 역할로서 아비담마 논장은 쉽지 않다. 매우 어렵게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북방 아비달마구사론에 대하여 8년 배우는 공부라 하였다. 테라와다의 아비담마논장 역시 그만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러나 한글로 번역된 책이 나와 있고 더구나 강연하는 스님의 동영상이 있기 때문에 훨씬 단축할 수 있다.

 

아비담마논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마음에 대한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마음공부한다느니 하면서 마음, 마음 하면서 마음타령을 하지만 이제까지 논장을 근거로 하여 이야기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위빠사나수행처에 가면 아비담마논장에 실려 있는 마음의 구조에 대하여 알려 준다.

 

마음의 구조를 아는 것은 위빠사나수행에 매우 도움이 된다. 이는 수행을 왜 해야 하는지, 수행을 하면 어떤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에 대하여 명쾌하게 알려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빠사나수행과 아비담마논장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네 가지 마음이 있는데

 

위빠사나수행처에서 법문을 하면 마음에 대하여 네 가지로 설명한다. 그것은 선심(kusalā citta), 불선심(akusalā citta), 과보심(vipāka citta), 작용심(kiriya citta)이다. 일반사람들은 선심과 불선심 두 가지만 알고 있으나 아비담마 논장에서는 두 가지가 더 추가 되어 과보심작용심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초심자들은 여기서부터 막혀 버린다. 그래서 아비담마 논장을 열어 보아야 한다.

 

아비담마논장에서 과보심(vipāka citta)과 작용심(kiriya citta)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내생윤회와 관련이 있다. 여기서 과보심이라 한 것은 과보로만 나타나는 마음을 말한다. 행위를 하면 과보가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탐진치 등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나는 선심과 불선심과 다른 것이다. 오로지 과보로만 나타나는 마음으로서 내생에 영향을 마치는 마음이다. 만일 과보가 매우 중하다면 그에 합당하는 세계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작용심이라 무엇일까?

 

작용심이라 무엇일까? 이는 아라한의 마음이라 한다.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말한다. 아무런 과보를 내지 않는 마음을 말한다. 번뇌 다한 아라한은 어떤 과보도 생산하지 않는다. 선한 것이든 불선한 것이든 과보를 내지 않는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Yassa ca visatā natthi

chinnasotassa bhikkhuno,
Kicc
ākiccappahinassa

parilāho na vijjati.

 

윤회의 흐름을 끊은 수행승,

그에게는 집착이 없고,

선하거나 악한 모든 일이 끊어졌기 때문에

타오르는 번뇌가 없습니다.” (stn715)

 

 

숫따니빠따 날라까의 경(Sn3.11)’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성자의 삶에 대한 게송으로 성자는 어떤 과보도 생산해 내지 않는다. 번뇌가 다 끊어졌기 때문에 악한 과보는 물론 선한 과보도 내지 않는다. 이와 유사한 말이 육조단경에 불사선불사악’ 이라는 말이 있다 .

 

아라한이 선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선한 행위를 하긴 하지만 선한행위를 했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마치 금강경에서 무주상보시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육조단경이나 금강경은 빠알리니까야 보다 후대에 성립 되었기 때문에 오리지널 버전은 빠알리니까야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라한은 행위를 하긴 하되 재생의 원인이 되는 과보를 생산해 내지 않는다. 이것이 작용심(作用心)’이다. 이를 빠알리어로 끼리야 찟따(kiriya citta)’라 한다. 어떤 업도 쌓지 않고 작용만 하는 마음을 말한다.

 

화가 났을 때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면 업을 쌓는 것이 된다. 그러나 알아 차리면 화가 났네가 되어 업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알아차리면 법이 되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업이 된다.”는 말이 있다.

 

위빠사나 수행은 행위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알아 차리는 연습이다. 이는 다름 아닌 아라한이 되기 위한 연습이라 볼 수 있다.

 

원인없는 마음?

