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자신의 업에 의해 던져져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0. 11. 10:06

 

자신의 업에 의해 던져져서

 

 

 

 

 

나홀로 사는 사람

 

이 세상을 혼자서 살아 갈 수 없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살아 갈 수 있다. 세상이 싫어 깊은 산속에 사는 사람도 알고 보면 온갖 문명의 이기로 살아 간다.

 

산에 사는 사람들은 TV는 물론 전화, 핸드폰 등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통신수단이 있다. 심지어 냉방과 난방까지 되는 시스템을 갖추어 놓고 살아간다. 이뿐만이 아니다. 먹는 쌀이나 식자재를 외부에서 공급받는다면 혼자 산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홀로 산다고 착각한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오래 살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것도 병이 없이 기대수명 너머까지 살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이다. 한마디로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의도적으로 회피 하는지 모른다.

 

죽음은 현실이다. 그리고 삶의 과정이다. 주변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고 병원 중환자실에 가면 죽음에 임박해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살아 있다는 것에 안도하는 것인지 죽음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듯 하다.

 

죽음은 바로 옆에 있다. 숨을 들이 마셨다가 내 쉬지 못하면 죽음이다. 죽음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오는 데는 순서가 있어도 가는 데는 순서가 없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닥이 꺼져서 죽고 천정이 무너져서 죽는다. 간판이 떨어져서 죽을 수 있다. 차를 운전할 때 깜박 잠들면 다른 사람까지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다.

 

나홀로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기적이다. 오로지 자기자신 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받을 줄만 알았지 줄 줄 모르는 사람이다. 베풀고 나누고 보시할 생각은 아예 없다. 그리고 손익이 분명한 사람이다. 손해 된다고 생각하면 멀리 하고 이익 된다고 여기면 가까이 한다.

 

얌체사랑

 

철저하게 이익을 따지는 이기주의자는 인색하기 그지 없다. 사랑을 줄 때도 조금만 준다. 너무 많이 주면 버릇없어 진다고 보는 것이다. 얌체 같은 사랑이다. 사랑은 주어도 주어도 마르지 않고 아무리 퍼주어도 손해 나는 것이 아님에도 얌체 같은 사람은 오늘 이만큼 주고 내일은 또 이만큼 주고 하는 식이다. 찔끔찔끔 간질 나게 주는 것이다.

 

사랑은 아무리 퍼주어도 지나치지 않다. 우유를 짤 때 매일 짜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들은 잔칫날 사용한다고 우유를 짜지 않는다. 막상 잔칫날이 임박해서 우유를 짜면 나오지 않는다. 굳어 버린 것이다. 얌체사랑도 이와 같은 것이다.

 

이기주의자는 인색한자와 동의어이다. 무엇이든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세상이 돌아 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뜻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여자라면 남편도 내 뜻대로 따라야 한다. 남자라면 아내도 내 뜻대로 해야 한다. 자식도 내 뜻대로, 심지어 대통령도 내 뜻대로 따라야 한다. 돈도 내 뜻대로 벌려야 한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 뜻대로 안될 경우 성질 낼 것이다. 내 뜻대로 하고자 하여 욕심 내고, 내 뜻대로 안 된다고 하여 화내며 살아간다. 이렇게 욕심과 성냄으로 살아 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이다.

 

사악한 마음을 지닌 채 그 자리에서 죽으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살아 가는 사람은 이기주의자이고 인색한 자들이다. 얻어 먹을 줄만 알았지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이띠붓따까 사악한 사람의 경(It.12)’경에 따르면 이런 문구가 있다.

 

 

“Idāha bhikkhave ekacca puggala paduṭṭhacitta eva cetasā ceto paricca pajānāmi: imamhi cāya samaye puggalo kāla kareyya, yathā bhata nikkhitto, eva niraye. Ta kissa hetu? Cittañ-hissa bhikkhave paduṭṭha. Cetopadosahetu kho pana bhikkhave evam-idhekacce sattā kāyassa bhedā param-maraā apāya duggati vinipāta niraya upapajjantī-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들이 사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나의 마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읽어 이 세계에서 그 사람이 죽을 때, 그는 그것이 작용하는 대로 지옥에 떨어진다.’라고 나는 분명히 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그의 마음이 사악하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세계의 어떤 뭇삶이 사악하다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Paduṭṭhapuggalasutta- 사악한 사람의 경, 이띠붓따까 It.12, 전재성님역)

 

 

사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ekacca puggala paduṭṭhacitta)’이 있다. 그런 마음은 하루 이틀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오랜 삶의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 ‘한 어떤 뭇삶 즉, 조건에 따라 착하고 건전한 것이나 악하고 불건전한 것의 그 성숙에 따라, 성장하여, 죽는 자가, 증오의 결과로서, 원한의 결과로, 마음속에 증오가 가득찼거나, 탐욕 등에 의해서, 마음이 퇴락했을 때라는 뜻이다.”(It.A.72) 라 하였다.

