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나의 삶도 축복이고 나의 죽음도 축복이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0. 15. 15:42

 

나의 삶도 축복이고 나의 죽음도 축복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노인들의 건강은 알 수 없다. 오늘 건강하더라도 내일 어떻게 악화 될지 알 수 없다. 신체와 장기가 노화 되어 마치 자동차를 오래타면 부품이 수명이 다 한 것처럼 몸의 이곳 저곳에서 고장이 나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 건강하다고 하여 내일도 모레도 건강하라는 법이 없다.

 

병이 나서 아플 때가 있다. 병은 어떻게 발생하였을까? 이유 없이 나지 않을 것이다. 병이 날만한 충분한 원인과 이유가 있음에 틀림 없다. 잘 기억 나지는 않지만 한 때 무절제한 생활을 하였다면 그것을 원인으로 병이 발생할 수 있다. 과도한 음주, 지나친 흡연, 무절제한 생활 등에 의하여 병이 날 만한 요인을 만들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몸이 아프면 괴롭다. 몸이 아프면 정신도 영향 받아 마음도 괴롭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플 때면 다시 한번 자신을 뒤돌아 보게 된다. 병이 날 만한 행위를 하였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병이 나으면 다시는 병이 날만한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것이다.

 

부처님이 풍병에 걸렸는데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에게도 병이 날 수 있다. 몸을 가지고 있는 한 부처님도 아라한도 자유롭지 않다. 부처님도 몸에 병이 났을 때 몹시 괴로워하였다고 한다.

 

상윳따니까야 데바히따의 경’에 따르면 한 때 세존께서는 싸밧티 시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풍병으로 괴로워 했다. (Tena kho pana samayena bhagavā vātehi ābādhiko hoti.)” (S7.13)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풍병은 ‘vātehi ābādhiko’ 를 말한다. 이는 냉기에 의해 발생된 병을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기 전 6년에 걸친 고행으로 위장에 풍병이 들었다.” (Srp.I.258) 라고 설명되어 있다. 젊어서 고행한 것이 원인이 되어 위장 장애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이 풍병에 걸린 것은 걸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고행을 하던 시절 바람이 부는 겨울 노지에서 보낸 이유도 있다. 이는 사리뿟따여, 나는 한겨울 차가운 밤이 서리가 내리는 팔일간에 찾아오면, 나는 노천에서 밤을 지새우고 숲에서 낮을 보냈다.” (M12) 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노지에서 못먹고 고행을 하게 되자 또한 사리뿟따여, 그렇게 적은 음식 때문에 나의 창자가 나의 등에 붙어버려, 내가 창자를 만지면 등뼈가 만져졌고, 등뼈를 만지면 창자가 만져졌다.” (M12) 라 하였다.

 

부처님은 풍병이 나자 어떻게 치료 하였을까? 경에 따르면 더운 물로 목욕을 하고 더운 물로 당밀을 타서 먹음에 따라 풍병이 치유 되었다고 하였다.

 

예전의 업이 성숙하여

 

우다나에 따르면 한 수행승이 병에 걸린 이야기가 있다. 번뇌 다한 아라한이었지만 병에 걸린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Tena kho pana samayena aññataro bhikkhu Bhagavato avidūre nisinno hoti, pallaka ābhujitvā uju kāya paidhāya purāakammavipākaja dukkha tibba  khara kauka vedana adhivāsento sato sampajāno avihaññamāno.

 

그 때 한 수행승이 세존께서 계신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가부좌를 하고 몸을 바로 세우고 예전의 업이 성숙하여 생겨난 괴롭고 찌르고 아리고 쓰라린 고통을 참으면서 새김을 확립하고 일아차리며 고뇌를 여의고 앉아 있었다.

 

(Kammasutta-업의 경, 우다나 Ud.21, 전재성님역)

 

 

주석에 따르면 이 수행승은 성과 이름이 알려져 있다. 이 수행승은 라자가하의 고귀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목갈라나를 인연으로 출가하였다. 윤회의 허물을 본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한다.

 

경에 따르면 수행승은 병이 나 있는 상태이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하여 괴롭고 찌르고 아리고 쓰라린 고통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런 고통이 예전의 업이 성숙된 것이라 하였다. 이는 ‘purāakammavipākajaṃ’라는 긴 복합어로 표현 되어 있다.