 

마음은 크게 선심, 불선심, 과보심, 작용심으로 나뉜다. 여기서 과보심과 작용심에 대하여 무기(abyākata: 無記)’라 한다. 왜 무기인가? 이는 원인 없이작용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원인 없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선심과 불선심은 원인을 가지고 있다. 연기법이 원인과 조건과 결과이듯이 원인 없는 마음은 없다. 불선심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기인한다. 그래서 욕망, 분노, 어리석음을 원인으로 하여 해로운 마음 불선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불선심이 있다면 선심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불선심의 원인과 반대 되는 것들이다. 즉 무탐, 무진, 무치가 원인이 되어 선심이 생겨 나는 것이다. 그런데 무기라 불리우는 과보심과 작용심은 아무런 원인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과보심과 작용심이 원인을 가지지 않는다(ahetu)’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이 두 가지 마음에 대하여 정확한 뜻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렵다.

 

초불연 아비담마길라잡이를 보면 원인없는 마음(ahetukacitta)’이 있다. 이런 번역은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하다. 여기서 원인없는이라는 말이 ‘ahetuka’이다. ‘원인없다라고 하였을 때 초심자는 어떤 원인을 없다고 하였을까?’ 라고 의문하게 된다.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법으로 알고 있는데 원인이 없다고 하니 헷갈리는 것이다. Ahetuka에 대하여 원인없는이라 하기 보다 원인을 가지지 않는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래야 헷갈리지 않는다.

 

원인이 없다고 하였을 때 이는 존재론적번역이다. 이는 있다없다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이다아니다로 번역하면 쉽게 이해 된다. 그래서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적 번역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원인없는 마음으로 할 것이 아니라 원인을 가지지 않는 마음또는 원인 없이 일어나는 마음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작용심은 어떤 과보도 생산해 내지 않는다. 그래서 아라한의 마음이라 한다. 그렇다면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에 어떻게 대처 해야 할까?

 

다섯 가지 느낌이 있는데

 

사람들은 행복을 이야기 한다. 그런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에 대하여 다른 말로 즐거움또는 재미라 할 것이다. 이는 빠알리어로 수카(sukha)’라 한다. 그런데 수카라는 말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는 것이다. 육체적 행복에서부터 정신적 행복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열반도 행복이라 하였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 수카의 의미는 눈과 귀 등 주로 다섯 가지 감감능력에 대한 것이다.

 

행복이라는 말에 수카가 있다. 그런데 아비담마논장에 따르면 행복에 대하여 두 개로 나눈다. 그것은 육체적 행복을 뜻하는 수카(sukha)’정신적 행복을 뜻하는 소마낫사(somanassa)’이다. 고통도 두 가지로 나뉜다. ‘육체적 고통을 뜻하는 둑카(dukkha)’정신적 고통을 뜻하는 도마낫사(domanassa)’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립적인 느낌우뻭카(upekkha)’라 한다. 그래서 아비담마 논장에서는 느낌에 대하여 육체적 행복, 정신적 행복,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중립적 느낌 이렇게 다섯 가지로 나뉜다.

 

아비담마 논장에서 느낌에 대하여 다섯 가지로 나눈 것은 경전적 근거를 갖는다. 상윳따니까야 백여덟 가지에 관한 법문의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느낌이란 무엇인가? 즐거운 느낌(sukha), 괴로운 느낌(dukkha), 만족한 느낌(somanassa), 불만의 느낌(domanassa), 평정한 느낌(upekkha)이다.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느낌이란 이런 것이다.”(S36.22, 전재성님역) 라 되어 있다.

 

욕계라는 감옥에서

 

위빠사나수행에서 느낌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감각접촉 이후에 나타나는 느낌을 알아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느낌에 휘둘리면 그대로 업을 짓게 된다. 그러나 느낌 단계에서 좋고 싫음을 알아 차렸을 때 업을 짓지 않는다. 여기서 알아차린다는 것은 단지 그렇네또는 그렇구나라며 그러려니하는 작용심을 말한다.

