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사띠(sati)는 ‘바른 기억(正念)’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0. 14. 13:09

 

 

사띠(sati)바른 기억(正念)’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사띠는 마음챙김일까? 이런 의문에 대하여 수 차례 글을 올렸다. 스님도 아니고 학자도 아닌 보통불자의 글에 대하여 반박하는 글도 보았다. 불교계에서 두 개의 기득권 집단이라 볼 수 있는 승가와 학계에서 마음챙김이라 하는데 이런 번역어가 먹혀 들어 가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승복의 권위 또는 PHD의 권위의 작용도 있을 것이다.

 

사띠에 대하여 바른기억이라고 정의 하였다. 기억의 의미로서 사띠에 대하여최근 띠(sati)(2015-09-29)’버리고 없애는 삶을 위하여(2015-10-0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글 에서 늘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였을 때 수행이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팔정도에서 정념은 기억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마음챙김이니 마음지킴이니 하는 말들은 본질을 어긋난 것이라 볼 수 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원담스님과 일묵스님의 대화에서

 

최근 사띠가 기억이라는 것에 대하여 추인 하는 듯한 글을 발견 하였다. 그것은 원담스님이 작성한 일묵스님과의 대화에 대한 글이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2015102()맑음

 

아침 먹고 嘉昌가창댐 주변 산 숲속으로 산책을 나가다. 떨어진 밤과 도토리가 가을 숲길 풍경을 꾸민다. 동제미술관에 들러다. 미술관 주인이 홍차를 내와서 잠시 담화를 나누다. 미술관은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리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으로 지어졌다. 갤러리는 金佶煦김길후 화가의 작품을 주제로 꾸며져 있다. 화가는 백합화와 수행자, 관조와 깨달음에 대한 image이마쥬를 그렸다. 어머니와 성불심(박은정 모친)보살이 관오사로 오다. 주지스님과 점심과 차를 나누다. 두 분 보살님에게 이 절에 다니면서 주지스님으로부터 마음 다스리는 법을 배우라고 하였다.

 

밤에 일묵(제타바나 선원장)스님, 大爲대위스님 오다. 차 한 잔하며 법을 담론하다.

 

1. 일묵스님은 sati바른 기억으로 번역하는 게 좋다고 한다.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면 뜻이 모호하고 포괄적이어서 실용적이지 못한 결점이 있다. sati란 어원에 마음이 들어설 근거가 없다. sati의 어원인 smriti기억’, ‘불망不忘, 잊지 않음이란 뜻을 살려서 기억으로 번역하면 위빠사나의 장점이 잘 드러난다. 무엇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가? 정견(즉 사성제 보는 것)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다. 善法 기억하고 잊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anapanasati들숨날숨 기억하기’, ‘호흡 기억하기로 번역하면 된다. 선법을 기억하고 잊지 않으니까 자연히 四正勤사정근을 함축한다. 매 순간 선법과 정견(정견 자체가 이미 선법이다)을 잊지 않으면 기억이 확립된다(sati가 확립된다). 기억이 확립되면 선명한 앎이 생겨난다. 이 앎이 바로 sampajana삼빠자나, 正智정지이다. sati를 흔히 알아차림이라 옮기는 것은 잘못이다. 알아차림은 sampajana이다. sati를 바른 기억으로 번역하면 선법, 정견이 지속적으로 견지되어 바른 정진이 이루어지면서, 선법은 더욱 증장되고, 정견이 확립되어져 어느새 유신견이라든지 사견(계금취견)이 떨어져 나가고 의심이 사라져 불퇴전의 신심이 서고, 관점의 혁명적 전환이 오게 된다. 이렇게 해서 수다원(豫流果)에 들게 된다.