 

purāakammavipākajapurāa(old)+kamma(action)+vipāka(result)’의 형태로 되어 있다. 오래 전의 행위가 성숙되어 과보로 나타난 것을 말한다. 이를 보통 ‘kammavipāka’라 하는데, ‘the result of one's actions’ 또는 업이숙(業異熟 )라 한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반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운동의 법칙에서도 알 수 있다. 관성의 법칙에 이어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있는데, 작용이 업이라면 업보는 반작용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업보는 즉각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행위에 대한 과보가 늦게 나타나는 것에 대하여 업이숙이라 한다. 업이 달리 익는 것이다. 그런 업보는 금생에 받는 것도 있고 후생에 받는 것도 있다. 후생도 내생에 받는 것도 있고 몇 생 건너 띄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수행승은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었음에도 이전의 업이 익어서 병이 났다. 그리고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이에 수행승은 새김을 확립하고 일아차리며 고뇌를 여의고 앉아 있었다.”라 하였다. 여기서 새김을 확립하고 일아차리며라는 말은 ‘sato sampajāno’의 번역어이다. 새김은 사띠를 말하고, 알아차림은 삼빠자나를 말한다.

 

부처님이 감흥어로

 

수행승은 좌선을 하며 앉아 있었다. 병의 고통을 이겨 내고자 새김을 확립하고 일아차리며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을 보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감흥어를 읊었다.

 

 

Sabbakammajahassa bhikkhuno
dhunam
ānassa purekata raja,
Amamassa
hitassa tādino
attho natthi jana
lapetave

 

[세존]

예전에 쌓은 티끌을 제거하고

일체의 업을 떨쳐 버린 수행승은

나의 것 없고 견고하고 한결같으니

사람들에게 그것을 말할 필요가 없다.”

 

(Kammasutta-업의 경, 우다나 Ud.2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수행승이 병고를 참고 견디는 것에 대하여 감흥하고 있다. 여기서 티끌과 업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착하고 건전한 업 마저 버렸다

 

첫 번째 구절에서예전에 쌓은 티끌을 제거한다 (dhunamānassa purekata raja)’고 하였다. 여기서 티끌은 raja를 말한다. Raja‘dust; dirt; pollen; defilement; impurity’의 뜻이다. 그런데 rājaking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왕이라는 rāja는 또 한편으로 더러운 오염원이라는 뜻도 된다.

 

게송에서 티끌이라는 병고를 의미한다. 주석에 따르면, 이는 거룩한 경지에 도달하기 이전에 행한 탐욕 등의 티끌과 함께 섞였기 때문에 티끌이라는 이름으로 얻은 고통이다. 그래서 그 고통의 체험되는 업의 성숙을 통해서 털어 내는 것이라 하였다.

 

번뇌 다한 아라한은 병고라는 티끌만 털어내는 것이 아니다. ‘일체의 업을 떨쳐 버렸다. (Sabbakammajahassa)’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최상의 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악하고 불건전한 업 뿐만 아니라 착하고 건전한 업 마저 버렸다는 것을 말한다. 재생의 근거가 되는 어떤 업도 짓지 않는 것이다.

 

폭류를 건넌 수행승은

 

악업은 물론 선업도 짓지 않는 수행승에게 자아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 병으로 인하여 고통받는다면 누구나 병원에 가고 의사에게 달려 간다. 그러나 나의 것이 없다고 보는 수행승에게  자신의 몸을 돌봄에도 무관심 한 것이다. 이는 자신의 몸이나 자아에 대한 애착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것은 없고(amamassa)” 라 하였다.

 

자아에 대한 애착이 없는 수행승은 견고하다(hitassa)’고 하였다. 열반의 저 언덕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저 거센 흐름을 건넜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생하기 위한 결생(paisandhi)’의 끈을 붙잡지 않는다. 여기서 결생이라는 것은 재생연결식을 말한다.

 

결생의 끈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이쪽 언덕의 나무에 매달려 있던 줄을 의지하여 강을 건너려던 사람처럼이라고 묘사 하고 있다. 여기서 줄이라는 것은 식을 말하는데 재생연결식이다. 이 재생연결식은 조건에 따라 발생된 식으로서 죽음의 강을 건너 다시 태어남을 가져 온다.

 

폭류를 건너 저 언덕에 도착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이 없다. 이 거센 흐름, 폭류에 대하여 네 가지로 보고 있다. ,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거센 흐름(欲流), 존재에 대한 거센 흐름(有流), 견해의 거센 흐름(見流), 무명의 거센 흐름(無明流) 이다. 여기서 욕류는 탐애에 대한 거센 흐름이고, 유류는 윤회의 거센 흐름이고, 견류는 62가지 사견의 거센 흐름이고, 무명류는 사성제를 모르는 거센 흐름이다.

 

폭류를 건넌 수행승은 한결같다(tādino)’고 하였다. 그것은 혐오적인 것에서 무혐오를 지각하는 등의 다섯 가지 고귀한 능력과 여덟 가지 세간의 원리를 말한다. 여덟 가지 세간의 원리는 팔풍이라 하여 이익과 불이익, 명예와 불명예, 비난과 칭찬, 행복과 불행을 말한다. 그래서 마음이 평정을 이루었기 때문에 한결같다(tādino)’고 하였다.