 

다섯 가지 느낌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특히 육체적 즐거움과 고통인 수카와 두카는 어떤 경우에 나타나는 것일까? 놀랍게도 수카와 둑카는 욕계의 54가지 마음 중에서 단 두 반 밖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과보심에서만 나타난다.

 

수카와 둑카는 과보심의 신식(身識)에서만 나타난다. 수카에 대하여 즐거움이 함께 하는 신식(sukhasāhagatakayaviññāa)이라는 과보심과, 둑카에 대해서는 고통이 함께하는 신식(dukkhasāhagatakayaviññāa)이라는 과보심을 말한다. ‘과 관련이 있다. 이는 안이비설신 중에서 신()을 말한다.

 

욕계에서 고통이 극대화 된 곳이 지옥일 것이다. 육체적으로 느끼는 고통 그자체의 괴로움만 있는 곳이다. 그래서 온몸으로 겪는 육체적 고통이 극대화 되었을 때 지옥과 같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또 욕계에서 즐거움이 극대화 된 곳이 천상일 것이다. 이는 온몸으로 겪는 육체적 즐거움이 극대화 되었을 때 천상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오로지 육체적 즐거움만 탐닉하면 어떻게 될까? 욕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식욕과 성욕으로 사는 범부들은 욕계라는 감옥에서 탈출 할 수 없다.

 

아름다운 마음(Sobhana citta) 여덟 가지

 

욕계에는 54가지 마음이 있다. 이 중 육체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은 과보심으로 나타나는데 단 54가지 중에 단 두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모두 정신적인 것들이다. 즉 정신적 행복을 뜻하는 소마낫사(somanassa)와 정신적 고통을 뜻하는 도마낫사(domanassa), 그리고 중립적인 느낌을 우뻭카(upekkha)이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이 가장 수승할까?

 

지금 여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이 있다. 이를 아비담마논장에서는 소바나찌따(Sobhana citta)’라 하였다. Sobhana라는 말은 ‘shining; beautiful’의 뜻이다. 빛나는 마음이라는 뜻도 있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마음, 빛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아비담마 논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로 소개 하고 있다.

 

 

1) somanassasāhagata ñāasampayuttam asakharikam eka

2) somanassasāhagata ñāasampayuttam sakharikam eka

3) somanassasāhagata āasampayuttam asakharikam eka

4) somanassasāhagata āasampayuttam sakharikam eka

5) upekkhasāhagata ñāasampayuttam asakharikam eka

6) upekkhasāhagata ñāasampayuttam sakharikam eka

7) upekkhasāhagata āasampayuttam asakharikam eka

8) upekkhasāhagata āasampayuttam sakharikam eka

 

 

이와 같은 여덟 가지 빠알리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1) 기쁨이 함께 하고, 지혜가 있고, 자극받지 않은 마음 하나.

2) 기쁨이 함께 하고, 지혜가 있고, 자극받은 마음 하나.

3) 기쁨이 함께 하고, 지혜가 없고, 자극받지 않은 마음 하나.

4) 기쁨이 함께 하고, 지혜가 없고, 자극받은 마음 하나.

5) 평온이 함께 하고, 지혜가 있고, 자극받지 않은 마음 하나.

6) 평온이 함께 하고, 지혜가 있고, 자극받은 마음 하나.

7) 평온이 함께 하고, 지혜가 없고, 자극받지 않은 마음 하나.

8) 평온이 함께 하고, 지혜가 없고, 자극받은 마음 하나.

 

 

1번항을 보면 “somanassasāhagata ñāasampayuttam asakharikam eka에 대하여 기쁨이 함께 하고, 지혜가 있고, 자극받지 않은 마음 하나라고 번역하였다.

 

somanassasāhagata에서 sasāhagata‘connected or endowed with’이다. 따라서 somanassasāhagata정신적 즐거움과 연결되어 있는이라는 뜻이 된다.

 

ñāasampayuttam에서 sampayutta‘associated; connected’의 뜻이다, 따라서 ñāasampayuttam지혜와 관련되어 있는이라는 뜻이 된다.