 

자신의 업에 의해 던져져서

 

주석에 따르면 악한 불건전한 것으로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성냄과 탐욕이다. 한평생 미움과 증오의 감정으로 살아 온 자가 있다. ()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듯이 마음 속에 증오심으로 살아 간다면 한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한이 맺힌 상태에서 갑작 스럽게 죽게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좋은 곳에는 가지 못할 것이다.

 

또 한 부류가 있다. 한평생 즐기기만 한 자이다. 감각적 쾌락을 쫓아서 오로지 한평생 보냈다면 어떻게 될까? 늘 갈애로 허덕일 것이다. 또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를 것이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을 말한다. 초기경에 따르면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다라고 정의할 수 없을 것이고, 세상은 염소, , , 돼지, , 승냥이이처럼 혼란에 빠질 것이다.” (It.36) 라 하였다.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 가는 자를 말한다. 이런 자에 대하여 마음이 퇴락했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마음이 퇴락한 자들이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 어떻게 될까? 결코 좋은 곳에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한평생 미움과 증오와 원한으로 보낸 사람들, 한평생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얼굴에 그렇게 써 있고 행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미래에 어떤 운명이 될지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나의 마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읽어(cetasā ceto paricca)”라 하였다. 이는 “ ‘나의 마음 즉, 나의 마음의 앎으로 그 사람의 마음이 퇴락했을 때라는 뜻이다.” (It.A.72) 라 하였다.

 

그렇다면 한평생 분노와 탐욕으로 살아 온 사람들의 운명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이 세계에서 그 사람이 죽을 때, 그는 그것이 작용하는 대로 지옥에 떨어진다. (imamhi cāya samaye puggalo kāla kareyya, yathā bhata nikkhitto, eva niraye)”라는 무서운 말을 하였다. 그것이 작용한다는 것은 업의 작용을 말한다. 일생동안 해 온 행위에 대한 과보이다. 그래서 조건이 하화합하여 그 사람이 순간적인 포착의 인식과정을 통해서 다른 곳으로 죽을 때, 옮겨진 대로, 가져와서 놓인 대로, 자신의 업에 의해 던져져서 지옥에 놓이게 된다.” (It.A.72) 라고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임종의 순간에 무거운 업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남을 말한다. 증오로 한평생 살았다면 증오의 마음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 나기 때문에 지옥에 태어난다. 이는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또 한평생 여자만 밝히며 살아 왔다면 성적쾌락에 대한 것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것이다. 아마 축생으로 태어날 지 모른다. 축생의 업을 쌓았기 때문에 축생이라는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업에 의해 던져져서라 한 것이다.

 

인상(byañjana)과 속성(nimitta)에 사로잡히지 말라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인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면 악처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S35.235)’에서는 구체적으로 표현 되어 있다.

 

 

Vara bhikkhave tattāya ayosalākāya ādittāya sampajjalitāya sajotibhūtāya cakkhundriya sampalimaṭṭha, na tveva cakkhuviññeyyesu rūpesu anubyañjanaso nimittaggāho. Nimittassādagathita-1 vā bhikkhave viññāa tiṭṭhamāna tiṭṭheyya anubyañjanassādagathita vā, tasmi ce samaye kāla kareyya, hānameta vijjati ya dvinna gatīna aññatara gati gaccheyya niraya vā tiracchānayoni vā. Ima khvāha bhikkhave ādīnava disvā eva vadāmi.

 

[세존]

수행승들이여,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뜨거운 쇠바늘로 시각기관을 차라리지질지언정,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의 인상과 속성에 사로잡히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 위험을 보고 이와 같이 말한다.”