 

치료를 거부한 아라한

 

게송에서 네 번째 구절 사람들에게 그것을 말할 필요가 없다. (attho natthi jana lapetave)”라고 하였다. 대체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주석을 보지 않으면 이해 할 수 없다. 주석에 따르면 거룩한 님은 몸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그대는 나를 약 등으로 돌보아 달라.’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UdA.167) 라고 설명되어 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치료를 거부 하는 것이다.

 

병에 걸리는 사람들은 병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약을 타 먹는다. 심하면 수술까지 한다. 죽을 병에 걸렸어도 병원에 가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악착 같이 모은 돈을 늙어서 병 들었을 때 병원비로 모두 날려 버린 다는 말이 있다.

 

몸과 마음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보지 않는 아라한에게 있어서 중병이 걸렸어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말할 필요가 없다. (attho natthi jana lapetave)”라고 하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치료도 받지 않고 더구나 요즘 식으로 말하면 수술도 거부 하는 것이다. 그대로 죽음을 맞이 하겠다는 것과 같다.

 

아라한의 삶은 덤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크게 의미가 없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십이연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많은 중년기의 사람과 노인에게 삶은 좌절, 실망, 괴로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삶의 조건은 갈수록 나빠지고, 건강은 점점 나빠지며 완전한 무너짐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무명과 집착 때문에 생을 즐거워합니다. 반면 아라한은 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삶을 지루하고 따분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삶에 염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라한이 죽음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고자 하는 욕구는 아라한이 이미 정복한 공격적인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이 바라는 것은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드는 것으로, 이러한 바람은 근로자가 일당이나 월급을 받고자 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근로자는 생계수단을 위해 불가피하게 일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과 고난에 처하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직장을 잃는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돈으로 급여 받는 날만 손꼽아 기다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라한도 완전한 열반을 얻는 순간만을 기다립니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십이연기)

 

 

법문집에서 아라한의 인생관을 보면 범부들과 다르다. 그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이다. 번뇌가 다하여 더 이상 태어남이 없는 아라한에게 있어서 삶이라는 것은 덤이다. 그렇다고 빨리 죽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아라한은 이미 죽음이나 육신의 해체를 바라는 욕망에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삶도 축복이고 나의 죽음도 축복이다

 

아라한은 어떻게 살아 가는가? 그것은 월급생활자가 때 되면 나오는 월급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완전한 열반이 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Nābhinandāmi maraa

nābhinandāmi jīvita,
Kāla
ca paikakhāmi

nibbisa bhatako yathā.

 

나는 죽음을 바라지도 않고

나는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고용된 자가 보수를 바라듯,

나의 시간을 기대한다. (Thag.606, 전재성님역)

 

 

 

Meditation

 

 

아라한은 죽음도 삶도 바라지 않는다고 하였다. 번뇌가 모두 소멸된 자에게 있어서 삶은 덤이나 다름 없다. 그런 나머지의 삶은 행복이다. 죽는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자아의 관념을 떠나 버린 아라한에게 있어서 육체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다시 태어남이 없는 아라한은 죽지 않는다. 그래서 불사(不死)이다. 이와 같은 아라한의 삶에 대하여 나의 삶도 축복이고 나의 죽음도 축복이다.”(Ud.45) 라고 말 할 수 있다.

 

좋으면 거머쥐려 하고 싫으면 밀쳐 내려 하는

 

수행승은 병에 걸렸다. 언제 어느 때인가 행위가 과보로 익은 것이다. 그러나 수행승은 쓰라린 고통에 대하여 사띠를 확립하고 분명히 알아차림으로서 이겨 내고 있다. 이는 육체의 병이 마음의 병으로 전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일반사람들은 육체의 고통이 너무 심하면 마음까지 병들어 더욱 더 고통 받게 된다. 그래서 그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두 가지 종류의 고통을 느낀다.”(S36.6)라 하였다. 이는 괴로운 느낌과 접촉하여 분노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 분노의 경향이 잠재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즐거운 느낌과 접촉이 일어나면 즐거움에서 환락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탐욕과 성냄으로 살아 감을 말한다. 좋으면 거머쥐려 하고 싫으면 밀쳐 내려 하기 때문이다.

 

분노가 소멸된 아라한에게 있어서 육체적 고통은 정신적 고통으로 전이 되지 않는다. 육체적 고통이라는 첫 번째 화살을 맞지만 정신적 고통이라는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괴로운 느낌과 접촉해도 우울해 하지 않고 피곤해 하지 않으며 슬퍼하지도 않고 통곡하지 않으며 슬퍼하지 않는다.” (S36.6)라 하였다.

 

잘 배운 고귀한 제자가 느끼는 것은 오로지 하나다. 그것은 육체적 고통이다. 그래서 그는 신체적이지만 정신적이지 않은 단 한 가지 종류의 고통만 느낀다.” (S36.6) 라고 하였다.

 

 

2015-10-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