 

asakharikam에서 sakhari‘restored; prepared; put together’의 뜻이다. 그래서 asakharikam한데 모아지지 않은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자극받지 않은이라 번역하였다. 왜 이렇게 번역하였을까?

 

asakharikam에 대한 초불연 각주를 보면 “asakharika asakhara에다 ‘~하는 것, ~하는 사람을 뜻하는 ‘-ika’어미를 붙여서 만들었다.”라며, “그러나 여기서는 문맥으로 볼 때 자극으로 옮기는 게 가장 무난하다.”(93번 각주)라 하였다.

 

자극 받는다는 것은?

 

여덟 가지 마음 중에서 이해하기 힘든 것이 자극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자극이라는 것은 남에 의해서 강요 받은 것 일수도 있고 자발적인 것을 수도 있다. 이런 자극은 선한 것이나 불선한 것 가리지 않고 일어날 수 있다.

 

선한 것에서 자극의 의미는 무엇일까? 예를 들어 보시 같은 것이다. 절에 가서 보시를 하면 공덕을 쌓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보시하였다면 자극 받은 것이다. 그라나 자발적으로 보시하는 경우도 있다.

 

불자들은 스님을 보면 반배를 한다든가 절에 가면 향을 피우고 삼배를 한다.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공경하는 마음을 내고 보시를 하면 공덕을 쌓아 천상에 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런 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감관이 맑은 청정한 수행자를 보면 고개가 숙여지고 거룩하고 장엄한 불상이나 사원을 보면 경배하고푼 마음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것 역시 자극받은 마음이다. 자극은 강요나 권유에 의한 것도 있고 저절로 일어나는 자발적인 것도 있다.

 

기쁨(somanassa)과 평온(upekkha)에 대하여

 

여덟 가지 아름다운 마음 중에 공통적으로 기쁨(somanassa)과 평온(upekkha)이 들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정신적인 것이다. 육체적 즐거움을 뜻하는 수카(sukha)와는 다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초기경전에서 수카는 눈과 귀 등 다섯 가지 감각능력에 따른 재미나 즐거움, 쾌락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 육체적 즐거움은 일시적이다. 오래 지속되지 못하여 괴롭다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한다. 그것은 오욕락이다. 그래서 형상, 소리, 냄새, , 감촉과 같은 오욕락을 추구한다. 이렇게 즐거운 것들이라 여겨지는 오욕락은 소멸되면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현명한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아서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 (S35:136) 라고 말한 것이다.

 

아비담마 논장에서는 정신적 즐거움 또는 만족한 느낌이라는 뜻의 소마낫사라는 말이 하나 더 있다. 그래서 욕계 아름다운 마음 여덟 가지 중에서 네 가지는 소마낫사(정신적 즐거움)이고 또 네 가지는 우뻭카(평온)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에서는 육체적 즐거움 보다 정신적 즐거움이 더 수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욕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은?

 

욕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을 들라면 어떤 것일까? 욕계 여덟 가지 아름다운 마음 중에서 첫 번째 항 기쁨이 함께 하고, 지혜가 있고, 자극받지 않은 마음이라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보시하면 공덕을 쌓는다는 말은 정견이다. 이는 세속적 정견에 해당된다. 업이 자신의 주인이라는 업자성정견을 말한다. 이렇게 정견을 가진 자는 보시대상을 만나면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흔쾌히 보시한다. 이것이 기쁨이 함께 하고 지혜가 있으며 자극 받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쁨이 함께 하고, 지혜가 있고, 자극받은 마음이란 무엇일까? 보시하면 공덕을 쌓는 다는 정견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자발적이지 않다. 관대함이 결여 되었거나 망설이기 때문이다.  옆에서 하는 것을 보고서 자극받아 그때서야 보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쁨이 함께 하고 지혜가 있으며 자극 받는  이다. 이렇게 본다면 기쁨이 함께 하고, 지혜가 있고,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가 욕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일 것이다.