 

2. sati를 번역하여 흔히 mindfulness라 하는데 이 말은 원래 영어사전에 없었던 것으로 PTS(빠알리 성전협회)에서 빠알리 니까야를 영어로 번역할 때 mindfulness라는 영어단어를 만들어냈다고 한다(미국 스님 비구 보디Bikkhu Bodhi의 견해). mindfulness라는 말은 sati가 함의하는 뜻을 모두 담아내는 데 한계가 있다. 최근 미국의 어느 불자가 사띠 수행이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리는mindful 것이다.’라는 이해를 비판했다악한 일도 알아차리면서 하면 괜찮다는 말인가 이런 의문이 생긴다는 것이다.  mindfulness자체에는 선법, 불선법에 대한 분별이 없다는 말이 되니 윤리적 상대주의에 떨어지게 된다. 계를 어기는 짓을 하면서도 mindful하면 해도 된다는 말이 된다.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satimindfulness라고 번역하지 말고, ‘바른 기억으로 번역해야할 당위성이 있다.

 

*보충: 나중에 생각해보니, sati바른 기억이라 번역하면 원어가 함축하는 범위가 좁아져서 그 뜻을 다 드러내지 못한다. 이래저래 생각해보니 각묵스님의 마음챙김이 제일 무난해 보인다. 더 좋은 번역이 있다면 현상금을 걸겠다는 각묵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3. here & now에서의 깨어있음awareness이나, 알아차림mindfulness는 에카르트 톨레Eckhart Tolle나 힌두성자들도 흔히 하는 말이다. sati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불교와 외도와의 차별을 발견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sati바른 기억으로 이해해야 한다.

 

(원담스님, 섭세일기-3,  2015-10-11, 카페 마음의 호숫가에서’)

 

 

글을 보면 일묵스님이 방문하여 법담나눈 이야기를 카페에 일기형식으로 올려 놓았다. 원담스님은 진주에서 머물며 사는 도과선원장이고,  일묵스님은 서울 제따선원장이다. 특히 일묵스님의 경우 대승불교뿐만 아니라 테라와다 불교 수행도 하였는데 주로 초기불교와 관련된 지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mindfulness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마음챙김

 

글에서 주목되는 문구가 있다. 그것은 일묵스님에 따르면 sati바른 기억으로 번역하는 게 좋다고 했다.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면 뜻이 모호하고 포괄적이어서 실용적이지 못한 결점이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sati가 어원적으로 마음이 들어설 근거가 없음에도 마음챙김이라 하여 마음이 들어 간 것에 대하여 영어 mindfulness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된 오류로 보고 있다.

 

영어 mindfulness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마음챙김이다. 이 마음챙김에 대하여 국적불명의 용어라도 강하게 비판한바 있다. 이에 대하여 어느 법우님은 마음챙김에 대하여 마음을 챙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띠하는 마음’을 챙긴다.”라는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덧붙여서 사띠하는 마음(선한 마음)으로 생활하라라는 뜻이라 하였다.

 

37조도품에서 사띠가 8

 

사띠는 선법이다. 아름다운 마음부수(sobhana-cetasika) 25가지 중의 하나에 속한다. 이 선한 마음부수로 인하여 마음이 선한 마음을 유지하도록 해 준다. 어떻게 유지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기억의 기능에 따른다.

 

사띠는 깨달음으로 이끄는 중요한 마음의 요소, 또는 마음의 작용이다. 이를 심소 또는 마음부수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이렇게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사띠는 어느 정도로 중요할까? 이는 깨달음으로 이끄는 37조도품에서 알 수 있다.

 

37조도품은 사념처, 사정근, 사여의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로 이루어져있다. 법수별로 나열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법수를 모두 합하면 37가지가 된다. 그런데 37가지 중에서 사띠가 무려 8개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가장 많은 것이 정진(viriya)으로 1위이다. 정진은 9, 사띠가 8, 지혜(pañña) 5개의 순이다.

 

부처님은 정진을 강조 하였다. 이는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서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D16)”라고 당부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은 사띠이다. 정진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왜 이렇게 부처님은 사띠를 강조하였을까? 그것은 깨달음으로 이끄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용어사용이라는 것이다.

 

사띠는 계행의 토대

 

초기경전을 보면 사띠가 수도 없이 등장한다. 그런 사띠에 대하여 팔정도에서는 한자어로 정념(正念)이라 하였다. 이는 바른기억이라는 뜻이다. 대체 무엇을 바르게 기억하라는 것일까?

