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열한 사유를 제거 하려면
체험을 해 보아야 안다고
어느 법우님이 좋은 사이트가 있어서 소개 시켜 주겠다고 하였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법우님이 SNS에 남긴 말이다. 가서 보았더니 대승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견성, 초견성 이야기가 나오고 불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모임을 이끌고 있는 재가자의 동영상도 보라고 하였다. 유튜브에 올려 진 것을 말한다.
동영상을 보긴 보았다. 그러나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하였다. 증도가에 대한 강연으로 초기불교와 다른 것이다. 또 다른 법우님의 글을 소개 해 주었다. 들어가 보니 자신의 체험담에 대한 이야기이다. 견성을 했다고 하며 맛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한결 같이 체험을 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경전도 필요 없고 오로지 체험해 보아야 알 수 있음을 말하고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칭찬 위주로 되어 있다.
법우님은 일부로 사이트를 알려 주었다. 아마 도움이 되리라고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방향이 너무 달라서 더 이상 들여다 보지 않았다. 카페에 올려진 글을 보았으나 건질 것이 없었다. 한결 같이 체험 해 보아야만 알 수 있다는 식이고, 부처님 보다 스승의 가르침을 우선시 하는 것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대승불교나 선불교 계통의 글을 보면 수행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맛을 보면 안다는 식이다. 이는 무문관 제1의 화두인 ‘조주의 무자’에서 “그 동안의 그릇된 지식과 잘못된 깨침을 말끔히 떨쳐버리고, 오랫동안 수행을 잘 익혀 나가면 안과 밖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경지에 들게 될 것이다. 그것은 벙어리가 꿈을 꾼 것처럼 다만 스스로만 알고 다른 이에게는 말해 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체험이다.”라고 표현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구체적인 방법이 나와 있지 않다. 다만 말이나 문자로서 알 수 없고 오로지 뜻과 마음으로만 알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맛을 보면 알 수 있다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 가르침에 “와서 보라”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경전을 무시하고 오로지 수행만으로 체험해야 한다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법문으로 자세히 남겼다. 그것은 방법에 대한 것이다. 해탈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다. 이것이 문자로 기록 되어 있다. 그래서 경전만 보고서도 수행을 할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 대승경전과 선불교와 다르다.
부정(Asubhā), 자애(mettā), 호흡(ānāpānassati), 자만(māna)
우다나와 앙굿따라니까야 ‘메기야의 경’에서 부처님은 마음의 해탈에 도움이 되는 원리 다섯 가지를 말하였다. 즉,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 계행을 갖추는 것, 소욕지족, 정진, 생성과 소멸에 대한 지혜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여기에다 네 가지를 더 추가하였다. 그래서 모두 아홉 가지가 되었다. 이렇게 아홉 수 이기 때문에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아홉 번째 법수(A9.3)에 배치 하였을 것이다. 그 추가된 네 가지 원리는 어떤 것일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Asubhā bhāvetabbā rāgassa pahānāya, mettā bhāvetabbā byāpādassa pahānāya, ānāpānassati bhāvetabbā vitakkupacchedāya, aniccasaññā bhāvetabbā asmimānasamugghātāya. Aniccasaññino Meghiya anattasaññā saṇṭhāti, anattasaññi asmimānasamugghātaṃ pāpuṇāti, diṭṭheva dhamme nibbānan”
“1) 탐욕의 제거를 위해 부정관을 닦아야 한다.
2)분노의 제거를 위해서 자애를 닦아야 한다.
3)사유의 제거를 위해서 호흡에 대한 새김을 닦아야 한다.
4)‘내가 있다’는 자만의 제거를 위해서 무상에 대한 자각을 닦아야 한다.
메기야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이루면, 무아에 대한 지각이 이루어지고, 무아에 대한 지각을 이루면, ‘내가 있다’는 자만은 제거 되고 현세에서 열반을 이룬다.”
(Meghiyasuttaṃ-메기야의 경, 우다나 Ud34, 앙굿따라니까야 A9.3, 전재성님역)
네 가지는 부정(Asubhā), 자애(mettā), 호흡(ānāpānassati), 자만(māna)이다. 이 중에서 자만의 제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자만을 제거하려면 무상에 대한 지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상에 대한 지각이 이루어지면 무아에 대한 지각도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만도 제거 된다고 하였다. 이는 자만이라는 것이 “내가 있다”라는 관념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데”라는 자만이다. 이런 자만에 대하여 아홉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 이렇게 세 가지에다 각각 세 가지가 합쳐져서 아홉 가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은 무아임을 알 수 있다.
경에서는 탐욕의 제거를 위해 부정관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분노의 제거를 위해 자애를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경에서 메기야가 망고숲에서 세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팔정도의 정사유에 해당하는 것으로 감각적 쾌락에 매인 사유, 분노에 매인 사유, 폭력에 매인 사유를 말한다. 이런 사유에 사로 잡혀 있을 때 정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탐욕과 분노를 제거하기 위하여 부정관과 자애를 닦아야 된다고 하였다.