 

미소짓는 마음

 

마음에는 선심과 불선심, 과보심, 작용심 이렇게 네 가지 마음이 있다고 하였다. 선심과 불선심은 탐진치 등 원인이 있어서 생겨나는 현재의 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선심과 불선심은 반드시 과보를 만든다. 그것이 과보심이다. 그러나 번뇌다한 아라한은 재생의 근거가 되는 어떤 과보도 남기지 않는다. 단지 그렇네하며 작용하는 마음만 있다. 위빠사나 수행하는 목적이다.

 

네 가지 마음 중에 작용심이 수행의 목적이라 볼 수 있다. 대상에 대하여 호불호 느낌을 단지 알아차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작용심 중에 미소짓는 마음이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기쁨이 함께한 미소짓는 마음(somanassasāhagata hasituppādacitta)이라 하였다. 미소가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기쁨, 소마낫사가 함께 하는 것이다.

 

미소짓는 마음은 아라한들과 벽지불들과 부처님들에게만 볼 수 있는 특유한 마음이다. 이것의 역할은 아라한들로 하여금 욕계의 현상에 대해서 미소짓게 하는 마음이라 하였다.

 

아라한들은 어떤 업도 생산해 내지 않기 때문에 악업은 물론 선업도 짓지 않는다. 선행을 하지만 선행 했다는 티를 내지 않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즐겁다고 하여 이빨을 내며 웃지 않는다. 다만 미소만 보일 뿐이다. 이러한 미소짓는 마음이 바로 작용만 하는 마음이다.

 

아라한의 미소

 

아라한이 미소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아라한으로 하여금 하찮은 것에도 미소를 머금게 하는 역할을 한다.”(Vism.14.108) 라고 하였다. 하찮은 대상이란 여섯 가지 감각대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서도 지혜나 평온이 함께 하는 유익한 마음들이 일어 날 수 있는 것도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라한을 미소 짓게 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를 들 수 있다.

 

 

1) 기쁨이 함께 하고, 지혜가 있고, 자극받지 않은 마음 하나.

2) 기쁨이 함께 하고, 지혜가 있고, 자극받은 마음 하나.

3) 평온이 함께 하고, 지혜가 있고, 자극받지 않은 마음 하나.

4) 평온이 함께 하고, 지혜가 있고, 자극받은 마음 하나.

5) 기쁨이 함께 한 미소짓는 마음

 

 

1번항에서 4번 항까지는 욕계에서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다. 5번항은 원인을 갖지 않고 단지 작용만 하는 아라한에게서만 볼 수 있는 마음이다. 이 다섯 가지 이유로 아라한은 미소 짓는다.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라한은 그 어떤 경우에도 호불호에 대한 업을 짓지 않는다. 늘 기쁨과 평온의 마음으로 살아 가기 때문에 여섯 가지 대상에 끄달리지 않고 단지 그렇네하며 미소 지을 뿐이다. 그렇다면 아라한의 미소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은 무엇일까?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문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Ruṇṇamida bhikkhave ariyassa vinaye yadida gīta. Ummattakamida bhikkhave ariyassa vinaye yadida nacca. Komārakamida bhikkhave ariyassa vinaye yadida ativela dantavidasaka hasita.

Tasmātiha bhikkhave setughāto gīte. Setughāto nacce. Ala vo dhammapamoditāna sata sita sitamattāyāti.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노래는 울음이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춤은 광기이다.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것은 장난이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노래도 계율의 파괴이고, 춤도 계율의 파괴이다. 이유가 있어 기뻐한다면,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A3.103)

 

 

앙굿따라니까야 울음의 경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노래부르고 춤추는 행위를 금하였다. 더구나 이빨을 보이고 웃는 것도 장난이라 하여 금하였다. 다만 기쁨을 표현 한다면 이빨을 보이지 않고 미소짓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즐거움에 끄달려 재생의 원인이 되는 업을 짓지 말라는 것이다.

 

 

2015-11-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