 

불자들은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지키며 살아간다. 삼보에 귀의 한다는 것은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귀의하는 것이다. 특히 담마에 귀의한다는 것은 가르침을 의지하여 살아 간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귀의 법귀의를 말씀 하시면서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가르침에 의지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불자들은 오로지 가르침에 의지하며 살아 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안 것으로 그치지 않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기억한 것을 되새기며 사유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항상 부처님 가르침안에서 살면 향상 될 것이고 궁극적인 목적에 도달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기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띠이다. 사띠를 하면 계행은 자동적으로 지켜지고 지혜가 생겨난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면 계행은 자동적으로 지켜 진다. 그것은 가르침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는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면 새김의 확립과 올바로 알아차림의 확립으로 부끄러움을 아는 것과 창피함을 하는 것이 토대를 확보한다.” (A8.81)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런 계행의 토대는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띠가 기억이라는 경전적 근거

 

사띠가 기억의 의미가 있다는 것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된다. 적어도 두 개의 경전적 근거를 들 수 있다.

 

 

Yasmi samaye bhikkhave, bhikkhu yathā vūpakaṭṭho viharanto ta dhamma anussarati anuvitakketi.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 때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한다.(S46:3)

 

 

Katamañca bhikkhave satibala: idha bhikkhave ariyasāvat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Ida vuccati bhikkhave satibala.

 

“수행승들이여, 새김의 힘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힘이라 한다.(A5.14)

 

 

칠각지상윳따 계행의 경(S46.3)에 따르면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에 대하여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이라 하였다. 기억과 관련된 말은 ‘anussarati’이다. 이는 ‘To remember’의 뜻으로 단순한 기억이라 아니라 늘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띠 앞에  anu가 붙는다. 이를 한자어로 수념(隨念)’이라 한다. 부처님을 늘 기억하면 불수념이 되고, 가르침을 늘 기억하면 법수념이 된다. 이런 수념은 40가지 사마타명상주제에 속한다.

 

사유와 관련된 말은 ‘anuvitakketi’이다. 이는 reflects의 뜻이다. 한번 사유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늘 사유하는 것이다. 이는 사유를 뜻하는 vitakka에다 반복을 뜻하는 anu가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은 한번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늘 기억해야(anussarati)’ 하고 늘 사유해야(anuvitakketi)’ 한다. 이처럼 늘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 때 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 (A8.82) 라 하였고, 또 기억하더라도 기억한 의미를 탐구하지 않는다면, 그 때 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 (A8.82) 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은 항상 기억하고 항상 그 의미를 사유해야 함을 말한다.

 

일상에서 사띠하기

 

부처님은 오력과 관련하여 사띠에 대하여 기억의 힘에 대하여 말씀 하였다. 어떤힘인가? 이는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는 능력을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을 잘 기억하고 있다가 경계에 부딪쳤을 때 기억해 내는 것이다. 이는 일상의 사띠에서 적용될 수 있다.

 

초기경전을 보면 감각적 쾌락에서 재난을 본다는 정형구가 많이 등장한다. 이는 가르침을 기억해야 가능한 것이다. 어떤 가르침일까? 감각적 쾌락을 추구함에 따라 일어 날 수 있는 재난에 대하여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이 많고 근심이 많다.라고 하였다. 즐거움을 추구하면 즐거워야 하는데 반대로 괴로움이 더 많다는 것이다. 즐거움은 일시적이지만 나중에 남는 것은 괴로움 밖에 없다는 말과도 같다. 이는 사띠가 확립되지 않았을 때 발생한다. ‘고양이의 경이 잘 말해 준다.

 

상윳따니까야에 고양이의 경이 있다. 어느 수행승이 마을에 탁발하러 갔는데 사띠를 하지 않고 간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엄청난 마음의 고통을 겪었다고 하였는데 경에서는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했기 때문에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S20.10) 라고 되어 있다.