여인이 흰 치아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지만
첫 번째 ‘탐욕의 제거를 위해 부정관을 닦아야 한다. (Asubhā bhāvetabbā rāgassa pahānāya)’ 고 하였다. 부정관이란 무엇일까? 주석에서는 열 가지 명상주제로 설명하고 있다. 이를 십부정(dasa asubha)이라 한다. 1) 부풀어 오른 시체에 대한 지각, 2) 푸르게 멍든 어혈을 지닌 시체에 대한 지각, 3) 고름이 가득 찬 시체에 대한 지각, 4) 부패해서 갈라진 시체에 대한 지각, 5) 동물이 먹고 남은 시체에 대한 지각, 6) 흩어진 시체에 대한 지각, 7) 살해 되어 흩어진 시체에 대한 지각, 8) 피로 물든 시체에 대한 지각, 9) 벌레들이 모여 우글거리는 시체에 대한 지각, 10) 해골과 뼈만 남은 시체에 대한 지각 이렇게 열 가지를 말한다. 주로 공동묘지 등에서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열 가지 부정관을 닦으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인을 보고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 하고 있다.
쩨띠야 산에 머물던 마하띳사 장로처럼. 장로는 쩨띠야 산으로부터 출발하여 아누라다뿌라로 탁발을 가고 있었다. 어떤 집안의 며느리가 자기 남편과 말다툼을 한 뒤 천녀(天女)처럼 단장을 하고 꾸민 뒤 그 시간에 아누라다뿌라에서 나와 친정집에 가더 도중 길에서 장로를 보고 음란한 마음이 생겨 활짝 웃었다. 장로는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쳐다보다가 그녀의 이빨에서 부정상(不淨想)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그녀의 이빨을 보고 이전의 인식을 기억했나니
그 자리에서 서서 장로는 아라한이 되었다.”
잠시 후, 그녀를 뒤따라오던 남편도 장로를 보고 “존자시여, 혹시 어떤 여인을 못 보셨습니까? 라고 여쭈었다. 장로가 그에게 대답했다.
“이곳을 지나간 자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겠노라
단지 뼈 무더기가 이 신작로를 지나가는 것만 보았도다.”
(청정도론, 제1장 계, 55절, 대림스님역)
부부싸움을 하고 집은 나선 여인이 속된 말로 장로빅쿠를 꼬셔 보려 하였다. 그래서 씨익 웃었을 때 하얀 치아가 드러났을 것이다. 이때 장로는 이빨을 보고서 해골바가지의 이미지가 떠 올랐다. 이는 평소 부정상을 닦았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열 번째에 해당되는 ‘해골과 뼈만 남은 시체에 대한 지각’이다. 이렇게 평소에 부정상을 닦아 놓았기 때문에 여인의 유혹에도 넘어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라한이 되었다.
절대로 자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두 가지
두 번째 ‘분노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애를 닦아야 한다. (mettā bhāvetabbā byāpādassa pahānāya)’ 고 하였다. 분노와 자애는 상극이다. 자애의 마음이 있을 때 분노의 마음이 있을 수 없다. 자애와 관련하여 숫따니빠따 ‘자애의 경(Sn1.8)’이 잘 알려져 있다. 경에서 자애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 해 놓은 구절이 있다. 그것은 “모든 님들은 행복해지이다.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stn147) 라는 구절에서 잘 나타나 있다. 더구나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Mātā yathā niyaṃ puttaṃ āyusā ekaputtam anurakkhe)”(stn150) 모든 사람들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라고 하였다.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바라는 자애의 마음을 내었을 때 원수에게 조차 분노의 마음은 다스려 질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자애의 마음을 낸다 하여 이성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어야 할까? 아내나 연인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특히 이성에 제한하여 자애를 닦아서는 안되고, 죽은 자에 대해서는 절대로 자애를 닦아서는 안된다.” (9장 4절) 라고 하였다. 왜 안될까?
이성에 대해서는 애욕이 생기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하나의 예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그는 자기의 부인을 사랑했다. 그가 자애를 닦을 때 밤새 벽과 싸웠다. 그러므로 이성에 제한하여 자애를 닦아서는 안된다.” (9장 6절) 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밤새 벽과 싸웠다는 것은 아내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닦을수록 애욕이 일어 났음을 말한다. 그래서 자애수행은 아내나 연인처럼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절대로 해서 안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본삼매를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근접삼매도 얻지 못한다.” (9장 7절)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예를 소개 하였다.
한 젊은 비구가 그의 스승에 대해 자애를 닦았다. 그의 자애수행은 전진이 없었다. 그는 대장로를 뵈러가서 ‘존자시여, 저는 자애를 통한 선의 증득에 능숙합니다. 그런데 도무지 증득을 이룰 수가 없으니 어찌된 영문입니까?’라고 여쭈었다. 장로는 ‘여보게, [명상주제의 대상인] 그 표상을 찾아보게’라고 말씀하셨다. 찾아본즉 그의 스승이 사망한 것을 알고서 다른 자를 대상으로 자애를 닦으면서 증득에 들었다. 그러므로 죽은 자에 대해서는 절대로 자애를 닦아서는 안된다. (청정도론, 9장 7절, 대림스님역)
자애의 마음을 닦으면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연인과 죽은 자를 제외 하고 모든 존재들이 대상이다. 이와 같은 자애수행의 정형구는 “그는 자애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서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남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북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 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마음으로 일체의 세계를 가득 채운다.” (M7) 라고 표현된다.