 

(Ādittapariyāyasutta-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235, 전잭성님역)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지금 누군가 머리 속에 온 종일 여자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이 있다. 그런데 지나가다 갑자기 위에서 떨어진 물건에 의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면 어떻게 될까? 경에 따르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S35.23) 라고 하였다.

 

경에서 인상과 속성에 사로잡히지 말라(na anubyañjanaso nimittaggāho)”라고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여기서 인상은 byañjana로서 ‘a sign or mark’의 뜻이다. 속성은 nimitta로서 ‘mark, sign; image; target, object’의 뜻이다. 초불연에서는 byañjana에 대하여 전체상, nimitta에 대하여 부분상(細相)이라 하였다.

 

신체의 특정 부위에 애욕을 느낀다면

 

초불연 각묵스님은 전체상과 부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여인의 비유를 들었다. 그래서 여인이라는 전체상과 얼굴이라는 부분상에 묶여 있을 때라는 표현을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주 섹시한 여자가 지나 갈 때 여자다” “섹시한데라고 보면 전체상을 취하는 것이다. 이는 여자다또는 예쁘다라고 전체적으로 관념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흥미를 끌었다면 이번에는 여자의 특정 부위에 시선을 집중할 것이다. 얼굴 또는 가슴, 다리 등을 관찰할 것이다. 이것에 nimitta로서 부분상을 취하는 것이다.

 

각묵스님은 전체상과 부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재미 있는 비유를 들었다. 각묵스님의 초기불교산책 해체해서 보기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예가 있다.

 

 

해체라는 말이 나오면 필자를 아는 사람은 즉시에 이영애님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 하늘나라 선녀님들보다 더 예쁜 이영애님의 눈과 코와 입술이 아무리 예쁘다할지라도 그것은 전체상을 이루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눈을 빼고 코를 분리하고 입술을 도려내어 알코올에 담가두었다면 아무도 그것에서 애욕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만일 애욕을 일으킨다면 그야말로 성도착증환자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아름답다 여기는 것은 우리가 관념적으로 취하는 전체상과 부분상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처럼 해체해서 보면 무상..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염오가 일어난다.

 

(각묵스님의 초기불교산책 해체해서 보기’)

 

 

눈과 코, 가슴 등에 시선이 꼽히는 것은 부분상(nimitta)을 취한 것이다. 그런데 부분상을 따로 떼어 놓으면 감각적 욕망이 사라질 것이라 하였다. 배우의 코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따로 떼어 내어 소독이 된 비이커에 담아 두면 그것을 보고 음심이 일어날 리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신체의 성기도 해당 될 것이다. 만일 신체의 특정 부위를 따로 떼어 내어 소독처리한 다음 보관한 것에 음욕이 일어난 다면 어떻게 될까? 각묵스님의 글에 따르면 성도착증환자일 것이다라 하였다.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으로 가득한 자에게 죽음이 왔을 때, 그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그 위험을 보고 이와 같이 말한다. (Ima khvāha bhikkhave ādīnava disvā eva vadāmi)”라고 하였다.

 

고마운 사람들

 

죽음이라는 것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 한평생 얌체처럼 설아 온 사람이 지금 이순간에 죽음을 맡게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껄껄껄하며 후회하게 될 지 모른다. ‘좀더 베풀며 살 껄  좀더 배우며 살 껄하며 껄껄껄할지 모른다.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베풀 줄 아는 사람이다. 아낌 없이 줄 줄 아는 사람들이다. 천사 같은 사람이고 보살 같은 사람이다. 우리 주변에는 예수같은 사람, 부처 같은 사람을 종종 본다. 타인을 위하 헌신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바로 그 사람이 예수이고 부처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후회가 없다. 이미 베풀고 나누고 보시하고 살기 때문이다.

 

예수나 부처는 성자들이다. 성자의 삶을 사는 사람이 성자이다. 성자는 철저하게 이타적이다. 사랑을 주어도 찔끔찔끔 주는 것이 아니라 막 퍼준다. 나홀로 깊은 산속에서 신선처럼 살아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함께 살아간다.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이다.

 

시물을 받으면 시주에게 머리를 숙인다고 하였다. 누군가 선물을 하였을 때 고개를 숙여 감사의 마음을 낸다. 성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는 존경의 마음이 일어난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이 세상에는 이기주의자도 많지만 잘 보면 종종 숨어 있는 천사나 보살을 발견하기도 한다. 고마운 사람들이다.

 

 

2015-10-11

진흙속의연꽃