수행승은 늘 사띠를 해야 한다. 좌선중에는 빠리무캉이라 하여 면전에 사띠를 확립하지만, 경행이나 탁발 중일 때는 빠리무캉을 할 수 없다. 그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가르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재난을 보아야 하는 것도 가르침을 기억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고양이 경에 따르면 우리는 신체를 가다듬고 언어를 다스리고 정신을 수호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감관을 제어하고 마을이나 거리로 탁발을 하러 가리라.” (S20.10) 라고 되어 있다.

 

새내기수행승 방기사는

 

탁발중에 새김을 확립한다는 것은 가르침을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한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대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런 기억이 없는 채로 마을로 탁발 갔다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을 때 애욕이 일어나 고통 받을 것이다. 이는 방기사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다.

 

방기사는 새내기수행승이었다. 어느 날 사원을 지키고 있었는데 잘 차려 입은 여인들이 찾아 왔다. 그 여인들을 보고 좋지 않은 생각이 일어났다. 경에서는 욕정이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S8.1) 라고 되어 있다.

 

방기사는 고민하였다. 여인을 보고서 욕정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지 고민하였다. 그래서 참으로 나에게 나쁜 일이 닥친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내가 스스로 자신을 위해 나의 좋지 않은 생각을 없애고 좋은 생각을 일으키면 어떨까?”라고 생각한 것이다. 안 좋은 생각을 잠재우기 위하여 좋은 생각을 일으키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방기싸]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내가 출가한 뒤에

어둠에서 오는 이러한 생각들이

완강하게 나를 엄습하고 있네.

 

훌륭한 사수인 귀공자들로서

잘 숙련된 강한 활을 가진 자들로

겁이 없는 사람 천 명이

나를 모든 방향에서 에워싼다 하더라도

 

또한 만약 그 이상의 여인들이 오더라도

나를 괴롭게 하지 못할 것이니

나는 가르침에 확고하게 서 있네.

 

태양신의 후예인 부처님에게서

그 자신의 입을 통해 나는 들었네.

열반으로 이끄는 길을.

내 마음은 그곳에 머물러 즐겁네.

 

이처럼 살고 있는 나에게,

악마여, 그대가 오더라도

그 때 그대가 나의 길을

악마여, 알지 못할 것이다.” (S8.1, 전재성님역)

 

 

방기사가 읊은 시를 보면 고양이의 경에서 수행승과 다르다. 고양이의 경에서 수행승은 사띠를 놓쳐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고 애욕이 그의 마음을 덮쳐서 죽을 정도의 고통을 겪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새내기 수행승이지만 방기사는 이를 극복하고 있다. 어떻게 극복하였는가? 이는 나는 가르침에 확고하게 서 있네라든가, “부처님에게서 그 자신의 입을 통해 나는 들었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사띠가 확립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함으로 인하여 가능한 것이다.

 

여인을 보고 욕정을 느꼈을 때

 

여인을 보고서 욕정을 느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사띠가 확립 되어 있지 않다면 끄달려 가고 말 것이다. 이럴 경우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기 해야 한다. 어떻게 상기해야 하는가? 그것은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여인을 보았을 때 이런 가르침이 있다.

 

 

[바라드와자]

“대왕이여, 알고 또한 보는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는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머니 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누이 같은 여인에 대하여 누이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딸 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S35.12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여인을 대하는 태도에 가족처럼 대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어머니 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누이 같은 여인에 대하여 누이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딸 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고 한 것이디. 주석에 따르면 어머니와 누이와 딸들은 범해서는 안되고 존중되어야 할 대상”(Srp.II.393)이라 하였다. 마찬가지로 모든 여인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여인을 보았을 때 성적대상으로만 본다면 이 세상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런 마음이 일어날 때 어머니 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는 등의 가르침은 매우 효과적이다. 이런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한다면 사띠가 유지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띠 번역어 새김은

 

사띠에 대한 번역어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상당히 퍼져 있다. 그러나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어는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띠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한다는 뜻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팔정도에서 한자어 정념이 바른기억을 의미 하듯이 사띠는 기억으로 불리워야 할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전재성님의 번역어 새김은 탁월한 번역이다.

 

 

2015-10-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