호흡수행을 하면 커다란 과보와 공덕이
세 번째 ‘사유의 제거를 위해 호흡에 대한 새김을 닦아야 한다. (ānāpānassati bhāvetabbā vitakkupacchedāya)’고 하였다. 여기서 ‘호흡의 새김’이라는 것은 ānāpānassati를 말한다. 이를 초불연에서는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이라 하였다.
아나빠나사띠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에 ‘호흡의 새김의 경(M118)’과 상윳따니까야에 ‘하나의 원리에 대한 경(S54.1)’에 실려 있다. 또 ‘라훌라를 가르친 큰 경(M62)’에 따르면 “라훌라여, 호흡새김을 닦으십시오. 호흡새김을 닦고 반복하면 커다란 과보와 커다란 공덕이 있습니다.”라며 동일한 가르침이 있다. 맛지마니까야 ‘호흡의 새김의 경(M118)’DMF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호흡새김을 어떻게 닦고 어떻게 익히면, 어떠한 커다란 과보, 커다란 공덕이 있는가? 이 세상에서 수행승이 숲으로 가고 나무 밑으로 가고 한가한 곳으로 가서 앉아 가부좌를 틀고 몸을 바로 세우고 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여 깊이 새겨 숨을 들이쉬고 깊이 새겨 숨을 내쉰다.
1) 그는 길게 숨을 들이쉴 때는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길게 숨을 내쉴 때는 나는 길게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2) 짧게 숨을 들이쉴 때는 나는 짧게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짧게 숨을 내쉴 때는 나는 짧게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3) 신체의 전신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4) 신체의 형성을 그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몸의 형성을 고요하게 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5) 희열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6) 행복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7) 마음의 형성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마음의 형성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8) 마음의 형성을 그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마음의 형성을 고요히 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9) 마음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10)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11) 마음을 집중시키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마음을 집중시키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12) 마음을 해탈시키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마음을 해탈시키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13) 무상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무상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14)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15) 소멸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소멸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16) 완전히버림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완전히버림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수행승들이여, 호흡새김을 이와 같이 닦고 이와 같이 익히면, 이렇게 커다란 과보, 커다란 공덕이 있다.(M118, 전재성님역)
사유의 제거를 위하여 호흡을 관찰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사유의 제거’는 ‘vitakkupacchedāya’를 말한다. Vitakkupaccheda는 ‘vitakka+upaccheda’형태이다. Vitakka가 ‘reflection; thought’의 뜻이고, upaccheda는 ‘stoppage; destruction; breaking off’의 뜻이다. 아나빠나사띠로서 사유을 제거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혜도 얻을 수 수행을 말한다.
이 수행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빠리무캉이다. 이는 사념처에서와 같이 “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여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라는 문구로 알 수 있다. 이렇게 사띠를 확립한 다음 호흡을 관찰하면서 신체와 마음의 형성을 그치면서 최종적으로 완전히 버림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호흡수행을 하면 커다란 과보와 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가르침은 잘 새겨 들어야
부처님은 메기야에게 아홉 가지 가르침을 주었다. 홀로 조용히 수행하다 욕망, 분노, 폭력에 대한 사유가 일어나 수행에 대한 진전이 없자 아홉 가지 가르침을 일러 주신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잘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모든 공부는 외는 것으로부터 시작 된다. 특히 옛날 필기구가 없던 시절 그리고 책도 없던 시절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을 잘 기억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틈만 나면 되새기고 사유하였을 것이다. 이는 바른 기억을 의미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한번 듣고 흘려 버리는 것이 아니라 늘 되새기고 사유해야 하고 외워야 함을 말한다.
Khuddā vitakkā sukhumā vitakkā
Anuggatā manaso uppilāvā,
Ete avidvā manaso vitakke
Hurāhuraṃ dhāvati bhantacitto.
[세존]
“저열한 사유, 미세한 사유가
따라오며 정신을 혼란시킨다.
이러한 정신에 나타나는 사유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마음은 이리저리 달린다.
Ete ca vidvā manaso vitakke
Ātāpi yo saṃvaratī satīmā,
Anuggate manaso uppilāve
Asesam-ete pajahāsi Buddho
정신에 나타나는 사유들을 지각하고
정진과 새김을 갖추어
정신을 수호하는 깨달은 님은
정신을 따라오며 그것을 표류시키는
그 사유들을 남김없이 여읜다.”
(Meghiyasuttaṃ-메기야의 경, 우다나 Ud34, 앙굿따라니까야 A9.3, 전재성님역)
2015-10-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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